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의 죄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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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블록의 <아버지들의 죄>를 읽다가, 내가 이 작가의 감성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맞아. 그래. 로렌스 블록은 이런 사람이었어. 하고 새삼스럽게 대단한 것을 깨우치는 듯이.

건조함과 어눌함속에 매우 강렬한 이미지들.

마치 주인공 매튜 스커더의 캐릭터가 말투는 어눌하고 계산빠르지도 못하면서 어딘가 굉장히 냉철한 느낌이 있듯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이 느낌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나보다.

 

 

뉴욕에서 한 여자가 살해된다.

기이한 것이,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칼에 찔려 사망했는데,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여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

뉴욕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괴이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것.

금새 이 수상한 남자가 잡히고, 남자는 자신의 죄를 자백했지만, 구금되어있는 동안 자살해버린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들이었다. 살해당한 사람이 있고, 살해한 사람이 있다.

죽은 여자의 아버지는 사립탐정 매튜스커더를 찾아가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를 하게 된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 역시 그녀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날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고 마이애미에서 한번 엽서를 보낸후, 뉴욕으로 이사간후에는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던 딸의 삶에

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부모에게도 행적을 알리지 않고, 살해당했는지,

부모로써도 궁금할 수 밖에...

 

경찰기반 탐정물들의 주인공들이 의례 그럿듯, 매튜 스커더는 어떤 사건을 겪고 나서 경찰을 그만두었다.

선이나 정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

경찰에 있을 때도 수없이 뇌물을 받아먹던 사람이며, 타인에게 뇌물을 권유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악으로 정의할수도 없다. 그냥 그에게는 그것이 현실이고 살아가는 법이었으니까.

등장인물들의 의뢰에 터무니없는 정의감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죽은여자의 삶을 알고 싶다고 한다면, 딱 그것만 알려주는 사람인 것이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정의롭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비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듯, 그 역시 그렇게 도시에 흘러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분량은 짧은데도 완성도 높고 재밌는 소설이었다. 아니, 재밌다기보다는 씁쓸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범인도 있고 피의자도 있는데, 그들의 인생 모두 씁쓸하다.

왜 씁쓸하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리라. 사람일이란게 다 그렇지 않나.

단조로운듯하지만 저마다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퍼져나가는 사건들, 밝혀지는 여러가지 과거들,

기이하면서도 공감할수 있는 주인공의 처연한 심상들과 그 초라하고 부숴진 주인공들이 서로 위로하며 끌어안으려는 모습들이 쓸쓸해서,

책이 중반이 넘어가면서, 죽은 여자 웬디의 인생을 알게되면서 묘하게 슬퍼진다.

 

짧지만 버릴 곳 하나 없는 밀도높은 소설이었다.

그래. 매튜 스커더는 이랬지.

최고다 최고. 최고라고 밖에는 말할수 없어!

 

p.s 왜 나는 매튜스커더를 보면 브루스 윌리스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알콜중독에, 세파에 찌들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어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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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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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은 있다.
오랜만에 읽은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 <죽지 그래>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단점만 선별하여 묶어놓은 듯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던 책이다.
내가 보기엔 교고쿠 나츠히코의 장점이자 단점은 말 빙빙 돌리기, 그리고 장광설인데, 좋게 풀리는 경우 뭔가 상식을 파괴하는 쾌감을 얻을수가 있다. 교고쿠도 시리즈에서는 그것이 참 좋게 풀린 편이라고 생각하고, 작풍 자체의 신비스러움과 더불어 좋은 시너지 효과를 준다.
그러나 이책은?
상식 파괴의 쾌감같은 것을 느끼기 힘들다. 단지 어떻게든 상식을 파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만 보일 뿐.

평범한 한 여자가 죽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사미라고 한다. 우연히 아사미를 알게된 청년 겐야는 그녀의 죽음 후에 그녀를 알고자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그녀의 어머니.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던 회사 상사. 그녀의 남자. 그녀의 이웃. 그녀의 죽음을 조사중인 형사.
겐야가 알고 싶은 것은 아사미에 대한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아사미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 사람들의 신세한탄을 듣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겐야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힘들면 "죽지 그래" 라고...

