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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국가 ㅣ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2
정원오 지음 / 책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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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상급식 투표 결과' 에만 혈안이 된 복지 논쟁
대한민국 사회 최대의 쟁점인 무상급식에 대한 주민투표가 드디어 내일 실시된다. 투표 결과는 서울이라는 특정 지역이나 무상급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선별적 복지론과 전면적 복지론이 정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국가 복지정책의 향후 진로가 판가름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투표결과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시장직을 내건 모습이 보기에 민망하고 무모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투표율 33.3%의 벽을 넘을지 모든 국민은 투표 결과에 집중하고 있다. 이 투표율을 넘지 못하면 개표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보수 진영 시민단체 쪽에서는 투표참여 문자 메시지와 홍보문를 전송함으로써 어떻게든 무상급식 도입을 막으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무상급식이라는 복지정책 도입의 의미보다는 투표 결과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거 같다. 오 시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진영 쪽에서는 무상급식은 빨갱이들이 선동하는 경제 파탄으로 가는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진보 진영 측의 야당에서는 오 시장에 내건 주민투표는 무의미하고 위법적인 행위라고 반박하고 나서 국민들에게 참여할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수치로 결정되는 투표 결과에만 매달리는 복지 논쟁이 점점 가열되는 양상이다. '무상급식' 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무상급식 투표 결과' 를 위한 싸움일까? 보수 세력은 어떻게든 투표율을 높이서라도 무상급식 도입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진보 세력은 그저 투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할 뿐 투표 결과에 따른 무상급식 도입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 마련에 대한 어떠한 자세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들의 입장 역시 천차만별이다. 오 시장의 눈물 쇼(?)에 코웃음치면서도 복지 정책 도입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몇 명이 있을까? 지방에 사는 주민들은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저 남의 나라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정당과 국민들은 정작 '복지' 라는 핵심적인 본연의 의미에 대해서는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례, 베버리지 보고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 윌리엄 베버리지 (1879~1963)
영국은 이미 50여 년 전에 복지 정책 도입 논쟁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나라보다 이미 복지국가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그래서 1945년 전후에 벌어졌던 상황은 2011년 한국의 복지 논쟁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영국 정치지도자들은 국민 사기진작을 위해 종전 뒤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했고, 전시 연립내각인 처칠 행정부는 1941년 이를 위한 위원회들을 구성했다. 윌리엄 베버리지는 그러한 위원회 가운데 하나인 ‘사회보험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베버리지는 1년여의 활동을 거쳐 1942년 12월 보고서를 출판했고, 이 보고서는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그것이 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복지국가의 모토가 탄생된 '베버리지 보고서' 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부모 소득과 관계없이 아동이 성장할 수 있는 아동 수당, 누구나 자유롭게 치료를 받는 무료 의료시스템, 원하는 사람 누구나 일할 수 있게 하는 노동 정책을 제시하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실의에 빠진 영국 국민들은 복지정책 도입에 환영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정책에 도입할 재정적 여건을 충당하기에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노동당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기로 검토하였으나 반대로 보수당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며, 전후 복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복지 확대는 국가 백년대계에 어긋난나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의 폭발적 기대 속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세계대전이 종전됨에 따라 영국은 전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에 돌입하였다. 선거 최대 쟁점은 전후 발전 방향이 아니라 베버리지 보고서의 실현 문제였다. 즉, 사회적 복지 제도가 도입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국민들의 강력한 여론에 선거 전세에 불리함을 느꼈던 것일까? 복지정책 도입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보수당도 어정쩡한 입장에서 보고서 내용 실현을 공약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적극적 실천과 대대적 복지 확대를 내세웠다. 전시내각 해체 전부터 노동당은 주도적으로 복지정책이 도입될 수 있도록 이미 기틀을 확립하고 있었다.
선거 결과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윈스턴 처칠 총리는 참패하고, 종전 두달만에 그때까지 단독 집권경험이 없었던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집권한 노동당은 약속대로 국민 보험 제도와 산업 재해 보험 제도를 법적으로 실시하게 하였고 복지 국가로서의 영국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과연 한국은 '복지국가' 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이 책의 저자 정원오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국의 사례를 들어 복지국가가 탄생하기 위한 필수 요건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노동당처럼 사회 보장 정책 도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둘째, 영국이 총선거를 통해서 복지국가로 전환될 수 있었듯이 민주주의 정치 과정 혹은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야 하며
셋째, 유럽 각국에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민주적 방식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사민주의 혹은 중도 좌파 정당이 존재하고 있듯이 복지국가 존립에 이념적으로 가장 친화성이 있는 정파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4대 사회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제도등 사회 복지 서비스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만 사회 보장을 위한 재정적 규모면에서는 OECD 국가 중에서 복지비 지출 비중이 가장 낮아 이미 복지국가 단계를 거친 영국와 스웨덴 등과 비교하면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저자는 두 번째 요건에서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안정화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pp 156)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최근 MB 정부의 노선 행보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적 가치가 점차 퇴행되고 있음을 역시 부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최대의 쟁점에 서 있는 무상투표 주민투표는 오히려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부정하려는 오 시장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고 서울시의 주민투표 발의는 무상급식 시행여부와 시기 결정 등은 서울시 교육감 소관임에도 불구하고 권한을 침해했으니 법적으로 본다면 이 투표는 민주적 절차를 어긴 위법 행위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민주주의 절차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이다.
우리나라에 남북 분단의 상황으로 인해서 좌파로 대표되는 진보세력의 입지는 여전히 미약하다. 좌파 이념의 민주노동당이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 집권당인 한나라당과 대표적인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는 확실하게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중도 좌파 정당이 없으며 '복지' , '무상급식 도입 찬성' 을 옹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지 정책 도입에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복지 국가와의 친화성 수준은 낮을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도 복지 국가 유형의 분류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통일적인 유형은 없지만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복지 후진국' 미국과는 별반 차이가 없다. 미국은 실질적인 사회 보험 제도가 도입되지 못했으며 사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출 비용 역시 유럽 복지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어설픈 복지' 보다는 '보편적 복지'
이러한 영국의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분명한 교훈을 준다. 안보 문제와 복지 문제가 충돌했을 때, 선거에서는 복지문제가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안보는 ‘모두의 문제’ 이고 복지는 ‘나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 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집권하여 보편적 복지라는 베버리지의 꿈을 추진했지만 6년 뒤에 다시 국민으로부터 불신당하고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고 되며 훗날 '영국병' 또는 '복지병' 이라고 불리우는 복지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베버리지 보고서와 노동당의 사례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국가에게는 교훈의 대상이다. 과감한 재정적 투자로 체감할 만한 수준의 급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치밀한 정책 기획력에 의해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이다.
어설프게 보편적 복지를 레토릭으로 주장하는 보수세력도 문제이지만 진보세력은 (투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무상급식 투표율이 33.3% 미달된 결과에 성급하게 축배를 들어서는 안 된다.
진정 가슴과 머리로, 국민들을 위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할 준비가 필요하다. 복지국가로가 되는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복지정책 및 복지국가의 참된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되든 간에 우리의 삶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는 '복지' 라는 개념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주창하는 보편적 복지는 오히려 역사와 발전을 더욱 후퇴시킬 수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