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001-809] 비둘기

 

 

 

비둘기 하면 ‘평화의 상징’이란 이미지가 등식처럼 붙어 다닌다. 그런 긍정적 이미지 덕분에 비둘기는 오랫동안 호의호식했다. 하지만 이제 행복한 시절은 갔다. 비둘기가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됐다. 이제 배설물, 털 날림 등으로 문화재나 건물에 피해를 주는 비둘기는 누구나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 포획할 수 있어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에서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조나단 노엘은 소설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노년의 은행 경비병이다. 어느 날 문밖에 앉아있는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 조나단은 좁은 방 안에서 지내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외톨이다. 조나단에게 비둘기는 평범한 새가 아니라 타자의 간섭이 차단된 자유로운 공간을 침범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온전히 이기적으로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처 입은 마음을 자가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기간이 길어지면 문제가 된다. 예컨대 《비둘기》의 조나단처럼 오랫동안 고립 기간이 지속한다면 정상적인 사회적응발달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것과 같아진다. 타인과의 소통도 없이 ‘정지’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인간의 뇌는 마치 컴퓨터와 같이 모든 사건을 기억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건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망각이란 방법을 통하여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관하는 모습이 달라져 의식에 잡히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뇌는 기억에 관련된 사실성만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포함된 감정들도 함께 기억한다. 그중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들, 특히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 과거의 어떤 일은 고통의 감정과 함께 머릿속에 저장됩니다. 그리고 비록 의식 속에서 사건 자체에 대한 사실성과 감정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잠재의식 안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활동성 세균처럼 다른 부위까지 번져나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현재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에 침범하는 트라우마가 된다.

 

조나단의 트라우마는 가족과의 이별과 사랑의 실패이다. 가족 구성원에 소속되지 못한 경험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덫이 되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며 비둘기 한 마리 앞에서 겁에 질린 모습에 더욱 자신감이 없어진다.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게 여겨 스스로 ‘불쌍한 존재’라는 망상에 시달린다. 만성적이고 장기적인 고독감에 익숙해진 조나단은 사회 안에서 스스로 규정지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행동으로 실행할 능력이 없는, ‘참아내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조나단의 심리 상태는 자신의 능력을 알 수 없는 수족관의 돌고래와 같다. 수조에 갇힌 돌고래처럼 사람들도 가정환경, 인간관계 등 수많은 수조라는 한계들로 개개인을 옭아맨다. 비둘기조차 일상을 위협하는 칼날이 되어버리는 위험한 고독이 심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살기 위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감정을 마비시켰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 척하는 사람이 더욱 외롭다.

 

일상은 별 생각이나 느낌 없이 익숙해진 채 반복된다. 사소한 감정의 상처에서 오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적당히 마비시킨 채 시간은 무심히 흐른다. 하지만 우리는 조나단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된 감정의 상처가 곪으면 한 사람의 내면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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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jung 2015-07-07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의 상처로 50살이 되도록 내면의 고독속에서 지내다가 어느날 찾아온 비둘기에게 공포를 느끼나 고독속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는 줄거리네요..
고독은.. 이겨낸다기 보다는..고독을 씹으면서..뭔가 내면의 강함을 다져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물론 이 책의 중년 주인공과는 다른 심정일 수도 있지만요..
조나단이 과거의 감옥에 갖혀 고독속에서 살아왔지만..그 고독 밖으로 자유를 찾아나가고 싶은 갈망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겠죠.. 그리고 그 계기가 비둘기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cyrus 2015-07-08 18:20   좋아요 0 | URL
저는 <비둘기>의 결말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나단이 비둘기가 있었던 자리에 돌아가면서 깨끗해진 상태를 보면서 끝이 이야기가 나잖아요. 다시 읽어봐도 결말이 조나단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 건지 아니면 여전히 고통에서 못 벗어난 건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양철나무꾼 2015-07-0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문이요~^^
리뷰 밑에 죽기전에 읽어야할 책1001 프로젝트는 말이죠.
누구의 프로젝트인가요?
그리고 리뷰 밑에 저런 박스태그가 보이면,
`죽기전에 읽어야할 책`인가요?@@

해피북 2015-07-08 16:23   좋아요 0 | URL
저도 양철나무꾼님 말씀처럼 그게 궁금했어요 어젠 죽기전에 읽어야할 1001책에서 목차도 훑어보기도 했는데 말이죠 ㅋㅂㅋ,,

cyrus 2015-07-08 18:23   좋아요 0 | URL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문학작품들을 읽으려고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나오는 책들을 무조건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 독서 분야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찌 보면 단순무식한 독서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