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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 어떤 변화를 겪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ㅣ 세창클래식 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6월
평점 :
평점
3.5점 ★★★☆ B+
니체(Nietzsche)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약칭 ‘차라투스트라’, Also sprach Zarathustra, 1885)다. 그다음은 니체가 남긴 말로 알려진 ‘신은 죽었다’가 있다. 이 말이 처음 나온 니체의 책은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이다. 니체의 철학을 알고 싶은(공부해보고 싶은) 독자들은 《차라투스트라》부터 읽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니체의 책인데다 니체가 ‘독보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본인 스스로 그 책을 극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를 가장 먼저 읽는 것은 오히려 니체를 이해하는 데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니체에 입문하는 독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를 먼저 읽으라고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
니체는 아포리즘(aphorism), 즉 잠언 형식의 문장으로 글을 썼다. 그는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메모를 남겼는데 어떻게 보면 니체의 글은 불친절하다. 아포리즘을 선호한 니체의 글쓰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무턱대고 그의 글을 읽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도에 포기한다. 이 중에 어떻게든 끝까지 다 읽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글 속에 압축된 니체의 철학적 사유를 머리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문장을 눈으로 완독한 것에 만족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니체를 본격적으로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니체의 저서는 무엇일까. 니체 연구자들마다 니체를 막 이해하려는 독자에게 추천한 책이 다른데, 그중에 포함된 한 권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다. 이 책이 집필된 시기는 1888년이다. 이듬해 니체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90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지 못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대미를 장식할 두 개의 장에 각각 ‘전쟁 선언’과 ‘망치가 말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두 개의 장을 쓰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완성하지 못한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다.
‘이 사람을 보라’는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라틴어 구절 ‘에케 호모(Ecce Homo)’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로마의 총독 빌라도(Pilatus)는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한 예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왕을 상징하는 자줏빛 옷을 입히도록 했다. 이때 빌라도는 초라한 몰골을 한 예수를 군중에게 보여주면서 ‘에케 호모’라고 말했다. 법정에 모인 유대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했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다.
책 제목의 ‘이 사람’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걸까. 예수, 신? 아니다. ‘이 사람’은 니체 본인이다.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는 ‘어떤 변화를 겪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Wie man wird, was man ist)’다. 니체는 이 책 한 권에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썼으며 자신이 쓴 책들의 주요 내용과 집필 의도를 밝혔다. 《이 사람을 보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 다시 태어난 니체의 이력서이다. 니체의 말년에 나온 마지막 책이지만, 니체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려면 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
물론 《이 사람을 보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문장은 니체의 생각에 쉬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잘못 읽으면 니체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비중 있게 다룬다.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 즉 바그너를 열렬히 찬양했던 니체가 바그너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 배경을 모르면 바그너가 니체의 철학에 끼친 영향을 지나칠 수 있다. 혹자는 니체가 정신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이 사람을 보라》를 썼기 때문에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 않는 책이라고 말한다. 책 곳곳에 있는 난해한 문장과 과대망상에 가까운 잠언은 니체의 정신 분열 증상의 징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혼돈 속의 질서’라는 말이 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 니체가 살아오면서 축적해온 사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는 이성과 도덕,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진정한 삶을 사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우상 또는 허상으로 본다. 이성은 ‘위험하고도 삶을 매장하는 폭력적인 힘(《이 사람을 보라》, 143쪽)’이다. 이성은 자유를 억압한다. 도덕은 우리의 삶을 구속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우리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니체는 죄를 씻어내기 위해 거듭 반성하고,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기독교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그런 삶은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며 고통을 주는 운명에 대처하지 못한다. 이러면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될 거대한 허무의 벽을 넘지 못한다. 니체는 ‘허무에 맞서는 허무’를 내세운다. 그는 낯설고 가혹한 운명에 직면할 때 ‘극단적인 용기로 충만한 긍정(《이 사람을 보라》, 145쪽)’의 힘을 가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삶에의 의지’이며 그가 지향한 ‘디오니소스적 삶’이다.
디오니소스(Dionyso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이다. 우리는 그가 매일 입에 술을 달고 사는 신이며 질서정연한(올바른) ‘이성’과 대조되는 무질서한(올바르지 않은) ‘광기’를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를 바라보는 니체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라고 밝힌다(13쪽). 디오니소스는 여러 개의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폴리고노스(Polygonos)’다. ‘폴리고노스’는 ‘거듭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니체는 우리 삶에 여러 번 오게 될 고비들을 넘어서려면 ‘망치’를 들어 깨부수고(《우상의 황혼》), ‘쟁기’로 갈아엎어야 한다고 말한다(《반시대적 고찰》). 한계를 깨부술 수 있는 자는 거듭 태어난다. 다시 태어나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강조하는 ‘긍정의 철학’이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에 입문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역자의 상세한 주석은 니체 철학에 도전하다가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다.[주] 하지만 독자가 모를 수 있는 인명(니체의 지인이나 니체가 언급한 프랑스 작가들)을 소개한 주석이 없어서 아쉽다.
오자도 보인다. 36쪽에 ‘에케 호로’는 ‘에케 호모’의 오자다. 119쪽 본문의 ‘케사레 보르자’는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로 써야 한다. 119쪽의 94번 주석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 숭배론》을 설명한 내용이다. 《영웅 숭배론》에 언급된 인물 중에 ‘존스’가 있는데, 이는 오자다. ‘존슨’이 맞다. ‘존슨’은 영국의 문필가 겸 학자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다. 230쪽의 ‘카글리오스트로’는 ‘칼리오스트로(Cagliostro)’라고 써야 한다. 칼리오스트로는 18세기에 ‘칼리오스트로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연금술사다.
[주] 아리아드네(Ariadne)는 크레타(Crete)의 공주다. 그녀는 크레타의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Theseus)를 위해 실타래를 건네준다. 테세우스는 그녀가 준 실타래 덕분에 미궁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죽이고, 미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낙소스(Naxos) 섬에 잠든 아리아드네를 놔둔 채 떠나고, 그녀는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