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
피터 멘델선드 지음, 김진원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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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지나친 독서로 실명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을 무렵이었다. 보르헤스는 노트도 없이 기억에만 의존해 문학에 대한 사랑을 내보였다. 그의 소설 쓰기는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상상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한데 모아놓고 독자들이 혼돈과 착각 속에서 삶의 현상과 본질을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칼과 쟁기가 팔의 확장이라면,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눈이 멀었으면서도 계속해 책을 사 모았던 그는, 독서를 향한 치명적 열정을 보여줬다. 책은 보르헤스의 존재양식 그 자체였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괴테의 시구처럼 독서 행위는 실명의 진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 책은 상상의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경험의 총합이 무조건 진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책은 상상의 공간, 즉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주인공의 얼굴에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불러낼 수 있다. 소설의 이국적 장소를 친숙한 동네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볼 수도 있다. 때로는 문장 일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그냥 건너뛰어 넘어가기도 한다. 책 표지 전문 디자이너로 활동한 피터 멘델선드는 독서 행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누구나 당연하게 믿었던 책을 읽는 행위가 실제로는 책을 보는 행위에 더 가깝다고 확신한다. ‘책을 보는 행위에는 독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상상력 등이 동원된다.

 

독자는 책 앞에 서면 장님이 된다. 두 눈으로 글을 보고 있어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으로 봤던 내용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책읽기는 두 눈을 감은 세계와 비슷하다. 눈꺼풀 같은 막 뒤에서 일어난다. 일단 펼쳐놓은 책은 눈 먼 사람인 척한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 장씩 넘겨야 비로소 현상세계에서 나는 떠들썩한 자극을 봉쇄하고 상상은 날갯짓을 한다. (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76)

 

현실적인 세계를 드러내길 좋아했던 플로베르는 소설을 통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완성했다. 플로베르의 소설 속 문장과 단락은 스크린이 되고, 독자는 관객처럼 스크린 속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구절구절 문장을 씹어 먹었어도 독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마담 보바리의 결말은 책 안 읽는 사람들도 안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모두 보바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이레네오 푸네스(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정상이다. 푸네스처럼 말에서 떨어지면서까지 기억력의 천재가 되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비록 기억력의 천재가 되지 못해도, 상상력의 천재는 될 수 있다. 독자는 눈뜬장님이 되어 상상의 날갯짓을 활짝 펼치기만 하면 된다. 보바리 부인은 전형적인 프랑스 여성이지만, 독자는 자기가 알고 지낸 모든 여성의 얼굴들을 동원하여 부인의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한다. 보바리 부인이 과거의 첫사랑 모습으로 될 수 있다.

 

나처럼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비판할 근거를 취하기 위해 책 읽는 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는 자기 생각에 혼자서 맞장구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책을 꼼꼼하게, 분석하듯이 읽는 독자는 자신이 한 번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피터 멘델선드의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은 대부분의 독자가 공공연히 알고는 있지만, 확인하면서 해부하고 싶지 않은 은밀한 독서 행위를 정면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래선지 이 책을 보게 되면 자신의 상상 밀실을 들킨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만나고 다니는 동안, ‘눈뜬장님이 되어 딴생각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들은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다. 독서란 단순히 책에 기록된 문자를 추적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아니라 문자와 문자로 조형된 세상, 그리고 그사이 행간에 은닉된 세상과의 접촉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곧 이성인 시대는 지났다. 역시 보르헤스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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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명하면서까지 독서라니....상상이 안되지만....
그런데 상상불가한 일을 상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대단하네요..
책은 이성의 시대를 넘어 상상의 이상의 시대로 ^^...

cyrus 2016-11-02 19:18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에 유명 작가들이 언급되었는데요, 이상하게도 저자가 보르헤스를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보르헤스가 생각났습니다. ^^

stella.K 2016-11-0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기는 한데
네 글 읽으니까 생각 보다 좀 어려울 것도 같다.

cyrus 2016-11-02 19:20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의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못했군요. 그런데 알라딘으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요. 거짓말 아니고, 책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가 디자이너라서 글보다는 그림을 많이 채워 넣었어요. 정말 글보다 그림이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