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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2 - 이덕일 역사평설 ㅣ 조선 왕을 말하다 2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이덕일의 ' 조선 왕 ' 슈퍼스타 King
작년 기억이 남는 대한민국 방송 핫 트렌드를 꼽으라면 바로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일 것이다. 특히, 작년에 두 번째로 케이블 방송에서 기획한 <슈퍼스타 K 시즌 2> 같은 경우에는 케이블 프로그램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크게 뜰 수 있었던 것은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1인의 우승자에게 부여되는 어마어마한 상금과 '가수' 로 단숨에 성장할 수 있다는 메리트 덕분이었다. 유독,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경우에는 우승자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하기 마련이지만, <슈퍼스타 K 시즌 2> 같은 경우에는 우승자 허각 뿐만 아니라, 준우승자 존박을 포함한 ' Top 11 ' 안에 든 참가자들도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슈퍼스타 K>에 채널을 고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디션 참가자들을 향해 독설과 함께 냉정한 심사평을 날리는 <슈퍼스타 K> 심사위원 연예인들의 발언이다. 특히, 2009년 시즌 1과 작년 시즌 2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이승철은 우스갯소리로 2010년 케이블 TV 독설상에 수상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솔직하고 거침없는 독설 심사로 숱한 화제를 몰고 왔었다. 가수 뺨치는 훌륭한 실력을 갖춘 참가자라도 이승철의 독설 작렬은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네티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설과 가까운 심사평을 날린 이승철의 한 마디 한 마디 뒤에는 '가수' 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후배들을 위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이들이 자신보다 더 훌륭한 가수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진심어린 충고를 한 것이다.
이승철이 2010년 케이블 TV 최고의 독설가라고 한다면, 2010년 역사계 최고의 독설가라면 이덕일이었다. 그에게 '독설가' 라는 수식어를 붙기에는 억지스러운 감은 있긴 하다. 원래, 국어사전에서의 ' 독설가 ' 라는 의미는 '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잘하는 사람 ' 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독설가' 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으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하지만, 이덕일의 '독설' 은 국어사전의 정의와 같이 나쁜 의미에서 붙여준 것은 아니다. 역대 조선 왕들을 향한 이덕일의 ' 독설 ' 은 수많은 문헌들을 철저히 고증하여 균형적인 시각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성군이라도 이덕일은 문헌에 남아 있는 성군 치세의 작은 흠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책의 앞부분 ' 저자의 글' 에서 이덕일은 고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오늘날의 역사학계에 대해 반문을 하고 있다.
한편 근래 들어 고종은 ‘개명 군주’ 이자 ‘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군주’ 라는 식으로 호평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종은 전제왕권을 꿈꾸며 많은 인재를 죽였는데, 급진 개화파 김옥균은 물론 온건 개화파 김홍집도 죽이고, 농민의 리더 전봉준도 죽였다. 독립협회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근대국가 수립에 목숨 걸 인재와 세력을 모두 제거한 결과 주위에는 이완용 같은 출세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또한 고종은 실현 불가능한 전제 국가 수립에 집착하면서 모든 변화를 거부했다.
- 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2> ' 저자의 글 ' 중에서 -
나쁜 왕 : ' 벌거벗은 임금님 ' 이 된 고종
고 종 (1852~1919, 재위 1863~1907)
이 책의 마지막 내용인 ' 고종 ' 편 464 페이지를 보게 되면 위의 고종 사진 밑에는 이렇게 단 한 줄의 글이 적혀 있다.
재위 44년 간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
아무리 수많은 문헌을 토대로 고종의 업적에 대해 평가를 내렸다고 하지만, 고종에 대한 이덕일의 평가는 심사위원으로서의 이승철의 독설 못지 않다. 특히, 고종을 ' 망국 군주 ' , ' 무능력한 왕' 등 부정적인 수식어들을 언급할 정도로 그의 무능력한 치세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을 하고 있다. ' 개명 군주 ' 에서 한순간에 나라를 망쳐버린 ' 망국 군주 ' 로 격하되고 있다.
