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독한 미식가 - 솔로 미식가의 도쿄 맛집 산책, 증보판 ㅣ 고독한 미식가 1
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다니구치 지로 지음, 박정임 옮김 / 이숲 / 2010년 5월
평점 :
“밥이나 한 끼 하자!”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나이 들게 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아닐까.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회생활은 인간관계의 연속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대개 할 이야기가 있을 때 사람들은 식사자리를 잡는다. “식사나 한 끼 하시죠?”라는 말은 “우리 친밀감을 갖자”라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그래서 한편 고마운 일이다. 좋은 사람들과 한 식탁 위의 같은 음식을 먹으며 쌓아가는 인간관계. 그 속에서 인간은 나 혼자만이 아닌 따스한 ‘우리’가 되어간다.
하지만 모든 식사가 그렇게 즐겁기만 할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면 피치 못하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생겨난다. 본인이 해야 할 때도 때론 타인의 은밀한 청탁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다. 그때 밥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다. 그 자체로의 맛과 향을 잃은, 만남의 부속물이다.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식사 시간의 소중함이야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조직과 여러 인과관계에서 놓여나는 유일한 자유 시간. 하지만 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희생을 당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때의 식사는 잘 차려진 정찬인 경우가 많다.
이따금 홀로 즐기는 식사는 무엇보다 편하다. 식당에서 모처럼 외식을 하는 날이면 으레 접하는 광경 중의 하나가 바로 홀로 식사를 하러 오는 손님을 보는 것이다. 과거보다 ‘나 혼자 산다’는 사람이 확실히 많아졌다. 곧 ‘나 혼자 밥 먹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몇 달 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혼밥 레벨’이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혼밥'이란 '혼자 밥 먹기'의 줄임말이다. 총 9단계로 이루어진 ‘혼밥 레벨’은 1단계 편의점에서 혼자서 라면 먹기부터 2단계 푸드코트에서 먹기, 3단계 분식집에서 먹기 등 일상생활 도중 누구나 한 번쯤을 겪어봤을 법한 난이도에서 시작한다.
Level 1 - 편의점에서 혼자서 라면 먹기. 누구나 가능한 쉬운 수준
Level 2 - 3천 원짜리 선불 식당, 푸드코트에서 밥 먹기. 누구나 가능하고 테이블도 전부 다 벽보고 먹는 테이블
Level 3 - 분식집에서 먹기. 24시간 분식집에서 야간에 혼자 밥 먹기. 쉬운 수준
Level 4 - 패스트푸드점에서 먹기. 그룹․연인이 많이 와 용기를 필요로 하나 빠르게 먹고 가는 분위기라 수월
Level 5 - 중국집에서 먹기. 약간의 용기를 요하지만 아저씨들 혼자 먹는 경우 많아 쉬움
Level 6 - 전문요리집에서 먹기. 대부분 연인이나 그룹이 많아 약간의 용기를 요함
Level 7 - 피자가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기
Level 8 - 찜닭, 닭갈비, 고깃집, 전골집에서 먹기. 이건 애당초 그룹이 간단한 술 한 잔까지 하기 위해 가는 곳이며 약간의 조리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혼자 먹기 대단히 힘든 코스
Level 9 - 술집에서 혼자 술 먹기. 종업원이 “몇 분이세요?”라고 물었을 때 답변하기까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함
하지만 이어진 4단계부터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먹기, 중국집에서 혼자 먹기, 세련된 라면집에서 혼자 먹기 등 대부분 그룹으로 손님이 방문하는 식당 등을 제시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더욱이 7단계는 피자가게, 스파게티, 패밀리 레스토랑 등 100% 그룹이 찾는 곳을 제시하고 있으며, 8단계는 고깃집 등 애초에 그룹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식당을 제시해 ‘혼자 왔느냐고 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마지막 9단계는 술집에서 혼자서 술 마시기로 혼자서 안주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 ‘상식에 벗어난 용기’를 요구하고 있다.
‘백지장마저도 맞들면 낫다’는 세계관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판국에 식사를 혼자 해결하러 오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혼자 먹되 남들 특히 아는 사람들 눈에 뜨일까 봐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바빠서,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할 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게 사회성 부족이나 성격 이상 등으로 여겨질까 겁낸다.
이웃 나라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심하다. 일본 대학생들 가운데 화장실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나 홀로 식사 자체는 딱히 뉴스랄 것도 없다.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하면서 빵을 먹거나 칸막이가 쳐진 식당에서 식사하는 ‘런치메이트(점심동료) 증후군’이 거론된 게 10년 전인 까닭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에 신경 쓰지 않고 어디서든 식사를 하는 대범한 용기를 가졌다. 심지어 음식의 맛을 음미하면서도 식당 안에 있는 손님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기도 한다. 그 사람은 바로 독신주의자 이노가시라 고로.
일 때문에 끼니 놓치는 게 다반사인 고로는 공복을 못 참는다. 늘 일 때문에 끼니를 놓친다. 허기진 배를 안고 주변의 식당을 찾는다. 무얼 먹고 싶은 기분인지, 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맛집을 찾는 데 어떤 ‘촉’이 작동한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 이것저것 주문한다.
혼자 먹지만 뭘 먹어도 많이 먹는다. 결과는 언제나 대체로 만족한다. 가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을 만나기도 하지만, 주인공은 일단 먹기 시작한 음식은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 만화는 뭘 많이 먹지도 않고 해설보다는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데 그 자체로 식욕을 자극한다. 이것저것 빼고 먹는 것 자체를 담백하게 묘사했다.
최근 외식문화의 보급과 서구식 식습관의 확산 등으로 여러 사람과 함께 그리고 빠르게 먹는 식습관이 자리 잡았다. 이렇다 보니 음식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오히려 잊어버린다. 우리는 모든 맛을 잊어버린 채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식사의 즐거움은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때때로 나 자신만을 위한 식사를 즐기는 것도 좋다. 적어도 식사시간만큼은 세상사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부담스러운 대화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조금은 불편할 때도 있다. 4명씩 앉게 되어 있는 대부분 식당들, 바쁜 시간이면 합석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1인분을 주문하면 안 되는 메뉴를 먹고 싶지만, 선택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은 슬프다. 그렇지만 요즘은 싱글족을 위한 테이블이나 메뉴를 준비하는 식당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다.
그래도 왠지 이상하거나 남의 눈치가 보인다고? 혹시 자신에게 쓸데없는 주술을 거는 것은 아닐까. ‘혼자 식사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외로운 사람이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