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대화 -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 이성복 대담
이성복 지음 / 열화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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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2014년에 걸쳐 이어지는 대담은 중복되는 내용들도 많았지만, 이성복 시인의 고군분투를  살펴보며 쓰는 자의 자세를 점검하는 좋은 책이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한국 시단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성복 시인의 시집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6), 그 여름의 끝(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 , 입이 없는 것들(2003), 래여애반다라(2013) 시집 숫자와 산문집과 시론집을 합한 숫자가 엇비슷하다.

 

그는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잘 분석하고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싫증을 빨리 내는 편이야. 그것이 내 한계지. 화전민들 보면 불 질러서 밭 갈아먹고 일정 기간 지나면 떠나잖아요. 난 늘 그런 식으로 해 왔거든. 처음에는 아버지 얘기했다가, 두 번째는 어머니 얘기하고, 세 번째는 당신얘기했다가, 네 번째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나에 대해서, 그리고 이번에 다섯 번째는 입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고 있지. 그러다 보니 신체적인 연령하고 정신적인 연령이 같이 나가더란 말이지.”(p83)

 

자신의 콤플렉스와 싸우며 자기 내면의 존재와 대화하는 모습을 문학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성복 시인의 초기 시들은 개인적인 자장磁場(주관적, 폐쇄성, 난해함)’(p11)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한국 문학의 여전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사안인데, 현실과의 괴리에 대한 얘기다. 그에 대한 이성복 시인의 말을 좀 길지만 옮겨 본다.

 

시인이 노래하는 현실이 사회적 시대적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보여진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간과할 때, 다시 말해 시인이 자신의 주관적 개인적 체험의 변용을 배제하거나 포기할 때, 시는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가 다른 여러 가지 문화적인 표현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거 같습니다. 이 말은 결코 시가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의 독자적인 영역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난해성 문제인데, 물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추구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저로서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의 이면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라는 규범적 단정이나 다수결주의가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그것은 결국 시의 평준화, 대중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한 나라의 문화 가운데 쉽게 접근될 수 없는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까 해요. 그것이 문화의 평가절하를 막는 부식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p12)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개인적인 삶이 사회적인 삶과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결코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시대의 예술가의 작업이란 시대적인 삶 속에서 인간의 본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의 시대적 삶을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추적해야지, 이미 인간의 삶을 추상화시켜 놓은 다음 시대적인 삶을 이야기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릴 수 없다는 거죠. 저에게는 변화하는 이 삶,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p27)

 

시라는 건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야.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 그게 시지. 아주 깊은 물에 돌멩이 하나 던졌을 때 아무 느낌도 없는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 거, 그게 시지. 말하자면 바다에 내리는 눈 같은 거.”(p149)

 

 

 

"어떤 방향 아래서 우리들의 삶을 고찰하고 싶지 않다"(p29)고 말한 이성복 시인은 두 번의 프랑스 유학을 통해 서양과 동양의 공부에 두루 집중했다. 불교와 서양의 후기구조주의가 탈중심과 탈이치’(p35)로 만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네 번째 시집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시가 동자무당의 말이길 바란다.

 

"어딜 가도 내가 불편한 것은 본질적으로 어린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뜨내기 근성은 마음속의 어린애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 어린애는 늙지도 않고, 철도 들지 않고, 만족도 모릅니다. 시는 그 어린애의 말입니다. 동자무당의 말이지요. 모든 이들에게는 저마다 숨겨 놓거나 혹은 가둬 놓은 그 어린애가 있습니다. 그 어린애가 삶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가 말장난이고 광기이고 욕망인 것은 동자무당의 말이기 때문입니다.”(p41)

 

