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카렐 차페크의 작품을 읽는 중이라서 《카렐 차페크 평전》(행복한책읽기, 2014)도 겸해 읽었다. 제목만 봐도 그저 차페크의 생애에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둔 평범한 평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직접 읽어 보면, 차페크의 주요 작품에 대한 설명이 많다. 평전이라기보다는 작품 개론서에 가깝다. 차페크의 작품 중에 인상 깊게 읽은 것이 희곡 《곤충 극장》(열린책들, 2012)인데 깊이 파고든 작품 해설을 참고하는 데 있어서 《카렐 차페크 평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카렐 차페크 평전》에서 《곤충 극장》을 소개하는 글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문장을 발견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희곡의 클라이맥스는 변화를 보여준다. 벌목꾼은 방랑자의 주검을 발견하고는 "죽은 자여, 불쌍한 늙은이야. 적어도 일생의 근심은 덜었군."이라며 결말을 내린다. 또 다른 희망적인 미래를 상징하는 아기를 안은 여자가 그의 임시 묘지에 꽃다발을 놓는다. 희곡의 첫 부분에서 나비채집 곤충학자가 방랑자에게 화를 내고 경멸하는 반면에 희곡의 끝에서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희곡은 긍정적인 결말을 가지고 있다. (《카렐 차페크 평전》 「곤충 극장, 풍자와 익살을 내포한 철학적 알레고리」 중에서, 190쪽)
여기 인용문에 굵게 표시한 문장은 《곤충 극장》의 에필로그 장면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열린책들 출판사에 나온 《곤충 극장》을 읽었을 때, 벌목꾼이 방랑자의 주검을 발견하는 장면과 아기를 안은 여자가 방랑자의 임시 묘지에 꽃다발을 놓는 장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에필로그만 처음부터 다시 읽을 필요 없이 등장인물을 쉽게 확인하는 법이 있다. 《곤충 극장》과 같은 희곡 작품은 막이 오르기 전에 먼저 각각의 막에 나오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하루살이 세 마리, 하루살이 합창단(코러스), 민달팽이 두 마리 그리고 여행자다. 열린책들의 《곤충 극장》은 민달팽이 두 마리가 서로 대화하면서 끝이 난다. 민달팽이 두 마리는 땅바닥에 널린 하루살이들의 시체와 여행가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삶을 달콤하다고 말하면서 지나간다. 민달팽이들은 사라지면서 《곤충 극장》의 막이 내린다.
국내 초역인 《곤충 극장》은 완역이 아닌 것일까. 열린책들의 《곤충 극장》에 있는 결말대로라면 이 작품의 해석이 달라진다. 《카렐 차페크 평전》에 소개된 결말의 해석과 상반된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곤충 극장》 원서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체코 어는 아예 모르겠고, 영어 독해 실력이 영 시원찮으니 찜찜한 기분으로 문제 제기만 해본다. 소소한 숙제가 생겼다. 일단 《곤충 극장》의 결말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작품과 관련된 각종 문헌들을 찾아봐야겠다. 안 되면 열린책들 출판사에 직접 문의하는 수밖에. (혹시 《곤충 극장》 원서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결말에 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댓글을 남겨주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