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이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모임을 위해 기사()을 읽었다. 두 편의 희극을 읽은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두 편이 재미없다는 소감을 밝혔다.





























* 아리스토파네스, 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도서 출판 숲, 2013)


*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도서 출판 숲, 2020)

 

*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도서 출판 숲, 2021)


*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도서 출판 숲, 2008)

 

* 소포클레스, 천병희 옮김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도서 출판 숲, 2008)

 




희극보다 비극이 더 재미있었다고 말한 분도 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대명공연거리에 있는 <한울림 소극장>에 펼쳐진 극단 수작의 연극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예병대 작박세향 연출)를 보면서 그 말이 우연이 만든 공연 감상의 복선이라는 걸 알았다. <일글책>에서 나온 낮말이 <한울림 소극장>까지 들렸던 것일까. <한울림 소극장><일글책> 바로 건너편에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종환 옮김 햄릿》 (지만지드라마, 2019)


* 윌리엄 셰익스피어, 설준규 옮김 햄릿》 (창비,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경식 옮김 햄릿》 (문학동네,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박우수 옮김 햄릿》 (열린책들, 2010)


* 윌리엄 셰익스피어, 노승희 옮김 햄릿》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햄릿(민음사, 1998)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햄릿을 재해석한 공연작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고민하는 인간의 대명사다. 햄릿은 선왕을 암살하고 자신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결혼하여 왕관을 차지한 숙부 클로어디스를 복수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찮다. 왕자는 혼자서 괴롭게 고민한다. 고민 끝에 미친 척하면서 은밀하게 복수를 준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죽인다. 예상하지 못한 불의의 사건은 오로지 숙부에게만 겨눈 햄릿의 칼날을 어지럽게 만든다. 햄릿의 칼날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나타난 레어티즈를 지나치지 못한다. 한편 오필리아는 모멸에 찬 햄릿의 날카로운 말에 찔려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 햄릿의 칼날이 초래한 아버지의 죽음은 오필리아의 마음속에 깊이 팬 상처를 더 벌어지게 만든다. 오필리아는 실의에 빠져 미쳐버리고 비참하게 죽는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어떤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는 햄릿이 떠안은 세 가지 선택을 보여준다. 첫 번째 선택은 어머니를 위해 오필리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 두 번째 선택은 이승을 떠도는 아버지의 망령을 위로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수하는 것. 마지막 세 번째 선택은 원작 속 햄릿의 선택을 반영한 것이다. 첫 번째 햄릿의 선택은 모든 인물이 행복해지는 희극에 가깝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선택은 비극이다. 두 가지 비극이 진행될수록 평탄하게 진행된 희극은 희미해지고, 비극의 농도는 짙어진다. 등장인물의 삶이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려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비극이 웃음소리만 나는 희극보다 재미있는 이유다.

















* 데이비드 볼, 김석만 옮김 통쾌한 희곡의 분석: 희곡을 제대로 읽는 방법(연극과인간, 2020)




연극적(theatrical)’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연출가 데이비드 볼(David Ball)관객의 열렬한 반응을 유도해내는 모든 것연극적이라고 말한다. ‘연극적 매력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솜씨 있는 극작가와 연출가는 작품을 만들 때 연극적인 요소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연극적 매력에 푹 빠지면서 감정적 반응(즐거움, 슬픔, 분노, 공포 등)을 드러낸다. 연극적 매력의 반대말은 지루함이다. 지루한 연극은 실패작이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관객을 휘어잡는 연극적 매력이 가득한 수작(秀作)이다. 원작 햄릿의 원제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이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비극인 기존 원작에 두 가지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가지 이야기는 햄릿(예병대 분)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택 상황이다.


햄릿의 첫 번째 선택. 1막은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희극이다. 이 희극에서 햄릿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묵직한 고민의 짐을 내려놓는다. 결국 그는 어머니 거트루드(김소현 분)의 행복을 위해 선왕을 죽인 숙부 클로디어스(이동학 분)를 양부로 받아들인다. 햄릿과 오필리아(박은솔 분)는 결혼해서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태어난다. 귀여운 손자를 안아 보고 싶은 클로디어스가 관객에게 직접 아기 안은 방법을 묻는 장면은 햄릿의 희극에서 원작에서 볼 수 없는,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 1막의 연극적 매력은 무대 밖의 현실 세계와 무대 위 극 중 세계 사이에 놓인 투명한 4의 벽’이 깨지면서 클로디어스가 체면을 내려놓은 손자 바보로 나오는 장면이다.


1막의 유쾌한 분위기는 웃으면서 즐긴 관객을 방심하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비극이 시작된다. 햄릿의 두 번째 선택. 2막의 햄릿은 원작에 드러난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선왕 아버지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수를 실행한다.


