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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 일터에서의 사고와 죽음, 그에 맞선 싸움의 기록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기획 / 포도밭출판사 / 202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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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 옹졸하게 욕을 하고 [중략]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이 시를 쓴 김수영은 조그만 일에만 분개할 뿐 정작 부당한 권위 앞에서 분개하지 못한 자신의 소극적 태도를 반성했다. 시인은 옹졸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라고 표현했다. ‘절정(絶頂)’은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고 분개하는 삶을 뜻한다. 하지만 불의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살아온 시인은 절정 옆에 비켜서 있는 상태다.
시인이 반성한 ‘옹졸한 전통’은 결국 이 시를 읽는 우리의 옹졸한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하는 타인에게 사소한 불만과 짜증을 내면서 살아왔다. 왜 우리는 택배 물품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택배 노동자를 원망하는가. 택배 물품을 제대로 보관하지 않은 아파트 경비 노동자에게 분개하고, 전화 연결 대기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콜센터 상담원에게 옹졸하게 욕을 하고. 일하는 모든 사람은 노동자다. 그런데 노동자인 우리는 또 다른 노동자가 제공한 서비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노동자가 만든 제품에 조그만 하자가 있으면 분개한다. 타인의 노동에 분개한 우리는 내 주변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잘 몰랐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옹졸한 노동자의 전통’은 타인의 노동을 업신여기게 한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열악한 노동 현실에 비켜선 채 그들에게 분개하는 우리의 옹졸한 모습을 반성하게 만든다.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노동의 과정은 최상의 상품과 서비스라는 노동의 결과에 가려진다. 이 책을 기획한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잘 보이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은 노동자들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했다. 이름이 생긴 노동자들의 고통은 ‘산업재해’ 또는 ‘직업병’이라는 실체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자신의 아픔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노동 현장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참고 일해야만 했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 노동자인 우리가 외면했던 또 다른 노동자들의 고통, 그리고 고용주 앞에서 침묵해야 했던 우리의 고통이 기록된 책이다.
헌신과 인내.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두 단어를 주로 쓴다. 그들은 일하다가 병들거나 다쳐도 가족을 위해 아픔을 참아가면서 일터로 향한다. 우리는 그 모습을 성실한 노동자의 본보기라고 배우면서 자라왔고, 고통을 초월한 노동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와 반대로 아프다면서 출근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냉담한 반응을 드러낸다. 심지어 그의 아픔을 의심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고용주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라고 홍보하면서 구직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노동자가 일하는 도중에 다치거나 죽으면 고용주는 사고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한다. 고용주가 정말로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를 세웠다면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지 작업 현장 점검을 철저히 했을 것이고, 보호복과 안전 장비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였을 것이다. 내가 하는 노동도 힘든데 남의 노동과 고통까지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헌신과 인내를 강조하는, 아니 강요하는 노동은 노동자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 노동자들이 서로 노동의 고통과 아픔을 알지 못한다면 건강한 노동을 할 권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워진다.
모든 사람이 노동 문제에 비켜서 있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단 노동의 정의를 다시 물어야 한다. 근면과 헌신을 강조하는 노동만이 노동의 유일한 정의요, 참된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긍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한다. 현실에 동떨어진 ‘착한 노동’이 아닌 ‘위험한 노동’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위험한 노동에서 비롯된 노동자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집필진은 한목소리로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다른 노동자의 고통을 바라보면 우리가 진짜로 분개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알
* 144쪽

굴똑 → 굴뚝
* 147쪽

이타이타이병 → 이타이이타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