'동자무당의 말을 꿈꾸지만 타협으로 만든 토우(土偶)가 되지 않기 위해 그의 시집은 그토록 고된 불화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가 십 년 만에 내놓은 시집 , 입이 없는 것들· · · 기둥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환상을 부수는 데 좋은 무기가 돼 주는 게 인류학과 생물학”(p91), “생명의 원천이 다 더러운 모습인데, 물기 빠지고 나면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거지”(p159)라고 말하는 이성복 시인의 최근 시들의 기둥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몸과 감각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나이에 따른 관심이나 말초적인 것을 자극하는 소재성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역설적인 존재의 비극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몸이며, 생사 문제에 대한 노심초사가 시이고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삶의 쓰디쓴 열매인데 그건 경험이라는 꽃이 떨어져야 생기는”(p238) 거라며 이성복 시인은 경험과 인식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시가, 삶이, 세계가, 사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말할 수도 없으면서 말하는 존재이며,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동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작가가 독자에게 책을 건네는 것은 자기한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기 임종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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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3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30 22:50   좋아요 2 | URL
그래서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하죠. 비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칭찬이 되든 욕이 되든 그 또한 자신의 몫이 되고요ㅎ;;
이 책을 어떻게 풀어 쓸까 고민 많았는데 제 주관적 방향이 잘 나타났나 모르겠습니다^^

2016-09-30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30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30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10-01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글 좋아요..

많은 경우 시는 이래야 한다 문학은 저래야 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저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목격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 시대의 특수성, 개인의 특수성으로 목격한 것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독자는 각자의 삶과 몸을 통해 읽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문학을 통해 어떤 답을 제시받기보단 그들이 목격한 것을 재차 목격함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를 더해가는 게 독서란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훌륭한 문학이 있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 어떻게든 보려는 노력이 시대와 개인의 임종을 무의미하지 않게 하는 것 같고요.

바다에 내리는 눈은 이내 사라지고 말지만 우리는 그 순간을 지켜볼 순 있죠.

표현할 수 없는 걸 표현하려는 시도들, 또 서로의 글을 의미 있게 읽어주는 노력들이 삶의 무의미를 이겨내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ㅎ

AgalmA 2016-10-02 10:18   좋아요 2 | URL
이성복 시인이 워낙 달변이시라 읽는 맛 나게 만드시죠^^

지금 문학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데 서사시는 국가형성 시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하죠. 현대에서는 서사시가 나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안으로의 모험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건 지도 모르죠.

치료사와 예언가 위치를 예술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져 왔죠. 동굴 깊숙한 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벽화들이나 황무지에 우뚝 남아있는 기념비들처럼....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현대에서는 지식인의 의무로서 요구하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역사와 의미를 가지죠.

아주 오래 전 원형극장에 모여 사람들이 비극을 바라 보았던 건 답을 바라기 보다 현재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힘,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했던 거 였겠죠.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늘 삶을 목격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현장에,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은 그래서 일 테고요. 좀더 깊이 표현해보려는 자들이 작가군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인간은 진짜 자유를 바라는 걸 까요? 법과 규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얻는 평온함과 쾌락을 더 원하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작가의 특수성이 내 특수성을 건드릴 때 감동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보편성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렇게 뭉텅그려 모아 보는 건 너무 축약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특수성이 특수성을 알아본다라는 표현이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한겨울 동해 바다에 내리는 폭설을 보며 너무 서러워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머릿속에서 이 기억은 영원히 목격됩니다.

아무 2016-10-01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시집은 얼마 전에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고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다른 작품도 찾아서 읽어보려고 생각중이에요. 전 그 `개인적인 자장`이 좋았습니다만..^^
생각해보니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집을 잘 찾질 않았는데, 이성복 시인은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ㅎㅎ

AgalmA 2016-10-02 10:14   좋아요 1 | URL
이성복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그 개인적 자장 때문에 좋아할 거라 저도 생각하는데 말이죠^^ 대부분의 뛰어난 작가들도 그들만의 특수성이 빛나서 호응을 받았던 거 잖아요. 시대가 작품의 진가를 깨닫는 데 늦는 건 부지기수였으니^^; ...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건 비평가가 아니라 ˝깨어있는 독자˝여야 하겠죠ㅎ

이성복 시인 산문집 제목들도 다 한 줄의 시죠. 문장력 때문에 산문에서 더 빛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즈음 읽기 적절한 목록이기도 하겠네요^^

