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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 프로이트의 마지막 인터뷰

 

오래된 전통을 보존하는 도시에는 꼭 크고 작은 박물관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대영박물관처럼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위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도 있다. 이런 작은 박물관들은 대개 그 위인이 생전에 거처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경우인데, 위인이 생전에 쓰던 가구는 물론이고 옷과 책들, 모자와 펜 한 자루까지 세심하게 보관해놓은 곳이 많다.

 

이와 같은 개인 박물관 중에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박물관은 학자와 문인이 많이 사는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만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스에게 점령당하자,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은 서른 번이 넘는 구강암 수술로 병색이 완연한 노학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프로이트는 생의 마지막 1년을 런던에서 지내다가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가 지금의 프로이트 박물관이다.

 

프로이트 박물관에 가면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망명한 1938년 겨울, BBC 라디오는 이 집에서 프로이트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정신분석학을 처음 주장한 이래 나는 많은 이에게 비난과 모욕, 핍박을 받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세상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주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자신의 숭배자를 까발리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지성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3대 혁명으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의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인간이 무의식의 노예에 불과하단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망한 책은 수없이 많이 나왔다. 프로이트 연구자들이 인정했던,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영국의 정신분석가 어니스트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총 3권, 1500페이지에 달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도 나오듯이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 생전 그의 제자이자 추종자로, 국제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한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프로이트 옆에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제자이고 측근이기에 객관적으로 프로이트의 삶을 조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니스트 존스의 책보다 보다 실증적이며 균형적인 시각으로 프로이트를 접근한 책이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인생>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피터 게이의 책은 이미 2년 전에 국내에 번역되었다.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의 논문과 저서, 편지를 샅샅이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 정신 분석을 받았던 환자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발로 뛰며 이 평전을 썼다.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직접 정신 분석을 공부해 프로이트의 내면을 읽어내려 시도했다는 것. 이를 토대로 프로이트가 남긴 사소한 농담이나 실수에서도 행간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프로이트의 체취를 책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이 책마저도 프로이트를 설명하기에는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옹프레다. 그는 ‘반(反)철학사’라는 제목의 6권짜리 책을 통해 전통철학에 반기를 든 비주류 철학자이다. 특이하게도 그가 프로이트 숭배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셸 옹프레는 피터 게이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프로이트에 관한 모든 자료를 근거로 소개하면서 신랄하게 자신의 숭배자를 까발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욕망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며 인간 내면의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까발렸다면 환자의 정신을 분석하던 이 위대한 유대인 자신의 심리상태는 과연 어땠을까.

 

 

 

 ♣ 프로이트와 비밀의 열쇠

 

작품과 작가의 삶은 무관하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몰개성’ 이론이 글쓰기 일반을 대변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었지만 작가의 삶의 편린들이 작품 해석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나름의 유용함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소소한 것까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전적 연구의 한 구절에서 자신의 삶과 정신분석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살바도르 달리 「관료의 프로이트적 초상화」 1936년

 

불멸의 그리스와 현대의 차이에는 프로이트만이 존재한다. 불멸의 그리스 시대엔 신플라톤 학파의 순수한 인체가, 현대에는 정신분석학에 의해서만 열리게 되는 서랍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

 

 

 

“정신분석과의 관련성을 배제한다면 나의 개인적 경험들은 아무런 흥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프로이트의 개인사를 자세히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프로이트는 자신의 손에 몰래 쥐고 있는 이 ‘열쇠’를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하기가 꺼리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이론은 철저한 자기분석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만 남길 원했지만, 영원토록 숨기길 원했던 비밀의 ‘열쇠’는 무덤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 열쇠는 지금 자신을 숭배했던 철학자 미셸 옹프레의 손에 쥐어졌다.