이런 식의 인터뷰 구성을 가진 책은 참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신선함을 느끼기는 힘들어서,
구조자체적으로도 독특하다고는 결코 말할수 없다.
이 책을 보는 내내 교고쿠 나츠히코가 무엇을 쓰고싶었던 것일지 궁금했다.
애초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었을지.
현대인의 비겁한 자기변명일까. 아니면 아사미라는 여자의 기구한 인생이었을까.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든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의 상식깨기 스타일의 대화방식이 이 소설의 경우에서는 굉장히 황당한 방식으로 표출되어서,
보는 내내 납득하기도 힘들었다. 내내 자기 신세 한탄 하는 사람도 보기 짜증나기도 했지만, 자기 변명이 아닌 부분에서도 변명하지 말라며 우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그건 발상의 전환도 상식 파괴도 아니다. 그저 억지이며 궤변일뿐이다.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주인공 교고쿠도가 상식 외의 발상을 하여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주는 역활을 했다면, 이 소설에서 겐야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설득력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 궤변을 윽박지르기만 한다.
그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설득당했을까? 소설에서는 그랬던 듯 싶지만, 정작 독자인 나는 설득당하지 못했다.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죽지그래>라는 말 또한, 설득력 없는 부분에서 그저 껴맞추기위해 등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아서
황당할때도 많다. 전체적으로 도가 지나친 느낌+자기 컨트롤을 못한 느낌을 받은 책이 이 책이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광팬이라면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읽어야 할것이고, 라이트팬이라면 그냥 이책은 포기하라 귀뜸하고 싶다.
솔직히말해, 실망적이다.

p.s 이 책 말미에, 작가와의 인터뷰가 실려있는데,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더 심어주기에 딱 좋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을 보면서 한번도 그가 자상하거나 친절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은 안해봤지만,
쿨하다 못해, 작품에 애정조차 없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상당히 불쾌하더라.
이 소설은 그저 어디선가 의뢰받았기 때문에 나온 소설이다-라는 늬앙스를 강하게 느낀 것은 나뿐일까.
이런 인터뷰라면 그냥 싣지 않는게 좋겠다.
소설 마지막까지 읽고 뭔가 교고쿠 나츠히코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참 성의없이 썼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인터뷰를 보고나니 그런 생각이 사실인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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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1-09-2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pple님 안녕하세요. ^^;
항상 살짜기 들러서 글만 읽고 가다가 결국 댓글 씁니다. ;;;; 저도 이 책 읽고 무지무지 실망했었거든요. 서점에서 발견하고 작가이름에 홀려서 샀는데 이건 뭐지 -_- 하는 심정이 되더라는. 인터뷰 읽고는 정말 학을 뗐어요. 무성의의 극치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바로 알라딘 중고서점에 넘겼답니다. ㅠ_ㅠ

Apple 2011-09-20 19:10   좋아요 0 | URL
아, 무성의는 저만이 느낀게 아니군요.ㅎㅎㅎ허허...진짜 이런 인터뷰라면 싣지 않는게 좋지 않나요? 모든 답변이 성의없기도 했고, 이 책마저 성의없는 의도로 집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게다가 이런 소설 또 쓸 의향있냐고 물어봤을 때는 또 의뢰 들어오면...이런식으로 답변하더라고요. 허허...황당했어요.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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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금새 잊혀져버릴 것만 같은 책.
딱히 굉장히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본듯한 반전들, 아니 반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재쳐두더라도,
이런 소재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했을 어떤 것을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분량에 비해 꽤 빠른 시간에 집중해서 읽을수 있는 책이긴 했지만,
읽고나서 특별한 임팩트를 느끼지 못했음이 아쉽다.
 
이제 곧 10살이 되는 미치오는 종업실날 결석해버린 같은 반 친구 S에게 숙제와 유인물을 주기 위해 S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충격적인 장면.
목을 맨채 자살해버린 S와 맞딱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일 후, 자살한 S는 거미가 되어 미치오 앞에 나타나 자신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며,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아달라 말하며, 자신을 죽인 범인이 자신들의 담임 선생님인 이와무라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미치오는 세살짜리 여동생 미카와 함께 이와무라 선생님을 뒤쫓기 시작한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초등학생. 그리고 그 아이 앞에 나타난 환생이라는 기묘한 이야기들.
비누를 입에 물고, 다리가 꺽인 채 죽어서 발견되는 동물들.
이상성욕과 이상심리들이 맞물리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소설은 아니었다.
 
