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편견  

최근에 출간된 진중권<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은 3년 전에 출간된 <고전예술 편>을 이은 2편격이다.    1권 고전예술에는 고대부터 인상주의까지 모더니즘에 들어서기 전의 예술사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면 <모더니즘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책 내용을 소개하기 전부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를줄 아는 '현대인' 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현대미술를 어렵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미술은 너무 단순하고 고색하다고 해서 낡고 뛰덜어진 예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대적인' 현대예술은 복잡하다고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해 못하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당연히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복잡하다' , '고전미술은 그림만 봐도 화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데 반면 현대미술은 도통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당연히 모던(modern)하며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와 선입견에 불과하다.  

진중권은 <모더니즘 편>에서 현대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모더니즘' 적 예술사조를 소개하기 위해서 단순히 기존의 미술사에서 사용하던 통사적 전개보다는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을 빌어 수많은 현대미술 사조들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모더니즘 편>에서는 한스 제들마이어(1896~1984)라는 미술사학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가 선택한 전개방식이 사뭇 이례적이다.   제들마이어는 예술 '보수' 주의자 로서 현대미술의 모순을 끄집어내는 미술사학자로 유명하다.  평소에 '진보' 입장에 서서 사회적 이면에 독설하기로 유명한 저자의 모습과 상반되어 흥미롭다.   

제들마이어는 20세기 초에 등장하다가 사라진 현대예술의 유행들이 전통적 예술 가치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현대적 예술 가치를 찾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쉽게 좌절되어 심지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되돌아갔다고 분석하였다.  현대예술의 전형적인 특징인 동시에 자기모순으로로 이르게 한 네 가지 예술적 근원으로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의 의지, 근원을 향한 열정, 광기에 대한 호기심’ 을 제시한다.

  

 

  순수성의 추구 : 야수파와 입체파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년 

(pp 36 수록) 

  

'순수성의 추구' 란 회화에서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색채, 형태, 원근법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서 회화는 관객들을 위시한 표현 양식과 그에 대한 의미에 부여하다기보다는 회화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 배제시킴으로서 순수한 형태의 회화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순수성을 표현하고자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순수성' 이라는 것이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미술 입문자나 독자에게는 그저 추상적인 용어로 들리지만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현대미술사조가 야수파(fauvisme, 포비즘)입체파(cubism, 큐비즘)이다.   

야수파와 입체파는 20세기 초 거의 동시에 등장한 미술운동이었는데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표현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다.   야수파가 인상파의 화풍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일시적으로 교류를 맺게 되어 형성하였지만 입체파는 인상파로 활동했던 폴 세잔의 구축적인 원근법에 매료되어 초창기 입체파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야수' 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수파 소속 화가들은 색채의 강렬함을 강조하였다.  그림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사물과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실제 색채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실제 색과는 상관없이 원색으로 표현하였다.  야수파 화가들은 원색으로서 빨강, 노랑, 파랑 등과 같은 화면의 전체적인 효과를 펼칠 수 있는 강렬한 색채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년  

(pp 63 수록)  

 

그는 굉장히 단순하고 변형된 금속성의 인물을 고안했다.  그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 인물, 집 등 모든 것을 기하학적 윤곽과 입방체(cubes)로 축약했다.  

- 루이 보셀의 비평,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 pp 55 -

   

반대로 입체파는 '정육면체' 를 뜻하는 Cube에서 비롯되었듯이 색채보다는 형태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당시 비평가들 역시 입방체로 구성된 입체파 회화의 표현방식에 대해서 경멸적인 비난을 퍼부었는데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조롱 섞인 의미에서 '입방체' 그리고 '입체파' 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세잔이 원근법이라는 오랫동안 예술가들을 지배한 기교를 제거한 것처럼 입체파 화가들 역시 원근법의 고정된 시선 대신에 여러 개의 시선이 공존하는 화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루이 보셀의 비평대로 모든 형태들을 기하학적 원형에 가깝도록 표현하였다. 

하지만 오직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다보니 정작 예술적 가치 자체는 관객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모호적인 용어에 불과하며 그런 관념에 불과한 '순수성' 을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추상미술이라는게 많은 이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들마이어는 추상미술을 '인간 행위의 근본을 무시' 하는 '사이비 종교와 같은 비교(秘敎)적인 예술'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pp 21)  

 

 

  근원을 향한 열망  : 표현주의

 

 에밀 놀데, <황금 송아지 주위의 댄스>  1910년 

(pp 29 수록)  

 

20세기 초 독일에서 등장한 표현주의 미술은 화가의 감정 또는 화가를 둘러싼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순수함을 표현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표현주의 소속 화가들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들어내고, 원시적이면서도 격앙된 색채를 통해서 근원적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들마이어는 오직 순수함을 추구했던 표현주의의 구호에 모순을 지적한다. 인간이 더욱 순진해지기 위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무의식에 숨겨진 어두운 심연으로까지 파고들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전쟁이 남긴 무력감과 허무주의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실망과 동시에 예술적 변질감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표현주의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몇몇 표현주의 화가들은 '11월 그룹' 을 형성하여 정부의 후원 밑에서 활동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의 표현주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고 키르히너 같은 화가는 자신의 예술이 그토록 믿어왔던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 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그리고 에밀 놀데나치당에 가입함으로써 표현주의 예술을 다시 한 번 부흥시키려고 하였지만 놀데의 정치적 전략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훗날 나치의 히틀러는 표현주의 예술을 '퇴폐예술' 로 낙인찍어버렸다.  

