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82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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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코끝을 스쳐 지나갈 뿐, 콧속에 가둬둘 수가 없다. 기억 저편에 살짝 묻어뒀다가, 어느 순간 다시 불러내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천부적인 후각을 가졌더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황홀한 향기들 전부 맡아볼 수 있을까. 후각을 새롭게 일깨워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그동안 살면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코를 확 뚫어준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사랑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소녀들을 스물다섯 명이나 죽인다. 바람에 실려 온 소녀들의 향기에 취한 그르누이가 망설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는 광기로 치닫는 인간의 섬뜩한 탐미 본능을 보여준다.

 

그르누이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냄새조차 맡아본 적 없는 고독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서식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향기로 만들어내는 일로 대신한다.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는 고독한 주인공은 말한다. 존재의 영혼은 향기라고. 《향수》가 독자에게 호기심과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냄새를 표현한 활자 이미지를 실제의 영상 이미지로 바꾼 톰 튀크베어 감독의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소설을 꼭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설은 수억 개의 후각세포가 엉켜 있는 듯한 생생한 후각적 묘사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후각의 제국으로 가는 초대장이며, 어두컴컴한 18세기 파리의 뒷골목으로 스며들어 가는 입구이다.

 

인간은 오늘날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보는 것’은 곧 안다는 것,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오페라 공연은 대사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연극 공연은 화려한 무대 위에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을 본다. 물론 음악을 듣고, 대사를 듣지만, 그것은 시각의 보충 감각에 불과하다. 일상생활에서도 시각 위주의 감각 체계는 강력하게 통용되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각적 조화와 균형에 따라 결정된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그르누이는 시각 위주의 문명을 거스르는 안티 히어로다.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소통하고 역시 창조하는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후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원작에서 냄새나는 문장을 따라가지 못했고, 관객들은 그르누이의 살인 행위와 향수 한 방울로 750명의 군중을 조종하는 마지막 장면만 기억할 뿐이다. 영화의 충격적인 영상미가 시각 문명을 거스르는 후각 천재 그르누이를 엽기적인 살인마로 만들어버렸다. 원작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영화를 본다면 당신은 쥐스킨트가 《향수》의 영화화에 무려 15년 동안 반대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도 가장 평가절하 받는 감각이다. 우리는 냄새 맡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냄새야말로 생존과 생식에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우리가 동물의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물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피하고 잘 요리된 음식과 매력적인 이성에게서 나는 냄새에 끌리는 것은 축적된 경험적 지식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진화된 본능에 가깝다.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인류는 향수를 만들었다. 오늘날 초호화 건물로 알려진 베르사유 궁전에 왕족과 귀족 들이 살았을 때 불결한 악취가 심했다고 한다. 궁전에 화장실이 없어서 귀족들이 궁전의 넓은 정원이나 실내 커튼 뒤에서 볼일을 봤다. 그래서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다양한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향수는 인류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귀중품이 아니라 악취 나는 인류의 본성을 가리려고 몸에 입는 얄팍한 가면이다. 향수의 역사 속에 고귀한 냄새만 쫓아 청결한 척하는 추악한 인간의 이중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향수》는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추악한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설이 들어 있다. 살인으로 빚어낸 향수는 귀족, 성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매료시켜 그르누이의 죄를 잊어버리게 한다.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고약한 치부를 망각하는 인간의 모순을 의미한다. 마치 겉은 화려하나 건물 내부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던 베르사유 궁전처럼 말이다.

 

최상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그르누이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 사회가 만들어 낸 불행한 사생아다. 냄새가 없다는 이유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르누이를 인간 대접하지 않은 그들도 선하다고 볼 수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꾸짖는 격이다. 결국, 《향수》에서 주인공의 삶을 판단하는 독자의 감상적 역할은 무의미해진다. 부처는 향을 가까이하면 성품이 향기로워지고 악을 가까이하면 악취를 풍기게 된다고 가르쳤다. 독자들 가운데 마음속에 품고 있는 향기가 아름다운 자는 그르누이에게 돌을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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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6-3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수>를 읽고 신선한 충격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죠. 튀크베어의 영화도 아름답지만 cyrus님 말씀대로 원작을 못 따라와요. 연기 천재 벤 위쇼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그루누이의 존재감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사랑받고싶은 욕망과 존재 이유를 찾는 그루누이...

cyrus 2015-07-01 18:07   좋아요 0 | URL
원작을 읽을 때 그르누이의 향수에 취한 사람들이 집단 섹스를 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영화에서 그 장면을 봤을 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이 충격적인 장면 하나 때문에 원작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 원작이 야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

초딩 2015-07-0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두를 읽다가 어느 영화가 생각났는데, 15년을 반대했던 그 영화가 맞는 모양이네요 :)
크게 잊고 있었던 것인만큼 더 신선항 충격일 것 같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

cyrus 2015-07-01 18:11   좋아요 0 | URL
초반에 그르누이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이야기가 지루할 겁니다. 이 부분만 지나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

해피북 2015-07-0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같은 책을 읽고 생각의 뿌리가 다른지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되네요 ㅋ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단순히 살인과 냄새에만 초점을 맞춰 좀 짜증냈던 기억이 납니다(원체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아서요ㅋ) 이 글을 읽으니 오래된 기억 속의 향수를 다시 꺼내보고 싶어지네요 ㅎ

cyrus 2015-07-01 18:16   좋아요 0 | URL
제가 <향수>를 처음 읽었던 때가 10년 전이었어요. 그 때 고등학생이었는데, 친구들이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만 보고 이상한 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향수>를 읽는 10, 20대 독자들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

서니데이 2015-07-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수>가 처음 우리나라에 출간 되었을 시기에 이 책에 대해서 소개를 읽고는 그후로 제대로는 읽진 않았네요. 향수와 향기라는 것이 그 때는 조금 독특하다 느껴졌던 것 같긴 해요. 그 사이 영화로도 나왔고, 많이 알려져서 아는 책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 기회되면 읽어봐야겠어요.
cyrus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15-07-02 21:33   좋아요 1 | URL
영화도 나와서 이 책을 안 읽어도 대략 줄거리를 알 수 있게 되었죠. 그래도 읽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원작의 묘사가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