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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는 책에서 현대적 생활에서의 쓰레기는 모든 생산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며 특히 산업계의 우두머리들은 쓰레기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산 활동을 자극하고 격려하고 유발하는 전략은 새로운 쓰레기의 생산을 자극하기 때문에 쓰레기 은폐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우만이 말하는 '쓰레기' 는 인간이 사용하고 버려지는 썩지 않고 분해되지 않은 채 산처럼 쌓여만가는 유형적인 형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와 문명이 발전할수록 그 경쟁 과정에서 도태된 잉여의 인간들, ‘쓰레기가 된 인간들’ 이 점점 늘어가고 있음을 역설했다.
'쓰레기가 된 인간들' 은 사회집단으로부터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집단을 지칭한다. 그들은 현대화의 질서구축과 경제적 진보에서 탈락해 온전한 의미의 현대적 생활방식을 영위하지 못하면서 사회로부터 도태되어 갈 뿐이다.
엄마가 처음에 딱부리를 달래노라고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고 했지만, 이 곳은 분명 사람들이 쓰다 남아서 또는 싫증이 나서 아니면 못쓰게 된 물건들을 버리는 쓰레기장이었고, 이 곳에 사는 사람들도 도시에서 내몰리고 버려진 인간이다.
- 황석영 <낯익은 세상> pp 44 -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을 읽으면서 쓰레기에 대한 바우만의 정의가 오버랩되어서 불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평생 산동네에서 살다가 꽃섬에 정착하게 된 딱부리와 평생 꽃섬에서 자란 땜통은 도시문명에서 오랫동안 고립된 채 살아왔다 이들에게 교회라는 공간은 그저 라면을 얻게 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제 값으로 물건을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직원으로부터 절도범으로 의심을 받아야할 정도로 도시화를 상징하는 백화점은 꽃섬 소년들에게는 낯익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공간일 뿐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도 그리 좋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버스를 타기만 하도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악취 때문에 탑승거부를 당하기도 한다.
쓰레기매립지에서 쓰레기를 수집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연명하는 꽃섬 동네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기피하고 은폐하려는 쓰레기더미를 담당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문명화의 생산라인에서 제외됨으로써 위태로운 폐기물 취급을 받는 사회적 낙오자들이기 때문이다.
꽃섬 동네 사람들은 쓰레기로 집을 짓고, 쓰레기로 밥을 하며, 쓰레기 판 돈으로 술을 마시면서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들의 모습은 쓰레기를 줍는 묘사가 많다.
쓰레기를 수집하는 것이 꽃섬 동네들에게는 유일한 '노동' 이며 경제적인 수입을 얻는다. 그러나 정작 소설 속에서 이들이 소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근대는 노동이 사회구성의 원리였지만 오늘날의 사회가 구성원에게 내세우는 규범은 소비다. 현대 사회에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비자 노릇을 해내는 사람이 정상인 대접을 받는다.
꽃섬 동네 사람들은 ‘잉여’ 즉 남아도는 쓰레기 그 자체이다.
사람도 물건도 버려진 꽃섬에는 못 쓰는 물건들과 밑바닥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이곳의 일상에도 웃음이 있고 사람 간의 정이 있다. 딱부리네 모자가 이사 오던 날 아수라 아저씨는 없는 돈을 털어 라면을 사오고 주민들은 햄을 꺼내 먹을 수 있는 잡탕찌개를 끓여 모자를 대접한다. 그들은 이 맛난 저녁과 함께 술을 곁들이며 노래도 부른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노동력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행위를 통해 얻게된 경제적 가치를 제대로 소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꽃섬 동네 사람들은 실업이 낳은 빈곤층이 아닌 비 경제적소비자로서의 빈곤층이 된 셈이다. 결국 소비하지 못하는 빈곤층인 꽃섬 동네 사람들은 평생 쓰레기더미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물건과 먼지와 연기와 썩는 냄새와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사람 모두가 지어냈다는 것을. 하지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짙푸른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 같은 책, pp 228 -
자유경쟁과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는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없이 쓰라린 시련을 겪고 있다. 소설 결말 속에 등장하는 딱부리의 깨달음은 쓰레기로 가득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고귀한 인간이 되기 위한 희망의 새싹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그러나 문명은 새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으로 끊임없이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없는 것을 잘라내 버렸고, 그 덕분에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이 탄생했다. 어두운 현실은 밑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으며,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아름다움은 어두운 욕망을 감춘 채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과연 자본이 강조되는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의 되물림을 딱부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쓰레기더미에 사는 잉여가 아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생산과 소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들의 욕망이 가득한 낯익은 세상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까?
딱부리의 깨달음이 부질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