 

 

  광기에 대한 호기심 : 다다와 초현실주의   

 

 

조르조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년  

(pp 217 수록)  

 

키리코의 작품에서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어떤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듯하다.  엇갈린 원근법,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정체불명의 광원(光源)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로운 분위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수수께끼 같은 '경이' 를 보았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pp 218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다 초현실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다다는  본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나 전쟁 이후에 형성된 무의미함 그리고 비합리성, 반도덕을 강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들을 부정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전쟁 이전까지 예술작품이 외적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으며 부조리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에 조롱과 경멸하는 동시에 재앙의 시대를 살아나갈 수 있는 묵시론적 광기를 통해서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가치와 형식을 거부하려는 다다는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변화됨으로써 '다다' 로서의 고유한 무정부주의적 의미가 퇴색된 채 하나의 예술운동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다다 특유의 허무주의만으로 예술의 본질을 찾을 수 없다는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라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을 주창하였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 또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할법한 낯선 꿈의 세계 그리고 광인의 착란 증상이 만들어낸 광기의 세계야말로 전쟁에서의 정신적인 해방과 예술로써의 진정한 창조 상태로 보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역시 예술의 내재적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광기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이 진정 '광인' 이 아닌 이상 초현실주의적 예술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정신 분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구축의 의지 : 구축주의, 바우하우스

 

 

 블라디미르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최초 모형,  1920년 

 

시대가 가면 갈수록 현대미술은 더욱 더 새로운 유행의 예술사조들이 등장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예술가들은 예술의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 기술, 기하학' 과 같은 기계 역학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러시아 구축주의의 주요 멤버로 활약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철판, 유리, 철사 등에 의한 공간구조에 창안하여 약 400 m 높이의 경사 나선형인 철골구조물인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계획하였다.  당시 철물이 부족한 소비에트 체제의 러시아 재정 상태로 인해 타틀린의 원대한 꿈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인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하여 '기술적 구축의 예술' 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그후 기술과 예술의 만남은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미술에서 추구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독일 데사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건물 

 

'기술과 예술의 만남' 이라는 현대적 예술적 인식은 독일에서도 정착되기 시작하는데 러시아에서 건너온 바실리 칸딘스키(칸딘스키 역시 러시아 특유의 구축주의 예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와 파울 클레 등을 중심으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Bauhaus) 라는 조형예술 전문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과 예술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교육에 치중하였다.   바우하우스에 소속된 학생들과 교수들은  오늘날 산업적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미래' 를 위해서 '과거' 로 돌아간 현대미술  

결론적으로 제들마이어는 이 네 가지 근원으로 인해서 현대예술은 단순한 비(非) 예술로 전락, 역설적으로 자신이 기피하고자했던 예술적 가치와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자기모순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원인으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황폐하고 부조리한 현대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그릇된 우상숭배를 오직 예술에서만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현대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파괴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급진적인 혁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제들마이어는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예술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진정한 조건으로는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라' 는 철학자 셸링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복음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정신' 이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pp 33)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과거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예술 '보수' 주의자다운 결론이다.  저자 역시 현대예술의 자기모순과 이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린 제들마이어의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만 가지고 그가 예술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섣부른 결론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평소에 '진보주의자' 로써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독자들에게는 '예술' 에서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에 동의하는 저자의 모습이 흥미로울 것이다.  저자가 말한대로 이 책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면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예술의 진면목을 알게 되며 제들마이어의 예리한 분석에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비록 '모더니즘' 예술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제들마이어의 분석만을 가지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보수' 와 '진보', 상반된 두 가지 관점으로 현대예술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책의 구성면에서 아쉽게 느껴지지만 복잡하면서 어렵다던 현대예술의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들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도둑 2011-09-15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나요?.,,,
결국 현대미술도 '낯설게 하기군요... 작가 마음대로, 보는 사람 마음대로, 참으로 불칠전한 것이 현대미술이 아닌가 싶네요... 진중권의 미학세트를 사놓구선 포장지를 아직 뜯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걸 글을 읽으면서 생각났어요. 사이러스님의 글은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군요. 게으론 독자 다녀갑니다..^^

cyrus 2011-09-15 16:30   좋아요 0 | URL
네, 올해 연휴에는 맛있는거 많이 먹고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연휴가 끝나도 여기 대구는 무척 덥네요. 물론 꽃도둑님이 사시는 곳도
더우시겠죠? ^^

stella.K 2011-09-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대단하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 쓸 것 같고,
뭐라고 쓰긴 써야하는데 난감해.ㅠ

cyrus 2011-09-21 16:03   좋아요 0 | URL
책의 주요 내용들만 뽑아서 정리한거랍니다. 솔직히 인문, 과학, 예술분야
책이 리뷰나 서평으로 쓰기에는 쉽지 않은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