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남구 대명동의 대명 공연문화 거리에 있는 소극장에 연극 공연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2020년 연말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연극 공연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을 통해 알게 된 배수정 씨가 연극 공연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생애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 공연작은 페미니즘 희극의 고전으로 알려진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인형의 집》이다.
* 헨릭 입센 《인형의 집》 (민음사, 2010년)
수정 씨는 주인공 노라(Nora)를 맡았다. 공연을 보기 전에 대구 동네 책방 <서재를 탐하다>에 가서 《인형의 집》을 사서 읽었다. 그런데, 그런데 인상 깊었던 《인형의 집》 공연 감상문을 쓰지 않았다. 그날 내가 미망(迷妄)에 빠졌구먼.
서점 <일글책>에서 진행되는 고전 읽기 모임은 매주 토요일에 한다. <일글책>은 대명 공연문화 거리 근처에 있다. 서점 주인장은 연극 공연을 즐겨 본다. 지난주 토요일에 고전 읽기 모임 회원들과 함께 <우전 소극장>에서 열린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을 봤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2008년)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 출간 400주년 기념 에디션]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2023년)
*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수진 옮김 《한여름 밤의 꿈》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 2018년)
책벌레인 나는 무대 위의 희극을 제대로 맛보고 싶어서 애피타이저로 종이 위의 희극을 눈으로 먹었다. 2019년 8월 마지막 목요일 밤이었지. 그날에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선정 도서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번역본은 민음사 판본이었다. 민음사 판본의 대사는 운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원작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번역되었다. 역자에 따르면 희극의 시적 대사는 음악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는 대사들이 있다. 민음사 판본처럼 ‘읽기 위해 만들어진 극 작품’은 공연용 대사로 쓰기에 어색하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세곤 옮김 《한여름 밤의 꿈》(예니, 1999년)
반면에 연극인이 번역한 극 작품의 대사는 소리 내어 읽기에 아주 좋다. 연극계의 원로 오세곤이 번역한 《한여름 밤의 꿈》은 출간된 지 꽤 오래됐다. 하지만 종이 극장을 펼치면 극 중 인물들의 대사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오세곤이 번역한 대사는 전체적으로 간결하며 감탄사가 많이 나온다. 24년이나 지났는데도 대사가 극 중 인물이 되어 여전히 열연을 펼치고 있다.
‘극단 폼’이 제작한 《한여름 밤의 꿈》 배우들의 연기 폼이 미쳤다. 동작과 대사 모두가 통통 튀고 발랄했다. 관객들이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신조어나 재미있는 표현을 적절히 섞은 대사는 《한여름 밤의 꿈》 줄거리를 잘 모르거나 연극 공연을 처음 보는 관객들만 보이는 무대 앞에 세워진 어색한 장벽을 녹아내리기에 충분했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섹스피어’다. 셰익스피어의 극 작품들을 읽어 보면 성적 암시가 들어간 대사를 확인할 수 있다. 1818년 영국에 어린이들이 보기에 안 좋은 외설적 대사나 잔인하게 묘사된 장면이 삭제된 ‘건전한’ 셰익스피어 작품 전집이 나왔다. 대사가 삭제된 셰익스피어 작품 전집은 ‘문학 검열’의 사례로 거론된다. ‘극단 폼’이 각색한 《한여름 밤의 꿈》은 ‘어른을 위한 희극’이다. 내가 보기에 섹드립은 간간이 나왔고, 과장되지 않은 아주 순한 맛이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2008년)
《한여름 밤의 꿈》을 ‘눈으로 읽는 고전’으로만 생각하면 공연을 즐길 수 없다. ‘극단 폼’ 《한여름 밤의 꿈》은 원작을 제대로 파괴했다. 극 후반부의 백미인 결혼식 중에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공연극 ‘피라모스와 티스베(‘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를 덜어냈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티타니아(Titania)의 모습은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예상하지 못한 웃긴 장면일 것이다.
누군가는 고증을 무시할 정도로 원작을 심하게 파괴한 것 아니냐고 따질 것이다. Why not? 스웩(Swag)[주]이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구먼. 불만 있으면 셰익스피어에게 따져라.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우스 시저》에 영국식 자명종 시계가 나온다.
공연은 결혼식장에서 들리는 ‘축혼 행진곡’이 흘러나오면서 끝난다. 축혼 행진곡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의 관현악곡 <한여름 밤의 꿈>의 7번 곡이다. 비록 잠깐 나오는 배경음이지만, ‘극단 폼’이 원작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멋진 마무리였다.
[주] 스웩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처음 나온 단어다. 셰익스피어, 힙하다, 힙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