고종 재위 시기에는 근대화 발전으로 앞당기고 있었던 이웃나라 일본의 ' 메이지 유신 ' 과 문호 개방을 목적으로 호시탐탐 조선을 노려왔던 서양 열강들의 내정 간섭이 잦았다. 고종이 세상 물정에 대한 눈치가 없었고 무능력했다지만, 그도 분명히 한반도 내외의 시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으로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서양 문물을 시찰하게 한 점과 미국과 영국 간의 수호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서양 문호 개방을 위한 근대화의 씨앗이 이제 막 움트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자기 스스로 ' 근대화 ' 라는 씨앗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의 머리속에는 전제군주제라는 기존 사회 유지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먼저 인용된 ' 저자의 글 '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정 내에서 김옥균, 김홍집 등을 필두로 한 개화세력의 힘이 날로 커지게 되자 고종은 이들을 제거하였고, 이완용과 그 밖의 친일파들을 등용되게 하였다. 고종은 자신의 왕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싹을 제거하다보니 친일파라는 잡초가 자라나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결국 친일파라는 잡초를 그대로 놔둔 고종은 허무하게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역대 선조 왕들과의 업적과 평을 점수로 환산해본다면, 고종의 점수는 아마도 최하위권일 것이다. 그의 업적은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에 나오는 어리석은 왕을 연상케 한다. 동화 속의 왕은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투명 옷 ' 이라는 재단사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올누드로 백성들 앞에서 ' 투명 옷 ' 을 뽐낸다. 재단사가 말한 ' 투명 옷 ' 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 100% ' 뻥 ' 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재위 시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수 사대부 세력 그리고 개혁을 주장하는 친러파, 친일파 세력들의 달콤한 말에 쉽게 휘둘러다니는 왕이었다. 특히, 재위 초기 때는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섭정의 영향이 무척 컸다. 왕권 강화 목적으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실시하였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이었다. 공사 자금이 부족해지자, 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강제로 원납전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경복궁 중건에다가 원납전으로 이어지는 대원군의 시대착오적인 정치제도 콤보(?)는 국가재정의 혼란을 가중시켜버렸으며 공교롭게도 아들 고종 역시 정책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고종은 사회 분위기가 좋으면 대세의 흐름을 따랐으며 반면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오게 되면 다른 세력으로 선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근대화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를 고종이 스스로 차 버렸던 이유도 ' 전제군주 ' 라는 유명무실한 ' 투명 옷 ' 하나에 집착해서 생긴 고종 최대의 정치적 실수였던 것이다.
좋은 왕 : 슈퍼스타 King 1등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세종
고종이 '망국 군주' 라는 꼬리표 때문에 역대 왕들 중에서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면, 반대로 최고의 군주 1위는 단언 제4대 왕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선호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세종의 업적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한자 앞에서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서 훈민정음을 반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집현전을 통해 나라를 이끌어 갈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동시에 학문 진흥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능력 위주의 등용을 중요시하여 관노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세종 역시 고종처럼 왕권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중앙집권 체제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정치적 모토를 실현된 반면에 고종은 무능한 왕이라는 오명만 얻고 말았다.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교과서 하나 제대로 보지 않은채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은 사람보다 시험성적이 당연히 좋게 나오는 것처럼 세종과 고종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정치적 모토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당연히 서로 엇갈려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세종은 단순히 왕권 유지에만 치중하기보다는 항상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공법상정소를 설치하여 토지에 따라 세율을 달리하는 정책을 내세웠지만 조정에서는 이 제도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세종에 대한 문헌 중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세종 치세의 오점이기도 하다. 조정의 쓴소리를 듣는 세종 입장에서는 무척 귀가 따가웠을터지만, 세종은 이들의 충언을 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도를 새롭게 시정한 전제상정소를 설치하여 보다 나은 전세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간언일 수도 있는 신하들의 목소리를 세종이 제대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공부 덕분이었다. 세종에게는 공부는 자기수양의 일부였으며 배운 것들을 정치 현안 해결에 응용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세종은 학자들에게 책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였으며 경연을 통해서 학자들과 함께 학문 토론을 즐겼다.
조선 사회라고 하면 항상 먼저 연상되는 것이 ' 유교 ' 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유교 사회 이데올로기는 많은 이들에게도 세종의 학문수양이 유교와 관련된 공부라고 오해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종은 유교 공부에만 편식하지 않았다. 정작 그는 경서보다는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가 선호하면서 자주 읽었던 역사서는 <좌전>과 <자치통감>이었으며 세종은 학자들과 함께 <자치통감>을 통해서 강론을 펼치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다.
책과 학문을 향한 세종의 무한 애정은 사가독서라는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사가독서는 학자와 관리들에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이다. 일종의 독서 휴가제인 셈이다. 공부는 자기수양하는 동시에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밑바탕이라고 생각하는 세종의 학문관을 엿볼 수 있는 제도이다.
재미있게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재위 1837~1901)도 관리들에게 3년에 한 번씩 ' 셰익스피어 베케이션 (Shakespeare Vacation)’ 이라는 독서 휴가제를 부여하였는데 휴가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을 정독하여 독후감을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라고 해서 권장하는 차원에서 휴가를 내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민중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인들이 보다 나은 선정을 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세종과 빅토리아 여왕, 두 군주의 독서 휴가제는 서로 내용은 다르지만 의도와 목적은 같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와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은 나라의 발전 및 선정과 연계되는 끊임없는 공부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세종이 빅토리아 여왕보다 수백년 전부터 실용적인 공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독서 휴가제를 세계 최초로 실시했다는 점에서 세종의 업적을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어중간한 왕 : 국운이 따라주지 못했던 현종
현종 시대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는 기묘한 시기였다. 지배층인 사대부는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이란 형이상학적 문제를 가지고 격렬하게 논쟁했다. 반면에 피지배 백성은 개구 이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흉년과 대기근에 시달렸다.
