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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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을 때, "우리는 촛대"(<우리는 촛대>)처럼 오롯이 홀로 되어 "밤하늘 언덕에 풀을 몰고 다니던 염소들"(<달 내음>)을 관찰하듯 상상하거나 '내 속에서 돋아든 달과 내 속을 집어먹은 내가 서로 바라보는'(<그때 달은>) 것을 응시한다. 

삶이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망설이는, 바위"(<낯익은 당신>) 같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 중단되는가. 중단된다면 시는 없을 것이다. '땅 속에서 감자가 감자의 시간을'(<물 좀 가져다주어요>) 살 듯이 우리는 망설이는 시간 속에 사는 존재이며, 도무지 향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해에게서 시까지 내려왔다. 

 

 

땅을 헤쳐 발굴을 하는 시인의 이 시집 속 은 그래서 유난하다. 
"삼엄하게 해가 떠오르던 날"(<영변, 갈잎>),  "폭약 많은 오후"(<연등 빛 웃음>), "마른 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해는 우리를 향하여>) , "해는 이곳에 아찔한 정적을 경작하고 / 햇빛은 자유 데모보다 더 강렬하게 / 폐허의 심장을 움켜쥐지요"(<새벽 발굴>), "별을 구우려고 불을 피우거나 하는 이도 있지만"(<별이 별이>),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빛이거나 누런빛이거나 하던 거"(<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사막에는 아이를 키울 빛이 서성이고 있는데"(<코끼리, 거미 다리를 가진, 그 해변에서 달리가 그린, 그 코끼리>), "야자잎 드문드문 빛의 존재를 지우는데도 빛은 있다"(<물지게>), "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작은 아가의 귓바퀴 위에도 빛나는"(<그렇게 조용했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 "그 물 위 당신이 뱉어낸 별들 안아 들일까, 말까 / 그 물속 사라지는 저 빛 어쩔까, 나 말까"(<저 물 밀려오면>)

 

 

시인은 사물을 털어 땅의 명(命)을 발견하듯이 빛 속에 사물을 두어 빛의 명(命)도 따른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저녁 스며드네>),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고 들어왔다"(<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만>), "저 불을 아무도 빼앗지 않는 곳에 두고 싶어요 "(<엄마>), "눈빛 아래 혼자 돋아나는 발자국"(<눈 오는 밤ㅡ진이정을 추억하다>), "빛으로/기어가는 뱀 한 마리"(<배>), "빛 속을 걸어다니고 싶었던 말 한 마리"(<말 한 마리>)

 

 

이 시집의 바탕인 하늘과 땅의 공존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과 없는 일'(<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이 함께 있는 것이라 보여주고, 우리가 어둠과 빛 모두에 속하면서도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이 빛들은 '통증이며 아스피린'(<달이 걸어오는 밤>)이라 내가 아프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기침마저 빛난다. 이 시집에서 내가 느끼는 감동은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기쁨이여>)이다. 하늘과 땅은 오래전부터 서로의 거울이었고, 그 사이에는 상반된 것이 언제나 공존했다. 내 바깥의 것들은 모두 나를 비추는 빛으로 돌아온다.  어둠마저도.

 

 

 

오늘도 해가 졌다. 어둠과 빛 속에서 우리는 제 한 몸으로 쉼 없이 태어나고 자란다. 매일매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 시는 하루의 마지막 빛처럼 도착하고 나는 계속 읽을 것이다. 그물이 고리를 벗어 물빛으로 풀어지며 내가 사라질 때까지. 

 

 

 

 

 

2005년 나온 허수경 시인《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세월이 흘렀어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이 빛의 고고학은 성공한 거 같다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 그냥 지나칠 역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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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10-11 1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냥 궁금해서 여쭙니다. ^^
인용에 매번 페이지 번호 넣으시는데, 특별한 의미 있으신지요?^^
읽는 사람에게는 과속방지턱처럼 턱턱 걸려서요. ㅋ

AgalmA 2016-10-11 20:07   좋아요 2 | URL
인용이 아니라 강조로 혼동해 제 표현으로 알고 넘어갈까봐 굳이 그렇게 합니다. 읽기 불편할 거라는 거 압니다. 시 경우는 제목도 중요해서 그것까지 넣으니 이중 과속턱을 만들고 있죠ㅎ;;
어떻게 하면 더 가독이 잘 될까 연구해 볼께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허수경 시인이 `너 없이 걸었다`(에세이집)로 전숙희 문학상을 수상했다지요. 최근 모습의 사진은 시인에게 많은 세월이 쌓인 듯 하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에세이집인 `모래도시를 찾아서`에서 시인은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난 뒤 하는 수 없이 가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로 인해 여성성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하지요.

한 가족의 생계를 떠맡는 살벌함이란 말도 함께 나왔지요. `모래도시를 찾아서` 이전에 나온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의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자신의 독일 체류를 어머니, 다른 식구, 그리고 벗들의 인내를 파먹고 살았던 시기라 말합니다.

독일에서 살아갈 것이란 말을 들으니 전숙희 문학상 수상작인 `너 없이 걸었다`가 궁금해집니다.

뮌스터....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의 대비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모래도시를 찾아서`를 통해 감지할 수 있고 명(命)이란 주제는 `혼자가는 먼 집`을 통해 명시적으로 접할 수 있지요.

고고학과 연결지은 발상이겠지만 ˝땅을 헤쳐 발굴을 하는 시인의 이 시집 속 빛은 그래서 유난하다.˝는 해설은 좋습니다.

새 시집이 반가운 한편 밀린 숙제를 하지 못한 것 즉 이전 시집의 미진한 읽기는 구입을 망설이게 합니다.

어둠과 빛의 대비를 새 시집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으리라 보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AgalmA 2016-10-11 20:36   좋아요 3 | URL
허수경 시인 산문도 몇 번 읽어 봤는데, 글 잘 쓰시죠. 무엇을 쓰든 보통 이상 보여주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성의 포기는 현실적인 얘기일 뿐 허수경 시인의 시는 누가봐도 여성성으로 가득한 시입니다.

이젠 벌써 타국 생활 25년 째라고 하더군요. 시에서 그런 페이소스가 가득하고요. `모래도시`란 제목도 고고학에서 나온 것이겠죠.
타국에서 시를 쓰는 한국시인의 예가 거의 없는 데다 고고학이 직업이라 허수경 시인은 좀 독특한 시적 지대를 보여줘 주목되죠. 한국적인 걸 잘 아는 시인이 타향살이를 하며 한국어로 쓴 글이라 그 자체가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것입니다.
차학경이 또다른 차원의 연구거리였듯^^

새 시집을 미리보기로 잠시 봤는데, 1부는 이제껏 가져온 주제의식과 소재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고, 과일 제목이 주루룩 나오는 2부부터 어떤 변화를 보여줄 지 궁금하더군요. 제목으로 보면 4~5부가 가장 궁금한 부분입니다. 새로운 대비를 보여주길 바랍니다.

정보될 만한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수경 시인은 여성성보다 모성(여성성이 모성에 포함되겠지만)적인 면이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 나오는 ‘폐병쟁이 내 사내’, ‘조카 이름 같은 꽃이’ 등의 시로 인한 깨달음이라 생각합니다. “...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폐병쟁이 내 사내’), “...제 어미 빈 젖 같이 아직 찬 햇살을 받고 일찍 피어 있/ 었습니다/ 혈육 같은 꽃 속으로 들어가/ 얼른 봄이 되고 싶었습니다/ 꽉 찬 젖을 맘껏 빨리고 싶었습니다”(‘조카 이름 같은 꽃이’) 등의 구절로 인한 깨달음일 것이란 의미이지요.