햄릿의 세 번째 선택. 3막은 원작을 반영한 이야기다. 극 중 배우들의 연기가 정점에 이르면서 비극적인 효과는 배가 된다. 햄릿은 선왕을 죽인 숙부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곤자고의 암살이라는 궁중 연극을 자신이 직접 연출한다. 햄릿 역의 예병대 배우는 공연작의 연출자다. 배우 겸 연출자가 햄릿이 되어 극 속의 극을 연출하는 장면은 비극 속의 소소한 희극적인 요소다


곤자고의 암살공연이 진행되자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 햄릿과 오필리아가 함께 공연을 본다. 여기서 곤자고의 암살을 보는 네 사람의 표정 연기와 무언의 행동은 3막의 연극적 매력이 발산하는 장면이다. 클로디어스는 곤자고의 암살의 하이라이트인 독살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수상히 여긴다. 그러면서 거트루드와 귓속말한다. 이 장면은 거트루드가 선왕 암살의 공모자임을 암시한다. 햄릿에게 외면받은 오필리아는 슬픈 표정으로 공연을 본다. 햄릿은 자신이 연출한 공연을 유유히 바라본다. 하지만 공연은 안중에 없다. 그는 그토록 기다리던 복수의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복수는 햄릿이 진정으로 원하고, 반드시 진행해야 할 희극’의 결말이다. 이 희극이 진행되면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는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햄릿에게 버림받은 오필리아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다. 3막에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 네 사람 모두가 비극과 희극의 주인공이다.







극 중 음악 또한 관객을 사로잡는 연극적 매력이 될 수 있다. 햄릿이 선택의 기로 앞에 멈춰서서 고민할 때 90년대 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콩트 <이휘재의 인생극장>의 배경음악이 나온다. <이휘재의 인생극장>에서 이휘재가 연기한 주인공은 두 가지 삶을 선택한다. 콩트는 두 가지 삶이 어떻게 진행되며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 보여준다. 이 음악은 역재생된 상태로 나오는데 시간을 되돌리는 순간임을 강조한다.


곤자고의 암살장면에서 나온 음악은 차이콥스키(Tchaikovsky)의 발레 모음곡 <호두까기 인형> 4악장 꽃의 왈츠. 원작의 시대적 배경이 12세기라서 19세기 말에 만든 러시아 음악이 나왔다는 이유로 따지고 싶지 않다. 12세기 덴마크 궁정 내부에 어울릴만한 곡을 찾기 힘들다. 원작의 오필리아는 실성해서 미쳐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꽃을 주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쓸쓸히 물에 빠져 죽고, 거트루드는 오필리아의 무덤에 꽃을 뿌린다. 즐거운 분위기의 춤곡 꽃의 왈츠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암시한 귀로 듣는 복선이다. 원작의 주제인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로 해석할 수 있다.




















* 디트리히 슈바니츠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들녘, 2008)

 




원작을 어느 정도 반영하면서 햄릿를 재해석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예병대 배우님은 햄릿70분으로 압축해서 만들었다종이로 된 햄릿과 무대 위의 햄릿은 다르다. 종이 햄릿은 얇고 가볍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무대 위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제일 길다. 햄릿을 독자적으로 분석한 디트리히 슈바니츠(Dietrich Schwanitz)햄릿공연이 보통 2~3시간 걸리기 때문에 저녁 공연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무대 위의 햄릿은 종이 햄릿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햄릿의 대사는 전체 분량의 40%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많다. 실제로 무삭제판 햄릿공연극이 1899년에 선보였을 때 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종이 햄릿를 무대 위에 올리려면 각본가와 연출자는 과감하게 원작을 해체해야 한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에 잘린 유명한 장면은 햄릿이 궁정 광대 요릭의 해골을 쳐다보면서 탄식하듯이 독백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원작 51장에 나온다. 포스터와 입장권에 요릭의 해골이 그려져 있다.


지난주 토요일은 비가 많이 내렸다. 그날 연극을 본 내 선택은 옳았다. 비극이 희극보다 재미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만, 비극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희극 같은 일이 좋을 수밖에 없다. 연극이 끝난 후에 내 갈 길을 막아서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채플린 씨, 그날만 당신의 말이 틀렸어요. 종종 우리 삶의 희극은 가까이에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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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9-22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말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은 채플린이 한 말은 아니에요. 원래는 ˝비극은 클로즈업으로 찍고 희극은 롱쇼트로 찍는다˝라는 영화 촬영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cyrus 2023-09-23 07:0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많이 인용된 말이라서 채플린이 진짜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글을 쓰면서 유명인의 말을 인용하고 싶을 때 실제로 유명인이 한 말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겨요. 이럴 때 좀 더 검증했어야 했는데 제가 그걸 무시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Redman님. ^^

그레이스 2023-10-0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전독서 동아리를 하고 있습니다.
반갑네요^^
저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이 책으로 읽었습니다.

cyrus 2023-10-02 09:1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은 희극 어땠어요? 읽어볼 만했어요? 희극에 대한 모임 회원들의 반응이 너무 안 좋아서 2권 읽기는 미루었어요... ㅎㅎㅎ 그래서 이번 달은 희극 2권이 아니라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것으로 결정되었어요. ^^

그레이스 2023-10-02 09:24   좋아요 0 | URL
저는 좋았습니다.
5, 6년 전인가 읽었는데, 다들 반응이 좋았었습니다.
배경을 더 잘 알고 읽으면 좋았을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역사나 문화사를 먼저 읽는것도 좋지요.
지금 다시 읽으면 그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겠죠.

cyrus 2023-10-02 09:3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역사적 배경과 대사에 언급된 인명이 낯설어서 재미를 못 느낀 분들이 많았어요. 2권 첫 번째 희극 <리시스트라테>는 유명한 작품이고, 예전에 읽었을 때 재미있어서 이것만큼은 같이 읽자고 건의했는데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희극 2권은 저 혼자 읽으려고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