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잊힌 작가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작가의 이름은 안토샤 체혼테(Antosha Chekhonte). ‘체혼테’는 필명이다. 그는 1860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체혼테는 모스크바대학교 의대생이었는데,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188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쓴 글은 서너 장 분량 정도 되는 단편소설이었고 싸구려 잡지에 실렸다. 체혼테의 단편소설은 러시아의 사회 문제나 특정 계급의 인물을 풍자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형식이다. 일 년에 그가 쓴 단편소설의 수는 100편 이상이었다. 이 정도면 글을 대단히 많이 쓰는 편이다. 체혼테는 돈을 벌기 위해 짧은 글을 계속 썼다.

 

 

 

 

 

 

1886년에 체혼테는 그리고로비치(Grigorovich)라는 작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리고로비치는 당시 러시아 문단에서 알아주는 중진 작가였다. 편지에는 젊은 작가가 더 잘 되길 바라는 선배 작가의 진심 어린 충고가 있었다. 그리고로비치는 체혼테에게 가벼운 분량의 글을 빨리 쓰는 습관을 버리고, 진지하게 사색을 하면서 글을 써보라고 충고한다. 이 편지는 체혼테의 작가 활동에 큰 전환점이 된다. 1887년부터 발표된 체혼테의 작품들은 코믹한 소품 형식의 글에서 점점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밝은 일상 속에 가려진 어둡고 무거운 삶의 한 단면을 소재로 쓴 글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체혼테는 자신의 본명을 내세워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체혼테의 본명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이 글을 읽으면서 체혼테의 정체를 일찍 간파한 독자가 있을 것이다. 장난으로 체혼테라고 소개한 체호프의 사진이 결정적인 힌트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로쟈 님이라면 이 글의 제목만 보고 체혼테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체호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단편소설의 대가이자 극작가다. 어떤 사람은 이 글을 쓴 의도가 궁금할 것이다. 내가 체혼테와 체호프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소개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체혼테와 체호프는 분명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체혼테와 체호프의 작품은 따로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체혼테는 문학적으로 깊이가 있고 성숙한 글을 쓴 체호프가 되기 전 단계인 프로토타입(Prototype, 초기 모델)이다.

 

대부분 사람은 체호프가 누군지 알고 있어도 그가 체혼테라는 필명을 썼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처음부터 체혼테를 잊힌 작가라고 언급한 이유가 있다. 사실 체호프는 초창기에 작가 활동을 할 때 필명을 여러 개 사용했다. ‘체혼테는 가장 많이 알려진 체호프의 필명이다. 그 밖에 체호프가 사용했던 필명은 내 형의 동생’, ‘쓸개 빠진 놈이다. 체호프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필명을 내세워 유머 작가로 활동했다. 문학 연구자들은 체호프가 짧은 분량의 유머 소설을 많이 쓴 1880년에서 1885년까지의 시기를 체혼테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체호프의 초기 작품들은 체혼테 시대에 나왔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나온 작품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초기 작품들이 중기와 후기 작품들에 비해 문학적 우수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체혼테 시대의 작품 형식은 단조롭다. 어떤 장소에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어리숙하고 무지한 인물이 등장하여 비웃음을 살만한 말과 행동을 한다. 이러한 형식의 글을 러시아에서는 스쩬까라고 한다. 스쩬까는 일정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을 소재로 한 글을 뜻한다. 체호프가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미 스쩬까가 유행했고, 대중은 잡지에 유통되는 짧고 유머러스한 글을 선호하고 있었다.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쓴 체호프는 사회 문제를 살짝 건드리기만 하지 엄할 정도로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웃음을 나오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만 보여준다. 체혼테 시대의 작품들을 보면서 나오는 웃음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빨리 증발한다. 웃음마저 금방 사라지니 급속도로 전개되는 짧은 이야기들도 기억 속에 잊히게 된다. 이런 독자의 반응은 크게 웃을 정도로 재미있지만, 아주 빠르게 나오는 개그의 대사나 한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관객의 상황과 비슷하다. 따라서 체혼테 시대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 몇 편을 꼽기가 어렵다. 사실 초기 작품들은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자주 번역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체호프의 대표작은 중기 및 후기 작품에 속한다.

