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의 고고학 - 로마 시대부터 소셜미디어 시대까지, 허위정보는 어떻게 여론을 흔들었나
최은창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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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디지털 굴뚝에서 매연과 소음이 무럭무럭 뿜어져 나오는 디지털 시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저자는 우리들이 부지불식간에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앨리스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의 상황은 모험을 겪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오는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아비규환의 현실이라는 게 문제다.

 

 

 

이 책은 “수많은 형태의 ‘거짓’이 어떤 이유에서 생산되고, 누가 어떻게 전달했고, 어떤 혼란과 피해를 주고, 어떤 방식의 규제가 제안”되었는지를 살핀 가짜뉴스 현상의 고고학적 탐색이다. 국내 학계는 가짜뉴스 개념을 “형식과 내용을 모두 기만하는 가짜 정보”로 좁게 보지만, 저자는 ‘악의적 유언비어’, ‘거짓 소문’, ‘정치 프로파간다’, ‘왜곡된 뉴스 보도’, ‘뉴스 정보의 파편’까지 포함시켰다. 가짜뉴스와 허위정보는 그 목적에 따라서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다. ①자극적 제목으로 노출시켜 클릭을 유도해서 광고 수익을 얻는 가짜뉴스, ②정치적 여론의 향방을 인위적으로 이끌기 위한 ‘온라인 프로파간다’ ③알고리듬, 봇넷botnet 등 허위정보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자동화 기술의 활용, ④광우병 보도, 기후변화, 백신 접종 거부, GMO 식품 등 대중의 공포를 자극하는 ‘과학적 위험성’을 다룬 뉴스가 그렇다.

 

 

 

 

 

 

 

“거짓과 허위정보는 대중의 관심을 이끌고 분노 감정을 유도하기 위한 사실의 날조, 왜곡하는 전언傳言, 증오심 부풀리기, 적군과 아군을 나누는 선동의 요소였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낯선 침입자가 아니라 정보 생태계의 오랜 주민이었고, 우리 자신이기도 했다. 인쇄술, 라디오, 무선 전신, 웹브라우저, 모바일 인터넷 등 기술 발전에 힘입어 미디어의 힘이 강력해지는 동안 허위정보도 그림자와 같이 진화를 거듭했다. 미디어의 역사는 허위정보 전파의 역사이기도 했다. 16세기 팸플릿의 시대부터 1930년대 라디오의 전성기, 1960년대 TV 뉴스 방송에서도 오보와 허위정보는 흘러나왔다. 완전한 사실만이 뉴스로 전달되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중략)… 소문이나 발언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가를 지배 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때 생겨나는 해악은 중세 가톨릭 종교재판소, 18세기 청나라의 저혼 사건, 반대자를 가혹하게 탄압한 나치의 비밀경찰, 중국의 국가인터넷판공실이 실시하는 강력한 단속이 보여준다. 교황권은 이단 척결을 내세워 마녀사냥을 가톨릭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게르만 민족주의 자긍심을 고취시켰고, 미국의 적색 공포 프로파간다는 반공산주의가 곧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동가가 거짓으로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는 많은 희생양들이 뒤따랐다.

