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는 비극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다. 비극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다루면서, 덕과 정의에 탁월하지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닌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하는 인물(ex 오이디푸스)이 주인공인 이야기여야 한다. 인물은 훌륭한 인물이어야지 열등한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내가 처음 시학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비극 요건은 ‘인물’에 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파토스(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를 요건으로 말하고 있지만 ‘파토스적 인물’은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파토스적 인물’은 자아 분열적인 인물, ‘개인주의적 파토스’에 대한 것이다.
나는 어떤 흐름을 생각했다. 문학이 우리 내부의 들끓음에 점점 다가오는 어떤 기록들에 대해서.
고골 《광인일기》(1835) - 도스토예프스키 《분신》(1846) - 카프카 《변신》(1915) - 루쉰 《광인일기》(1918) - 나보코프 《절망》(1934년부터 연재, 1936년 단행본 출간) - 카뮈 《이방인》(1942)
여기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1866년 연재, 1867년 단행본 출간)을 추가해야 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많은 것들도.
확실히 연결되는 작품은 고골 《광인일기》, 도스토예프스키 《분신》, 나보코프《절망》이다. 주인공들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지위와 삶을 철저히 잃는다는 점에서 세 작품은 연결되지만 비극이라고 보기에 그들은 훌륭한 지위도 인품도 아니다. 이 소설들을 비극적이게 관통하는 건 '파토스적 인물'이다. 나보코프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그러했듯(<작가란 무엇인가 2> 인터뷰 참조)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 작가라 비하했다. 하지만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게 독자로서 내 평가다. 《절망》에서 자신을 뛰어난 작가로 여기는 게르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열병으로 인한 발작적 정신이상과 자존감 상실로 인한 일탈 행동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하는 조롱은 나보코프의 발화도 섞여 있다. 재밌게도 “19세기 러시아 고전 문학이 휴머니즘의 파토스에 입각해 확립한 전통”을 반격하고자 한 나보코프 작품 속 ‘개인주의적 파토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카프카 《변신》, 카뮈 《이방인》을 왜 가져왔는가. 나보코프 《절망》을 다 읽고 나니 ‘개인주의적 파토스’로는 앞선 시기의 카프카 《변신》도 연결되어야 할 거 같고 (느닷없이 나타난 분신 때문에 자아 분열적이 되는 과정과 느닷없이 벌레로 변한 변신 때문에 자아 분열적이 되는 과정의 유사성), ‘참회를 거부하는 살인자의 고백록’으로 보자면 카뮈 《이방인》도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절망》의 대강의 스토리는 이렇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게르만은 사업이 파산 지경에 이르자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 펠릭스를 자신으로 위장해 보험 사기를 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 증거까지 남기는 어설픈 실수를 한다. 게르만은 완벽한 작가도 살인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살인의 고백은 《절망》이란 제목이 되었다. 작가 기질을 뽐내는 광란의 독백 양식은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또 닮았다. 이 분신들은 내 안에 선과 악이 끊임없이 오가는 걸 폭로하는 자아상이자 타인과의 대화보다 더욱 독백으로 빠져들게 하는 대상이다.
《절망》 영문판 서문에서 나보코프는 사르트르("작가도 주인공도 전쟁과 망명의 희생양이다") 등의 비평에 코웃음을 치며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군가 나의 게르만의 모습에서 ‘실존주의의 아버지’를 본다면, 그건 흥미로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폭로하면서도 세계와 대결하는 한 개인의 고백이자 독백. 나보코프 《절망》의 끝을 덮으며, 나는 카뮈 《이방인》의 끝을 떠올렸다.
*
아마도 이 모든 건 거짓 존재, 사악한 꿈이다. 그리고 나는 프라하 근교의 어느 풀밭에서 잠을 깰 것이다. 적어도 나를 이토록 빨리 궁지로 몰아넣은 건 좋다.
다시 커튼을 걷었다. 서서 바라들 본다. 그들은 수백, 수천, 수백만. 그러나 완전한 침묵. 들리는 건 숨소리뿐. 창을 열고 짤막한 연설을 한번 해볼까……
ㅡ 나보코프 《절망》
*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와 나는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ㅡ 카뮈 《이방인》
나는 고백도 독백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이다. 이 미완성의 생각들만 나를 닮은 채 여기 남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