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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 이야기
제프리 초서 지음, 김재환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월
평점 :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는 우리나라에선 다소 낯선 작가이다. 그러나 그를 언급하지 않은 영문학사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 초서가 살던 중세 영국의 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가 더 고상한 언어로 간주해 대부분의 영국 작가들은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초서는 영어로만 작품을 쓴 선구적인 존재 중 한 사람이다. 이 점에서 그는 ‘영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영문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데, 오랫동안 상식으로 굳어진 이 평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의 문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서는 인간 행동의 천태만상을 묘사한 글을 썼으며 그의 대표작 《캔터베리 이야기》는 귀족, 성직자, 노동자 등 모든 계층을 망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중세판 인간 희극’이다.
《중세부인 이야기》는 초서의 초 · 중기 작품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동명 제목의 장시(長詩) 『중세부인 이야기』, 『명성의 집』, 『새들의 회의』, 『열녀전』, 초서가 쓴 것으로 알려진 단시(短詩)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초서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영국에서 유행한 중세 프랑스 문학의 형식을 따랐다. 중세 프랑스 작가들은 ‘사랑’을 주제로 한 알레고리 형식의 글을 썼는데, 초서는 프랑스 작가들의 글쓰기 방식을 참고했다. 프랑스와 영국 작가들이 선호한 형식을 ‘사랑의 환상(love-vision)’이라고 한다. ‘사랑의 환상’ 이야기는 항상 정해진 방향대로 흘러간다. 처음에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연애에 불만을 드러낸다. 그는 불면증을 해소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여기서부터 진행되는 이야기는 ‘환상’이다. 꿈속의 장소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 정원에서 주인공은 ‘말하는 동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사랑과 인생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듣는다. 의인화된 동물들은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나면서(주인공이 현실로 돌아오는 상황) 이야기는 끝난다.
『중세부인 이야기』는 초서가 자신의 문학적 후원자였던 블랜치(Blanche) 공작부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초서는 이 작품에서 공작부인을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하면서 그녀의 성품을 칭송한다. 『명성의 집』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인생의 무상함을 알레고리 기법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새들의 회의』는 ‘사랑의 환상’ 형식을 철저히 따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새들은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을 한다. 의인화된 새들은 귀족과 평민을 상징한다. 『열녀전』은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다가 배신당해 불행해진 옛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남자를 배신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와 대조적이다. 초서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제5권 후반부에 악녀에 대한 글을 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정숙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글을 쓰겠다고 밝혔다. 『열녀전』의 ‘프롤로그’에 작가 본인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사랑의 신’에게 핀잔 듣는 초서의 모습이 나온다.
너[초서-cyrus 주]는 크리세이드가 트로일루스를
저버린 이야기를 영시로 써서
여성들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지?
이제 나[사랑의 신-cyrus 주]에게 한번 대답해 봐.
어째서 너는 여자들을 놓고서 험담만 하고
좋은 소리는 도통 하지 않는 거야?
네 마음속에는 선의라는 것이 없는 거야?
네가 가지고 있는 책 속에는
착하고 정숙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거야?
네가 새 것 옛 것 망라해서 60여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도 아시지.
거기에는 로마인들과 희랍인들이
여러 여자들의 삶을 다룬 긴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데,
백이면 아흔아홉은 좋은 이야기들이야.
이것은 하느님도 아시는 일이고,
그런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아는 일이야.
(『열녀전』 프롤로그, 264~279행, 243쪽)
『열녀전』 프롤로그 264~272행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초서의 자책과 반성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면서 초서는 다음 구절에 자신이 60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자랑)한다. 과거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책이 매우 귀했다. 중세 시대에는 보통 크기의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수십 마리의 동물 가죽이 필요했고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필경사가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써야 했다. 그야말로 중세 시대의 책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초서의 문학 세계, 즉 중세 영문학을 이해하려면 《중세부인 이야기》,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캔터베리 이야기》 순으로 읽는 것이 좋다. 특히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와 그 다음에 나온 『열녀전』은 ‘중세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중세 문학에서 바라본 여성’을 주제로 책을 읽을 때 이 두 작품을 절대로 빠트려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