김이듬 시인의 ‘베를린, 달렘의 노래’의 발문에서 허수경 시인이 이런 말을 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괴테의 시 ‘방랑자’ 에 대해 릴케가 한 “시인은 세계들을 제 속에 지니고 다닌다. 그래서 언제나 부자다. 비록 배고플 때에도”란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저에게는 이 인용마저도 모성의 한 표현인 듯 보입니다. 지난 번 ‘혼자 가는 먼 집’을 주역으로(풍천소축과 산뢰이 등으로) 풀어보았는데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잘 되지 않아 포기했지요. 그러나 이번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AgalmA 2016-10-11 21:10   좋아요 1 | URL
저는 여성성이 더 큰 테두리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모성 속에 넣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모성과 여성성을 개개로 나눠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언급하신 구절들은 모성적인 면이 강한 게 있죠. 그러나 사랑을 갈구하고 찾는 詩도 많은 만큼 그런 경우 `모성`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성이 더 큰 범주로 타당할 것입니다. 시에서조차 mam을 강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시인은~ 배고플 때에도˝ 대한 언급도 모성이란 틀로 보려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자식 밥을 걱정하듯이란 생각은 벤투님의 관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시인은~ 배고플 때에도˝ 그 표현은 디아스포라와 노마드가 합쳐진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김이듬-베를린 연결만 봐도 허수경 시인은 그걸 염두에 두고 그런 표현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시단에 중요한 시인이기도 하니 벤투님의 분석 기대하겠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아스포라의 정서를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은 그런데 누군가 왜라고 물으면 순진하게 무조건 믿는다고 말합니다. 순진하게란 말, 무조건이란 말 등이 모성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모성도 변하고 여성성도 변하겠지만,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 어머니인 시간은 당연히 일부이지만 모성은 여성성에 비해 덜 변하고 덜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수경 시인에게서 모성을 더 크게 보는 것은 많은 또는 무난한 해석이어서 벗어나고 싶은 점도 있습니다. 허수경 시인은 모성으로 알려져 후에 사랑을 갈구하는 시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해도 사람들의 인상에 고착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AgalmA 2016-10-11 21:43   좋아요 1 | URL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무조건 믿는다, 순진하다 그것이 왜 모성과 관계되는지.... 의미 그대로 동심, 순진함, 백치 그런 걸로 해석이 안되고 왜 여성들의 표현들을 ˝모성˝이란 둑에 가둬 두려고 하는지. 폭력성, 남성성을 ˝부성˝이라고 하진 않잖습니까. 왜 여성들을 ˝모성˝으로 자꾸 가두려 둡니까. 지금의 페미니즘 논란처럼 여성성은 가늠하기 어렵고 불안정하기에 모성이 안정적인 개념이라 그걸로 모아서 해석해 보려는 ˝경향성˝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데요. 굉장히 이데올로기적인 겁니다.

허수경 시 평론들을 살펴보지 않아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모성˝으로 고착시키는 것에 저는 반대입니다. 평론은 고착 이상의 걸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멋지고 안정적인 틀로 잘 꾸민 밭처럼 꾸민 평들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을 만큼 뿌듯하고 읽기엔 좋겠지만 작가에겐 사형대죠....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맹목을 생각한 것입니다. 여성(어머니가 아닌 존재들)도 맹목적일 수 있지만 그런 점은 어머니가 더 한 것이라 봅니다. 궁금한 것은 모성을 이야기하면 무조건 그 틀에 가두는 것인가요? 모성이 아닌 것을 모성의 틀로 보는 것이 문제이지 뚜렷한 모성성을 모성이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혹 모성만 이야기하지 말고 다른 것들도 보고 작품화하라고 하면 수긍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시인이든 소설가이든 하나의 주제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지요. 삶이란 복잡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한 시인의 한 편의 시가 아닌 시집 한 권이나 시인의 시 세계를 말할 때는 모성도 이야기하고 여성성도 이야기하고 디아스포라적 정서도 이야기하고 다른 정서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점들이 주요 경향으로 뚜렷하고 평했을 때 새로운 인식 확장에 기여한다면 말해야겠지요.

AgalmA 2016-10-11 21:53   좋아요 1 | URL
예. 제가 말하고 싶은 게 그겁니다. ˝모성만 이야기하지 말고 다른 것들도 보고˝ 종합화 해서 말해 주길요. 말씀처럼 긴 시간 동안 창작을 하는데, 기존의 이미지와 주제로 계속 보려 하면 안될 것입니다. 지금 제가 쓴 이 시집 평도 고고학을 연구하는 허수경 시인이 잘 드러나는 시들에 집중했지 토박이 말로 꾸민 향토색 짙은 시들은 전혀 언급을 안했습니다. 풍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줘야 할 겁니다.

성미정 시인 같은 경우 결혼 이후 정말 ˝모성˝이 강해진 시들인데, 그 시들과 허수경 시인의 시를 비교하면 허수경 시인의 시는 모성보다 차라리 모던에 더 가깝다 말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허수경 시인 시에 모성이 타이틀이 되는 것에 제가 이런 반응을 하는 것.

yureka01 2016-10-11 2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찍으로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빛을 쫓았건만
빛의 고고학은 한번도 발굴해 보지를 못했네요.
시집에 빛의 지도가 있는지 찾아 보겠습니다.^^

AgalmA 2016-10-11 21:47   좋아요 2 | URL
아이고, 깜짝이야;
아마추어인 제 눈엔 빛 엄청 잘 잡으시던데요.
가만, 생각해 보니 사진으로 빛을 발굴한다....어떤 작가가 있을까 생각해 볼 부분이네요.
yureka01님이 어떤 빛의 지도를 찾아 보여 주실 지 기대하겠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누가 모성을 이야기할 경우 바로 그것을 모성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이라 보기보다 그가 하는 평의 주요 흐름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성도 순종, 희생, 맹목이 아닌 영화 마요네스인가요 그런 새로운 시각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모성 이야기만이 아닌 모두 해당되는 바이지만 끊임없이 새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건은 형상과 생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겠지요. 프롬도 인간의 본질이란 말을 쓰지 않고 본질적인 것이란 말을 쓰며 인간성의 상수와 변수를 이야기하지요. 문제는 무엇을 상수로 보고 무엇을 변수로 볼지이겠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미정 시인 이야기가 수정, 추가되었네요. 제가 읽은 바가 없어 아쉽네요. 훗날을 기약하고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AgalmA 2016-10-11 22:02   좋아요 1 | URL
성미정 시인 초반 시들은 독특해서 좋아했는데, 결혼후 생활밀착형 시를 쓰고 계셔서 180도 변한 케이스죠... 이럴 땐 참 어찌 반응해야 할 지....
암튼 벤투님의 균형잡힌 시평으로 시인들이 새롭게 빛날 수 있길 바랍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11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을 주역으로 풀어본 것도 새롭게 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요.

달걀부인 2016-10-11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과 글에 대한 댓글들(특히나 벤투의스케치북님과 알갈마님의) 심각하게 읽으면서, 이보다 완벽하게 책을 읽을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꼬심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찬찬히 한명의 작가를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럼 또 택배로 책을 보내야한다는 말입니까? ㅜㅜ

AgalmA 2016-10-11 23:26   좋아요 1 | URL
벤투님이나 저나 시 판매 촉진 모임 같은 건 아닌데 그렇게 된 격이네요^^;;
시집은 분량이 적어서 e-book으로 많아도 좋을 거 같은데, 보호 차원인지 잘 없어서 달걀부인님의 시집 읽기에 도움이 안 되고 있네요;;
대화에 귀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고기자리 2016-10-12 1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걸 느껴요.

시를 읽거나, 시를 읽는 나를 읽거나, 시를 쓴 시인을 읽거나, 시를 읽은 독자를 읽거나, 나누는 대화를 읽거나 하며 말이죠 ㅎ

어떤 시구절, 어떤 문장도 나를 통하지 않곤 읽을 수 없으니 저자와 나를 동시에 읽는 것이 읽기가 아닐까도 싶어요..