왕권제와 교황의 지배력이 사라지고 민주적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취약한 제도였다. 대중의 심리는 언변을 갖춘 선동가가 제공하는 표면적 명분을 갖춘 반복적 메시지에 쉽게 흔들릴 수 있었다. 허위정보의 생산자들이나 프로파간다의 선동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 여론의 흐름이 쏠리면 소떼몰이가 가능했다. 선거의 승리가 모든 것을 잠재우고 권력을 부여하는 시스템에서는 유권자를 분노하게 만들든지, 속이든지, 선동하든지, 위협하든 승리하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뉴스 정보는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웅변술과 연설은 정보의 전달이나 공적인 토론이 아니라 대중의 ‘설득’에 사용되었다. 긍정성의 이웃으로 부정성도 따라다니듯 인쇄술은 라틴어 성경, 지식의 전파, 팸플릿을 통한 사회 비판뿐 아니라 마녀사냥의 방법과 지침을 담은 정보를 퍼트리는 데도 기여했다. 혹스(Hoax, ‘괴담 또는 속임수’)와 도시전설, 만우절 뉴스는 사회적 해악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언비어나 근거 없는 소문은 권력자나 집단 광기와 만나 1768년 저혼 사건,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 같은 폭력 행위를 낳기도 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는 미국 옐로 저널리즘의 전성기였다. 페니 프레스 penny press 시대 신문사들은 괴담, 모험담, 엉터리 의료 지식, 괴물 이야기, 가짜 인터뷰 등 독자들이 원하는 흥밋거리를 신문에 실었지만 독자를 노골적으로 우롱하거나 정치 뉴스를 조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고 수익을 얻기 위해 미확인 뉴스 정보를 뿌리거나 허위정보를 사실처럼 퍼뜨리는데 일조하는 소셜미디어나 유튜브는 옐로 저널리즘을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로 만들었다.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추측성 뉴스의 역사도 반복되고 있다. 1898년 2월 쿠바 하바나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전함 메인호가 스페인 군대의 공격 때문에 침몰했다는 보도 행태는 한국의 천안함 사건을 다룬 뉴스들과 비슷했다. 미국 해군은 메인호 침몰 원인을 1974년 재조사해 메인호가 탄약고에서 시작된 화재로 폭발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한국 천안함 사건은 어찌 될까.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은커녕 가짜뉴스로 곡해되고 있는 상황인데. 1912년 4월 타이타닉 호 사건에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과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사고 당시 누군가 무선전신으로 송신한 가짜뉴스로 인해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일제히 타이타닉 호 승객이 전원 무사하다는 헤드라인을 앞다투어 올렸다. 이 가짜 무선은 신문 역사상 가장 많은 헤드라인에 실린 가짜뉴스로 기록되었다. 코로나19 음모설이 한창인 요즘, 1980년대에 “에이즈AIDS는 미국이 만들어낸 질병”이라는 가짜뉴스를 전 세계 언론에 뿌린 KGB의 공작은 냉전시대 허위정보전으로 눈길을 끈다. 2014년 에볼라 감염 때는 러시아계 방송 《RT America》가 에볼라와 에이즈가 서구 제약회사와 미국 국방부가 합작한 무기라는 의혹이 라이베리아에 퍼지고 있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2017년 프랑스와 독일 선거, 2016년 브렉시트 투표,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도 러시아가 끊임없이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CIA가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미디어 홍보 캠페인(앵무새 작전)을 전개했듯 여론을 움직이려는 허위정보전은 ‘정치적 도덕성을 결여한 자’와 ‘진실을 지키려는 선한 자’의 대결로 보기 어렵다. 가짜뉴스가 가장 급증하는 때는 선거 시즌이다. 대선 경우 한국의 후보자는 안보관, 이념적 정체성, 5·18 정신 등을 검증받고, 미국에서는 출생, 이민자와 무슬림을 대하는 관점, 낙태 합법화, 총기 규제 등에 대해 정치 공세를 받는다. 이와 관련해 허위 정보, 가짜 뉴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뉴스들이 대거 유포된다. 한국은 뉴스 기사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접하는 게 압도적이지만 미국은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전달받는 비중이 높다. 미국과 한국은 뉴스 소비 상황이 다르지만 네트워크 프로파간다에 흔들리는 건 동일하다. 독립 미디어 복스Vox의 분석에 따르면, 온라인을 통한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는 여론을 조작하고 선거 캠페인의 결과를 뒤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가짜뉴스 웹사이트의 날조와 가짜 이야기는 극단적 정치적 관점을 가진 집단의 확증편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이다. 진정한 문제는 주류 미디어의 뉴스 편집 비중이다. 데이터 과학과 결합한 허위정보에 집중적으로 노출된다면 대중은 뉴스의 인물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가지거나 그를 불신하게 될 수도 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원인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미디어의 강력한 지지 덕분이었다. 1983년 미국 미디어 시장은 50개 미디어 기업이 지배했으나 201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폭스, 컴캐스트, 타임 워너, 월트 디즈니, CBS 코퍼레이션, 바이어콤 등 여섯 개 기업들이 90퍼센트를 통제하고 있다. 4개 지상파 방송사 CBS, Fox, ABC, NBC도 모두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미국 내 언론의 전체적 판세는 보수 언론이 진보 언론에 비해 세력 면에서 우세하다.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달받은 뉴스의 ‘내용’이 정확한가는 관건이 아니고 ‘누가’ 그 메시지를 전하느냐가 뉴스의 신뢰도를 결정하게 된다.” 한국은 2009년부터 신문·방송 교차 소유를 허용하면서 종편 방송 시대가 열렸다. 일부 언론사들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당파성을 드러내놓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과 추측성 논평과 보도를 계속해 가짜뉴스의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 “미디어 학자 제임스 케리는 ‘저널리즘’과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같은 이름’이라고 보았다.” 외신을 통해 팩트체킹까지 하는 지금 한국의 언론은 ‘공적인 삶’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기능을 못하고 있다. 외신이라고 다 믿을 수 없다. 페루의 퀴노아 가격 통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빈곤 국가들의 식량 부족 악화를 연결한 잘못된 해외 뉴스도 있었고, 뉴스 전재 계약을 타고 부정확한 정보가 국문 뉴스로 보도되는 구조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이 암을 일으킨다는 뉴스가 그대로 전해지는 오보 해프닝도 자주 있다. 가짜뉴스가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데이터는 “경제 성장률, 피해 규모, 사상자 수, 실업률, 범죄율, 물가 인상률”인데 한국의 언론들이 부정확을 넘어 데이터를 악의적으로 제시하는 걸 자주 본다. 데이터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전달할 기자도 부재하고, 책임 있는 기사가 아니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나 어뷰징 기사로 대중을 끌어들이기 바쁜 한국의 언론이 공신력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가짜뉴스와 허위정보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악의적 소문, 허위정보를 동원한 선동, 날조된 뉴스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공통점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적 요소 또는 불만을 강조하여 공포와 분노를 합리화하는 데 있다.

