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방 ‘서재를 탐하다’가 2019년 6월 21일로 문을 닫는다. 책방은 3년 동안 머물렀던 동네(대구 북구 침산동)를 떠나게 된다. 책방뿐만 아니라 책방의 이웃인 옷 수선 가게와 떡 가게도 떠난다. 책방과 소규모 가게들이 사라진 자리에 40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선다. ‘서재를 탐하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시 태어날 뿐이다. 빠르면 다음 달에 원대동에서 ‘서재를 탐하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다.
동네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생로병사의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동네에서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가 일어난다. 오래된 건물들이 철거돼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발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재개발로 한층 젊어진 동네의 부동산 가치는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야 한다.
책방은 도시의 오아시스다. 책방은 너무나 빠른 도시의 속도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휴식처다. 그러나 자주 가던 책방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잠시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찾으면 셔터가 내려 있거나, 다른 간판이 걸려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오래된 책방(헌책방)은 동네 책방보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킨 책방도 ‘책의 맛’을 아는 독자들이 주로 찾는 노포(老鋪)다. 노포가 사라지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이 잊히는 것처럼 오래된 책방이 사라지면 그곳에 있는 책들도 사라진다.
* 오 헨리 《마지막 잎새》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내게 오래된 책방은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마지막 잎새’와 같다. 담쟁이덩굴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생각하는 소녀는 마지막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늙은 화가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마지막 잎새를 벽에다 그려놓고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잎새’와 같은 오래된 책방이 사라지면 그 속에 있는 책들의 생명도 끝이 난다. 책의 일부는 다른 책방으로 이동하게 되지만, 팔지도 못하는 책들은 폐휴지로 전락한다. 오래된 책방이 살아남으려면 책방을 운영하는 젊은 주인이 있어야 하고, 책방을 찾는 손님들이 조금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마지막 잎새’를 지켜줄 (젊은) 애서가와 독자들이 많지 않다.
* 야마시타 겐지 《서점의 일생》 (유유, 2019)
‘가케쇼보(벼랑 책방)’라는 이름의 책방을 11년 동안 운영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호호호좌(웃음소리가 있는 곳)’라는 새 간판을 단 야마시타 겐지의 《서점의 일생》에 보면 이미 책방 폐점을 경험한 일본인의 글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야마시타 겐지는 ‘가케쇼보’ 책방을 문 닫을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방을 운영한 적이 있는 하야카와 요시오라는 가수를 직접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하야카와는 책방을 그만두니까 “편안해졌다”라고 말한다. 하야카와도 책방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제목은 「폐점한 날」이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책에 「폐점한 날」의 일부를 인용한다.
폐점한 나는 울고만 있었다. 눈물이 끝없이 나왔다. 책장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님과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폐점을 알고 매일 오는 손님이 있다. 이제 우리 가게는 그 사람이 살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무엇인가 찾아 간다. [중략] 이와나미 문고가 반품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것만 사 가는 손님도 여럿 있었다. 전별금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친한 사람도 아니었다. 가게 앞에 멈춰 서서 들어오자마자 “너무 서운해요”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예순 살 정도의 사람이다. 다른 손님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뜻밖이었다. 흔히 말하는 단골이나 친한 손님(물론 안타까워해 줬지만)보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쉬워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중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감동이 책방에는 매일매일 있었던 거다. 감동은 예술의 세계에만 있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생활에도 비슷하게 있는 거다. 나는 그것을 폐점 일에 손님에게 배웠다.
(《서점의 일생》 중에서, 256쪽)
책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단골손님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저만치 떨어져서 책방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들도 책방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아도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책방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책방에 자주 오지만, 책을 사지 않는 손님을 삐딱하게 바라봐선 안 되고 쫓아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책방의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책방에 가득한 사람들의 따스한 온정을 느끼고 싶어서 그곳에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책방의 친숙함과 편안한 분위기를 외면할 사람은 없다. 그들은 새로운 것의 가치 못지않게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잘 안다. ‘오래’라는 수식어가 붙여지면 민망할 수도 있지만, 빨리빨리 변하는 현재 도시의 속도를 생각하면 책방이 3년 이상 유지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도시의 속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책방이 많아졌으면 한다. 책에 대한 애정에 상관없이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고, 사람의 온정이 느껴지는 도시의 오아시스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