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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모든 감각을 열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현상 너머의 본질을 캐는 통찰력. 그것이 시인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다. 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는 이런 통찰력이 잘 스며들어 있는 산문집이다. 시 속에 삶의 풍경은 어떻게 비치고, 함축될까? 시인은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때로는 통일신라의 기와 조각 무늬를 감상하면서 '지도 없는 여행'을 떠나는 공상에 잠긴다. 또 리치먼드의 길을 더듬으며 에드거 앨런 포를 회상하기도 하고, 이인성의 수채 풍경화에서 풍경의 의미를 배운다. 멀리 보들레르까지 가지 않더라도 화가와 시인의 관계를 정의한 예술가는 적지 않다. 강연균 화백이 그랬던가? "시인은 언어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는 그림을 통해 시를 이야기한다"라고.
나는 풍경을 사랑한다. 풍경이란 살아있는 공간이다. 나의 눈길이 닿을 때까지 그 공간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죽어있던 공간이 내 시선이 닿는 순간 목숨을 가진 표범처럼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수많은 풍경 - 그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풍경이(또한 한 순간이) 나의 망막을 보이지 않는 인두로 지지는 것이다. 그때 그 풍경은 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피 흘리는 풍경' 중에서, 38쪽)
시인에게 있어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망막세포 하나를 죽여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눈에는 죽어 있던 공간이 하나의 역동적 풍경으로 보인다. 그 공간 안에서 선과 점과 면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풍경이 그려진 시는 '움직임의 시'이자 '깨달음의 시'다. 얼핏 보면 정적인 시인의 풍경 속에는 움직임과 깨달음의 '가쁜 숨'과 땀방울이 들어 있다. 그 들이켜고 내쉬는 숨과, 솟아나서 떨어지는 땀방울을 새겨 넣는 시인의 손은 섬세하면서도 둔중하다. 거기에는 섣부른 계몽의 교훈이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묘사도 없다. 평이한 묘사와 진술만으로 자연의 풍경이자 '나의 풍경'을 빚는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느끼는 풍경은 밋밋해 보이지만 힘차며 그래서 아름답다.
풍경을 받아들이면서 체험하고, 성찰한 것을 근거로 완성한 시는 오래 간다. 언어로 묘사된 풍경은 단순히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숨과 땀방울이 스며든 존재로 표상되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소도구가 된다. 숨겨진 부분, 가려진 부분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견자가 시인이라는 점을 되새긴다면 허만하의 언어를 통해 세상의 가려진 부분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자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이다. 딱딱한 기계의 눈으로 결코 읽을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새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허만하 시인의 글은 감정의 묘사에, 자잘한 교훈에 자족하는 오늘날의 언어들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그 불완전한 언어의 틈 한가운데를 허만하 시인이 성큼성큼 걷고 있다. 저기 십리 밖 풍경 냄새 맡으러 시인이 걸어간다.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위해선 그가 표식으로 뿌려놓고 간 조약돌을 잘 챙겨야 한다. 낯설면서도 깊은 언어로 뭉쳐진 텍스트의 조약돌(박남수, 릴케, 가스통 바슐라르, 쥘 쉬페르비엘[주])을 줍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 허만하 시인은 ‘6월에 바라본 한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제목의 글에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 1884~1960)의 시를 인용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2000년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쉬베르비엘의 시는 널리 소개되지 않았다. 비록 시집은 아니지만, 쉬페르비엘의 소설이 2014년에 《바다 위의 소녀》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이 국내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소개된 쉬페르비엘의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