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책]방
EP. 19
일글책, 직립보행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Sence #1
이번 주말에 무조건 꼭 읽어야 할 책 한 권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이다. 다음 주 토요일은 ‘푸코 읽기’ 첫 번째 모임 날이다. ‘푸코 읽기’는 2022년 ‘니체 읽기’ 모임에 이어 카페 <스몰 토크>(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김완 사장이 올해 새롭게 진행하는 철학책 읽기 모임이다.
[카페 <스몰 토크> 푸코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년)
《말과 사물》 1부를 읽어야 하는데, 분량이 꽤 많다. 다른 책들을 쫓다 보니 《말과 사물》을 너무 소홀히 했다.
Sence #2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는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끝나면 《말과 사물》을 읽으려고 했다. <일글책>은 주말에 오후 6시까지 펼쳐져 있다. <일글책>이 덮을 때까지 1부 끝까지 다 못 읽더라도 절반 분량은 읽어야 했다.
* 이창현 (글), 유희 (그림)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1》 (사계절, 2018년)
* 이창현 (글), 유희 (그림)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2》 (사계절, 2023년)
나를 포함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는 여덞 명의 정회원 모두 ‘독서중독자’다. 일단 <일글책> 주인장이 ‘독서중독자’다. 그분이 회원들에게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을 추천했다. 나는 <일글책> 주인장이 구매한 《익명의 독서중독자》를 빌려서 읽었다. 독서중독자들이 모여서 대화하면 당연히 책 이야기를 하게 되고, 상대방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알게 된다.
* 크리스티앙 보뱅, 김도연 옮김 《그리움의 정원에서》 (1984Books, 2021년)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회원 한 분이 자신이 예전에 읽은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의 《그리움의 정원에서》가 좋았다면서 추천했다. 그분은 이 책을 <일글책>에서 샀다. 요즘 나는 보뱅과 같은 나라 출신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글에 푹 빠져 완전히 젖은 상태다. 보뱅의 글도 어떤지 한번 적셔보고 싶었다. 《그리움의 정원에서》를 구매하여 <일글책>이 다 덮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읽었다. 작고 얇은 《그리움의 정원에서》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정작 읽어야 할 《말과 사물》은 가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Sence #3
《그리움의 정원에서》에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노랫말이 인용되어 있다. 노래 제목은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다.
* [절판] 에디트 피아프 ♥ 마르셀 세르당, 강현주 옮김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은행나무, 2003년)
종이에 흘러나온 에디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은 에디트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다. 에디트와 마르셀은 서로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길게 이어진 그리움 위에 사랑을 편지 위에 띄워 주고 받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르셀은 에디트를 만나러 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는 마르셀이 사망하기 직전에 두 사람이 쓴 편지 글을 모은 책이다.
Sence #4
저녁에 <직립보행>에 갔다. 직립보행 부부는 다른 지역의 책방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자주 가는 책방 중 한 곳이 인천의 헌책방 <아벨 서점>이다. 추석에 <아벨 서점>에 가서 총 50권의 책을 샀다고 했다.
<직립보행> 주인장이 내게 서울 여정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기분이 들뜬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린다면서 호언장담의 허세를 부렸다. 나는 입을 열면 버퍼링이 심하다.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한 시간은커녕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내 이야기는 구멍이 뻥뻥 뚫린 채 나왔다.
<책 바>가 있는 망원동을 ‘망월동’이라고 잘못 말하기도 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직립보행> 주인장은 오류를 정확히 짚어냈고, ‘망월동’은 광주에 있는 동네라고 알려줬다. 말보다는 글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다.
Sence #5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중간중간 끊어져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말하는 도중에 책방에 손님이 왔다.
<직립보행>은 삼덕동에 있는 책방이라서 이 동네를 지나가는 연인들이 심심찮게 책 보러 온다. 부부 책방 주인장은 <직립보행>을 ‘데이트 필수 코스’라고 대놓고 홍보한다. 독서중독자 성향의 연인은 직립보행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손님이다. 오늘 온 연인은 독서중독자 정도는 아니었다.
부부 책방 주인장은 책을 유심히 고르는 연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책 큐레이팅을 한다. 이게 <직립보행>만의 영업 방식이다. 남편 책방 주인장은 나의 허술한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연인에게 말 걸기 시작했다. 아, 또 시작이군. 연인에게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Romain Gary)를 소개하면서 그가 쓴 대표작을 추천했다. 여기서 또 프랑스 작가를 만나네.
남편 책방 주인장은 내 말을 중간에 끊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인이 독서에 몰입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얘기했다. 그렇지만 이미 끊어져서 잘게 부서진 이야기를 이어 붙여서 말하자니 너무 힘이 빠지고 버거웠다. 말 잘하는 책방 주인장들이 부럽다.
epilogue
결국 오늘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못했다.
하루만 남은 주말에 전력투구하듯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러면 일요일에 해야 할 일들이 다음 주말로 미뤄진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뇨,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했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겐 모두 똑같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 내 기쁨은 오늘 당신과 함께 시작하니까요.
(《그리움의 정원에서》에서 인용된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 노랫말,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