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민음의 시 42
문인수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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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올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그런데 어디 눈물 흘릴 일이 고작 세 가지밖에 없을까? 남자가 흘러야 할 눈물 세 가지는 남자가 여자보다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허세일 뿐이다. 남자가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마음껏 울어 볼 때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눈물에 감정이 개입되면 그것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식의 관념은 사람 간의 형식과 격식에 치중하게 되고 솔직한 정서를 억누른다.

 

슬프다는 것. 그것은 분노나 미움의 감정보다는 덜 공격적이다. 문인수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슬픔의 감정을 선택했다. 다만, 그 슬픔은 시인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려고 슬픔의 내성을 키운다. 시집 《뿔》(민음사, 초판: 1992년 / 개정판: 2007년)에 나오는 눈물은 마치 윤활유처럼 고독한 감정을 쓰다듬는다.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몰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노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비」, 13쪽)

 

 

슬픔의 내성을 키운다는 것은 슬픔을 슬픔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슬픔을 하나의 성찰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슬픔으로 뒤바뀌는 변주의 과정을 시인은 내버려 둔다. 불로 변하는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시인의 마음을 뜨겁게 태워도 크게 억울해하지 않는다. 시인은 슬픔의 힘을 믿는다. 슬픔의 힘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은 고독의 앙금까지 싹 다 태워버리는 것이 고독한 현실에 원망을 품고 있는 것보다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말 걸지 마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14~15쪽)

 

 

인간은 누구나 슬픔을 안고 살며 그 슬픔을 통해 성숙한 자아를 이루기도 한다.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라.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일수록 마음속 그늘이 깊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심장으론 다른 이들보다 더 차가운 절망의 피가 흐른다. 문인수 시인의 시에는 고독을 꼭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다림이 담겨 있지 않다. 살아있는 내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제 몫의 슬픔이다. 「까마귀」에서 시인은 허허벌판 한가운데 드러내놓고 울 작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건한 시인이라고 왜 슬픔을 모르겠는가. 강건하기에, 슬픔의 물기는 더 축축하다.

 

 

나는 지금

동구 밖 홰나무 꼭대기에 서 있다

흘끔거리다가 마른 나뭇가지에 주둥이 비비다가

가슴패기 어깻죽지 털다가 꽈악꽈악 소리 지르다가도

잘 보인다

검다.

도무지 열어젖힐 수 없구나 온몸을 오욕칠정을

다 뒤져 보아도 나는,

숯이다.

나는 지금

동구 밖 홰나무 꼭대기에 서 있다.

잘 보인다

더는 타오르지 못하겠다.

 

허허벌판으로 가야겠다.

 

번개 우레 쾅 쾅 목 놓아

목을 놓아, 그 끝 간 데 없는 울음이 돼야겠다.

젖어, 자야겠다.

 

(「까마귀」, 23쪽)

 

 

우리는 눈물 속에서 그 사람의 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거짓된 마음, 교만한 마음에서는 절대로 눈물이 나올 수 없다. 바닥 없는 슬픔은 마른 눈물로 쩍쩍 갈라질 뿐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뿔》에는 진실한 눈물의 흔적이 보인다. 어찌 보면 이 시집은 눈물로 만들어 낸 진주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자들이 인생을 안다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 눈물에 젖은 시를 읽는다면 자기 존재를 알게 되리라. 우리 모두 지금 슬픔이란 감정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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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쌩 2015-05-29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루스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능력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오쌩 2015-05-2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말대로 슬픔이야말로 정신적 성찰과 지혜를 선물하는거 아닐까 싶어요.
노폐인 노개인^^

cyrus 2015-05-30 20:03   좋아요 0 | URL
적당한 슬픔과 눈물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치유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인수 시인의 시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

붉은돼지 2015-05-2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을 보니 뜬금없이 떠오르는 문구가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화장실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ㅋ

분위기 파악 못하고 죄송합니다 ㅡㅡ;;;

cyrus 2015-05-30 20:04   좋아요 0 | URL
사실 저 화장실 문구로 첫 문장을 쓸려고 생각했었습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15-05-2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정말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는군요~ 시집이라면 원래 근사하지만 옮겨주신 시들이 참 좋네요^^

cyrus 2015-05-30 20:05   좋아요 0 | URL
시집에 제가 소개한 것보다 더 좋은 시들이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