- <조선 왕을 말하다 2> '현종' 편, p 70 -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제 18대 왕 현종(1641~1674, 재위 1659~1674) 은 인지도가 낮은 축에 속할 것이다. 현종의 대표적인 업적을 꼽으라면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한 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종의 업적을 제대로 아는 이는 극소수이다.
현종에 대한 후세의 역사가들의 평가 역시 그리 좋지 못하다. 아니, 그의 치세가 잘했다고 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잘못했다고 딱히 말할 수도 없는, 정말 어중간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의 갑작스런 승하는 아직 정치적 능력이 미숙하지 않은 젊은 현종에게는 나라를 다스려야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정신적인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현종의 치세동안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따라다녀야만 했으며 때때로 현종의 발목을 잡기도 하였다.
효종은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의 둘째아들이었지만, 장자였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자 그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효종이 죽은 뒤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服喪) 문제로 대두된 예송논쟁(기해예송)은 서인과 남인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만드는 정치적인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효종은 종법상 인조의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남인 계열의 윤선도 등은 비록 차자이지만 왕위의 계승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3년상을 입어야한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결국, 현종은 1년상을 주장한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송시열의 서인 계열은 집권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74년 현종의 어머니가 죽자 또다시 한 번 예송논쟁이 불거지게 되자,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으며 서인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두 차례의 예송논쟁은 서인과 남인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하지만, 예송논쟁은 현실상으로는 무의미한 쓸데없는 논쟁이었다. 서인과 남인이 이토록 복상 문제 가지고 대립을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교적 이념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유교적 이념의 확립은 곧 사회 정국의 변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변수였다. 자신들의 세력 집권을 위해서 이론 논쟁에 치중해야했던 서인과 남인 간의 갈등의 실마리를 현종은 냉정하게 해결의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했다.
그리고, 현종은 어떻게 보면 시기를 잘못 타고 태어난 왕일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던 16세기에는 전세계적으로 소빙기라는 기후변화가 찾아왔었다. 이전과 다른 기후변화는 조선 팔도에 가뭄, 홍수, 냉해, 태풍이 잦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병충해까지 찾아와 한반도의 오재(五災)는 장기간 흉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은 끼니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갑작스런 자연재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현종은 백성들의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강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전시를 대비하기 위해 저장한 군량미를 일시적으로 방출하였으면 왕실에 바치는 공물과 관리의 녹봉을 삭감시켜 백성들을 먹여 살린 쌀을 확보하도록 마련하였다. 그리고, 현종 자신도 금주를 하는 등 어떻게든 민심 회생을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이제 막 자신이 꿈꿔왔던 정치적 이상의 날개를 활짝피려던 현종은 34세의 젋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현종은 어중간한 임금으로 기록에 남기게 되었다.
지금 MB에게 필요한 건 , , ,
재미있게도 ' 좋은 왕, 나쁜 왕, 어중간한 왕' 이 세 명의 왕들의 이야기에는 요즘 우리나라 현실과 유사한 면이 보이고 있다.
고종과 흥선 대원군이 끝까지 고집했던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 징수 그리고 백성들의 반발과 뒤이어 찾아온 경제적 파탄은 정부가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4대강 사업의 암울한 미래상일지도 모른다. ' 4대강 살리기 ' 라는 명목 아래에 진행되는 사업에만 치중하게 된다면 작년에 주장했던 ' 서민 살리기 ' 는커녕 본사업에 투입되는 비용으로 거둬들이는 세금 때문에 민심이 추락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강화 목적으로 1700억원을 들여 자신만의 초호화 주택을 신축했다고 한다. 지금도 북한들의 수많은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북한과 남한 전체에 구제역이 확산되면서 축산업자들의 시름은 가면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는 마당에 구제역 확산 방지에 대한 정부의 늑장 대응은 이미 확산된 구제역의 손길을 막을 수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구제역 확산이나 작년과 같은 배추 파동과 같은 특수적인 재해에 대해서 국민들이 2차 피해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2011년 신년사로 MB는 신년화두로 ' 일기가성(一氣呵成)' 을 언급하면서 올해에는 한반도 평화와 경제 성장이 확신되는 해이므로 국운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살려 선진국 문턱을 단숨에 넘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신년사에 걸맞게 희망적인 분위기만 돋구는 처음 들어본 어렵기만한 사자성어를 화두로 제시하는 것보다는 누구나 다 알면서도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걸맞는 화두를 제시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지금 MB에게 필요한 건 이것이다. ' 옛 것을 알면서 새 것도 안다 '
세종이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곧 마주하게 될 정치적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던 것처럼 MB와 모든 정치인들은 지금까지 겪어온 사회적 쟁점들을 되돌아보면서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선정을 베푸는 능력이 함양되어야 할 것이다.
남은 임기동안 MB가 어떻게 정치적 능력을 보이는가에 따라서 훗날 그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정당하게 내려질 것이다.
좋은 대통령이 될지, 아니면 나쁜 대통령이 될지 지켜봐야할 것이다. 뭐라고 단정적으로 평가내릴 수 없는 어중간한 대통령이 되지 말기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