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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블라인드 - 우리는 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가?
앤드루 슈툴먼 지음, 김선애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평점
4점 ★★★★ A-
불을 피우면 연기는 위로 올라간다.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는 연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연기로 종이를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형제는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연기를 채웠다. 비단 주머니는 공중에 떴다. 형제는 하늘을 나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열기구를 제작했다. 그런데 처음에 형제는 기구가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제지 공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 형제는 전기(!)가 기구를 뜨게 만든 원인이라고 짐작했다. 오랜 생각 끝에 형제는 연기에서 나오는 부력이 기구를 띄운 힘이라고 추측했다. 연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 ‘몽골피에 기체’라고 불렀다.
기구를 하늘로 띄워 올린 힘은 연기가 아니라 뜨거운 공기다. 커다란 기구 주머니 속의 공기가 주머니 밖의 공기보다 온도가 높아지면 밀도는 작아진다. 공기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부피가 변한다. 온도가 높고, 압력이 낮아지면 공기의 부피는 커진다. 주위 압력이 일정할 때, 공기의 온도를 높이면 공기의 부피는 커진다. 이때 공기의 부피는 커졌기 때문에 밀도가 작아진다. 밀도의 차이가 공기를 상승하게 하는 데 바로 이 힘이 기구를 뜨게 만든다.
형제는 뜨거운 공기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기구가 연기 때문에 떠오른다고 믿었다. 그런데 기구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쏘아 올린 불꽃에서 나오는 뜨거운 연기가 기구 주머니를 들어 올린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연기는 항상 위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기구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그저 뜨거운 공기가 기구를 띄운다고만 알고 있다. 그들은 공기가 뜨거워지면 생기는 과학적인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에 대한 무지가 기구의 원리를 오해하게 되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그러니 과학을 모른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사이언스 블라인드》는 과학 비전공자와 과학 전공자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다. 아! 내가 ‘위로’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오해하지 마시길. 내가 방금 언급한 ‘위로’는 독자의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자기 계발(서)식 위로’가 아니다. 자기 계발식 위로는 심리학 이론을 어설프게 적용한 가짜 위로다. 과학이 위로를 준다고 해서 과학 공부를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이언스 블라인드》에서 보여준 과학의 위로는 ‘냉철한 위로’다.
《사이언스 블라인드》의 주제이자 핵심 단어는 ‘직관적 이론(intuitive theory)’이다. 《사이언스 블라인드》는 열두 가지 직관적 이론과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설명한 책이다.우리는 직관에 의존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직관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서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짐작한다. 또는 내 주변에 일어난 어떤 현상이나 사건도 직관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직관은 개인적인 판단에 기초하기 때문에 다소 정확하지 않다. 직관적 이론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않고(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우리 스스로 터득한 설명이다. 물론, 직관적 이론에도 장점이 있다. 직관적 이론은 여러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직관의 단점은 장점보다 너무 커서 해롭다. 앞서 언급했듯이 직관은 순간적으로 상대방과 현상을 이해하므로 정확성이 떨어진다. 직관에 의존한 판단이 틀렸으면 오류를 인정하고 정정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머릿속에 눌러앉은 직관적 이론은 그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심지어 우리의 시야를 더 좁게 만든다. 직관적 이론은 자신과 일치하지 않은 정보나 지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직관적 이론이 계속 말썽을 일으키면 우리는 직관에 이끌려 세상의 진실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런데 단점이 많은 직관에 왜 ‘이론’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붙여졌을까? 우리는 어떤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배우기 전에 그 현상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직관을 이용한다. 몽골피에 형제는 기구가 움직이는 원리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형제는 기구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기구를 움직이게 하는 미지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종이를 날린 하얀 연기를 봤을 테고, 연기가 기구를 뜨게 만든 힘이라고 믿었다. 기구를 띄운 연기를 뜻하는 ‘몽골피에 기체’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비과학적인 명칭이다. 그러나 형제는 연기의 힘을 특별하게 보였고, 여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 기구가 뜨는 원인과 기구의 원리를 모두 설명하려고 했다. 특정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려는 직관적 이론을 ‘인과적 지식’이라고 한다. 몽골피에 기체는 ‘인과적 지식’, 즉 직관적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명칭이다.
과학자들도 인간이라서 직관적 이론의 유혹에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는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이언스 블라인드》를 읽으면 과학사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직관적 이론에 맞선 과학자들의 실험 정신이 지금의 과학을 만들었다. ‘냉철한 위로’가 언뜻 차가워 보이긴 한데, 사실 별거 없다. 국어사전에 ‘냉철하다’의 의미가 이렇게 나온다. “생각이나 판단 따위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며 사리에 밝다.” 《사이언스 블라인드》를 다 읽고 난 후에 내 귓가에 과학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과학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과학 이론을 제대로 안다고 해서 직관적 이론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어.” 과학의 ‘냉철한 위로’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교훈이다. ‘냉철한 위로’가 남긴 교훈은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세상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직관적 이론이 왜 잘못되었는지 분명하게 따질 수 있다. 직관적 이론에 의해 좁아진 시야가 조금이라도 넓어지면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이론이 눈에 들어온다.
※ Mini 미주알고주알
1
* 35쪽
피아제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보존에 대해 이유가 부족한 이유는 사고의 논리를 아직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발달 단계를 ‘전조작기(pre-operational)’[주]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사고 유형은 보존에 관한 추론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정신생활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고 믿었다.
[주] 전조작기의 원어는 ‘pre-operational stage’ 또는 ‘pre-operational period’다.
2
* 38쪽
15세기에 화학 합성의 원칙을 발견한 존 달튼(John Dalton)[주]
[주] 존 달튼의 정체는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다. 그는 오랫동안 외면 받은 원자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원소가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면 화합물이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돌턴이 15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잘못 소개되었는데, 그는 1766년에 태어났다.
3
* 52쪽
미스테리 → 미스터리
4
* 116쪽
전략 게임 “철도 거물(Railroad Tycoon)”[주]
[주] ‘Railroad Tycoon’은 철도 회사를 운영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레일로드 타이쿤’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알려졌기 때문에 게임 이름을 직역하지 않아도 된다.
5
* 224쪽
성장에 대한 본질론적 개념이 잘못 적용되는 또 다른 예는 장기 기증에서 볼 수 있다. 본질이 생물 전체의 특성이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 장기도 원래 주인의 본질을 지닌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상상해보라. 누군가의 심장을 당신의 몸으로 이식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심장 기증자들은 몇 명 되지 않고 그중 가능한 기증자는 오직 연쇄 살인범뿐이다. 당신의 연쇄 살인범의 심장을 받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기증자들 중 누구의 심장도 받기를 꺼린다. 왜냐하면, 심장에 기증자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장기 이식 이후에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지에 대해 상상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격과 행동이 기증자의 성격 및 행동과 비슷하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심장 이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수혈이나 유전자 치료 또한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관점으로 볼 때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또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본질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러나[주] 본질론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주] 접속사가 틀렸다. ‘그러나’가 아니라 ‘그러므로(또는 ‘따라서’)’라고 써야 한다.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또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본질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성장에 대한 본질론이 적용된 사례이며 비과학적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