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정말 어려운 책이다. 번역이 잘 된 논어 한 권을 독파했어도 공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동양학자가 국내에 나온 논어 대부분이 왜곡 번역되거나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 논어가 차지하는 위상이 중요한 만큼,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없을 수 없다. 특히 논어를 읽으면서 주희의 해석에만 의존했던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지금도 논어의 일부 구절은 제대로 풀이하기가 쉽지 않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논어 한 구절을 이해하려면 중국 학자와 일본 학자들의 주석까지 참고해야 한다.
논어 읽기가 어려우면 논어를 쉽게 소개한 입문서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논어 입문서를 고를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입문서를 쓴 저자 약력을 살핀다. 논어와 같은 동양고전을 연구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믿고 읽을 만하다. 간혹 새로운 접근으로 논어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럴 때 다른 학자들의 입장과 비교하면서 본다. 원전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입문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간이 나면 원전을 꼭 읽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요약본이나 입문서는 잊어버리기 쉬우니 꼭 원전을 찾아 읽으라고 했다. 논어를 전공한 적 없는 저자가 펴낸 입문서는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읽어야 한다. 이런 저자는 논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어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맥락을 잡은 입문서는 고전을 억지로 끼운 경박한 처세론과 다를 게 없다.
일본의 독서전문가, 다작 활동하는 작가로 알려진 사이토 다카시도 논어를 다룬 책 한 권을 펴냈다. 놀랍게도 《내가 논어에서 얻은 것》(원제는 ‘논어력’)은 올해에 아홉 번째로 나온 사이토의 책이다. 이번 달에 나온 타 출판사의 번역본 두 권까지 포함하면 올해에만 출간된 사이토의 책이 무려 열한 권이나 된다. 책 앞날개의 저자 소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이 책에서는 최고의 고전 《논어》를 독자들이 좀 더 쉽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사이토 다카시-글쓴이 주)이 직접 《논어》를 읽으면 깨달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자칫 단편적이고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듯 보이는 《논어》에서 ‘연결의 힘’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 생동감 넘치는 ‘논어의 세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딱 이 내용만 보면, 사이토의 책이 믿고 읽을 수 있는 논어 입문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이토는 저자 서문에서 원문을 몇 번 반복해서 읽을 것을 주문했다. 그래서 논어를 해석한 사이토의 생각이 옳은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결국 원전과 다른 입문서도 참고해야 한다. 원전을 읽어보지 않은 채 저자의 명성만 믿고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독서는 논어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심어질 수 있다.
사이토는 논어, 즉 공자가 생각하는 학문이 실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생각하는 ‘실학’이 조선 시대 실학과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조선 시대의 실학은 유교 기반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는 학문이었다. 일본의 실학자들도 조선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 수용을 강조했다. 다만 조선의 실학과 차이점이 있다면, 조선의 실학이 ‘민생안정’에 초점을 맞췄다면, 일본의 실학은 ‘민중 계몽’에 가깝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부의 역할에 의지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국민 개개인의 독립된 정신을 함양하는 실학 교육을 표방했다.
사이토는 공자가 시 읽기의 효용성을 논하는 대목이 논어의 실학 지향적인 면이라고 주장한다.
시를 읽으면 감성을 갈고닦을 수 있으며 인격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말은 지금 이 시대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여기서 매우 실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말은 바로 ‘멀리 군주를 섬길 때도 도움이 된다’는 부분이다. 이는 곧 시를 읽는 것이 실무와 직결된다는 말이다. (《내가 논어에서 얻은 것》 83쪽)
나는 사이토가 유키치의 《학문을 권장함》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이 든다. 유키치는 《학문을 권장함》이라는 책에서 유학과 봉건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만약 유키치가 살아 있었으면, 시 읽기가 실무로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사이토의 실학에 기가 찼을 것이다. 유키치는 시를 잘 짓는 선비는 생활력이 강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유키치가 시를 잘 읽는 선비들이 실무에 능할 거라고 좋게 봤을까?
예로부터 선비들 중 생활을 능숙하게 꾸려나가면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시를 잘 지으면서 장사까지 잘한다는 상인의 이야기도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을 권장함》 15쪽)
유키치의 냉정한 생각 속에는 시 읽기와 작문에 몰두한 선비들의 현실성 결여를 문제 삼고 있다. 유키치의 실학은 실용성을 강조하는 학문을 넘어서서 과학의 의미까지 포함된 양학(洋學)으로 봐야 한다. 사이토는 단순히 실용성이라는 이유만 가지고 논어가 실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애초에 논어의 실학적인 면을 강조하려면, ‘유키치의 실학’을 언급하지 않아야 했다. 《내가 논어에서 얻은 것》에 인용된 논어 구절을 논어 원전과 비교하면서 읽어봤는데 번역이 잘못된 문장도 있었다. 논어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쓴 논어 입문서의 한계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내일 이어서 소개하겠다. 아무튼, 사이토 다카시의 《내가 논어에서 얻은 것》은 논어 입문서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