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처음으로 ‘대구시교육청 작은 도서관’을 방문했다. 이름 그대로 교육청 건물 내부 안에 있는 도서관이다. 공공도서관에 없는 책이 그곳에 있어서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대구시교육청에 몇 차례 가본 적은 있었지만, 도서관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교육청 청사는 상당히 컸다. 그런 곳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본관 2층에 도서관이 있었다. 조금 긴 복도를 지나서야 도서관이 나온다. 역시나 도서관 내부는 작았다. 안 쓰는 사무실 공간을 도서관으로 마련한 것 같았다.

 

 

 

 

 

도서관 내부를 찬찬히 둘러봤다. 나온 지 오래된 책들이 많았다. 실내등 빛이 잘 들어오지 않은 쪽에도 책이 가득히 꽂힌 책장이 있었다. 그 책장 제일 윗부분에 있는 이름표가 내 눈에 들어왔다. '교육감님 도서', 그 옆에는 ‘부교육감님 도서’ 책장, 각종 통계자료 및 보고서를 보관한 책장이 있었다. 이쪽 책장에만 이름표가 있는 거로 봐서는 교육청 직원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책장일 것이다. 나는 교육감님과 부교육감님의 독서 편력이 궁금해서 한 10분 동안 그곳 주변에 서서 책장을 관찰했다. 교육 및 역사 분야 관련 학술 서적이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나온 통계자료집이나 조사 결과 보고서 같은 교육청 소속 자료들이 책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료들을 시민들이 찾는 도서관에 보관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교육감님과 부교육감님의 책장은 사람 발길이 드문 구석진 쪽에 있다. 교육청 직원은 필요에 따라 과거에 만들어진 자료를 찾아볼 수는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관료적인 냄새가 짙게 밴 자료들을 꼼꼼히 보지는 않는다. 아니, 그쪽으로 얼씬도 하지 않는다. 장서 관리 측면에서 본다면 공간 낭비다. 경상도 사투리 중에 ‘짱박다’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는 군대 용어로 많이 쓰인다. 물건을 감추거나 사람이 숨었을 때 ‘짱박다’ 혹은 ‘짱박았다’라고 말한다. 서류로 남은 자료들을 따로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 한쪽 구석으로 ‘짱박아’ 둔 것 같다. 자료들을 그냥 꽂아놓으면 마치 쓸모없는 것들을 보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직원들이 칙칙하고 딱딱한 관료제 냄새를 없애려고 책장에 방향제를 달았다. 그것이 바로 ‘교육감님’, ‘부교육감님’이 들어간 이름표다. 이름표를 붙임으로써 초라한 책장에 확실한 명예의 도장을 찍는다. 책장의 이름표는 도서관을 찾는 시민들에게 효과가 있다. 교육감님과 부교육감님의 독서 취향을 알리는 동시에 그동안 활동한 내역들을 정리한 자료들까지 공개하여 시민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능력과 업적을 알리는 하나의 홍보 전략이다. 책장의 이름표는 그것을 본 시민에게 강력하면서도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

 

"보세요? 교육감은 똑똑합니다. 이런 수준 높은 책들을 읽었답니다. 깔끔하게 모아둔 자료집과 보고서들을 봐주세요. 이렇게 대구의 교육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다음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면 절 뽑아주십쇼!"

 

‘교육감님의 책’이 아무리 좋아도 도서관 장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장서 관리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전시 행정의 결과물이다. 겉치레를 위한 장식품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장서 소유자가 아무리 고귀하고 높으신 분이더라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극존칭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님’을 붙이니까 권위적인 느낌만 더욱 부각된다. 시민들을 찾는 ‘작은 도서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사무적인 느낌이 나는 도서관을 누가 찾겠는가. 차라리 직원들만 이용 가능한 도서관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낫다. 교육청 청사를 나오면서 옷에 밴 관료주의 냄새를 빼느라 고생했다. 아득한 분위기라서 책 읽기에는 좋았으나, 시민들에게 보라는 식으로 전시한 책들의 압박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곳에 다시 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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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02-1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도서관은 작은 도서관이네요. 구석에 있는 정말 작은 도서관.. 잘 안쓰는 공간 땜방용 작은 도서관..

cyrus 2016-02-13 11:30   좋아요 1 | URL
생각한 것보다 평수가 작았습니다. 자세한 위치 설명을 몰랐으면 찾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오거서 2016-02-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말로 전시행정 표본이군요.

cyrus 2016-02-13 11:31   좋아요 1 | URL
도서관을 만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ㅎㅎㅎ

탕기 2016-02-1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댁으로 가져가서 방에 꽂아두세요, 라고 말하고 싶네요.
뭐 교육청 도서관이고, 교육청은 정치의 공간이니 저희 측에서 피하면 그만 입니다만...

cyrus 2016-02-13 11:32   좋아요 0 | URL
이름표가 있다고 해서 교육감이 실제로 소유했던 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나름 잘 보이려고 어려운 내용의 책을 꽂은 것 같았습니다. 책장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yamoo 2016-02-12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곳까지 왜 가셔가지고...ㅎㅎㅎㅎㅎ
서울시 관악구에는 작은 도서관이 정말 많습니다. 근데, 위와 같은 도서관은 한 권도 없어요..ㅋㅋ 전부 신간 소설과 따끈한 인문학 서적들이 쭉~~꽂혀 있는 곳...시민들의 대출이 활발한 곳...이런 도서관이 작은 도서관이지요..ㅎ

cyrus 2016-02-13 11:35   좋아요 0 | URL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책을 너무 좋아한 죄입니당 ㅎㅎㅎ

원더북 2016-02-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감님은 똑같은 책을 두 권씩 읽는 습관이 있으시군요! ㅎㅎ

cyrus 2016-02-13 11:36   좋아요 0 | URL
원더북님, 관찰력이 좋으십니다. 있어 보이려고 아무 책이나 꽂은 티가 확 납니다. ㅎㅎㅎ

2016-02-12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3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2-1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글의 내용이 제목이랑 어우러져서 완전 멋져요^^

cyrus 2016-02-13 18:43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2-1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만, 저런 븅신같은 짓을 아직도 하는군요. 교육감이고 부교육감이고 자신이 읽은 좋은 책을 추천한다면 모를까, 누가 저기에서 한 권이라도 뽑아올런지 모르겠네요. 절묘하게도 금년이 병신년이라는 것이 떠오르는 scene입니다.

cyrus 2016-02-14 11: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교육감님의 책 중에 뽑고 싶은 읽을 만한 것이 없어서 이분이 재출마를 하면 안 뽑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