몰입하기 힘들었던 요인중에 하나는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대화체로 대화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책 후반에 이렇게 설명되어있다. "세살짜리 치고는 말투가 유창한 이유를 알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10살짜리 치고도 너무나 어른스러운 말투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졌다고 밖에는 할수 없다.
게다가 자살하는 초등학생이라니, 시작부터가 조금씩 거북하기 시작하더니, 초등학생을 데려다놓고 어른처럼 이야기 시키는 듯한 거북한 느낌은 이 소설의 소재 그 이상으로 아이러니 하면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아이가 관련된 끔찍한 사건을 다룬 이야기는 손을 불끈쥐게 되면서도 굳이 마다하고 싶지 않지만,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말하는 아이가 화자인 이야기는 꺼리게 된다. 왜일까? 어쩌면 아이가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재가 충격적일 뿐,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소설은 되지 못했다.
등장했다가 어느 순간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등장인물들도 많았고 다 읽고 나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런 것보다도 그저, 초반부터 반전이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반부부터의 이야기가 시시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은 <섀도우>이후로 처음인데, <섀도우>는 보고나서 상당히 짜증났던 기억이 난다.
대표작이자 인기작이라는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역시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나와 주파수가 그닥 맞지 않는 작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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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12-05-0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읽었어요. 미치오 슈스케 출세작이라던 이름값에 비하면 여러모로 아쉽더라고요.
XXX가 등장하는 순간, 범인인지 알아챔ㅋㅋㅋ
그리고, 설정도 과해서 공감이 안되었고요.
 
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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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맥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여동생과 함께 이사온다.
빨간 머리에 어여쁜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소년은 이웃집에 사는 소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맥의 부모는 죽었고, 보호자인 루스 아줌마는 맥에게 살찐다며 음식을 주지 않고, 사사건건 맥의 자유를 방해한다.
자존심이 강한 열네살 소녀 맥은 루스 아줌마의 폭언과 학대를 못견디고 경찰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말해보지만,
보수적인 작은 마을안에서 그 일은 루스아줌마의 교육태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 망신시키는 철없는 계집애의 망언이 되어버린다.
그 일을 계기로, 루스 아줌마는 맥을 점점 더 학대하기 시작한다.
방공호로 만들어진 지하실에 맥을 가두고, 음식도 물도 주지 않은 채, 대답할 가치없는 어이없는 질문을 하며 지하실에 매달아놓고 고문하며, 여기에 자신의 10대 세 아들들까지 가세시킨다.
그리고 점점 동네 10대 소년들은 이 이웃집 소녀 맥이 고문당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또는 고문을 자행해보려고 지하실로 모여든다. 그들은 루스를 발로 차고, 때리고, 칼로 찢고, 화상입을 정도로 뜨거운 물에 샤워시키고, 담뱃불로 지지고, 성폭행까지 하고 맥의 몸을 만신창이로 훼손시킨다.
루스 아줌마 옆집에 사는 열두살 주인공 데이비드 역시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이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으면서, 데이비드는 때로는 방관하고, 때로는 그들의 행동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
데이비드가 직접 맥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맥은 첫사랑 소녀였기 때문에.
그러나 데이비드는 벌거벗겨진 채 천장에 매달린 맥을 보며 끊임없이 만지고 싶어하고, 그 모습을 잊을수가 없어서, 루스의 집 지하실에 자꾸 드나들게 된다.
죄책감과 쾌감을 동반한 엄청난 자극. 12살 데이비드는 거기에 홀려버린 것일까.
 
