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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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잊혀져가는 한국화 속 선인들의 감정

요즘 우리 미술계에선 현대미술 전시는 흘러넘쳐도, 제대로 된 한국화 전시는 드물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같은 경우에는 르네상스부터 근대까지 광범위한 미술사조들의 그림을 매일 볼 수 있지만 양이 한정되어 있어 보존 유지가 필요하는 한국화 특성상 간송미술관에 일 년에 두 차례 여는 특별한 전시가 아니면 화랑가에서는 볼만한 전시를 접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관객들이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한국화 전시 환경의 풍토가 척박하다보니 정작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그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서양화에 에 눈이 익숙해져 흑백의 한국화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화 특유의 정취와 고아한 미(美)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한국화에는 잔재주를 품은 채 먹물로 그려진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한국화 속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던 그 당시 화가 또는 시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옛 그림을 보게 되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선인들의 감정 및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화가 대중들의 인식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어지듯이 선인들의 감정도 잊혀지게 된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서 ' 옛 생각 ' 이 단지 옛 것의 아름다움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심정을 관객은 그림을 통해 교감할 수 있다.   '옛' 이라는 단어만 가지고 고리타분한 생각일거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옛 그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착각이다.  시간은 초월하더라도 옛 그림 속에서 남아 있는 '옛 생각' 들은 현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생각 및 감정과 똑같으며 세속에 파묻혀 검정이 무더져 가는 회색의 현대인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던 감정을 깨워주기도 한다.  
 

 

 

   노인을 술 푸게 하는 것   

 

 

정선 <꽃 아래서 취해 (심화춘감도)> 18세기   (책 pp 19) 

 

한 손에 막대기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은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은 막대기로 치려고 하였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우탁 (고려 말의 학자, 1263~1342) - 

 

봄은 조물주의 탄생이 시작되는 세상의 서막이다. 겨울잠에 잠들었던 나비가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눈 속에 꼭 닫았던 꽃봉오리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화려한 꽃잎을 펼친다.  

그러나 봄이 온다고해서 모든 사람이 다 즐겁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나비를 보면서 누군가는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노인은 술병과 술잔이 엎어져 있을 정도로 취한 상태이다.  봄의 생동한 기운에 흥해서 술에 취한 것일까?     술을 마시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인데 술 취한 노인의 표정은 썩 기쁘지가 않다.    노인은 봄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게 아니라 춘수(春瘦)을 달래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있다.    봄은 젊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인들에게는 봄은 그리 달갑지가 않다.  봄이 온다는 것은 곧 세월의 시작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찌 잡을 수 있으랴. 

춘수는 곧 흐르는 세월 앞에서 탄식할 수 밖에 없는 봄만 되면 뒤숭숭해지는 마음의 병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인간은 무능한 존재일뿐이며 인생은 유한하다.  

고려 말의 학자 우탁은 시조를 통해서 두 손에 쥔 막대기와 가시를 통해서 어떻게든 '늙은 길' 과 '백발' , 즉 흘러가는 세월과 시간으로 인해 생기는 '늙음' 을 막아보려고 한다.   반대로 춘수에 시달리는 노인은 코 빠지도록 술을 마심으로써 힘겨운 마음의 고통, 즉 늙음에 대한 회한 그리고 인생 무상의 서글픔을 잊으려고 하는 듯하다.    봄이라는 세상이 노인을 술 푸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 살아 가고파  

 

 이한철 <물 구경 (의암관수도)>  19세기  (책 pp 108~109)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연상되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물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강희안의 그림과 비슷하지만 이한철의 그림이 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시원스럽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을 벗아나기 위해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바닷가를 휴가지로 많이 찾는 편이다.  역시 선인들도 공부에 심신이 지치게 되면 산 중의 계곡과 같은 자연의 공간 안에서 휴식의 즐거움을 찾았다.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씼는다고는하지만 그림 속 선비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속이 만들어낸 마음 속 고충들을 씻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자연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계곡을 찾아왔지만 한 선비는 물의 흐름에 매로된 나머지 동행한 선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동료 선비와 종이 귀가하자고 종용하고 있지만 선비는 당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치원의 시구처럼 ' 온 산을 둘러 싸인 ' 계곡의 물소리는 세상의 번잡한 시비를 잠재우고 있다.  자연의 시원한 물 소리로 인해서 복잡하고 시끄럽기만한 세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아예 세속에 대한 그리움마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선비는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최치원처럼 물소리를 통해서 그동안 세속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동시에 세상과 단절하고 자연 속에 은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조가 국화를 그렸던 진짜 이유