`내 바깥의 것들은 모두 나를 비추는 빛`이니까,

`도무지 향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루의 마지막 빛처럼 도착하는`
그 무엇을 소원하며,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나 봅니다..

AgalmA 2016-10-12 16:30   좋아요 2 | URL
^^ 세상이 강요하는 틀을 너무 싫어해서 제 문장도 그래서 비,오문 투성이죠.
인상이란 원래 내가 읽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게 우선이잖아요? 그때 타인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죠. 그걸 고려할 상태도 아니고ㅎ 타인을 위한 글쓰기로 올 땐 잘 정서해야 하는데, 고치다보면 처음 날 것 느낌이 날아가버려서 죽도 밥도 아니게 될 때가 많더라고요. 퇴고가 제일 고역.

언제나 제 식으로 읽고 싶어요. 물고기자리님이 잘 보신대로 이 글도 시인의 문장으로 저를 모아본 것이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문장들이 가득했으니까. 물고기자리님이 따옴표로 가져온 제 표현에도 물고기자리님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언어가 우리가 하나이면서 공동체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는 걸 거듭 확인합니다. 그래서 읽고 쓰는 일에 얼마나 사랑이 스며 있는지도.

물고기자리 2016-10-12 16:25   좋아요 2 | URL
네, 시인의 말이 아닌 A 님 글이라 작은 따옴표로 가져왔어요^^

시인이 본 것에서 무엇을 보았는지가 중요한 거겠죠. A 님이 본 것에서 제가 본 것을 또 표현해 본 거고요 ㅎ

읽고 쓴다는다는 것에 대한 A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시인선 85
박정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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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1987) & Nick Cave & the Bad Seeds  "From Her to Eternity(그녀에서 영원까지)"



평생 자신을 사로잡는 것들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 천사도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린 삶에도 영원에도 묶인다. 먹고 자고 질투하며 자식을 낳는 우리 모습을 神에게 투영하기도 하면서. 오늘도  "말갈이나 숙신의 언어로 비가 내리고" (<그때 나는 여리고성에 있었다>) 셀 수 없는 비처럼 언어처럼 "여진(眞), 여진(眞)", "아무르, 아무르" 를 가만히 입안에서 굴린다.

 

 

이 시집의 첫 시는 <무르>이다. 정대 시인의 시를 꾸준히 읽어온 사람에겐 익숙한 단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언제나까지나 반복할 단어. Amour, 사랑. 이 시에는 짐 자무시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도 스며 있다. 그들이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성과 제약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에서 이 사랑의 속성은 같다. 모두 사라져도 사랑은 살아남아 존재(사람이 아니라도)의 사랑을 키울 것이다. 뱀파이어도, 천사도 벗어날 수 없어라.

 

 

"상처 입은 것들의 면은 모두 한 채의 절"(<금각사>)이라고 했다. 같은 시에서 "상처 입은 것들의 면은 모두 금각사"라는 말도 했다. 상처로 반짝이는 것이라면, 사람과 별과 부러진 칼의 차이는 없다. 비유는 때론 야멸차지. 반짝이기 때문에 가끔 서로 마주하지만 말은 건네지 않는 사이. 어두워서 마주하고 차가워서 마주하고 어떤 이유로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사이와 사이. 이유가 없는데도 따지면 이유가 있는 사이. 양자역학과 우주의 끝을 말하지 않아도 이유는 아주 쉽게 만들어지고는 한다.

"인류를 구원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시인이란 존재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시인의 말에서 나는 "해 있기 때문에"를 되풀이해서 읽는다. 속해 있기 때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은 인류에 속해 있는가. 인류의 기원이기에 구원도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인가. 인과를 따질 때 나는 화가 나기보다 슬프지만 냉정해지려고 한다. 
한참 생각 중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게 무엇을 더 해 주면 좋겠니.   
아니오, 아니오. 
결코영영은 모두에게 아픈 말이다.   
우리는 다른데 이토록 속해 있다.   
뜨거운 차가 1도 정도 더 식고 밤이 더 깊어지고 비가 더 적셨다.   
자네, 너무 멀리 나간 거 아닌가. 시인은 말한다.   
'내면의 깊이를 획득한 말의 싱싱함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어쩌면 이런 것.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는 함께 잠들 수 있지만 아침이면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로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깨어나야 한다"는 애정 공산주의의 수칙에 공감하면서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콜로이드 소노르Colloides sonores, 즉 교착적 음향의 사랑을 꿈꾸는 나는 어쩌면 애정 라이프니츠주의자에 가깝다 // 타자(他者)에 대한 영원한 동경 때문에 나는 삶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 고독과 분별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의기양양(계속 걷기 위한 삼중주>)

"전직 천사"라 천진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세계를 배회하던 시의 날개를 접고 시인은 말한다.
"삶이란 스스로 꿈꾸는 한 편의 시이다. 전직 천사는 날개 달린 발로 온 세계를 떠돌며 단 한 편의 시를 쓴다. 허공을 살다 영원으로 사라진다. 영원이라서 가능한 밤과 낮이 여기에 있다. 그럼 이만 총총"

이 순간 시를 쓰고 있는 사람, 시가 필요 없는 사람에게 '적 상상력'이란 쓸모없는 말. 그것은 설명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니피앙이자 시니피에. 그 조차 아직 반짝이고 있긴 한 걸까. 몇몇의 귀를 위해 말하려는 노력.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내일 구름은 몇 개나 뜰까. 확실한 건 내가 알 수 없는 만큼 존재하고 사라질 거라는 거.
 
 

짐 자무쉬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4)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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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6-10-07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아름다워 불을 지른 이야기에서 이성복 시인의 아볼리 비블로 디나니떼 소노르까지.. 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 이르기까지 생각거리를 뭉터기로 던져주는 글이네요. 알 수 없는 Agalma님!

AgalmA 2016-10-08 00:38   좋아요 2 | URL
벤투님은 반짝이는 걸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 오늘도 비를 뿌리며 생각구름이 뭉게뭉게 흘러 갑니다...
알 수 없다니 정상! :)

북다이제스터 2016-10-07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시니피에 보다 시니피앙에 의미가 더 크다고 느낍니다. 다의적인 것이 더 좋습니다. ^^

AgalmA 2016-10-08 00:40   좋아요 0 | URL
저도 시니피앙쪽에 더 비중을 두는 편... 오죽하면 제 서재 프로필이 ˝아마도 남는 건 기호˝겠습니까. :)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8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제 공부가 많이 부족한 탓이지요...

AgalmA 2016-10-08 07:14   좋아요 1 | URL
知에 대한 욕심(긍정의 뜻)이 많으신 것이지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요^^ 별자리처럼 풍성히 엮어 가시길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그 문제라면 저도 당연히 부족합니다! 아니, 제가 더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8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글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기원 감사드립니다. 네 맞습니다. 풍성하게 엮어 가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

AgalmA 2016-10-08 20:59   좋아요 1 | URL
벤투님 글에 제가 배우는 만큼 저도 도움이 된다면 기쁜 일입니다. 주말 좋은 기운 충전되셔서 또 많은 반짝이는 걸 발견하시길^^ 그걸 늘 나눠주고 싶어하는 분이시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겠죠~

물고기자리 2016-10-08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유독 머리형 사람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생각의 속도와 비례하는 글의 속도랄까,

저 같은 가슴형 인간은 누가 머릿속을 헝클어주면(자극해주면) 저 혼자 가슴이 뜨거워지며 이런저런 영감을 받고 아, 좋다.. 여기서도 생각해봐야지, 저기서도 생각해봐야지 이러거든요 ㅎ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는 글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일 듯싶어요. 장황하고 설명적인 글보단 자신과의 대화, 또는 누군가의 대화, 다 하지 않은 고백(아니, 할 수 없는) 그래서 여백이 읽히는 독백이 좋은 이유겠죠..