 

2. 경제적·정치적 인센티브가 존재하는 한 허위정보와 가짜뉴스의 생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 인쇄 시대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떠도는 비공식적인 뉴스 정보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가를 판정하여 공식화하는 것은 언제나 권력자의 권한이었다. 지금은 이 권한의 범위와 책임이 광범위해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례로 반복되고 있다.

 

4. 언론과 비언론, 진실한 정보와 허위정보의 이분법으로 복잡한 가짜뉴스 현상을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5. 정보 과잉으로 인한 혼돈과 피로, 무질서 속에서 허위정보를 꿰뚫는 가시성 확보가 어렵다.

 

6. 올드 플랫폼(지상파 방송, 케이블 TV, 라디오, 신문)과 뉴 플랫폼(검색 엔진, 포털 사이트, 소셜 미디어) 모두 허위정보와 가짜뉴스의 증폭에 사용된다. 2019년 기준으로 미국 성인 가운데 69퍼센트는 페이스북으로, 한국은 10명 중 8명이 포털 사이트에서 디지털 뉴스를 본다. “진실한 뉴스 정보이든, 거짓 소문이든 가장 효과적인 증폭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7. 허위정보는 생산적 토의를 위한 전제를 망가뜨리므로 소모적 논쟁만이 겉돌게 되고 불신만 더 악화된다.

 

8. 미국 연방대법원과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 규제 대상이 분명하고, 해악성이 구체적이어야만 표현의 자유 규제가 헌법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고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 ‘규제 대상’의 명확한 설정, ‘해악성·위험성’의 유형, 중립적 판단의 주체를 정하는 일이 요구된다.