정황을 모르고 본다면, 이 소설은 천인공노할 만큼 어이없을만큼 끔찍한 스릴러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부모잃은 두 아이를 거둬키우는 주인집 아줌마가 소녀를 상대로 학대를 저지르는 것 하며, 그것도 모잘라 10대의 세 아들들이 여기 가세하고, 거기에 동네 10대 아이들이 모두 가세해 한 소녀를 농락하고 고문하는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들중 누구라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부모에게 말했을 법도 한데,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철저히 광기어린 폭력에 물든 모습들과 내 일 아니라고 고개 돌려버리는 모습들, 그 모든 것이 치가 떨리게 공포스럽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장소와 인물과 약간의 사건을 변경했을 뿐, 거의 똑같은 사건이며, 정말 어이없게도 이 정도가 실화를 순화시킨 거란다.
"인디애나주 역사상 한 개인을 상대로 저질러진 가장 끔찍한 범죄"라는 이름이 이 책에 붙어있는데,
아마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끔찍한 일들은 세상에 더 벌어지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갈수없는 상태에서,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출구없는 공포를 이 사건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맥의 말을 단순한 가정불화로 설명하려드는 경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게 미덕이라 믿는 이웃집 사람, 같이 놀았던 기억도 있으면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어린 소녀를 보고 자신들도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동네 아이들.
모든 사람이 공범자이며 가해자다.
그리고 이 소설의 화자 데이비드의 존재 역시 공범자가 되듯, 이 소설을 잃고 있는 독자 역시 공범자가 되어버린다.
 
이 기묘한 집단 광기속에서 고통받고 외로운 맥은 꿋꿋하고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맥이었다. 아무리 찢기고 밟혀도, 인간으로써 포기하지 않아야 할것은 포기하지 않는 맥은 끝까지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맥의 고통들이 더 슬프고, 마음이 찢어질정도로 애처롭게 느껴졌으리라.
옆집 소년 데이비드가 자신도 알수 없는 광기에 휘말려가며, 적어도 나는 직접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며 자신을 위로하는 가운데에서도, 까닭없이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래서 종종 이유없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이유없이 울음이 터져나올 때 나도 같이 울었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맥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도 같이 많이 울었다.
끝없는 고통과 공포속에서 맥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맥이 말했을 때에도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근 몇년간 이렇게 슬픈 소설은 또 난생 처음이라 울고 또 울면서 책을 보았다.
 
끔찍하게 무서운데, 동시에 끔찍하리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만약 이 소설을 다른 작가가 썼을 때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사유하지 않고, 고통에만 초점을 맞춰, 세상에 넘쳐나는 다른 스릴러 소설들과 똑같은 접근을 했더라면, 이 소설은 망작중의 망작이 되었을 터.
그러나 작가는 끔찍한 현실에 필터를 거르기 위해 이웃집 소년을 등장시키고, 그 이웃집 소년을 통해 우리들의 무관심과 방조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며, 언제나 상냥하던 이웃집 아줌마가 광기에 쩔어가며 이유없는 학대를 일삼는 괴물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보고있는 사람들 까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되찾을수 없는 순수와 인간성 상실의 아픔을 맥의 아픔만큼이나 절절하게 느낄수 있게 만들었던 문체 또한 탁월했다. 어쩌면 글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맥의 고통과 죄책감의 고통은 더 배가 된다.
이 책은 공포소설의 외형을 띈 고발소설이면서, 한편으로는 돌아올수 없는 일을 회상하는 성장 소설이었어서 더더욱 마음 아팠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그녀를 고문하고 죽였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은 죽었고, 어떤 사람은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10대였던 그들이 어른이 된 지금, 모두가 한마음으로 맥을 잔인하게 고문했을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모르겠다..(1965년도 사건이니,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미 중년을 넘겼겠다.)
한때 치던 장난으로 기억하고 있을지, 뒤돌아 생각해보고 끔찍하게 잔혹했던 자신을 반성했을 지.
그들이 그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죄책감의 공포속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단다.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한 가지는 선한 자들의 방관이다"
내 손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래도, 우리는 잘못된 세상을 향해 어느정도 죄책감은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귀찮아 무시한 일들이 커다란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에 하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고, 도망치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타인을 소중하게 여겨야 자신도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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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섬 밀리언셀러 클럽 119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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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리노 나쓰오 소설이 풍년이 나서 기쁘다. 이번에 발간된 <도쿄섬>과 더불어 미로 시리즈가 두편이나 발간되고. 팬으로써 이렇게 기쁠수가!!!!
 