사람은 다양하지만 한 사람이 다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어요. 자신의 평생을 사로잡는 그것을 누군가는 묘사하고, 연주하거나 조각하고, 채색하고 연출하며 우리는 서로의 퍼즐 조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로에게 뾰족한 각들도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갈 순 없을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어요. 그러려면 찌르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다름을 들어볼 수 있어야겠죠.

하지만 그건 이상일뿐이고, 우린 여전히 서로를 찌르고 다치며, 그 상처 속에 좌절하며 그러다 가끔 귀한 생각을 얻겠죠 ㅎ

찌르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는, 창을 띄우면 읽을 수 있는 글이 있어 행복한 오전이었어요..

행복하라는 자계서를 읽고선 별 감흥이 없지만 스스로 생각하려는 글엔 늘 감흥을 받거든요.

(이미 이해하고 계시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행복은 생각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라서요 ㅎ

AgalmA 2016-10-08 22:39   좋아요 2 | URL
비온 뒤 해처럼 반짝~ 나타나신 물고기자리님^^ 물고기자리님이 계신 비밀의 정원으로 원정대라도 보낼까 했는데 그러자니 금반지 모으기 등 자금 사정으로...ㅎㅎ... 이런 농담, 장난이 하고 싶었다고요^~^!

저도 머리형 사람들의 롤러코스터식 글 재밌어하긴 하는데, 논리만 있고 가슴이 없으면 글읽기에 흥미가 떨어지더라는....사람은 역시 어느 정도 신비주의로 가려져야....ㅎ; 지금 아갈마닥에선 물고기자리님 주가 폭등!!!

글의 딜레마. 롤랑 바르트가 사진으로 `푼크툼`을 말하기도 했지만, 글도 근본적으로 우리를, 대상을 찌르고 예리한 흔적을 남기는 구조라 늘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말씀처럼 귀한 생각을 얻기도 하죠. 얻는 것과 잃는 것도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라 생각합니다. 데리다가 말한 `에크뤼티르`도 스쳐가고.

물고기자리님의 인상적인 말씀, ˝사람은 다양하지만 한 사람이 다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행복은 생각할 수 있는 상태˝를 제 식으로 연결하면, 한 사람이 다양할 필요는 없지만 다양한 생각은 필요하다로 모아봐도 되겠지요^^?

그러나 물고기자리님이 생각하는 행복 속에 계신다는 그 말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러네요...
문득 어떤 시가 생각나서... 산속 물에 제 모습을 비쳐보는 반수신에 대해서...



반수신半獸身의 독백



어느 날, 내 몸이 나의 우상偶像임을 보았다. 비가 낙엽에 오거나 산새의 노래를 듣거나 마음은 육체의 노예로서 시달렸다. 아름다운 거짓의 방에서 나는 눈바람을 피하고 살지만 밥상을 대할 때마다 참회하지 않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을 두려워 않는다. 언제나 일월성신日月星辰과 함께 괴로워 않는다. 추호라도 나를 속박하면, 나는 신을 버린다.
순간이라도 나를 시인하면, 나는 부처님을 버린다. 몸과 정신은 둘 아닌 것, 비단과 쇠는 다르다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하나인 것, 언제나 여기에 있다.
시침이 늙어가는 벽에 광선光線을 긋는다. 산과山果는 밤에도 나뭇가지마다 찬란하다. 돌은 선율로 이루어진다.


사람 탈을 쓴 반수신은 산속 물에 제 모습을 비쳐 보며, 간혹 피 묻은 입술을 축인다.


김구용 [뇌염](2001, 솔)



물고기자리 2016-10-08 23:33   좋아요 2 | URL
네,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더 집요하게 탐구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평생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요 ㅎ

무언가를 뚫어져라 봐왔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책이고, 그에 대한 목격담을 나누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대화인 것 같아요.

작가들도 저마다 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듯, 나와 다른 걸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엔 귀를 기울이게 돼요. A 님의 글도 제겐 그렇거든요, 뭔가 지향하는 건 비슷한데 표현은 좀 다르죠. 그래서 영감을 받을 때가 많아요 ㅎ(제게 없는 게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죠! ㅎㅎ)

맞아요, 그 행복은 조금 슬픈 뉘앙스에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절망의 상태는 아니지만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계속 생각하며 버티는 거니까, 옮겨주신 시가 단단한 듯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처럼요.. 왜 좋은진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서 몇 번을 읽었어요 ㅎ

갑자기 추워진 느낌이에요. 오늘은 바람소리도 유난하네요. A 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제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시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행복하셨음 해요^^

AgalmA 2016-10-09 00:10   좋아요 2 | URL
말들의 혼례가 끝나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 이성복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글을 읽는 건, 생각을 하는 건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면서 알게 될 `찰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겠죠. 그 앎은 `찰나`라 우리는 곧 잊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지만 쓰는 순간 변하고 간신히 잡은 것도 곧 망각의 세계로 갑니다. `의미`는 봉인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모리스 블랑쇼는 끝없이 추적해 나갔죠. 그리고 바타유, 벤야민 저는 그들의 추적이 너무도 감동스러웠습니다.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 없어 더 그렇습니다.
물고기자리님이 생각으로 밀고 나아가는 흐름도 그들과 닮아 애정합니다.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촛불이 흔들리는 유난한 밤입니다. 길고 길겠죠. 지속적으로 행복하란 말씀에 지속적으로 생각하라!란 주문도 같이 실려 있는 것 같아 조금 무서운데요ㅎ... 바람따라 계속 나타나주세요. 친구님.

물고기자리 2016-10-09 00:06   좋아요 1 | URL
아, 진짜 제가 말하고 싶은 걸 이렇게 인용까지 해서 콕 집어 말해주면.. 좋다고요 ㅎ

그 말도 맞고, 그 말도 맞아요^^

AgalmA 2016-10-10 18:48   좋아요 1 | URL
책읽다가 또 발견해서 추가)

뱃사람들은 바람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 배의 돛을 바람에 맡겼다
-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속 `철의 시대`에서...

물고기자리님이 댓글 속에서만 요정처럼 반짝이고 계셔서 저도 댓글로 찾아다님ㅎ
날이 상당히 차갑네요. 책 속 따뜻한 난로 속에 잘 계시려나....

물고기자리 2016-10-10 19:57   좋아요 1 | URL
A 님이야말로 요정이네요 ㅎ

찾아다니며 책 읽어주는 요정이요^^
(제가 이런 호사를 다 누립니다! ㅎ)


안 그래도 요즘은 리뷰를 읽는 걸로 독서를 연명하는 중이거든요;;

좋아하는 노트랑 펜이랑 꺼내놓고 원 없이 읽고 싶어요!^^ 오늘은 한 페이지도 못 읽었는데 A 님 덕분에 귀한 문장을 또 얻었습니다 ㅎ

2016-10-08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10-08 21:34   좋아요 0 | URL
님 리뷰 고퀄로 쓰시면서 제게 그런 말씀하시니 쑥쓰^^a 시 리뷰는 특히 더 어려운 거 같아요. 분석적이 되고 싶지 않은 제 태도도 있지만 시의 충만함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아끼는 맘도 늘 가지고 있어서 모호하게 말하는 감이 좀 있죠... 책을 통해 얻은 걸 작가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 우리가 쓰는 리뷰엔 늘 그런 노력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말 여유롭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8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눠주고 싶어하는 분이라는 말씀은 틀리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나눠준다는 명분으로 저도 모르게 (자랑할 것도 없지만) 과시하고 드러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바쁘신 듯 하네요.

