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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1001-728] 장미의 이름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No. 43, 1799년
5년 만에 완독 성공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두 권짜리를 처음 구입했을 시기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2007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에코의 소설이 유명한데다 어느 일간지에서 선정한 대학생 새내기 추천도서목록을 본 뒤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이맘때가 되면 일간지의 북섹션마다 2012학번 대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를 소개한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이제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 정도로 어엿한 '세계문학'으로 자리잡았지만 5년 전만 해도 『장미의 이름』은 전집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장미의 이름』 은 회색 사철 양장본이다. 회색 사철로 된 『장미의 이름』은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기가 드물어졌다. 알라딘에서는 절판 상태다. 지금 세계문학전집의 『장미의 이름』은 노란색 사철 양장본으로 나오고 있다. 요한묵시록의 주석서에 실린 삽화를 차용한 표지는 여전하다. 간혹 헌책방에 들리면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86년판 『장미의 이름』이 굴러다니긴 한데 세월이 조금 지나면 개정판인 회색 사철 양장본도 헌책방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5년 전에 구입해놓고선 여러 차례 완독의 실패를 고배를 마신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읽기 시작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횟수만 해도 수십번 정도다. 중세와 관련한 방대한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낸 스토리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개정을 거듭하면서까지 내용을 보충한 故 이윤기 씨의 상세한 역주가 있어도 중세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눈에는 그저 어렵고 빽빽한 문자로만 보일 뿐이다.
본의 아니게 소설의 결말을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1권 때문에 알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소설만큼은 완독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오히려 작년에 숀 코너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소설을 읽어보려고 한 번 뒤적거려보기도 했다. 비록 이 도전 역시 실패했지만.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장미의 이름』을 완독하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자하니 내 자신이『장미의 이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떠올려졌다. 이들은 금지된 책에 담겨진 금지된 지식을 알려고 하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이 쓴 어렵기로 유명한 소설을 읽으려고 하다가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굳이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을 완독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장미의 이름』 독서의 목적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맞추기 보다는 소설 속에 소개된 중세의 사상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알고 싶었다. 시지프스가 죽어서도 영원히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 것처럼 나는 도전, 중간에 포기를 반복해야 했다. 1권짜리 완독은커녕 1권 반 페이지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중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은 꼭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첫 장부터 다시 읽었다. 결국에는 한 달동안 틈틈이 읽은 끝에 두 권짜리를 완독할 수 있었다.
역사의 회색시대라기엔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독자는 중세라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중세'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거나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어도 에코의 소설을 읽기가 수월하지가 않다. 중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흑시대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시대다. 중세적 삶의 문법과 근대적 삶의 문법 가운데 무엇이 더 옳으며 무엇이 더 좋은가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에코가 재현한 중세는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미로처럼 설계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지성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성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은 지식을 누리는 데 있어서 적잖이 한계가 있었다. 중세의 도서관은 오늘날처럼 누구나 마음대로 책을 빌려가면서 읽지 못했다. 특정한 시간만 도서관의 책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열람'은 책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읽는 것이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교회 도서관에 보관된 책을 읽거나 필사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칠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단적인 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지된 책을 읽으려고 했다.
소설은 종교의 맹신적 믿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시절의 이야기다. 종교와 교회의 입장에서는 화려했던 장미가 꺾이는 시기였던 것이다. 종교적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내보이는 구 세력과 철학적 이성을 중시하는 젊은 수도사들 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관리륻 담당했던 원장 수도승은 그리스 철학에 관한 책들이 보관된 장서관의 출입을 철저히 막는다. 아울러 일반인의 경우 조금이라도 부도덕하다고 판단되면 마녀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로 인한 억압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는 지식에 대한 갈구를 불러일으켰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교리로부터의 깨달음보다는 진리 그 자체, 곧 삶의 비밀을 추구하기 위해 책을 보고자 했다. 에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중세인들의 인생관을 라틴어 명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수도승이 찾고자 했던 지식의 근원은 도서관에서 숨겨져 있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pp 23)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단 한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 때문이었다. 『시학』2권은 희극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뿐 아니라 웃음도 우리 삶에 유용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 신부는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이 원죄를 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리에 집착했던 호르헤 신부의 눈에는 야밤에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위험천만한 이단자로만 보였던 것이다.
지식의 권력화의 위험성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호르헤 신부가 예수와 기독교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다면, 월리엄 수도사는 그 진리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장미의 이름』은 월리엄과 호르헤의 대결을 통해 독자들에게 깨우쳐 준 교훈은 진리란 알고 보면 이름뿐인 데, 그 진리라는 허상에 얽매이면 자신이 '악마의 책'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처럼 자신도 남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악마로 만드는 것은 호르헤 신부가 휘둘렀던 권력이다.
진리의 권력화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서양 열강은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자신들보다 미개한 문화를 지닌 식민지를 '종교 전파'라는 명목 하에 지배 헤게모니로 사용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천 년 전에 등장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절대적인 지식이 권력이 될 때, 그 지식 권력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사탄이 된다. 에코는 이러한 문명사적인 비극을 중세 말의 신앙과 학문의 대립을 통해서 그려냈다. 중세의 악마는 호르헤 신부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생겨났다.
이단에 대한 탄압과 신학적 독단,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지배질서는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면 '동지', 그 반대는 '적'이라고 여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위험한 우상이 된다. 이러한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윌리엄 수사가 추구했던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반성,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열린 자세,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 탐구가 필요하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윌리엄의 제자였던 아드소가 수도원의 폐허 위에서 내뱉는 독백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라져 버린 과거의 아름다웠던 장미의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