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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ㅣ 환상문학전집 13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이매진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몸이 아프다며 수술을 여러 번 받는 환자가 있다. 그 환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병원에 입원할 목적으로 거짓말을 물론, 자해까지 일삼는다. 일부러 몸을 다치게 한 후 그것을 구실로 병원에 입원하려는 속셈이다. 없는 병과 상처를 일부러 만들려는 괴이한 행동. 이런 사람은 ‘뮌히하우젠 증후군(Munchhausen syndrome)’과 관련되어 있다. 병적인 거짓말을 일삼지만 매우 그럴듯해 많은 이들이 속기 쉽다. 또한 자기 역시 그 거짓말에 심취한다. 뮌히하우젠 증후군 환자는 가족을 달달 볶는다. 자녀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다.
거짓말을 입에 달지 않으면 가시가 돋는 사람. 뻔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마치 실제 상황처럼 말하는 사람. 뮌히하우젠은 허풍쟁이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동화로 소개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18세기 러시아 군대의 장교로 근무했던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실존 인물 뮌히하우젠 남작은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가 남작을 괴짜 허풍쟁이로 만들었다. 라스페는 악마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 영국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을 정도로 똑똑했다. 이런 그가 절도범, 사기꾼이 될 줄 알았을까. 돈이 필요한 라스페는 다시 펜을 잡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바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다. 그러나 라스페가 이 작품의 저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당시 뮌히하우젠 이야기가 독일에서 인기를 끌었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라스페가 돈을 벌기 위해서 유행에 편승한 것뿐이다.
이야기가 전부 황당하다. 계속 읽어보면 말이 안 나온다. 웃음의 핵심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라스페는 남작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이야기의 진실을 보증해주기 위해 세 명의 서명자가 등장한다.
아래 서명자들인 우리들은, 진실로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에 다음 사실을 최대한 엄숙하게 지지합니다. 그 어떤 나라에서 벌어진 것이든 우리의 벗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든 모험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온전한 사실입니다. - 걸리버, 신드바드, 알라딘
이야기 시작하기에 앞서 벌써 ‘뻥’의 기운이 느껴진다. 어린이용 동화를 본 독자라면 가장 유명하고도 황당한 장면 몇 개를 기억할 것이다.
남작은 포탄을 타고 적진 상공을 날아간다든가 하체가 사라진 애마를 타기도 한다. 한 번은 터키군의 포로로 끌려가던 중 곰을 겨냥해 도끼를 던졌는데 이 도끼는 그대로 날아가 달에 꽂혔다. 남작은 빨리 자라기로 유명한 터키 강낭콩을 심었고 콩나무가 쑥쑥 자라 달에 도착하자마자 도끼를 가져왔다. 이 장면 하나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공상과학소설의 원조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전체적으로 엉망진창인 괴작이다. 이 작품을 순전히 ‘어린이를 위한 모험담’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크게 실망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보기에는 좋지 않은 묘사가 있다. 문제가 되는 장면 몇 가지를 들어보자. 총알을 두고 사냥을 나간 남작은 대신 버찌씨를 총에 장전해 사슴의 머리 정중앙을 맞혔다. 펄쩍 뛰어 달아난 사슴은 1년 뒤, 머리에 버찌가 주렁주렁 열린 벚나무를 뿔 대신 달고 나타났다. 유달리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넘치는 아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 따라할 수 있다. 집에 키우는 반려견 머리에 과일나무 씨앗을 심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 다음 일어나게 될 상황은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곰 사냥 이야기는 하체가 잘려나간 말 이야기보다 더 잔인하다. 남작은 부싯돌 두 개로 곰을 사냥했다. 부싯돌 한 개는 곰의 벌어진 입 속으로, 나머지 부싯돌은 곰의 항문 쪽으로 던졌다. 두 개의 부싯돌이 한 번에 부딪히면서 폭발음이 일어났고, 곰의 몸뚱어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남작의 사냥 방식은 잔인한 동물 학대에 가깝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의 ‘두 번째 모험’은 ‘첫 번째 모험’과 비교하면 많이 뒤떨어지는 형편없는 내용이다. ‘첫 번째 모험’까지 마무리 지어야 했었다. 다소 지루하고 억지스러운 장면이 진행된다. 신원 미상의 작가들이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뜬금없이 돈 키호테가 등장해서 남작이 가는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돈 키호테는 남작 일행을 ‘거대한 괴물’로 여기어 공격한다. 뮌히하우젠과 돈 키호테의 만남.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남작은 자신이 만든 허풍의 세계 속에 갇혀 있고, 라 만차의 기사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다. 서로 닮은 면이 있는 두 사람을 프랑스의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렸다.
18세기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을 옹호하는 제국주의적 관점이 슬쩍 드러낸다. 라스페는 자신의 작품에 문학작품 속 인물을 등장시켜 패러디를 시도하고 있지만, 뮌히하우젠을 띄워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조롱하기도 한다. 루소와 볼테르를 뼈와 가죽만 남은 시체로 묘사하여 바알세불(Beelzebub, 사탄)과 동행하는 악령으로 만들어 놓는다. 남작은 그들을 무찔러 버림으로써 영웅이 된다. 라스페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 체제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소설 속 뮌히하우젠은 라스페의 ‘오너캐(작가와 작중 주인공의 동일화)’다. 라스페는 젊은 시절 재능을 낭비하고, 악마의 손아귀 속에 놀아나는 바람에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 돈을 만져보면서 꼬인 인생을 제대로 풀어보려고 황당한 내용의 소설을 쓰게 됐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인생을 바꿔보려고 조급하게 쓴 사기꾼의 어설픈 소설이다. 당연히 완역본이 축약본보다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축약본보다 못한 최악의 완역본도 있다. 축약본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모험담이었다. 그 즐거운 추억 때문에 완역본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이 없길 바란다. 읽어보면 후회한다. 추억은 추억 그대로 남겨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