AgalmA 2016-10-08 21:37   좋아요 1 | URL
몸도 마음도 잘 챙겨야 글도 잘 소화할 수 있을텐데 갈수록 참 힘드네요. 건강 잘 챙기시길, 벤투님.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8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제가 많이 힘드네요. 목요일 점심 대접받은 알탕(처음 먹어본) 이후 속이 많이 불편하고 그제 어제 계속 서울행을 했더니 오늘은 계속 어지럽네요. 의사에게 complaint하듯 했네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런 점을 글쓰기 선생님은 고통 총량의 법칙 또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 표현하더군요. 건강 챙기시기를... 저도 저에게 다짐하듯 하는 말입니다. ^^
 

리스토텔레스 시학에는 비극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다.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다루면서, 덕과 정의에 탁월하지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닌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하는 인물(ex 오이디푸스)이 주인공인 이야기여야 한다. 인물은 훌륭한 인물이어야지 열등한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내가 처음 시학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비극 요건은 인물에 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파토스(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를 요건으로 말하고 있지만 파토스적 인물은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파토스적 인물은 자아 분열적인 인물, ‘개인주의적 파토스에 대한 것이다.

 

나는 어떤 흐름을 생각했다. 문학이 우리 내부의 들끓음에 점점 다가오는 어떤 기록들에 대해서.

고골 광인일기(1835) - 도스토예프스키 분신(1846) - 카프카 변신(1915) - 루쉰 광인일기(1918) - 나보코프 절망(1934년부터 연재, 1936년 단행본 출간) - 카뮈 이방인(1942)

여기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1866년 연재, 1867년 단행본 출간)을 추가해야 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많은 것들도.

 

확실히 연결되는 작품은 고골 광인일기, 도스토예프스키 분신, 나보코프절망이다. 주인공들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지위와 삶을 철저히 잃는다는 점에서 세 작품은 연결되지만 비극이라고 보기에 그들은 훌륭한 지위도 인품도 아니다. 소설들을 비극적이게 관통하는 건 '파토스적 인물'이다. 나보코프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그러했듯(<작가란 무엇인가 2> 인터뷰 참조)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 작가라 비하했다. 하지만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게 독자로서 내 평가다. 절망에서 자신을 뛰어난 작가로 여기는 게르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열병으로 인한 발작적 정신이상과 자존감 상실로 인한 일탈 행동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하는 조롱은 나보코프의 발화도 섞여 있다. 재밌게도  “19세기 러시아 고전 문학이 휴머니즘의 파토스에 입각해 확립한 전통을 반격하고자 한 나보코프 작품 속 개인주의적 파토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카프카 변신, 카뮈 이방인》을 왜 가져왔는가. 보코프 절망을 다 읽고 나니 개인주의적 파토스로는 앞선 시기의 카프카 변신도 연결되어야 할 거 같고 (느닷없이 나타난 분신 때문에 자아 분열적이 되는 과정과 느닷없이 벌레로 변한 변신 때문에 자아 분열적이 되는 과정의 유사성), ‘참회를 거부하는 살인자의 고백록으로 보자면 카뮈 이방인도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절망의 대강의 스토리는 이렇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게르만은 사업이 파산 지경에 이르자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 펠릭스를 자신으로 위장해 보험 사기를 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 증거까지 남기는 어설픈 실수를 한다 게르만은 완벽한 작가도 살인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살인의 고백은 절망이란 제목이 되었다. 작가 기질을 뽐내는 광란의 독백 양식은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또 닮았다. 분신들은 내 안에 선과 악이 끊임없이 오가는 걸 폭로하는 자아상이자 타인과의 대화보다 더욱 독백으로 빠져들게 하는 대상이다.

절망영문판 서문에서 나보코프는 사르트르("작가도 주인공도 전쟁과 망명의 희생양이다") 등의 비평에 코웃음을 치며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군가 나의 게르만의 모습에서 실존주의의 아버지를 본다면, 그건 흥미로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폭로하면서도 세계와 대결하는 한 개인의 고백이자 독백. 나보코프 절망의 끝을 덮으며, 나는 카뮈 이방인의 끝을 떠올렸다.

 

 

*

아마도 이 모든 건 거짓 존재, 사악한 꿈이다. 그리고 나는 프라하 근교의 어느 풀밭에서 잠을 깰 것이다. 적어도 나를 이토록 빨리 궁지로 몰아넣은 건 좋다.

다시 커튼을 걷었다. 서서 바라들 본다. 그들은 수백, 수천, 수백만. 그러나 완전한 침묵. 들리는 건 숨소리뿐. 창을 열고 짤막한 연설을 한번 해볼까……

 

나보코프 절망》 

 

 

   

 

*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와 나는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카뮈 이방인

 

 

 

 

나는 고백도 독백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이다. 이 미완성의 생각들만 나를 닮은 채 여기 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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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신의 진화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from 공음미문 2016-12-22 07:13 
    나보코프 《절망》은 도스토예프스키 《분신》에서 좀 더 진화(한 자아상을 보여준다. 두 소설에서 주인공이 분신 때문에 파멸을 맞는 결과는 같지만 당연히 과정은 다르다. 도스토예프스키 《분신》의 주인공인 골랴드낀은 사회 속 노예의 삶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해 몰락을 맞았다면, 나보코프 《절망》의 주인공인 게르만은 자신이 노예의 삶을 살지 않는 영리한 주체라는 자기도취에 빠져 몰락을 맞는다. 더 풀어서 말하면, 골랴드낀은 자신과 닮은 분신의 음모에 당해 정신
  2. 여전히 가면을 강요하는 시대에서 - 도스토예프스키 《분신》
    from 공음미문 2016-12-22 07:13 
    도스토예프스키 《분신》의 주인공인 9등 문관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듯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거짓 흥정을 하며 쇼핑을 즐기고 교양과 품위에 대해 신경을 쓰는 속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이 자신을 파멸시키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 피해망상 환자이기도 한데, 초대받지도 않는 상급 관리자의 만찬에 나타나 망신을 당한 뒤 피해망상은 더욱 커진다. 무도회에서 쫓겨나 거리를 배회하던 골랴드낀
 
 
AgalmA 2016-10-06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리뷰도 페이퍼도 제대로.....

2016-10-06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6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0-06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남주나 여주는 원래 파토스적 인간이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소설이 넘 재미 없을거 같습니다. ^^ 아참, 인간도 파토스적인 것이 현실이라 소설이 리얼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

AgalmA 2016-10-06 20:15   좋아요 0 | URL
그래서 드라마가 막장으로.....;;;;

2016-10-06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7 0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7 0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10-08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이 눈에 들어오네요^^

지금 파묵의 신간을 읽고 있는데 나보코프의 아름다운 문장엔 가혹한 면이 내재되어 있지만 삶이 정확히 이렇다는 것을 써내는 놀라운 작가라는 내용을 읽으며 급관심을 갖는 중이에요 ㅎ

AgalmA 2016-10-08 23:38   좋아요 2 | URL
나보코프의 글에 대한 파묵의 평 저도 동감합니다. 오만한 지성들의 특징이기도 하달까ㅎㅎ;;
나보코프 새 신간 <재능>(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손 본 소설이라 더욱 관심...)을 읽고 파서 나보코프 예전 책들을 찾아 읽고 있는데, 어쩌다보니 전작탐독이 되어가는 듯ㅎ;;
<롤리타>의 험버트와 <절망>의 게르만이 다른 듯 닮아 다른 소설의 주인공은 또 어떤 모습일까 추적하고 싶은 흥미를 불러 일으킵니다. 나보코프는 글 쓰는 사람들에게 더 매혹적이죠. 수많은 텍스트들과 정보를 교묘하게 배치하는 연금술사이기도 하니까요. 물고기자리님이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한 문제적 작가^^
 
끝나지 않는 대화 -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 이성복 대담
이성복 지음 / 열화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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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2014년에 걸쳐 이어지는 대담은 중복되는 내용들도 많았지만, 이성복 시인의 고군분투를  살펴보며 쓰는 자의 자세를 점검하는 좋은 책이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한국 시단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성복 시인의 시집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6), 그 여름의 끝(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 , 입이 없는 것들(2003), 래여애반다라(2013) 시집 숫자와 산문집과 시론집을 합한 숫자가 엇비슷하다.