페크pek0501 2016-10-02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 그게 시지.˝
저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무엇을 느꼈으되 누군가에 의해 표현되지 않았을 무엇을 찾는 일에 주목한 적 있거든요.
아마 누군가는 표현했겠지요. 다만 제 눈에 띄지 않았을 표현인 거죠. 그러니까 흔한 표현인 아닌 것에 주목한 거죠.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고(제가 이렇게 영특할 리 없고) 어떤 글을 읽고서, 바로 이거야 이런 걸 써야 하는 거야, 하면서 주목했던 거예요.

이성복 시인의 광팬으로서 반가운 글을 보고 쓴 댓글입니다.

AgalmA 2016-10-02 13:02   좋아요 1 | URL
뭔가 말하려다 이 장면으로 대신하고 싶어서 남깁니다. 오늘은 비가 오지만...우리에게 폭설처럼 오는 것들이 있었고, 있을 것이고....


[<옥희의 영화> 제3편 폭설 후의 강의실 대사]

철판 자막: 영원한 수수께끼 그대 여자의 마음
송감독이 칠판의 낙서를 지운다.

송감독: 뭐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옥희: 전 정말 나이 빨리 들고 싶거든요? 그동안 어떻게 기다려야 돼요?
송감독: 걱정하지마. 나이 금방 들어.

진구: 선생님, 성욕은 어떻게 이겨 내세요?
송감독: 누가 이겨낸다 그랬어? 누가 성욕한테 이기냐? 너 그런 사람 본 적 있어? 그런 사람 있다고 얘기나 들어 본 적 있어? 안돼! 그러니까 고민하지마.

옥희: 사랑은 꼭 해야 하나요?
송감독: 연애 말야?

옥희: 아니요, 그냥 사랑하는 거요.
송감독: 사랑 절대 하지마. 정말로 안하겠다고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진구: 왜 사람들은 서로를 못 믿나요?
송감독: 원래 인간이 믿을 수 없는 존재지. 혹시 니가 관대해지면 그 만큼 믿을 수 있겠지.

진구: 선생님, 예쁜 여자를 원하는 건 치사한 건가요?
송감독: 뭐가 예쁜건데? 니가 뭘 보고 있는데, 그 사람한테서.

옥희: 우리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동물인가요?
송감독: 그거 알아봐야 뭐 별로 달라질 거 없을 것 같은데.

옥희: 뭘 믿고 살아야 할까요? 사는데?
송감독: 니가 믿고 사는 거니까. 니가 찾아야지. 그냥 니가 믿는 거야. 결정하는 거야.

옥희: 어떤 게 현명한 거죠?
송감독: 아, 현명한 거, 내가 현명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진구: 선생님, 제가 영화에 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송감독: 자꾸 만들어 보면 니 스스로 알게 돼. 만들어 보면...

옥희: 선생님,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
송감독: 뭐 어떤 사람한테는.

진구: 살면서 뭘 제일 원하세요?
송감독: 글쎄, 오늘은 이걸 원하고 내일은 저걸 원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뭐.

옥희: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송감독: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게 생각해도. 내가 너희들 보다 오래 살았잖아.

진구: 죽는 게 무서우세요?
송감독: 아니. 왜? 너 무서워?

진구: 애인 있으세요?
송감독: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있어. 근데 잠은 안 잔다.

옥희:왜 사랑하세요?
송감독: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어. 아냐, 없는 거 같애.


페크pek0501 2016-10-02 13:25   좋아요 1 | URL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다 좋았고 제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 두 개 뽑아 봤습니다.

옥희: 선생님,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
송감독: 뭐 어떤 사람한테는.

옥희:왜 사랑하세요?
송감독: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어. 아냐, 없는 거 같애.


AgalmA 2016-10-02 13:27   좋아요 1 | URL
마지막 대사가 그거여서 이 장면이 더 좋았어요^^
비오는데 pek0501님 맘도 촉촉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