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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평점 :
평점
4점 ★★★★ A-
독서는 도락(道樂)이다. 국어사전이 알려준 도락의 의미는 세 가지다. 도(道)를 깨달아 스스로 즐기는 일. 재미나 취미로 하는 일. 술과 도박 같은 못된 일에 흥미를 느껴 빠지는 일. 책에 조언을 구하는 독자는 도락가가 아니다. 책 속의 보물을 찾는 독자가 진정한 도락가다. 도락가가 원하는 보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 도락가가 선호하는 책 속의 보물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잡학이다. 보물은 명성 있는 저자가 쓴 책 속에만 묻혀 있지 않다. 무명 저자의 책, 또는 돈 주고 보면 안 될 ‘쓰레기’ 책에도 보물이 있다. 전자의 보물찾기는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를 찾는 일이라면, 후자는 괴팍한 취향을 가진 도락가가 선호하는 일이다.
오탈자는 책에 생긴 때다. 그런 오탈자를 보물로 여기는 도락가가 있다. 그의 눈은 단순히 책을 보기 위한 신체 기관이 아니다. 종이를 빡빡 문지르는 때밀이 수건이다. 오탈자 찾기 도락가가 종이를 문질러서 오탈자들을 쏙쏙 골라내면 저자와 편집자는 따가운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너무 세게 문지르는 때밀이는 피부 건강에 좋지 않다. 종이 때 밀기도 마찬가지다. 오탈자 찾기 도락가가 과욕을 부리면 오탈자가 아닌 낱말마저 문질러서 떼려고 한다. 오탈자 찾기 도락가도 사람인지라 그가 쓴 글에도 맞춤법이 틀린 낱말이 있다. 그러니 잘하자, cyrus.
도락가가 책을 너무 좋아하면 책을 훔치는 도벽을 끊지 못한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지식 습득에 대한 욕구를 좋게 생각했던 과거 사람들은 책 도둑을 너그러이 용서했다. 하지만 책을 소유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훔치는 행위는 중범죄다.
책을 훔치는 도벽이 없어도 독자는 ‘조용한 도둑’이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독서를 ‘소리 없는 절도’에 비유한다. 그가 쓴 산문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은 ‘독서’라는 고상한 범죄 행위를 예찬한다. 책 제목의 ‘세 글자’는 도둑을 뜻하는 라틴어 ‘fur’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를 제 입으로 말하길 꺼렸다. 그래서 ‘fur’를 직접 말하는 대신에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책 읽는 도둑도 책 속의 보물을 훔치는 일에 능숙한 도락가다. 그들이 훔치고 싶은 보물은 앞서 언급한 쓸데없는 잡학이라면, ‘쓸모 있는 보물’은 다른 나라의 언어다. 언어 훔치기 도락가의 활동 구역은 외국 서적이다. 지식이든 언어든 독자는 타인이 쓴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훔쳤다. 책을 읽으면서 훔친 남의 보물로 치장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나’다. 키냐르는 책 읽는 인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닌 ‘ab alio(타인을 통한) 피조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독자는 겸손해야 한다. 불손하고 허세가 심한 독자는 사기꾼이다. 그들은 저자나 다른 독자들의 소중한 생각들을 훔쳐 왔으면서 자기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글 쓰는 도락가는 책 속 보물을 계속 만져보고,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다듬는다. 그렇게 해서 다른 독자들이 탐낼 만한 새로운 보물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한 편의 글과 한 권의 책이다. 서평은 책 속 보물찾기 전문 도락가가 다시 만드는 보물이다. 서평 쓰는 도락가가 주로 찾는 보물은 책의 핵심 내용이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생 타망(Saint-Amans)은 저자를 ‘고기파이 속에 잠들어 있는 토끼고기’로 비유했다. 책은 고기파이를 담은 접시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칼과 포크를 쥐고 고기파이에 박힌 토끼고기를 골라낸다. 먹음직스러운 토끼고기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먹여주고 싶은 본인 생각이다. 독자는 고기파이를 먹기 전에 이미 그것을 맛본 도락가의 서평을 먼저 본다. 독자는 서평을 읽으면서 고기파이가 먹을 만한지 아니면 맛이 괜찮은지 판단한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보물을 찾으려는 독자들을 위해 ‘책을 잘게 나누고 찢어야’ 한다. 종이를 문질러서 ‘오탈자’라는 때를 제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오류와 거짓 정보를 찾아내서 찢는다. 책은 ‘청정 지식 보고’가 아니다. 거기에도 독자들이 걸러내야 할 ‘보물인 척하는 가짜’와 ‘오물’이 종종 있다. 보물이 아니라고 해서 모른 척할 수 없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그걸 발견하는 즉시 잘라내야 한다. 저자의 명성에 기가 눌리거나 맹목적으로 신뢰하면 책의 오물이 눈앞에 있는데도 찾지 못한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 저자의 견해를 무조건 믿어서도 안 되며 내가 믿는 지식도 틀릴 수 있다는 회의주의적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는 책의 오물만 찾아 찢어버리는 ‘책 더 리퍼(책 + Jack the Ripper)’다. 비판과 검증은 ‘책 더 리퍼’가 책을 읽을 때마다 들고 다니는 무기다.
키냐르는 ‘소리 없는 절도(vol)’ 행위인 독서가 올빼미의 비상(飛上, vol)과 흡사하다고 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은 자신의 책 서문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라는 구절을 남겼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인간의 정신은 몽롱해진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수록 인간은 음모론과 가짜 정보를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그럴 때 지혜의 신 미네르바의 곁을 지키는 올빼미는 힘차게 날갯짓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독자는 ‘진짜 보물’, 즉 진실을 원한다. 소중한 보물을 찾으러 ‘글자 나무’로 이루어진 ‘책 숲’을 혼자서 모험한다. 책 숲 이곳저곳 전전하면서 자신과 타인이 믿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맞는지 아닌지 스스로 검증한다. 하지만 독서와 글쓰기를 예찬한 키냐르도, 미네르바의 올빼미 독자도 안다. 한평생 책 속의 보물을 찾는 모험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위험한지를.
그래도 나는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도락가, ‘대도(大盜)’로 살아가고 싶다. 매일 밤, 책 읽기 전에 기도해야겠다. 미네르바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오탈자 찾기 전문 도락가’, ‘책 더 리퍼’ cyrus가 발견한 책의 때와 오물>
* 26쪽 옮긴이 주 6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 아우구스투스(Augustus)
* 195쪽 옮긴이 주 24
아프로디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여신. 로마 신화의 디아나(Diana)[주1].
[주1] 디아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Artemis)와 관련된 로마 신이다. 아프로디테에 대응하는 로마 신은 베누스(Venus)다.
* 223쪽 옮긴이 주 3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소설(1922) 『율리시스』에 나오는 인물.[주2] 이 작품이 『오디세이아』를 모방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오디세우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짐짓 ‘율리시스’라 쓴 것으로 보인다.
[주2] 조이스의 소설에 ‘율리시스(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율리시스》의 주요 등장인물은 레오폴드 블룸(Leopold Bloom)과 그의 부인 몰리 블룸(Molly Bloom), 조이스의 또 다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온 스티븐 데덜러스(Stephen Dedalus) 등이다. 《율리시스》는 호메로스(Homer)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서사 구조와 등장인물들을 패러디한 소설이다. 레오폴드 블룸은 오디세우스, 몰리는 페넬로페(Penelope)에 해당한다.
* 242쪽 옮긴이 주 1
오레스트 → 오레스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