 

옹프레는 정신과 의사가 되어 프로이트를 상담용 소파에 편히 눕게 한다. 혹시 프로이트가 당황할까봐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시가 한 대를 슬쩍 내밀어본다. 드디어 그가 ‘자유연상’을 하기 시작하면 옹프레는 굳게 잠겨 있는 프로이트의 책상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책상의 서랍에 숨겨진 물건 찾듯이 그 안에 보관된 ‘프로이트 엽서’에 적힌 지적 우상의 내면을 과감히 드러낸다.

 

 

 #1 첫 번째 서랍 :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책상 가장 큰 비중을 자지하는 서랍 하나를 열어 보면, ‘아버지’가 있다. 그의 생애에서 아버지가 차지한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프로이트가 인간 사회의 근원을 이룬다고 생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性)적인 환각이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즉 아버지를 (어머니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 증오하는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며 불안해하는데, 여성의 생식기를 관찰함으로써 거세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아버지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는 보헤미아에서 빈으로 이주한 상인이었다. 장사는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나 아이가 많은 프로이트 일가는 늘 가난에 쪼들렸다. 어느 날 소년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젊을 때, 새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다가 한 독일인에게 모욕을 당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은 일부러 야콥의 모자를 떨어뜨리며 “이 유대인 놈아, 인도에서 내려가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소년 프로이트는 당연히 아버지가 맞서 싸웠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불평 없이 차도로 내려가서 진창에 떨어진 모자를 주웠을 뿐이었다. 당시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다반사였으나 프로이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은 아버지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남자’로 생각하던 프로이트를 실망에 빠뜨렸고 후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그의 정신분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아버지와의 개인적 경험과 인상을 토대로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옹프레는 근친상간에 대한 욕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프로이트는 콤플렉스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핍박받는 소수 민족 출신에다가 변변치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질투와 그로 인한 죄의식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2 두 번째 서랍 : 자기검열

 

프로이트는 유명해지기도 전인 1885년 벌써 14년간의 모든 메모, 편지, 논문 발췌문, 작업 중 원고를 일차로 없애버렸고, 이후 같은 자료 파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다. 심지어 한번은 젊었을 때 “동성애적 경향”을 이야기할 정도로 절친했다가 결국 절교하게 된 친구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를 플리스 사후 미망인에게서 돈을 주고라도 사들이려 했다. 물론 없애버리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렇게 없앤다고 짓궂게 농담을 했다. 진심이 무엇인지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 전기 작가에게 편집당할 재료가 된다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편집권을 둘러싼 투쟁이 전공의 하나인 그가 자신의 삶의 편집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남에게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자신의 삶에 대한 위생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 생전의 프로이트의 태도를 익히 보아온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에 아무리 용기를 내 전기를 써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가 내린 무언의 지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3 세 번째 서랍 : 오류, 조작

 

여전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제도권 학계에서 완전히 수용되지 못하거나 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놀라울 만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검증 가능성은 여전한 시빗거리다. 정신분석의 유일한 도구가 언어이고, 대상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이런 비판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직관에만 의존한 프로이트의 어처구니없는 추론 또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대표적인 것이 프로이트가 분석한 도라의 사례다. 그에 따르면 도라는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를 간호하는 내연녀, 내연녀의 남편 K씨 모두와 동일시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프로이트는 도라와 K씨와의 스킨십에 대해서도 작용(자극) 반작용(흥분)이라는 생리, 물리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한다. 이처럼 기계적이고 경직된 해석과 가부장적인 권위로 환자의 주장을 묵살하는 독단,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성욕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의 측근들조차 돌아서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그에게 진찰받고 난 1년 후에, 도라의 정신 상태는 더욱 피폐해졌으며 몸이 극도로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임상 치료에 관한 한 정신분석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수많은 치료 실패와 재발 사례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프로이트의 환자들에 관한 사례들은 프로이트가 직접 조작하고, 환자를 가상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인 ‘안나 O’가 정신분석으로 치료됐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늑대 인간 사례로 알려진 러시아 청년 세르게이 판케예프도 프로이트로 인해 치료된 것이 아니라 92세에 사망하기까지 70년간 10명의 정신분석가에게 치료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 네 번째 서랍 : 코카인과 담배