 

9. 허위정보를 유포하는 활동이 외주화·자동화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의 힘이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다. 2019년 영국 하원이 펴낸 ‘허위정보·가짜뉴스 보고서’는 페이스북을 법을 초월하며 행동하는 ‘디지털 갱스터’로 표현하며, ‘민주주의’, ‘데이터 프라이버시’, ‘시장 지배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에서 극단적 콘텐츠를 찾아내 차단하는 것은 머신러닝으로는 한계가 있다. 플랫폼마다 운영하는 ‘정책’ 또는 ‘가이드’를 통해 자율규제가 이뤄지고 있지만, ‘가짜뉴스 또는 허위조작정보’ 는 위반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와 ‘유해·위험한 콘텐츠, 폭력적·노골적 콘텐츠, 폭력·범죄 조직, 증오 표현, 권리 침해, 사이버 폭력’ 사이에서 많은 허위정보들이 전파되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 차단을 요청한 신고는 전 세계에서 2019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1,000만 건이 넘었다. 예일대학교 로스쿨에서 헌법을 가르쳤던 토머스 에머슨은 “진실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거짓을 억누르는 방법은 없다”라고 했지만, 그는 ‘의견의 허위’만 예상했지 악의적 ‘사실 조작’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이란 과소한 정보의 교환으로는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과도할 정도로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면서 경쟁을 펼치고 서로를 무너뜨리도록 그 과정을 지켜보자는 것”으로 경제학에서 온 아이디어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사상의 자유시장도 아무런 규제가 없다면 다양한 문제가 나오기 마련이다. 소셜미디어나 온라인상 익명의 행위자들이 행하는 집단적 프로파간다가 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들고, 미디어 산업의 소유권이 과도하게 집중된 구조 또는 뉴스 정보를 전달하는 디지털 플랫폼이 거짓 발언의 가시성을 증폭시키는 상황에서 여러 국가의 자정 역할이 필요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요구는 갈수록 많아지지만 그만큼 우리가 허위와 진실을 가려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뉴스들이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최은창 『가짜뉴스의 고고학』 체크 포인트 잡느라 포스트잇 플래그 한 통이 장렬히 전사했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 밑줄이 많아 포스트잇 플래그를 적게 쓰긴 했지만 『가짜뉴스의 고고학』 에 예상치 못하게 정말 많이 썼다. 주석 빼면 본문은 유발 하라리 책이 더 긴데! 예상대로 리뷰 정리하는데 300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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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 - 질문하는 문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폴 김 외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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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일상을 살아가지만 전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도 체감한다. 인류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도 전후가 다를 큰 사건이다. 실시간으로 각국 정부의 대처와 사람들 행동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치 판단과 개념의 허상도 깨닫고 있다. 20세기 초에 사라진 줄 알았던 파시즘적 성격의 정부가 속속 재등장하고 인종차별, 민족주의, 젠더 문제가 들끓는 현재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까.

 

인류사의 도약은 빅 퀘스천(big question)의 등장으로 가능했다. 신화적 세계관을 자연과학적 세계관으로 전환했던 탈레스, 중세 신학적 사회를 인간 중심적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데 기여한 데카르트나 다윈, 인간 노동의 창조성과 고유성을 발견한 마르크스 등 많은 역사적 위인들은 전환적 질문과 비판적 사고를 제시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관점 전환적 질문이 중요한데 질문하는 능력은 ‘교육’의 역할이 가장 크다.

 

한국 사회가 질문 없는 교육과 사회였다는 게 크게 드러난 일화가 있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내한했을 때 초대에 감사하며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청했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 중국 기자가 아시아 대표로 자신이 질문을 하겠다고 나서 오바마가 제지하고 한국 기자에게 재차 질문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우리에게 기레기 소리 듣는 것과 차원이 다를 한국 기자들의 세계적 굴욕이었다. 박근혜와 오바마의 한미 공동 기자회견에서 박근혜가 취재진의 질문을 잊고 엉뚱한 답변을 한 망신까지 덧붙여 한국인 모두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일체의 질문을 차단하고 수첩만 보고 측근만을 포용했던 박근혜 정권은 국정 농단의 파국까지 내보여 우리 사회를 아프게 돌아보게 한 거울이었다.