 

그는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잘 분석하고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싫증을 빨리 내는 편이야. 그것이 내 한계지. 화전민들 보면 불 질러서 밭 갈아먹고 일정 기간 지나면 떠나잖아요. 난 늘 그런 식으로 해 왔거든. 처음에는 아버지 얘기했다가, 두 번째는 어머니 얘기하고, 세 번째는 당신얘기했다가, 네 번째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나에 대해서, 그리고 이번에 다섯 번째는 입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고 있지. 그러다 보니 신체적인 연령하고 정신적인 연령이 같이 나가더란 말이지.”(p83)

 

자신의 콤플렉스와 싸우며 자기 내면의 존재와 대화하는 모습을 문학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성복 시인의 초기 시들은 개인적인 자장磁場(주관적, 폐쇄성, 난해함)’(p11)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한국 문학의 여전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사안인데, 현실과의 괴리에 대한 얘기다. 그에 대한 이성복 시인의 말을 좀 길지만 옮겨 본다.

 

시인이 노래하는 현실이 사회적 시대적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보여진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간과할 때, 다시 말해 시인이 자신의 주관적 개인적 체험의 변용을 배제하거나 포기할 때, 시는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가 다른 여러 가지 문화적인 표현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거 같습니다. 이 말은 결코 시가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의 독자적인 영역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난해성 문제인데, 물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추구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저로서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의 이면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라는 규범적 단정이나 다수결주의가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그것은 결국 시의 평준화, 대중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한 나라의 문화 가운데 쉽게 접근될 수 없는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까 해요. 그것이 문화의 평가절하를 막는 부식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p12)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개인적인 삶이 사회적인 삶과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결코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시대의 예술가의 작업이란 시대적인 삶 속에서 인간의 본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의 시대적 삶을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추적해야지, 이미 인간의 삶을 추상화시켜 놓은 다음 시대적인 삶을 이야기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릴 수 없다는 거죠. 저에게는 변화하는 이 삶,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p27)

 

시라는 건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야.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 그게 시지. 아주 깊은 물에 돌멩이 하나 던졌을 때 아무 느낌도 없는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 거, 그게 시지. 말하자면 바다에 내리는 눈 같은 거.”(p149)

 

 

 

"어떤 방향 아래서 우리들의 삶을 고찰하고 싶지 않다"(p29)고 말한 이성복 시인은 두 번의 프랑스 유학을 통해 서양과 동양의 공부에 두루 집중했다. 불교와 서양의 후기구조주의가 탈중심과 탈이치’(p35)로 만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네 번째 시집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시가 동자무당의 말이길 바란다.

 

"어딜 가도 내가 불편한 것은 본질적으로 어린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뜨내기 근성은 마음속의 어린애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 어린애는 늙지도 않고, 철도 들지 않고, 만족도 모릅니다. 시는 그 어린애의 말입니다. 동자무당의 말이지요. 모든 이들에게는 저마다 숨겨 놓거나 혹은 가둬 놓은 그 어린애가 있습니다. 그 어린애가 삶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가 말장난이고 광기이고 욕망인 것은 동자무당의 말이기 때문입니다.”(p41)

 

'동자무당의 말을 꿈꾸지만 타협으로 만든 토우(土偶)가 되지 않기 위해 그의 시집은 그토록 고된 불화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가 십 년 만에 내놓은 시집 , 입이 없는 것들· · · 기둥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환상을 부수는 데 좋은 무기가 돼 주는 게 인류학과 생물학”(p91), “생명의 원천이 다 더러운 모습인데, 물기 빠지고 나면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거지”(p159)라고 말하는 이성복 시인의 최근 시들의 기둥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몸과 감각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나이에 따른 관심이나 말초적인 것을 자극하는 소재성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역설적인 존재의 비극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몸이며, 생사 문제에 대한 노심초사가 시이고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삶의 쓰디쓴 열매인데 그건 경험이라는 꽃이 떨어져야 생기는”(p238) 거라며 이성복 시인은 경험과 인식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시가, 삶이, 세계가, 사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말할 수도 없으면서 말하는 존재이며,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동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작가가 독자에게 책을 건네는 것은 자기한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기 임종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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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3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30 22:50   좋아요 2 | URL
그래서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하죠. 비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칭찬이 되든 욕이 되든 그 또한 자신의 몫이 되고요ㅎ;;
이 책을 어떻게 풀어 쓸까 고민 많았는데 제 주관적 방향이 잘 나타났나 모르겠습니다^^

2016-09-30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30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30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10-01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글 좋아요..

많은 경우 시는 이래야 한다 문학은 저래야 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저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목격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 시대의 특수성, 개인의 특수성으로 목격한 것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독자는 각자의 삶과 몸을 통해 읽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문학을 통해 어떤 답을 제시받기보단 그들이 목격한 것을 재차 목격함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를 더해가는 게 독서란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훌륭한 문학이 있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 어떻게든 보려는 노력이 시대와 개인의 임종을 무의미하지 않게 하는 것 같고요.

바다에 내리는 눈은 이내 사라지고 말지만 우리는 그 순간을 지켜볼 순 있죠.

표현할 수 없는 걸 표현하려는 시도들, 또 서로의 글을 의미 있게 읽어주는 노력들이 삶의 무의미를 이겨내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ㅎ

AgalmA 2016-10-02 10:18   좋아요 2 | URL
이성복 시인이 워낙 달변이시라 읽는 맛 나게 만드시죠^^

지금 문학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데 서사시는 국가형성 시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하죠. 현대에서는 서사시가 나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안으로의 모험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건 지도 모르죠.

치료사와 예언가 위치를 예술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져 왔죠. 동굴 깊숙한 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벽화들이나 황무지에 우뚝 남아있는 기념비들처럼....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현대에서는 지식인의 의무로서 요구하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역사와 의미를 가지죠.

아주 오래 전 원형극장에 모여 사람들이 비극을 바라 보았던 건 답을 바라기 보다 현재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힘,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했던 거 였겠죠.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늘 삶을 목격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현장에,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은 그래서 일 테고요. 좀더 깊이 표현해보려는 자들이 작가군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인간은 진짜 자유를 바라는 걸 까요? 법과 규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얻는 평온함과 쾌락을 더 원하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작가의 특수성이 내 특수성을 건드릴 때 감동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보편성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렇게 뭉텅그려 모아 보는 건 너무 축약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특수성이 특수성을 알아본다라는 표현이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한겨울 동해 바다에 내리는 폭설을 보며 너무 서러워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머릿속에서 이 기억은 영원히 목격됩니다.

아무 2016-10-01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시집은 얼마 전에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고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다른 작품도 찾아서 읽어보려고 생각중이에요. 전 그 `개인적인 자장`이 좋았습니다만..^^
생각해보니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집을 잘 찾질 않았는데, 이성복 시인은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ㅎㅎ

AgalmA 2016-10-02 10:14   좋아요 1 | URL
이성복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그 개인적 자장 때문에 좋아할 거라 저도 생각하는데 말이죠^^ 대부분의 뛰어난 작가들도 그들만의 특수성이 빛나서 호응을 받았던 거 잖아요. 시대가 작품의 진가를 깨닫는 데 늦는 건 부지기수였으니^^; ...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건 비평가가 아니라 ˝깨어있는 독자˝여야 하겠죠ㅎ

이성복 시인 산문집 제목들도 다 한 줄의 시죠. 문장력 때문에 산문에서 더 빛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즈음 읽기 적절한 목록이기도 하겠네요^^

페크pek0501 2016-10-02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 그게 시지.˝
저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무엇을 느꼈으되 누군가에 의해 표현되지 않았을 무엇을 찾는 일에 주목한 적 있거든요.
아마 누군가는 표현했겠지요. 다만 제 눈에 띄지 않았을 표현인 거죠. 그러니까 흔한 표현인 아닌 것에 주목한 거죠.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고(제가 이렇게 영특할 리 없고) 어떤 글을 읽고서, 바로 이거야 이런 걸 써야 하는 거야, 하면서 주목했던 거예요.

