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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평점
3점 ★★★ B
‘lab’은 ‘laboratory(실험실)’의 준말이다. 과학자 호프 자런(Hope Jahren)은 어린 시절에 과학 교수인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실험실은 그녀가 자유롭게 기계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31쪽) 장소였다.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대표작인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여성과 소설’을 다룬 주제를 다룬 강연문을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돈과 방은 자유롭게 사색할 수 있고, 편안하게 글을 쓰기 위해 있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다. 호프 자런의 첫 번째 책 《lab girl(랩 걸)》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여성을 위한 ‘《자기만의 방》 과학 버전’이다. 혼자 실험할 수 있는 나만의 실험실이 없으면 창의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실험실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과학자의 집이다. 자런은 대학교 건물 안에 있는 T309호실을 개인 실험실(the Jahren Laboratory)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실험실에 있으면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된다. 자런은 친한 동료 빌(Bill)과 함께 매일 밤마다 실험실을 꾸몄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어린 소녀들이 인형의 옷을 여러 번 갈아입히는 일(141쪽)’처럼 느꼈다고 회상했다.
나만의 실험실을 마련하고, 이 공간을 계속 유지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자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학원생이 과학자로서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이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는다. 연구 기반을 갖추지 못한 과학도들은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다. 획기적인 연구 결과는 단기간에 나오지 않는다.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백 번 이상의 연구를 시도해야 하며(실패를 겪어야 하며) 절대로 중도에 포기해선 안 된다. 자런은 진정한 과학자가 되려면 자신만의 실험을 개발하고, 그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고 말한다(99쪽). 그러기 위해서 국가는 과학도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과학자들이 실패해도 계속 이어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랩 걸》은 여성 독자,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싶은 여성에게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중요한 까닭은 자런이 과학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전문직 여성이 처한 일상적인 문제들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런은 ‘과학자’라는 명함을 가진 것만으로 여성이 자신만의 연구를 시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과학자로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편안한 실험실의 필요성이다.
《랩 걸》은 크게 ‘나무’와 ‘과학(식물학)’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식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의인화하여 표현한다. 특히 저자가 어린 시절에 만난 은청가문비에 대한 글(2장)은 문학 교과서에 실릴 만한 글이다. 저자는 평범하고 초라해 보이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은청가문비에 생명과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일반인이 보지 못한 나무의 삶을 들려준다.
어떤 독자는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산만하다고 불평하면서 《랩 걸》이 ‘과학책’ 같지 않다고 했다. 앞서 필자가 말한 두 가지 주제의 글이 이리저리 번갈아 가면서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개인적인 일상을 주저리주저리 서술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는 독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랩 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산만한 글쓰기를 이해해줘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랩 걸》은 잘 만든 책은 아니다(이유는 후술할 ‘Mini 미주알고주알’을 참조할 것). 하지만 저자는 마치 정해진 틀에 벗어나 쓰고 싶은 대로 쓰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랩 걸’이 되어 글을 썼다. 과학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과학적인 내용만 잔뜩 있어야 하나. 《랩 걸》 이전에도 국내외 과학자들은 에세이 형식으로 된 과학책을 썼다. 《랩 걸》은 과학 책이다.
※ Mini 미주알고주알
* 187쪽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1207/pimg_7365531662755394.png)
→ 원문(<Lab Girl>, 131쪽): goose-shit yellow
→ ‘goose’는 거위를 뜻한다. 갈매기를 뜻하는 영단어는 ‘gull’이다. 그리고 ‘노랑색’은 비표준어다. ‘노랑’ 또는 ‘노란색’이라고 써야 한다.
* 187~188쪽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1207/pimg_7365531662755395.png)
→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애리조나에 만든 바이오스피어 프로젝트”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바이오스피어 프로젝트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애리조나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일까. 원서(132쪽 참조)에는 ‘Biosphere project’라고 적혀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Biosphere 2 project’다. 저자는 프로젝트 명칭을 착각하여 잘못 썼다. 실제로 캐나다 퀘백 주 몬트리올에 ‘Biosphere’라는 생태 박물관이 있다. ‘생물권’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바이오스피어는 지구 전체 생태계를 의미한다.
→ 바이오스피어 2는 햇빛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거대한 돔이며 투명 유리로 만들어졌다. 이 구조물 안에 인간 거주지와 동식물을 위한 생태 구역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Biosphere 2’는 인공 지구 생태계다. 바이오스피어 2 프로젝트는 1991년에 애리조나에 완공되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가 바이오스피어 2를 관리했고, 지구 온난화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 구조물은 애리조나 대학교가 소유하고 있으며 연구시설 및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번역본에 있는 문장을 “컬럼비아 대학교가 주관하고, 애리조나에서 진행된 바이오스피어 2 프로젝트”로 고쳐 쓸 수 있다.
* 193쪽
“너구리들이 또 아기 너구리들을 갖게 될 거야. 털이 더 필요해.”
“팔을 둥치에 난 구멍으로 집어넣어봐. 너구리들이 씹을 수 있게. 노인의 팔은 씹는 데 아주 좋거든.”
[원문, <Lab Girl> 135쪽]
“The raccoons are having baby raccoons again; I need more hair.”
“Stick your arm in the hollow, then, and the raccoons will chew it. An old man’s arm is good for chewing anyway.”
→ ‘라쿤(raccoon, 학명: Procyon lotor)’을 ‘너구리’와 같은 종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라쿤을 ‘너구리’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다. 라쿤은 너구리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다. 그래서 라쿤을 ‘미국 너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이름 때문에 라쿤을 너구리와 같은 종으로 오해하기 쉽다. 너구리를 뜻하는 영단어는 ‘Raccoon dog’이다. 미국인들은 너구리를 ‘라쿤을 닮은 개’로 여긴다. 너구리의 학명은 ‘Nyctereutes procyonoides’다.
* 272쪽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1207/pimg_7365531662755400.png)
→ 원문, <Lab Girl> 190쪽: “Shit, this thing will need gas witnin a couple of hours. I should have filled up while you were back there playing Goldilocks.”
→ <곰 세 마리>는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Goldilocks and the Three Bears)’를 말한다. 골디락스는 금발을 뜻하며 동화의 주인공인 금발 소녀의 이름이다. 골디락스는 숲속을 헤매다 세 마리의 곰이 살고 있는 오두막을 발견한다. 오두막 주인인 곰들은 외출한 상태였다. 골디락스는 빈 오두막에 들어갔고(무단 주거 침입), 부엌의 식탁에 있는 오트밀 죽 세 그릇을 발견한다. 첫 번째 죽은 너무 뜨거웠고, 두 번째 죽은 너무 차가웠고, 세 번째 죽은 먹기 좋게 온기가 적당했다. 골디락스는 세 번째 죽을 먹는다. 식사를 마친 골디락스는 세 개의 의자 중에 자신에게 딱 맞는 의자에 앉지만, 그 의자는 부서져버렸다. 소녀의 철없는 행동은 계속되는데, 이번에는 침실에 들어간다. 소녀는 침실에 있는 세 개의 침대 중에 너무 푹신하지도 않고, 너무 딱딱하지 않은 침대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그 침대에 누워 잠든다.
→ ‘금발이 놀이’는 동화에 묘사된 소녀의 민폐 행동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역자는 골디락스를 ‘금발이’로 번역했는데, 동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금발이 놀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역자는 ‘금발이’가 누군지 설명한 내용이 있는 주석을 달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