    

 

 

    

 

 

 

 

 

 

 

 

 

 

 

* [품절] 안톤 체호프 개와 인간의 대화: 안톤 체호프 선집 1(범우사, 2005)

* [품절] 안톤 체호프 《콘트라베이스와 로맨스: 안톤 체호프 선집 2(범우사, 2005)  

    

 

오래전에 범우사는 단편과 중편, 그리고 희곡을 수록한 다섯 권짜리 안톤 체호프 선집을 펴냈는데, 모두 절판되었다. 첫 번째 선집(개와 인간의 대화)과 두 번째 선집(콘트라베이스와 로맨스)에 체혼테 시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개와 인간의 대화1885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술에 취한 관리가 자신을 향해 짖어대는 개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이 재미있게 그려졌다.

    

 

 

 

 

 

 

 

 

 

 

 

 

 

 

 

* 안톤 체호프 처음 소개되는 체호프 단편소설(인디북, 2011)

* 안톤 체호프 체호프 유머 단편집(지만지, 2013)

 

    

 

개와 인간의 대화》는 절판되었지, 2010년대에 들어서 다행히 체호프의 초기작만 따로 모아 번역한 처음 소개되는 체호프 단편소설(인디북)체호프 유머 단편집(지만지)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체호프 단편 선집들은 중기 및 후기에 나온 작품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런 책에 수록된 초기작은 고작 한두 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처음 소개되는 체호프 단편소설체호프 유머 단편집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편 선집이며 체호프의 작품 세계에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 역할을 하는 책들이다. 체호프 유머 단편집에 있는 이웃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1880잠자리라는 주간지에 발표된 체호프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다. 처음 소개되는 체호프 단편소설에 있는 아버지라는 작품은 이웃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해에 발표된 체호프, 아니 체혼테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잠자리에 실렸다.

 

, 지금까지 체혼테의 작품과 체호프의 작품을 구분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프로토타입과 진캐(진짜 캐릭터)가 쓴 작품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880년에서 1885년 사이에 나온 작품은 체혼테가 쓴 것이다. 체혼테 시대의 연도만 기억하면 된다. 체호프 단편 선집을 읽을 때 작품 끝부분에 있는 작품 발표 연도를 꼭 확인하시라(발표 연도를 밝히지 않은 번역본도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이 체혼테가 쓴 것인지, 체호프가 쓴 것인지 알 수 있다.

 

 

    

 

 

Trivia

    

 

 

 

 

 

 

 

 

 

 

 

 

 

 

 

*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민음사, 2002)

*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문예출판사, 2006)

    

 

 

독서 모임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읽기의 이번 달 선정 도서민음사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이다. 민음사 판의 관리의 죽음, 거울과 문예 판의 복수자는 체혼테 시대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독서 모임을 위해 두 권의 책만 읽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책 모두 중기 및 후기 작품들 위주로 수록되었지만, 체호프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TMI(Too Much Information)인데, 모임 날짜가 130, 이번 달 마지막 목요일이다. 모임 전날인 129일은 체호프가 태어난 날이고(어떤 번역본에는 117일로 되어 있는데 이 날짜는 율리우스 달력에 가까운 러시아 구력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현재 전 세계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그레고리 달력이다), 체호프 탄생 16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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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1-27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보니까 알겠던데. 체호프라는 거.
그런데 1년에 단편 100편을 썼다니 대단하군.
글치 않아도 그의 책이 있긴한데...ㅠ

얄라알라 2020-01-27 21:11   좋아요 1 | URL
저도 지금 우와 신기해, 하며 읽다가 댓글에 ˝1년 단편 100편이라고요? ˝쓰려고 했는데 stella.K님께 찌찌뽕해야겠어요.

로쟈님께서 이 글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cyrus 2020-01-28 20:09   좋아요 0 | URL
To. stella.K // 저는 체호프 단편 선집 두 권 가지고 있어요. 역시 단편은 분량이 짧아서 좋아요. 금방 읽을 수 있으니까요. ^^

To. 얄라알라북사랑 // 언젠가는 제 글을 보시겠죠? ^^

Angela 2020-01-31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본 순간! 제 최애 작가라는걸 알았죠 ㅎ

cyrus 2020-02-01 17:45   좋아요 0 | URL
수염 있는 체호프의 모습이 있는 사진은 워낙 유명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