 

과거에 코카인이 만병통치약으로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다. 주범은 놀랍게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였다. 그는 아편 중독에 시달리던 동료 의사를 코카인으로 10일 동안 치료한 후 "완전히 해방시켰다"며 코카인을 중독 위험이 없는 기적의 약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코카인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 동료 의사는 나중에 코카인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5년간 코카인을 규칙적으로 흡입하면서 “중독성 없이 지속적 행복감을 제공한다”는 예찬과 함께 주변에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애연가였다. 죽기 전까지 말 그대로 줄담배를 피웠다. 그로 말미암아 말년에 구강암으로 서른 번의 수술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담배를 결코 놓지 않았다. 치료제로 복용하던 코카인에는 중독되지 않았던 그가 오히려 담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시가는 그에게 지적인 자극제였고, 프로이트는 그것 없이 정신분석학의 탄생은 불가능했다고 고백했다.

 

 

 

 ♣ “나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로이트 박물관에 흘러나오는 프로이트의 육성에서 마지막 한 줄의 문장이 인상 깊다.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말은 프로이트의 평생을 압축한 것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탄생부터 사망까지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조용해 보이는 이 남자는 무쇠보다 더 강한 의지로 모든 장애물에 맞섰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념을 가진 인간은 무한정 강하며 결코 죽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다. 유대인이라는 태생도, 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가난도, 정신분석학에 쏟아진 학계의 비난과 공격도, 빈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도, 심지어 죽음마저 그를 무릎 꿇릴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적을 만나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더라도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무의식을 분석해 인간 심리의 저변을 해석해내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프로이트도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그 자신이 콤플렉스, 신경증(히스테리, 공포불안), 도착증 환자였던 셈이다. 학문적 기여도에 비해 오랜 세월 학계의 변방에 남아있었던 그는 세상이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해 주기를 바랐고 노벨상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다. 상담용 소파에 누운 프로이트의 이런 이야기를 그 자신이 직접 들었다면 어떤 진단을 내릴까? 분명한 점은 프로이트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미셸 몽프레의 책은 매우 논쟁적이어서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에겐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상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 수 있다는 기본적 인식을 전제한다면, 그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프로이트의 생전이나, 또는 그의 사후 줄기차게 따라다녔던 ‘비판’의 연속선에서 이해할 때 유익할 것이다. 물론 이 ‘비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후예들이 대답을 해야 하겠지만. 옹프레의 프로이트 평전이 나오더라도 그와 프로이트 추종자들 간의 투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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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2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쩐지 털보들의 나날이로군요.

cyrus 2013-11-26 22:56   좋아요 0 | URL
요즘 형님도 수염이 잘 나는가보죠? ㅎㅎㅎ

루쉰P 2013-11-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전히 독서에 날을 새우고 진보하는 청년으로 지내고 계시는 군요 ㅎ
너무 오랜만에 와서 인사 드리죠? ㅋ
프로이트도 저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여.
저도 항상 저의 무의식에 관심이 많거든요.
공부한다고 책상에 영어 책을 피면 15분 뒤엔 전 정확하게 휴대폰을 들고 웹툰을 보고 있어요...
왜 일까...대체 내 무의식의 무엇 땜에 이럴까...
이런 생각을 곧잘 합니다 ㅋ
여전히 좋은 글이에요 ㅋ 왠지 나중에 교수님 하실 거 같은 포스 ㅋ

cyrus 2013-11-26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루쉰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요즘 저도 프로이트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꿈의 해석>도 조금씩 읽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심오하면서도 수긍가는 부분도 있지만,
융 심리학도 공부해볼만 합니다. 저도 이번 학기 졸업반인데 딴 짓하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