 

 

 정조 <들국화> 18세기 (책 pp 155) 

 

국화야, 너는 어찌하여 삼월동풍(三月冬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어 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정보(1693~1766) 의 시조 -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1752~1800)가 그린 국화 꽃송이 위에는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메뚜기는 한 번에 수많은 알을 낳는데 '다산(多産)' 을 상징한다. 국화 옆 바위는 인간의 '수명' 을 뜻하며 국화의 '국(菊)' 자는 '살 거(居)' 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저자는 한자의 종합적 해석을 통해서 ' 오래 살아서 자식의 복을 누리라 ' 는 기원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 대왕이 단순히 여가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닐 것이며 '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이라는 한 나라의 임금다운 낙관도 있는 그림인데 국화의 의미가 가벼운 감이 든다.   

국화는 사대부들이 자주 그렸던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이다.  사군자는 그림 속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 고결한 군자 ' 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정보의 시조 속 에 나오는 국화처럼 서리가 생기는 추운 겨울에 핀 것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의 서릿발에서도 꽃송이를 피울줄 아는 국화의 특징은 군자로서의 지조와 절개와 유사하다.  자신보다 거대한 바위 틈에서 꽃송이를 피우는 그림 속 국화를 보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채 꽃을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천명월주인옹 ' 이라는 낙관에는' 온갖 물줄기를 고루 비추는 밝은 달의 임자 ' 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는데 정조 대왕은 국화의 그림을 통해서 조정의 사대부들에게 지조와 절개를ㅇ 유지할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물줄기뿐만 아니라 조선 방방곡곡 고루 비치는 밝은 달이 되고 싶었던 군주가 부귀에만 급급한 사대부들에게 향하는 의미 있는 충고인 셈이다.  

 

   

  마음으로 옛 그림을 느끼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책에서 "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고 말한 바 있다. 유홍준 교수의 말은 어쩌면 우리나라에는 옛 유산들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옛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빗대고 있다.  

으레 그림을 보게 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항상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다.  ' 과연 이 그림의 가격은 얼마나 나갈까? '    그림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미적 가치를 먼저 알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림을 팔면서 얻을 수 잇는 진정한 재화적 가치만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단지 아름답고 좋은 작품을 알아본다고해서 그것이 미술 또는 미술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말로 미술을 제대로 즐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양의 잣대가 아닌 건전하고 다양한 취향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밑거름일뿐이다. 

한국화와 같은 우리나라 옛 그림에 대한 관심과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옛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심미안이 향상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에 숨겨진 선인들의 옛 생각들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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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8-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명과 함께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미술관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참 좋습니다~

cyrus 2011-08-19 23:01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책 역시 읽었을 때 미술관을 관람한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제 글에 있는 그림은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고요,,
사계절 형식으로 꽤 많은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짤막한 에세이 형식의 글이라서 내용의 깊이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국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서
좋은거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8-1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가 그린 국화라니, 완전 감동이에요.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꽃그림은 좋아요. 예뻐요, 그림이. 아마 금방 시들기 때문에 꽃에게서는 별반 매력을 느끼지 못하나봐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지, 꽃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우리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좋을 것 같아요.^^

cyrus 2011-08-19 23:03   좋아요 0 | URL
국화 그림 이외에도 남계우라는 사람이 그린 꽃 그림도 이뻐요.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생소하면서도 멋진 옛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1-08-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 이 책 읽으면서 cyrus님 떠올렸었어요.
그림에 일가견이 있으신 님이 참 좋아할 것 같다 싶었거든요.
이제 개강이겠네요~^^

cyrus 2011-08-23 20:26   좋아요 0 | URL
이제 1주일 하루 남았어요.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방학 기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