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서스 비니어드(Martha’s Vineyard)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평온한 섬이다. 이 섬은 영화 <조스(Jaws)>의 촬영지였으며, 미국 대통령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외부인이 자주 드나드는 관광지가 되었으나 과거에 이곳은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청각장애인들이 살았던 옛날 마서스 비니어드 섬의 공용어는 ‘수화’였다.
1640년대부터 영국의 켄트(Kent)라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마서스 비니어드 섬에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청각장애를 유발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고립된 이주민들은 불가피하게 근친결혼으로 인구를 늘려갔고, 이로 인해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태어났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지속적인 근친결혼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열성인자가 출현돼 예상치 못한 장애나 질병과 관련된 면역성 약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서스 비니어드섬에는 청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청각에 이상 없는 비장애인들도 살고 있었다. 이 섬에 사는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은 모두 수화를 사용했다. 섬사람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편한 장애’로 인식하지 않았다. 또 그곳에서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줄여서 ‘마서스 비니어드’[주])는 섬사람들이 장애를 수용하는 사회화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이 섬에 사는 75세 이상 노인들을 만나면서 얻은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장애의 정의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넓힌다. 19세기 말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은 섬사람들의 청각장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직접 조사에 나섰지만, 확실한 결론을 얻는 데 실패했다. 벨은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화를 발명하기 전 그는 청각 장애인 전문학교를 경영한 교사였다. 그는 수화 대신에 상대방 입술의 움직임과 표정을 보며 말의 맥락을 이해하는 독화(讀話)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마서스 비니어드 섬사람들처럼 수화를 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공동체가 많아질수록 청각장애 발병률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벨이 섬을 조사하던 당시에 학자들은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의 유전 법칙을 모르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유전 법칙이 재조명받을 때까지 마서스 비니어드 섬사람들의 청각장애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벨은 섬사람들이 수화를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섬사람들은 외부인이 ‘듣지 못하는 것’을 장애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섬에서 청각장애는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특이한 질병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청각장애를 불행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외부인, 특히 비장애인들은 마서스 비니어드 섬을 청각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고립된 지역으로 본다. 그러나 이 섬에서 청각장애는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섬에 사는 비장애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와 수화를 같이 배우면서 자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한둘의 청각장애인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서스 비니어드 섬의 비장애인들은 수화를 평범한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서스 비니어드 섬에 살았던 최후의 청각장애인은 1952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이가 많은 섬사람들은 수화로 말했던 시절을 기억했다. 그들은 청각장애인을 ‘특별한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섬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청각장애인-cyrus 주]에 대해서 아무것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았어요. 당신이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섬은 살기에 대단히 좋은 장소일 거예요.”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 220쪽)
비장애인은 어딘가 몸이 불편해 보이고, 무언가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장애인으로 성급하게 판단한다. 그래서 장애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 여긴다. 《마서즈 비니어드》는 장애란 결코 장애인 개인의 문제도, 극복해야 할 대상도 아님을 보여준다. 즉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며, 장애인은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차별받아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수화를 쓰지 않는 사회에 청각장애인은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 책의 역자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서스 비니어드 섬사람(원문은 'hearing people'이다)을 ‘건청인(健聽人)’이라고 옮겼다. 나는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건청인’이라는 표현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인가. 그냥 ‘청인’이라고 썼으면 어떨까 싶다.
책 126쪽 저자의 주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자신의 자녀가 청각장애인의 여부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이 유능한 의학적인 유전학자를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저자의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녀가 장애인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장애인을 ‘아프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으로 타자화하는 인식이 생기기 쉽다. 래디컬 페미니즘 관점에서 볼 땐 장애 여성 또한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만약 장애인 태아를 양육할 수 없다면 임신 중지(낙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장애학을 공부한 여성주의 철학자들의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태아의 장애 여부를 알 수 있는 유전자 분석 기술이 도입된다면, 장애인은 ‘태어나선 안 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편견을 형성할 수 있다. 모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유전자 분석을 통해 예상 수명과 장애 여부를 판정하여 ‘태어나야 할 존재’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로 분류하는 것은 우생학과 다를 바 없는 발상이다.
[리뷰 제목 주] 이 책의 8장 제목이다.
[주]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마서스 비니어드’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