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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철학
라르스 스벤젠 지음, 이세진 옮김 / 청미 / 2019년 10월
평점 :
“형, 심심해 죽겠어요.”
아는 동생이 매일 나한테 전화한다. 《수염과 남자에 관하여》 서평의 서두에 언급된 그 동생이다. 대구에 코로나19 환자가 늘어나면서 나와 동생은 3주째 집에서 지내고 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지만, 동생은 혼자 산다. 동생이 사는 곳은 번화가 근처다. 그러나 지난 달 말에 코로나19가 크게 확산된 이후부터 동생은 외출을 못 하고 집안에만 있다. 이 녀석은 커피를 좋아하고 애연가다. 커피와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것 빼고는 바깥 공기를 오래 마신 적이 없다. 그는 햇볕을 쬐러 밖에 몇 시간 동안 돌아다닐 수 있다. 하지만 밖에 있어도 허전할 것이다. 요즘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되는 분위기라서 사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생은 항상 나랑 전화 통화할 때마다 한숨 푹푹 쉬거나 ‘심심해요’라는 말을 여러 번 한다. 이제는 그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스마트폰 화면에 녀석의 이름이 뜨면 일부러 전화를 안 받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전화를 자주 하는 그 녀석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혼자서 살고 있는 데다가 3주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며칠 전에 통화했을 때 동생이 ‘형, 나올래요? 같이 밥 먹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장 만나서 녀석에게 밥 한 끼 사주고 싶었지만, 내가 외출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이 녀석에게는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그는 분명 친구가 많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대구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동생은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매일 외로움에 시달린다.
《외로움의 철학》이라는 책에 보면 ‘혼자 있음(aloneness)’과 ‘외로움’의 정의가 나온다. 이 책의 저자는 ‘혼자 있음’과 ‘외로움’을 별개의 현상으로 본다. ‘혼자 있음’은 말 그대로 사람이 혼자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을 선호하면서도 때론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 있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타인과의 연결 욕구, 즉 타인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감정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때론 괴롭게 한다. 주변에 친구가 많은데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아니면 내 동생처럼 부득이하게 외출하지 못해 타인과의 연결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외로움을 ‘사회적 위축(social withdrawal)’ 또는 ‘사회적 고통(social pain)’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가 전파되면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집에서 생활하는 혼족들이 있다. 혼자 살아온 그 사람들의 생존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외로움 참는 일을 힘들어할 것이다. 혼족도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혼족들이 외로움을 참으면서 생활하는 것은 ‘사회적 고통’에 가깝다. 코로나19 전파력이 장기적으로 높아질수록 혼족들이 느끼는 사회적 고통도 더욱 커진다.
외로움을 ‘사회적 고통’이라고 해서 이 감정 상태를 ‘마음의 병’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 따라서 외로움 자체는 병이 아니다. 다만 사람을 피하려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사실 외로운 사람들은 타인과의 만남을 피하면서도 타인과의 애착을 갈망한다. 저자는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고통을 줄이려면, 타인을 신뢰하는 법과 타인에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또 자신의 생활 습관이나 행동도 변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인간에게 외로운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원인에는 외부 원인과 내부 원인이 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의존하는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지만 친밀도가 높지 않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맺어준 인간관계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한 가닥의 실과 같다. 우리는 이런 실들이 무수히 엉켜 있는 것을 ‘인맥’이라고 부르며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애쓴다. 이럴수록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우리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중심의 세상은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외부 원인이다. 하지만 저자는 외로움의 원인을 무조건 외부에서만 찾는 관점을 옹호하지 않는다. 내부 원인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를 제일로 아는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와 타인에 대한 불신이 너무 강한 사람은 외로움을 잘 느낀다. 그런 사람은 외로움을 일으킨 내부 원인을 파악하여 스스로 고쳐 나가야 한다. 또 자신이 만나는 타인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높아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매번 외롭다면서 투덜거린다. 외로움이라는 이 부정적 감정도 불편해도 결국 내 것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 자신의 감정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각자의 감정에 책임 있는 우리는 외로움을 덜 느끼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또 외로움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가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나만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토지라면, 적당한 외로움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비료다. 《외로움의 철학》은 건강한 고독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런 고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예찬하지 않는다. 타인과 만나는 외향적 활동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 Trivia
* 10쪽
사회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유대가 없는 사회적 공간에 서식하기를 심히 외로워한다. 알렉시 드 토크빌도 일찍이 1930년대에 미국의 민주주의를 연구하면서 같은 지적을 했다.
→ ‘1830년대’로 고쳐야 한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Tocqueville)은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1831년 5월에서 1832년 2월까지 아홉 달 동안 미국을 여행했고, 프랑스로 돌아와서 미국 사회의 모든 면을 분석한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표했다.
* 14쪽
이런 유의 외로움을 영화에서 찾아보자면, 마틴 스코세이스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이 떠오른다.
→ 오식인가, 아니면 번역자가 나름 생각이 있어서 저렇게 표기한 것인가? 예전에는 ‘마틴 스콜세지’로 표기했는데, 요즘은 ‘마틴 스코세이지’로 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 164쪽
크리스티안 가르베는 두 권짜리 저작 『사회와 고독에 대하여』(1979~1800)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려 했지만 실상은 사회의 중요성에 좀 더 치우치는 감이 있다.
→ 연도가 잘못 적혀 있다. 크리스티안 가르베(Christian Garve, 1742~1798)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사회와 고독에 대하여(Über Gesellschaft und Einsamkeit)》는 1797년에 처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