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랑제 공작부인》 (La Duchesse de Langeais, 1834년, <인간 희극> 제1부 풍속 연구 ‘파리 생활 풍경’)
발자크의 소설 《랑제 공작부인》(La Duchesse de Langeais)이 처음에 발표되었을 때 불렀던 제목은 ‘도끼에 손대지 마(Ne touchez pas lahache)’이다. 이 작품은 금성세계문학전집 20번에 《골짜기의 백합》과 함께 수록되었다. 금성세계문학전집은 오래전에 판이 끊긴 터라 헌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이 전집을 만나려면 오래된 책들을 따로 보관하는 보존서고에 찾아봐야 한다. 대구에 있는 모 도서관이 유일하게 금성세계문학전집 전 120권을 보존서고가 아닌 일반 자료실에 보관하고 있다. 놀랍게도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몇 권은 낙장이 있지만, 읽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금성세계문학전집 20번 덕분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 작품 목록에 관한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2015년 8월 6일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을 소개한 글(‘펜 하나로 세상을 정복하다’)을 쓰면서 나는 제1부 풍속 연구 『파리 생활 풍경』의 작품 목록에 의문을 느낀 적이 있다. 한 달 전에 표로 정리한 『파리 생활 풍경』의 작품 목록이다.

피에르 바르베리스의 《발자크》(화다, 1989) 속에 있는 <인간 희극> 작품 목록을 살펴 보다가 ‘13인의 비밀 결사’ 라는 제목에만 번호가 없다. 나는 처음에 ‘13인의 비밀 결사’가 하나의 독립된 작품인데, 출판사의 실수로 번호를 넣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이 추측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페라귀스》, 《랑제 공작부인》, 《황금빛 눈을 가진 여자》 옆에 ‘첫 번째 에피소드’, ‘두 번째 에피소드’, ‘세 번째 에피소드’라는 글자가 있다. 이 세 작품이 ‘13인의 비밀 결사’ 3부작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3인의 비밀 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관련 정보가 많지 않다. 《랑제 공작부인》의 역자 해설이 그나마 13인 비밀 결사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제정 시대에 활동했던 비밀 결사라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나폴레옹 왕정 전복을 기도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모였을 것이다. 《페라귀스》, 《랑제 공작부인》, 《황금빛 눈을 가진 여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모두 13인 비밀 결사에 가담한 실존 인물이다. 재미있게도 발자크는 ‘13인의 비밀 결사’ 작품 서문에서 13명의 조직원이 보여준 대담성과 강인한 마음을 칭찬하고 있다. 발자크는 왕정을 지지한 보수주의자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작품 전체를 정치적 견해와 연관을 지어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사실 《랑제 공작부인》의 줄거리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을 탄생하게 한 작가의 연애 경험담이다. 《랑제 공작부인》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전인 1831년에 발자크는 영국 부인의 이름으로 서명된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독자, 특히 귀부인들이 보낸 팬레터를 소중히 여겼던 발자크는 부인에게 답장을 보낸다. 몇 달 동안 편지로 교류하면서 영국 부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녀는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인 카스트리 후작부인이었다. 발자크보다 세 살 연상인 후작부인은 전 남편 카스트리 후작과 헤어지고,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장남과 사귄 적도 있다. 카스트리 부인은 발자크의 이상형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발자크는 자신의 속물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재산 많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발자크에게 이런 만남은 단순히 작가와 독자 간의 돈독한 우정 그 이상이다. 《발자크 평전》(푸른숲, 1998)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를 귀족 사회로 편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교만한 속물 덩어리로 보았다. 발자크는 부인의 저택에 드나들면서 부인과의 관계를 더욱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단둘이서 알프스를 여행할 정도로, 두 사람은 거의 애인처럼 지낸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식어버린다. 1832년 10월에 부인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발자크만 혼자 프랑스로 돌아온다. 부인은 자신을 ‘돈’, ‘명성’ 그 자체로만 보는 발자크의 속물근성에 실망했거나 아니면 육체적 관계를 강요하는 발자크를 매몰차게 거절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카스트리 부인은 발자크가 편지 덕분에 직접 만난 여성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발자크는 독자로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여성 독자들의 팬레터는 못생긴 숙맥이었던 발자크의 남성성을 확 살려주었다. 발자크는 펜 하나만으로 모든 여성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이 사건 이후로 발자크는 카스트리 부인과의 교제를 이어가지만, 예전의 친밀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카스트리 부인과의 연애는 발자크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는다. 발자크는 부인을 증오하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삶에서 겪은 가장 힘든 패배’라고 말했다. 이러한 가슴 아픈 작가의 연애사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랑제 공작부인》이다.
《랑제 공작부인》의 남녀 주인공 아르망 드 몽트리보 장군과 랑제 공작부인은 발자크와 카스트리 부인을 상징한다. 랑제 공작부인은 사랑의 감정 때문에 뜨거워서 미칠 지경인 몽트리보의 심장을 더 애태우게 한다. 부인의 ‘밀당’에 약이 오른 몽트리보는 그녀를 증오하게 되고, 복수하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카스트리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진심 어린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의외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랑제 공작부인은 뒤늦게야 몽트리보의 구애가 진실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복수심에 불타오른 몽트리보 또한 분노를 누그러뜨려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발자크는 몽트리보와 부인과의 비극적 사랑을 통해서 사교계라는 사회 구조에 조종당하고 희생된 개인의 감정을 보여준다. 랑제 공작부인은 상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몽트리보 장군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사랑을 선택한다.
《랑제 공작부인》을 번역한 역자는 이 작품을 ‘진실한 여성에 대한 찬가’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카스트리 부인에 대한 발자크의 복수가 투영된 작품으로 보는 해석을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역자의 해설에 동의할 수 없다. 전자의 해석으로 작품을 본다면, 카스트리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분노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과연 카스트리 부인은 소설 속 랑제 공작부인처럼 단지 자신의 상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발자크의 구애를 거절했을까? 발자크가 자신의 연애사를 미화하면서까지 《랑제 공작부인》을 쓰는 모습이 석연치 않다. 분명 발자크의 마음속에는 부인에 대한 미움의 앙금이 남아있을 것이다. 발자크가 카스트리 부인을 복수하기 위해서 《랑제 공작부인》을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발자크는 랑제 공작부인을 진실한 사랑 앞에 참회하는 인물로 설정했을까. 자신의 소설을 애독하는 여성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발자크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결혼 생리학》은 경제적으로 성공을 크게 거두지 못했지만, 여성 독자들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발자크는 여성의 생각을 정확하게 관찰했고, 그걸 글로 대신 표현했다. 그 당시 여성은 남성처럼 본명으로 글을 쓰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 독자들은 발자크에게 팬레터를 보냈고,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랑제 공작부인》처럼 서로 간의 오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는 여성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통속적인 전개 방식이다.
발자크는 자신을 장난감처럼 취급한 카스트리 부인과의 만남을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사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그의 행동이 잘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여성 독자에게 가까이 접근했고, 이런 만남을 지속해서 유지하여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 발자크의 여성 편력은 언론으로부터 심한 조롱을 받았으며 인기 작가임에도 권위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발자크는 펜 하나로 세상을 정복하는 문학의 나폴레옹이 아니라 여자들을 정복하고 싶은 프랑스판 카사노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