이성복 시인의 광팬으로서 반가운 글을 보고 쓴 댓글입니다.

AgalmA 2016-10-02 13:02   좋아요 1 | URL
뭔가 말하려다 이 장면으로 대신하고 싶어서 남깁니다. 오늘은 비가 오지만...우리에게 폭설처럼 오는 것들이 있었고, 있을 것이고....


[<옥희의 영화> 제3편 폭설 후의 강의실 대사]

철판 자막: 영원한 수수께끼 그대 여자의 마음
송감독이 칠판의 낙서를 지운다.

송감독: 뭐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옥희: 전 정말 나이 빨리 들고 싶거든요? 그동안 어떻게 기다려야 돼요?
송감독: 걱정하지마. 나이 금방 들어.

진구: 선생님, 성욕은 어떻게 이겨 내세요?
송감독: 누가 이겨낸다 그랬어? 누가 성욕한테 이기냐? 너 그런 사람 본 적 있어? 그런 사람 있다고 얘기나 들어 본 적 있어? 안돼! 그러니까 고민하지마.

옥희: 사랑은 꼭 해야 하나요?
송감독: 연애 말야?

옥희: 아니요, 그냥 사랑하는 거요.
송감독: 사랑 절대 하지마. 정말로 안하겠다고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진구: 왜 사람들은 서로를 못 믿나요?
송감독: 원래 인간이 믿을 수 없는 존재지. 혹시 니가 관대해지면 그 만큼 믿을 수 있겠지.

진구: 선생님, 예쁜 여자를 원하는 건 치사한 건가요?
송감독: 뭐가 예쁜건데? 니가 뭘 보고 있는데, 그 사람한테서.

옥희: 우리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동물인가요?
송감독: 그거 알아봐야 뭐 별로 달라질 거 없을 것 같은데.

옥희: 뭘 믿고 살아야 할까요? 사는데?
송감독: 니가 믿고 사는 거니까. 니가 찾아야지. 그냥 니가 믿는 거야. 결정하는 거야.

옥희: 어떤 게 현명한 거죠?
송감독: 아, 현명한 거, 내가 현명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진구: 선생님, 제가 영화에 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송감독: 자꾸 만들어 보면 니 스스로 알게 돼. 만들어 보면...

옥희: 선생님,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
송감독: 뭐 어떤 사람한테는.

진구: 살면서 뭘 제일 원하세요?
송감독: 글쎄, 오늘은 이걸 원하고 내일은 저걸 원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뭐.

옥희: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송감독: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게 생각해도. 내가 너희들 보다 오래 살았잖아.

진구: 죽는 게 무서우세요?
송감독: 아니. 왜? 너 무서워?

진구: 애인 있으세요?
송감독: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있어. 근데 잠은 안 잔다.

옥희:왜 사랑하세요?
송감독: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어. 아냐, 없는 거 같애.


페크pek0501 2016-10-02 13:25   좋아요 1 | URL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다 좋았고 제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 두 개 뽑아 봤습니다.

옥희: 선생님,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
송감독: 뭐 어떤 사람한테는.

옥희:왜 사랑하세요?
송감독: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어. 아냐, 없는 거 같애.


AgalmA 2016-10-02 13:27   좋아요 1 | URL
마지막 대사가 그거여서 이 장면이 더 좋았어요^^
비오는데 pek0501님 맘도 촉촉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어떤 이는 문학 열풍의 시작은 '티브 잡스'였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 2 프레젠테이션 때 '기술로는 부족하고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은 기업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애플의 강점이기도 한 GUI(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기술과 인문의 결합을 잘 보여준다. 사용자가 복잡한 명령어를 치지 않고 간단한 아이콘으로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경제성의 원리보다 사람을 생각하는 정신이 더 깃들어 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에 기여한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를 정치 개혁의 뜻으로 인용한 모 정치인. 고사성어로 에헴~하는 기존의 정치인의 언어 구사와 차별을 두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생략한다. 그 정치인이나 우리나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진 않았지만 어떤 효과는 있었다. 관심이든 반발이든 행동하게 만들었으니까. 아직 진행 중인 역사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르만 헤세가 쓴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모름의 앎에 대하여》 서평에서 인문학 열풍의 다른 요인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 있다. "삶이 견디기 힘든 시절에는 추상적인 사상의 문제보다 더 나은 피난처가 없다. 거기서는 그 어떤 싸구려 위안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한 가치들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p201)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과 전체를 위해 자신을 소진할 대로 소진한 젊은이들을 위해 1920년에 쓴 글이다. 같은 해 헤르만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익명으로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쓴 연유도 서평으로 밝히고 있다.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동년배가 말하듯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어서 였다고 한다. 1900년부터 죽음에 이른 1962년까지 헤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는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였다. ''은 유행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살피는 마음가짐이 인문학의 기본이고, 글은 언어와 나의 변덕스러움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명징하게 나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헤세는 몇 년마다 다시 읽는 책 중 하나인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두고, 완성하기까지 총 50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막강한 토르소만 남겼다고 했다. 짧은 비판 문장에도 강렬한 경탄이 들어 있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한 소설 전체가, 의지와 시도와 능력으로 보자면 거의 초인적인 괴물인 이 작품이 이런 자리에서 보이는 약간의 실패가 내게는 두 배나 경이롭고 위대하게 여겨진다. 사랑에서 생겨나지 않은 위대한 예술작품이 없듯이, 예술작품에 대해 다시 사랑 말고는 달리 어떤 고귀한 후원의 관계도 없다. 위대한 문학작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 일부가 드러나는 자리에서 오로지 비판이나 심지어 남의 실패를 기뻐하는 마음에 빠져드는 사람이라면, 이 풍성한 식탁에서 언제나 가난하고 비참한 굶주림만을 느낄 것이다."(p229)
ㅡ 헤르만 헤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서평 '이 소설은 하나의 세계다'

 

비판의 쾌락에 취한 굶주림 상태인 지도 모르는 글과 말은 어느 시대에나 상주했다. 그런 비판들은 만나는 모든 걸 황무지로 만든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다음처럼 앙상한 것만 남긴다.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쓴 것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살아있는지도 걱정스럽다. 그에 비해 헤세는 동화나 낯선 동양 경전도 차별 없이 정성껏 읽고 상대에게 전한다. 나쁘게 본다면 오리엔탈리즘도 섞여 있다 말할 수 있지만, 헤세가 직접 표현하기도 한 심이었다고 나는 본다. 삶의 비참함을 감내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작품을, 사람을, 세계를, 작가를 읽을 때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헤세의 에세이들은 증명하고 있다. 그의 글은, 인문학이 완성된 무엇을 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찾아가 읽고 생각하는 과정 전체라고 또렷하게 전해준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고찰이라고 불러도 될까. 50년이 지나도, 화성 이주가 실현되어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차갑지 않으면서 시들지 않는 헤세의 문장을 잘 표현한 표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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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8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28 15:32   좋아요 2 | URL
잡스 영향에 삼성도 인문학 프로젝트 했다가 아무런 소득도 못 얻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학이 기업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인문학 계열 학과들이 효수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씁쓸하죠. 장사되는 카페들은 만들면서 학과는 없애는 대학이라니...
기업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인문학을 자기계발이나 처세술로 써먹으려 하는 자세도 문제가 있겠죠.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죠. 겉으로는 인문학, 안으로는 실리 추구, 정말 표리부동한 현실입니다.
굳이 비밀글로 안 하셔도 될 내용 같은데요^^;

yureka01 2016-09-28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아갈마님 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서..비밀글 처리 했답니다..ㅎㅎ 우째 잘 지내시죠?ㅋ

