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시인이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외교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네루다의 생애와 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가 <일 포스티노>(Il Postino)다. 일 포스티노는 이탈리아어로 집배원이라는 뜻이다. 영화의 원작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Antonio Skármeta)의 소설 《불타는 인내》(Ardiente paciencia)다. 우리나라에서 이 소설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2004)
<일 포스티노>는 아름다운 지중해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원작 소설과 영화는 네루다의 실제 삶에 착안해 만들어졌다(소설과 영화의 세부적인 설정과 묘사, 결말이 다르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노동자들을 탄압한 정부를 비판한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네루다가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작은 섬에 정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원작 소설의 배경은 말년의 네루다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조용히 살았던 이슬라 네그라 섬이다. 이 섬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백여km 남짓 떨어진 위치에 있다.
네루다는 생전 그가 사랑했던 해변이 있는 이슬라 네그라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칠레를 장악한 피노체트(Pinochet) 정권은 그의 유해를 산티아고 공동묘지에 묻었다. 네루다는 망명을 계획했지만, 출국 하루 전 돌연 사망했다. 피노체트 정권은 네루다가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군부가 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네루다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네루다의 유해가 무덤에서 다시 꺼내어지긴 했지만, 네루다의 소원대로 이슬라네그라에 안장되었다.
섬의 우체국장은 네루다에게 오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배달할 전담 집배원으로 마리오를 고용한다. 처음에 마리오는 시인과 친하게 지내면 여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네루다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는 네루다에게 매일 편지를 전해주며 친구가 되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사실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의 실제 삶과 그의 시 문학 세계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네루다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려면 자서전과 평전을 참고하면 된다.
* 파블로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민음사, 2008)
평점: 4점 ★★★★ A-
* [절판] 애덤 펜스타인 《빠블로 네루다》 (생각의나무, 2005)
평점: 4점 ★★★★ A-
* 김현균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21세기북스, 2019)
평점: 4.5점 ★★★★☆ A
네루다의 자서전은 1994년에 《추억》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책으로 나온 적이 있다. 자서전은 시인이 살아온 과정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독자는 이 자서전을 통해 시인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를 관통했던 굵직한 시대적 상황들(스페인 내전, 칠레의 정치적 상황)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네루다의 삶은 양면적이다. 칠레를 대표하는 민중 시인으로 추앙받지만, 그의 개인사와 여성 편력은 객관적인 입장의 제3자가 봤을 땐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네루다의 시를 번역한 김현균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가 공동 번역으로 참여한 《빠블로 네루다》는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한 평전이 아니다. 시인의 주관적인 서술로 이루어진 자서전과 극적인 허구가 가미된 감동적인 장면만 기억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한 권의 주석이다. 평전을 쓴 저자에 따르면 네루다 자서전은 “이제껏 쓰인 가장 유쾌한 회고록의 하나지만 동시에 곳곳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부분(《빠블로 네루다》 44쪽)”이 있다.
네루다 평전도 자서전 못지않게 두꺼운 분량이다. 그렇지만 평전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주 작은 ‘옥에 티’를 발견하지 못한다.
* 《빠블로 네루다》 55쪽
네루다는 이탈리아 시에 등장하는 이름인 파올로를 좋아한 데서 ‘파블로’에 대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새로운 성은 위대한 체코 작가 얀 네루다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의 《말라스트라나 이야기》 중에서 한 편이 산티아고의 한 저널에 번역 · 소개되었는데, 네프탈리는 이 작품을 읽고 감탄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 명의 비평가는 네루다라는 성이 피아니스트 빌헬미나 노르만-네루다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녀는 첫 번째 셜록 홈스 이야기인 《주홍색 연구》에서 언급되는 실존 바이올리니스트다.
‘윌마 네루다(Wilma Nerud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빌헬미나 노르만-네루다(Wilhelmina Norman-Neruda)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녀의 아버지는 작곡가 겸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는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어린 네루다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순순히 따랐으면 피아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 《빠블로 네루다》 217쪽
알렉시스 톨스토이
‘알렉시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i Tolstoy, 1883~1945)의 오자다. ‘알렉세이’의 어원은 그리스어인 ‘알렉시스(Αλεξις)’이긴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식 발음에 가까운 이름으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평전을 만든 출판사가 부도가 나서 사라졌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야만 평전을 구할 수 있다. 평전의 분량이 많아서 읽기가 부담스러운 독자는 ‘서가명강 시리즈’로 나온 김현균 교수의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를 선택하면 된다. 김현균 교수는 앞서 필자가 언급한 네루다 평전 번역에 참여했다. 네루다의 시에 있는 구절에서 따온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는 라틴아메리카 대표 시인들의 삶과 시를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특히 네루다를 포함한 여러 라틴아메리카 문인들에게 영향을 준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에 관한 내용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나 네루다의 시 문학 세계에 입문한 독자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