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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ㅣ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광장』의 굴욕?
문학작품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적 상황과 연관돼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꾸준히 읽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 안에 담겨 있는 '시대정신', 즉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고뇌를 온전하고 명료하게 표현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최인훈의 『광장』과 작품 속 주인공 이명훈이 분단시대에서 4.19혁명으로 나타난 역사적 전환기의 민족의 사상과 고뇌를 상징한다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는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몰락해가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통해 70년대 경제성장의 사회상의 폐해를 고발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의 단면들이 발표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난쏘공』이 출간 30년 만에 통산 100만 부의 판매 기록이 세웠을 때 작가 조세희는 '현재 철거민의 삶은 30년 전이나 똑같다'고 말하면서 '30년 전에 나온 내 소설이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읽혀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냉담한 소감을 밟혔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로부터 소외받아야만 했던 '난장이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광장』도 마찬가지다. 작가 최인훈은 여러 차례 개작 끝에 탄생된 수정본을 출간하게 된 이유를 『광장』의 역사적 시대의 산물이며 좀 더 문학성을 보강하여 후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명준이 바다에 투신한 지 42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의 대립은 여전하다.
최인훈의 『광장』도 문학 교과서에 많이 수록되고 지금까지도 수정본으로 나올 정도로 전후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희의 『난쏘공』에 비하면 대중의 인지도는 조금 낮은 편이다. 철거민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조명되는 사회적 이슈가 거론될 때면 항상 연관되어 따라 언급되는 게 바로 조세희의『난쏘공』이다. 그런데 지금도 '분단국가'인데도 '분단 문학'의 인기는 그리 많지 않다. 5, 60년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뚜렷했던 사회상을 그려냈기에 오늘날 읽기에는 너무 케케묵은 소설이라는 인식 탓일까? 4.19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되는 시점에서 나온게『광장』인데 4.19 혁명을 기념하는 날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 정도면 문학적 평가에 비하면 상당히 굴욕적이다.『광장』은 수십년 전에 출간된 책치고는 50만 부를 넘을 정도로 스테디셀러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능 세대를 거쳤던 기성 세대들이나 현재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광장』은 역대 수능시험 지문 출제 작품이면서 모의고사에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소설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문학 시간에『광장』을 배웠던 사람들 중에서 텍스트 전체를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광장'과 '밀실'의 사회
한반도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세계적인 공간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지금도 갈등의 기억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 갈등은 해방 이후에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러한 체제 갈등과 경쟁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기에 이른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흐름이나 반대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지향하던 세력이나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팽배하고 있었던 1960년, 때마침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지쳐버린 이명준이 등장하는 『광장』이 탄생하게 되었다.『광장』이 나올 수 있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소설은 4.19 혁명으로 드러난 의식의 전환과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19 혁명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킴과 아울러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존의 정치세력들은 갑자기 폭발한 민중들의 자유의 에네르기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고 그 혼란을 틈타 군사독재가 등장함으로써 자유로운 사회의 탄생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은 끝내 '미완'으로 남아야만했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오직 '억압'과 '복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인식하에 제3국을 선택하지만, 끝내 바다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명준은 '광장' 과 '밀실'로 구분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다. '광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이념을 추구하면서 바람직한 사회 건설을 위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공적 공간이다. 반면, '밀실'은 개인이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사적 공간이다.
아버지의 월북 이력이 문제가 되는 바람에 남한 사회는 이명준을 빨갱이로 몰아붙였고, 그는 이를 계기로 남한의 개인주의적이고 폐쇄된 밀실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하기에 이른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밀실' 속에서 사적 이익만을 탐닉하는 퇴락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그와 동시에 '광장', 다시 말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묘한 동경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명준의 눈에 비친 북한 사회는 활기차고 정의로운 공동체적인 '광장'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남아서 개인의 자율성이 크게 훼손되는 사회였다. 심지어 '사랑'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통제사회였던 것이다. 이명준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불구적인 사회다. 그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바람직한 광장이 건재하되 밀실이 존중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사회의 조화, 이념과 행복이 공존을 이루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사회를 발견하지 못했다.
『광장』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명준의 행적과 심리적 자의식을 통해 작가는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명준은 나름의 방식으로 남북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지도, 현실을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한 사회와 현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친일파가 해방 후 고위직에 오르고 타락과 부조리, 방종에 가득 찬 '남한 사회'나 경색된 이데올로기, 허위, 부자유가 만연한 '북한 사회' 모두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모두 진정한 인간 삶을 충족시키기 어려운데, 그것은 애당초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모두 사회 성원들의 자생적인 욕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p 196)
이명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나누는 인상적인 이 대화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 나아가 우리 민족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 이명준이 선택한 '중립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남과 북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립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밀실'과 '공간'이 공존하지 않는 한국 사회
'밀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와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려다가 고초를 겪었던 자.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개념으로 '공론장'을 주장했다. 공론장은 개인들이 모여 권력의 간섭이나 제약없이 이성적인 비판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국가 권력의 방향을 논의하는 공간이다. 공론장의 엄청난 힘은 현대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밀실과 광장이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밀실보다 광장에서 존재감을 찾는다. 광장은 열린 공간이자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창구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고 다양성을 교감하며 통일성을 지향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광장을 열어라"라는 저항의 외침과 "무조건 열 수는 없다"라는 거부의 몸짓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한쪽은 자신을 진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보수로 이름 붙인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었고,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다. 정부의 얼굴이 여러 번 바뀌어도 철 지난 이데올로기 대립과 그에 대한 불신만 반복되고 있다. 이 땅에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있는지 의문만 커질 뿐이다.
60년 전의 이명준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본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밀실'의 암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 그리고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고초를 겪어야만했던 자가 같은 땅덩어리 내에서 살고 있는 게 지금 우리나라 사회의 현주소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고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구 냉전시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낡은 이분법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국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젋은 세대들은 이명준처럼 이데올로기로 인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진정한 삶의 행복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공론의 장을 형성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깊게 패인 극단적 단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