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이 연극의 포스터는 묘하게 내 마음을 끌었다. 아직 연극을 한번도 본 적이 없던 터라 이 작품으로 시작해보자 싶어서 예매를 해두고 부랴부랴 책을 구입했다. 처음 만나는 연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살짝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기 때문에 책을 읽어두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기 바로 전까지 나는 4막으로 구성된 이 책을 3막까지 읽었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설마 이 책 대로 연극이 진행되는 건 아니겠지, 대사가 너무 많잖아, 이걸 어떻게 다 외워, 했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은 총 네명(중간에 하녀 '캐슬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잠깐동안만 얼굴을 비춘다.) 이고 그 네명만으로 이 책(연극)은 이루어진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고 나니 웬걸, 내가 책에서 읽었던 그 말들이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그 흐름이 그대로 진행된다. 그리고 책 속에서 내가 읽었던 인물들이 내가 읽었던 대사를 내뱉으니 이 연극이 볼만해진다. 만약 책을 읽지 않았다면,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연극을 보았다면 자칫 단조롭고 지루하며 어렵게 느껴질 확률이 크다. 네명의 등장인물, 바뀌지 않는 장소. 나는 책을 먼저 읽어서 이 연극의 어려움을 다소 덜어준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연극배우로서의 손숙은 워낙에 명성이 자자하니 그렇다치고 나는 여기에서 '제임스 티론'의 역을 맡은 김명수에게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의 표정 연기는 리얼하고 성량은 풍부하다. TV에서 어쩌다가 보았던 그를 한 순간도 배우라고 인식해본 적이 없었는데, 맙소사, 그는 정말이지 엄청나게 연기를 잘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에드먼드 역할을 한 김석훈 역시 빼어난 연기를 보여주는데, 간혹 뮤지컬의 주연을 맡게 되는 '이미 인기있는' 가수들과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연극을 다 보고 난 후, 이 얘기가 작가 '유진 오닐'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은거라는 친구의 말에 깜짝 놀라 읽고 있던 책의 표지 작가 소개를 펼쳐보았다.
유진 글래드스톤 오닐(Eugene Gladstone O'Neil)- 유진 오닐은 뉴욕의 한 호텔에서 연극배우였던 제임스 오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호텔을 전전하며 살다가 기숙학교에 들어가지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한다. 이후 6년 동안 남미와 뉴욕을 떠돌며 선원 노릇을 하거나 방랑자 생활을 하던 오닐은 1911년 자살을 기도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 후 그는 결핵에 걸려 요양소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에 스트린드베리를 접하면서 연극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되고, 퇴원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습작 활동을 한 후 신극 운동가들과 함께 뉴욕 무대에 진출하게 된다.(『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책날개 작가소개中)
극중에서는 에드먼드 위로 유진이란 아들이 홍역에 걸려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유진의 형 에드먼드가 홍역으로 죽었다. 그 둘의 이름을 비롯하여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유진의 어머니가 마약 중독인것, 아버지인 제임스가 식구들에겐 인색하며 땅만 사들이는 것등은 모두 그의 삶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쓰고 사후 25년 이전에는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죽기전 아내에게 부탁했으나, 그녀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작품은 내내 우울하고 슬픈 광기를 표현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가슴에 박히는 장면들이 있다. 언제나 독설을 내뿜는 제이미, 그런 제이미가 자신의 엄마를 '마약쟁이'라고 표현하자 동생 에드먼드는 자신의 형을 때린다. 그런데 제이미는 이렇게 얘기한다.
(쉰 목소리로)괜찮아. 잘 때렸다. 이 더러운 혀. 잘라버리고 싶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멍하니) 너무 절망적인 기분이라 그랬던 것 같다. 이번엔 어머니한테 완전히 속았거든. 진짜 끊은 줄 알았어. 어머닌 내가 최악의 경우만 믿는다고 하시지만 이번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직은. 너무 실망이 커서. 이번엔 희망을 갖기 시작했었거든. 어머니가 이겨내시면 나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끔찍한 건, 취기로 인한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맨정신으로 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4막 中)
알콜 중독인 제이미는 어머니가 치료되면 자신도 치료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다시 최악의 경우로 돌아갔을 때 절망하고 만다. 그가 희망을 갖지 않았다면, 절망의 깊이는 이토록 깊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막이 내리기 직전 어머니인 메리(실제 유진의 어머니는 '엘라'였다)의 독백 역시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그 부분은 실제로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를, 실제로 이 공연을 볼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아껴두겠다.
자,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작가연보를 본다. 이 책을 읽기전에 유진 오닐과 그의 작품에 대해 아는게 없었다면, 작가연보에도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그가 있다. 그런데 차라리 모르는게 나았을 것만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 형, 그리고 자기 자신만으로도 그의 삶은 이토록 힘들었는데, 작가 연보를 보니 그의 삶을 도대체 그가 어떻게 견뎌왔을까 싶다.
1910년 - 장남 유진 오닐 2세 태어남. 그러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선원, 부두 노동자 노릇을 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방랑. 이후 뉴욕에 돌아와서도 술에 취해 자살을 기도하는 등 방황을 계속함.
1922년 - 어머니 엘라 퀸랜 사망.
1923년 - 형 제임스 오닐 2세 사망.
1925년 - 딸 우우나 태어남.
1943년 - 딸 우우나가 찰리 채플린과 결혼하자 딸과 의절함.
1950년 - 장남 유진 오닐 2세 자살.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작가연보 中)
그는 총 4회에 걸쳐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1936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다, 라고 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는 나와있는데, 퓰리처상이든 노벨 문학상이든, 그것이 그의 삶을 활기있게 만들어줄 만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것들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걸로 느껴진다.
-덧.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포스터와 공연 일정은 먼댓글로 연결된 람혼님의 페이퍼를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