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書의 즐거움 - 오래되고 낡았으나 마음을 데우는 책 이야기
윤성근 지음 / 모요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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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 세종도서 독서감상문 대회 출전작

 

 

정말 어렵다. 책을 가까이한 적 없는 사람에게 책의 장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솔직히 나는 종이책의 앞날이 걱정된다. 그러나 아주 그런 것만도 아니다. 두툼한 부피감과 종이 냄새 없는 전자책이 과연 종이책만큼 매력적인 대상인지 살짝 의문이 든다. 종이책을 많이 접한 세대는 종이의 질과 결을 느껴가며 엄지와 검지를 써 책장을 넘길 때의 기쁨과 향기를 안다. 게으름을 맘껏 부리며 느릿느릿 읽어본 경험도 있다. 지금은 오히려 읽을 게 귀한 게 아니라 잘 안 읽어서 문제다.

 

새 책은 망각을 위해서, 헌책은 기억을 위해서 존재한다. 책들이 대형 서점에서 빠르게 사라질 즈음, 헌책방에서는 어둠 속에 쌓여서 특별한 만남을 기다린다. 헌책방은 유통기한이 끝난 책들의 공동무덤이 아니다. 헌책방은 책들을 숨 쉬게 한다. 헌책방에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갈마들었다. 그 책 속에 담긴 오래된 사연들이 시간 속에서 증발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옛날에 좋아했지만 한동안 펼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펼치지 않을 책, 좋아하지만 잘 기억하고 있어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책, 괜찮은 책이지만 보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이 두루 손짓한다. 그런 책들이 돌고 돌면, 먼지에 파묻힌 책의 가치가 사람들의 손을 타며 두 배, 세 배가 된다.

 

《탐서의 즐거움》에는 책과 관련된 삶의 무늬가 시간의 축을 따라 새겨졌다. 추억 혹은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가 넘쳐났다. 손바닥 크기의 문고판 책을 들고 다니며 읽거나, 먼지 쌓인 헌책방에서 원하는 책을 찾아 헤매던 경험은 이제 공유하기 쉽지 않은 추억이 됐다. 옛날 책에 녹아든 삶의 이야기를 살려내는 작업에 그런 시간의 결이 보인다. 《탐서의 즐거움》에 소개되는 책들은 사람으로 치면 연세가 높은 고령자다. 나이 든 노인의 옷에 홀아비 냄새가 풀풀 풍기듯이 오래된 책에 퀴퀴한 곰팡내가 난다. 닳고 찢어져도 책 속에 있는 이야기의 힘은 팔팔하다. 《탐서의 즐거움》의 저자이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인 윤성근 씨는 헌책의 무한한 생명력을 감지했다. 표지를 조심스럽게 펼치면, 그 안에서 저자와 독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야기꽃이 활짝 피게 된다.

 

책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절판된 고은 시인의 소설 《일식》 초판을 찾아다닌 딸의 사연은 뭉클하다. 수소문 끝에 절판본을 손에 넣는 장면은 애서가의 심장을 뜨겁게 한다. 특히 헌책방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기쁨으로 벅찬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아직도 그 옛날 사소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헌책방이 존재하는 이유다. 헌책방은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다. 책을 찾으려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저마다의 추억은 발길을 헌책방으로 향하게 하는 끈끈한 강자성(强磁性)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뻔했던 책의 사연도 있다. 이런 책들은 좋게 말하면 ‘희귀한 책’, 조금 과장하면 ‘전설의 책’이다. 반면 작가 본인에게는 들춰내고 싶지 않은 ‘망작’, ‘괴작’이다.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이 한 권의 작품만 소설전집 최종 결정판에 포함하지 않았다. 1979년에 나온 《욕망의 응달》이다. 《욕망의 응달》 줄거리가 지금으로 보면 정상적이지(?) 않다. 김영하는 1980년대 학생운동을 소재로 무협소설 비슷한 작품으로 소설가로 데뷔했다. 소설 제목은 《무협학생운동》. 작가 프로필에도 기재된 적이 없는 전설의 책이다. 작가 본인들은 불태워버리고 싶은 망작을 부끄럽기 짝이 없는 ‘흑역사’로 여기지만, 독자들은 헌책방 아니면 들을 수 없는 헌책 비사(祕史)를 좋아한다.

 

책이라는 것은 단지 지식을 알아가는 하나의 매개체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윤성근 씨는 책을 통해서 자신이 여태 모르고 살아온 삶의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인생을 알고, 그 인생에 필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지 방법을 찾는 동반자다. 알고 싶은 것을 더 알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다. 이곳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옛날 지식을 잔뜩 쌓아 모은 낡은 저장소가 아니다.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지식이 아니라 종이책의 느긋함이 아닐까 싶다. 늘 새로운 정보에 목마르지만 그런 이미지를 장시간 들여다보고 있으면 멀미가 난다. 너덜너덜해진 책을 천천히 들춰보면서 그 속에 잊고 있던 정겨운 추억을 발견한다.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이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탐서의 즐거움》 158, 160, 161쪽에 ‘막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막장은 탄광의 맨 끝부분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상황을 ‘막장 인생’이라고 한다. 이 뜻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상황에 ‘막장’ 표현을 많이 쓴다. 나도 한때 ‘막장’ 표현을 자주 썼다. 본래 의미가 왜곡된 채 부정적인 표현이 된 막장을 쓰는 것은 가장 뜨거운 곳에서 탄광가루를 마시면서 일하는 분들에게는 실례다. 윤성근 씨가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라는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막장 표현이 왜 잘못되었는지 저자 스스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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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11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갓 출간된 새책의 잉크와 종이 내음.
그리고 오래 묵어서 쿰쿰한 종이의 곰삭은 내음...
종이 질감의 촉...
그리고 멋진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문장이
날개짓하는 느낌....
그리고 빈 여백에 느낌을 연필로 쓰는 소리들...

읽고 난 후의 오래 오래 여운이 퍼지는 심금....

이런거요...ㅎㅎㅎㅎㅎ

cyrus 2016-07-12 16:30   좋아요 1 | URL
책을 읽는 행위를 시적으로 표현한 문장이 정말 좋습니다. ^^

북깨비 2016-07-12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정보 감사합니다. 아 진짜 재밌을꺼 같아요. 😍😆😁

엇, 이분 `책이 좀 많습니다`를 쓰신 분이군요. 그 책 진짜 재밌게 읽었는데. 그전에도 그후에도 꾸준히 책을 내오셨다는거 오늘 검색해보고 처음 알았어요.

cyrus 2016-07-12 16:32   좋아요 1 | URL
헌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윤성근 씨의 책은 필독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책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가끔 제가 헌책방에서 찾은 책을 소재로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데, 윤성근 씨의 글쓰기 방식을 많이 참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