도쿄는 당연히 섬인데, (아니 그나라 자체가 섬인데...) 이책을 <도쿄섬>이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기리노 나쓰오 판 LOST라고도  볼수 있는 이 책 <도쿄섬>에는 이름모를 섬에 조난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남편과 크루즈 여행중 배가 좌초되어 이름 모를 섬에 정착하게 된 가즈코. 이상하게도 척박한 상황에서 서바이벌 본능을 일깨워 강해지며 심지어 살까지 찐 그녀와는 다르게 남편은 식중독으로 시름시름 앓으며 약해져만 간다.
그러던 중, 힘든 아르바이트를 못견디고 탈출해온 27명의 젊은 남자들이 그들과 똑같이 좌초되어 이 섬에 갖히게 된다. 구조되기를 기다리지만, 구조에의 희망은 점점 사라져가고, 그러던 중 버림받은 중국인들 열명까지 합세하면서 이 섬은 남자들이 들끓게 되어버린다.
이들은 이 섬을 도쿄섬이라 부르고, 지역마다 <시부야><쥬크.><기타센쥬>등등의 이름을 붙이며 도쿄처럼 대하려고 노력하고, 후에 등장한 중국인들을 <홍콩>이라고 부르게 된다.
 
30여명의 남자와 단 한명의 여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지 않은가?
마흔도 넘은 중년의 아줌마이지만, 섬의 남자들은 앞다투어 가즈코에게 잘보이려 노력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견디지못하고 식중독으로 점점 죽어가는 남편과 섬의 여왕벌이 된 가즈코.
남편이 죽자, 급기야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가즈코의 남편을 가리는 일까지 해버린다.
그런데 왜인지, 가즈코는 흡족스럽다. 이렇게 많은 남자에게 관심받아본 적도 처음일 뿐더러, 모두 자기보다 훨씬 어린 남자들 아닌가. 자기가 손 하나만 까딱하면 남자들이 몰려드는 이 여왕벌같은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색되어 간다.
 
<도쿄섬>은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답게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참 정떨어지고, 저마다 진상짓을 해대며,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의심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똘똘 뭉치지는 못할 망정, 여기서도 그놈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은 어쩌면 현재의 일본인(특히 남자)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만적일 지언정, 척박한 땅에서도 생존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강인한 생존력을 가진 <홍콩>들과 달리, <도쿄섬>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하고, 나약한데다가 자기중심적이라, 온실속의 화초를 산에 풀어놓았을 때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홍콩>들이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심지어 맛을 내기 위해 양파나 마늘 비슷한 것도 찾는 마당에, <도쿄섬>의 남자들은 감나무 아래 누워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구하기 쉬운 음식을 섭취하고, 이 섬에서 벗어나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누군가는 정신을 놓고, 누군가는 포기하고, 이 섬에 좌초하게 된 것에 대해서 남탓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와중에 본래의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허세까지 부린다.
섬의 단 한명의 여자, 가즈코 역시 긍정적인 인물이라 보기에는 힘들게, 모든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이상한 여자이긴 하지만, 적어도 생존력은 강하기 때문에, 가즈코는 내내 도쿄섬의 남자들을 비웃으며 이용할 방법을 찾으려 한다.
함께 살아남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서로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해먹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증오를 선택해버리는 도쿄섬 사람들. 얼핏 그 이유가 이해가 가기도 하면서도, 참 인정사정없다 싶다. 정말 이렇게 짜증나는 인물들만으로 소설을 쓰는 것도 재주이다. 내가 기리노 나쓰오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그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된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하고는 없어보인다. 다만, 그들의 삶은 어디에 있든 비슷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리더쉽있지만, 실은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리더 GM이나, 남 이용해먹고 거짓말 하는데든 일각연 있는 가즈코나, 둘다 어디에 있든 인생의 본질 자체는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 2차대전 당시, 실제로 30여명의 남자들과 단한명의 여자가 표류되어 살다가 구조되었던 일을 바탕으로 씌여졌다고 하는데, 기리노 나쓰오는 그 옛날 사건을 빌어서 현재를 말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지금의 "일본"은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도쿄> 그리고 <도쿄섬> 양쪽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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