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여파로 미국 메이저리그(MLB) 정규시즌 개막이 기약 없이 연기된 상태다. MLB 사무국과 선수협회는 시즌을 단축해 7월에 개막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다.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경기 수는 총 162경기인데 많게는 100경기까지 축소될 수 있다. 경기 수가 얼마나 줄어드느냐에 따라 0점대 평균자책점(ERA: Earned Run Average), 4할 타율 등 꿈의 기록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1941년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0.406)를 끝으로 메이저리그 78시즌 동안 4할 타자가 나오지 않았다. 1876년에 시작된 메이저리그에서 4할을 기록한 타자는 총 20명이다. 국내 프로야구(KBO) 유일의 4할 타자는 백인천(0.412)이다. 이 기록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시즌에 나왔다. 백인천은 72경기에 나와 250타수(298타석) 103안타(홈런 19개)를 기록했다. 프로야구 첫 시즌이 팀당 80경기라서 정식 기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풀 하우스》 (사이언스북스, 2002)
4할 타자가 잘 나오지 않고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타자들의 타격 기술이 퇴보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자신의 저서 《풀 하우스》에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한다. 그는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이 오히려 프로야구 선수들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을 증명해주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4할 타자가 사라진 원인은 ‘외부 요인 이론’과 ‘내부 요인 이론’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외부 요인은 타자들의 컨디션에 영향을 주는 것들을 의미한다. 빡빡한 경기 일정과 경기장 이동 경로는 선수들의 체력 회복을 더디게 한다. 언론의 열띤 관심과 취재 열기는 타자의 집중력을 방해한다. 4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선수는 기자들과 대중의 관심이 오로지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굴드가 《풀 하우스》에 언급하지 않은 외부 요인이 있다. 나는 심판의 일관성 없는 스트라이크 판정과 오심도 선수들의 기록에 영향을 주는 외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에 메이저리그 투수의 퍼펙트게임(선발 투수가 한 명의 타자도 진루시키지 않고 끝낸 게임. 홈런을 포함한 안타, 볼넷, 사구, 수비 실책 등 어떤 경우에도 타자를 진루시키지 않아야 한다) 기록이 심판의 오심에 의해 무산된 적이 있다. 그것도 경기 종료를 눈앞에 둔 9회 초에. 경기 중에 볼(ball)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는 경우가 있다. 관중들도 납득하지 못하는 공 하나의 판정은 타자들의 기록 달성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내부 요인은 투수의 투구 실력과 야수들의 수비 실력이다. 투수들은 타자들이 치기 어려운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게 되었으며 구속도 증가했다. 야수들의 수비력도 많이 향상되었다. 날렵한 야수들은 안타가 될 수 있는 타구를 몸을 날려서 글러브로 잡아낸다.
* 정재승, 백인천 프로젝트 팀 외 《백인천 프로젝트》 (사이언스북스, 2013)
정재승 교수는 굴드의 주장에 영감을 받아 역대 국내 프로야구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백인천 이후 4할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분석했다. 2012년에 시작한 일명 ‘백인천 프로젝트’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100여 명과 함께 시작된 집단 연구 활동이다.
* 벤 올린 《이상한 수학책》 (북라이프, 2020)
타율은 수학 공부를 포기한 사람들도 좋아할 수 있는 통계 지표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타율이 높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와 반대로 투수의 평균자책점은 낮을수록 좋다). 대중은 통계 수치가 객관적인 정보라고 믿는다. 그래서 타율이 높은 타자일수록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야구팬들은 3할을 기록하지 못한 타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타율 하나만으로 타자의 실력을 설명할 수 없다. 요즘 야구 전문가들은 타자를 평가할 때 타율보다는 장타율과 출루율(OPS: On base Plus Slugging, 장타율과 출루율을 합한 수치)을 중요하게 본다.
《이상한 수학책》의 17장(‘마지막 4할 타자’)은 타율이 공식 야구 통계 지표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타율을 대체하는 통계 지표에 대한 내용이다. 야구 규정의 역사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숫자에 공포를 떠는 독자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통계학자들은 타율을 오래된 유물 정도로 취급하지만, 타자들은 여전히 타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개인적인 목표는 타율 3할로 기록하면서 정규 시즌을 마치는 것이다. 타율은 구단의 연봉 고과 산정 기준이다. 타율 2할 9푼의 선수와 타율 3할 1푼의 선수가 받는 연봉 액수는 다르다. 물론 연봉을 많이 받으려면 타율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출루율을 높여야 하고, 도루 성공 횟수도 많아야 한다. 타자는 여러 가지 개인 기록 관리에 신경을 쓰면서 경기에 임한다. 이러한 선수들의 마음가짐 또한 4할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로 볼 수 있다.
* 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 (이상미디어, 2011)
홈런을 치지 못해도 출루율이 뛰어난 타자가 있다. 테드 윌리엄스는 《타격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자신만의 타격기술을 설명했다. 그는 눈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77개의 구간으로 나눈 다음에, 투수가 던지는 볼이 자신이 좋아하는 구간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테드 윌리엄스는 공을 오래 볼 줄 아는 선수였다. 즉, 그는 선구안(batting eye)이 좋았다. 공을 장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선구안이 나쁜 타자가 있다. 이런 선수들은 출루율과 장타율이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 박종윤(前 롯데 자이언츠, 은퇴)은 155타석 연속 무(無) 볼넷을 기록했다. 김동엽(삼성 라이온즈)은 장타력이 뛰어나지만, 선구안이 좋지 못해 삼진을 많이 당하는 편이다.
방망이를 투구에 잘 맞추는 능력도 좋지만, 그에 못지않게 제일 중요한 것은 선구안이다. 대중은 ‘4할’이라는 수치를 단순히 ‘공을 잘 치는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안타와 홈런을 많이 쳐도 4할을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공을 잘 보는 능력’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