AgalmA 2016-09-28 15:37   좋아요 2 | URL
제가 인문학으로 이야기를 풀었으니 그리 된 거죠, 뭐^^... 감기가 지독하네요. yureka01님도 감기 걸리지 않게 잘 챙기소서^^/

달걀부인 2016-09-28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침 첫 글(시차가 있으니까요)이었습니다. 감명 깊은 대화였어요. 제가 고민하는 지점들에 대한 답을 찾을수도 있었구요.
고민에대한 답을 찾았으나 세상에 대한 답은 요원해 보여 그저 이렇게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

AgalmA 2016-09-28 18:45   좋아요 1 | URL
시차가 꽤 있군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껴 사는 세상이라 문제도 계속 돌고 돌며 고민이 끊이지 않네요
고민이 모여 기적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열릴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체념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게 자신을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친절도 모이고 모이면 문화가 되잖아요^^

[그장소] 2016-09-28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열풍으로 미래는 미리 와있는데 , ㅎㅎㅎ 현실은 후퇴중이네요! 그쵸!^^ 비판은 모든 걸 황무지로 만든다 ..그렇죠 ..물어 뜯기에 바쁜 영영가 없는 논쟁은 정말 그래요!^^

AgalmA 2016-09-28 19:28   좋아요 1 | URL
이 나라 실세들은 지진이 와도 눈가리고 아웅이고, 미래는 미래를 위한 재테크 정도로 생각하니 이 폭풍 속의 한국이란 배를 어쩐답니까...
각자 자기 주장을 가져 발언하는 거 좋죠. 다만 타인에게 귀기울이지 않는 편견과 잘못된 논쟁 문화는 정말 고쳐져야 해요. 위계적인 교육과 경쟁을 일삼는 한국 교육과 경제 질서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죠.

[그장소] 2016-09-29 01:23   좋아요 1 | URL
아 ~ 아~( 오광록 버전 한숨)
누구의 주제런가 ...일만 이천봉 ... 산이좋아 ... 배댈곳도 많아 사공은 좋으려나~~!!
에헤라디오~당신은 ~ 어디, 어디있나요~^^ㅋ ( 마무리는 정동하 버전)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8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은 저항이고 비판이라는 이진경 선생의 모토는 사라진 것인가요?

AgalmA 2016-09-28 19:09   좋아요 1 | URL
적절한 문제 제기를 해 주셨네요^^
인문학의 저항 정신과 비판도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과 잘못되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일어서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용기를 내는 것도 포함되겠죠. 잘못된 흐름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던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의 뜻을 당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죠.
제 글에선 비판의 쾌락에 빠진 비판주의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지 비판의 긍정성까지 부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회의주의도 체념적 회의주의와 합리적 회의주의가 있잖습니까. 제가 비판 정신의 긍정성을 덧붙이려다 놓치고 글을 올렸네요.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9 13:20   좋아요 1 | URL
네...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9-28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이해하고 살피는 마음가짐이 인문학의 기본인데 인문학 전문가 강 모 씨는 노숙자를 좀비로 표현했죠.

AgalmA 2016-09-28 19:13   좋아요 2 | URL
지식과 인격이 비례하는 건 아닌 거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습니까~_~;
거친 발언으로 말에 무리한 힘주기를 하는 거 자기 부메랑이 되기 쉽죠...

북다이제스터 2016-09-28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헤르만 헤세.....
그 이름만으로도 떨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

AgalmA 2016-09-29 00:03   좋아요 1 | URL
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읽고 부르르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훼손될까봐 다시 안 읽고 있는데, 헤세도 그래서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되도록 안 읽으려 했다고 하더군요.ㅎ 이번에 이 책 읽으며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뽐뿌가 많이 왔는데, 소홀했던 동양 쪽을 시간을 길게 잡고 읽어야 겠단 생각도 했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이 장정일 공부 읽고 책목록 잔뜩 생기셨듯 저도 그런 상황ㅎ;

2016-09-29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9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9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09-29 16: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판은 `필요`지만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비판 쾌락주의자의 글은 그 내용보단 글을 쓴 사람을 읽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린 글을 통해 서로를 읽고, 읽히며 사람을 더 넓게 이해하고, 그럼으로 또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게 되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비판 쾌락주의자의 글에서도 인간에 대한 경험은 넓어지니 이 세상엔 아무 쓸모없는 글은 없는 것도 같고요 ㅎ


헤세는 참 많은 서평을 썼군요. 그러고 보니 이런저런 굴곡이 많은 때일수록 가볍지 않은 글들을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생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을요. 아마도 가벼운 글에선 위안 받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맞아요, 인문학은 완성된 무엇이 아니라 생각하는 과정이죠. 그래서 저도 일방적이지 않은, 최선을 다해 읽고 같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A 님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저도 `차갑지 않으면서 시들지 않는` 정신을 읽고 싶고, 또 그렇게 살고 싶어요 ㅎ


AgalmA 2016-09-29 19:20   좋아요 2 | URL
오, 물고기자리님이 빨리 물 위로 나타나셔서 반갑^^ 헤르만 헤세 힘이 강력했나 봄^^!
헤세가 서평을 그리 많이 쓴 것도 시대 영향이 있죠. 그 사이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 생각은 얼마나 많이 했을 것이며 세상에 대한 걱정은 또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운동선수들이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연습하듯이 글도 무거운 글을 통해야 더 단단해지고 깊어질 수 있겠죠.

글은 참 이상해요. 자연스레 동조되는 글엔 경계없이 푹 빠지게 되는데, 의문들이 툭툭 생기는 글엔 이 사람이 왜 이런 글을 쓰게 됐나 살피게 된단 말이죠. 그 지점이 비판의 시작이 되겠죠. 사람 생각의 다양성도 느끼게 되고요. 그래서 말씀처럼 쓸모없는 글은 없게 돼요.

제 글이 타인에게 모범이 되거나 내세울 글은 아니죠. 다만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합니다. 제가 가질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노력도 그 뿐이라고 생각하고요.

물고기자리님 글도 제겐 언제나 `차갑지 않으면서 시들지 않는` 글이랍니다^^ 요즘은 보기가 힘들어 `귀함`이 더 추가됨!
삶에서 글이 오고 글에서 삶이 묻어나듯 물고기자리님도 그런 삶을 사실 거라 생각해요.


물고기자리 2016-09-29 19:24   좋아요 2 | URL
그 귀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좀 더 게을러져 보겠어요!ㅋ

신기한 게 맘이 제일 복잡할 때 오히려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오게 돼요. 제게 있는 긍정적인 부분 중의 하나라고 오만하게 말해봅니다!ㅋㅋ

(A 님 글 읽으러 올라왔죠^^)

AgalmA 2016-09-29 19:42   좋아요 2 | URL
목소리 잃은 인어공주 상태시군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계시)
네가 까뮈와 키냐르와 파묵과 그르니에 같은 작가 리뷰를 많이 쓰면 쓸 수록 많이 볼 수 있다아아~아...
크흑, oTL .... 내가 읽고 글 쓰는 것도 오래 걸리는 방법이잖아;;;
<물고기자리님을 위한 A 단막극 끝>

웃고 계시지만 맘이 어떠실까 생각하니....
귀한 물고기자리님 감기 안 걸리게 잘 두르고 다니세요. 콧물 찔찔 인어공주되면 곤란하니까^^;;

물고기자리 2016-09-29 19:43   좋아요 2 | URL
아, 진짜 육성으로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ㅎㅎ

하여튼 A 님의 맞춤형 재치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좋은 글도, 따뜻한 댓글도 모두 감사해요. A 님도 얼른 감기에서 완전히 회복되시길요!!

고양이라디오 2016-11-08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의 비참함을 감내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작품을, 사람을, 세계를, 작가를 읽을 때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헤세의 에세이들은 증명하고 있다.˝

멋진 문장입니다^^ 저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