 

정치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인간들이 도덕적이라도 그들이 구성하는 사회는 다른 집단적 정체성을 이룬다고 말했다. 집단이 추구하는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시스템의 역학이 비합리적이며 정의롭지도 않은 정치적 파워 게임을 만들어내고, 도덕적 개인들마저 그 정치적 특수성에 가둔다. 그렇기에 사회 진화를 위해서는 개인의 선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현실적 메커니즘을 개선하는 실천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현시대에는 혁명과 같은 분노를 통한 사회체제의 감정적 전환은 불가능하며, 합리적 장치들을 디자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제목이자 전달하려는 주제인 ‘컬처 엔지니어링’이 그 과정이다. 기술혁명과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사회문제 속에서, 상황에 대처하는 사회 구성원 전반의 사고방식, 대응 방식, 의식의 고착화 현상은 정부가 교체되어도 잘 바뀌지 않는다. 네 명의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컬처(‘개인과 조직의 사고·대화·행위 양식을 강제하는 의식적·무의식적 토대·구조·맥락’) 변화를 촉구한다. 인문학자 함돈균, 교육공학자이자 교육행정가 폴 김, 국제개발협력가 김길홍, 국제경제기구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교육 분야 대표이자 남아시아 인간 사회개발 디렉터 나성섭은 사회 인프라를 설치해도 이 하드웨어를 제대로 사용하고 유지·관리하는 것, 거기에 따르는 관습·제도·정책·규정·법을 바꾸는 것이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그 사회의 컬처, 사람들의 문화·인식·태도 같은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강변했다. “‘사회적 합의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합의 능력에 따라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회를 잡는가, 못 잡는가가 나눠질 것‘(김길홍)이다.

 

한국에서 광우병, 4대강 사건이 불신과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던 것처럼 네팔의 멜람치 물 공급 사업은 정부군과 마오이스트 무장 반군 세력이 내전 중인 상황, 많은 NGO(민간단체가 중심인 비정부(非政府) 국제 조직)까지 고려해야 해서 사업 추진 20년이 걸릴 만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생활하기 위해 물이 필수 불가결한데, 가난한 사람들은 물 저장 시설이 없어서 더 크게 영향을 받아요. 물탱크로 가져와야 되니까 물값이 더 비싸져서 힘들어지고요. 물은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사회가 겪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프로젝트가 사실상 ‘실패’하게 되면 두 번째 고통이 발생하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프로젝트 비용이 굉장히 올라간다는 거죠. 시간과 인력과 자원이 더 들어가게 되니 비용이 몇 배로 뜁니다. 또한 더 나쁜 점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믿을 게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사회적 불신이 더 커지는 거죠.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과정에서 사회 지도층이나 와페드 등 누구도 사업 지연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사업 지연의 고통은 온전히 시민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이죠. 한 번 크게 추락한 사회적 신뢰는 복구가 굉장히 어렵고, 계속해서 불신을 증폭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심화하게 됩니다.」(나성섭)

 

「갈등의 해소라는 게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거나 합의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준을 어떻게 해서든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건 사회적 담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얘기와는 반대로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이 낮을 때에 사회적 무갈등의 상태에서 기술적 개발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환경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적당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경기장 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고 거기에 다른 구조물이 들어설 때 한국의 일반 시민들은 이 사안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그 자리에 지어진 건물이 설령 멋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별개로 이렇게 큰일들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별 거슬림 없이 수용된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폴 김 선생님 말씀은 사회개발 프로젝트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교육적 프로세스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의 질을 생태계 수준에서 총체적으로 진화시킨다는 관점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죠.」(함돈균) 

 

 

4대강 사업이나 용산 참사 등 한국 정부는 강제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후진적 사회의 모습을 자주 보여 왔다. 사회적 갈등이 만연하면 실행 기능이 떨어진다. 앞에서는 혁신을 말하면서도 노소, 계층, 개인·기업·공기관 할 것 없이 한국은 리스크 회피 사회다. 정부 보호 아래 기업은 단기 지대 추구를 최대화하려는 기회를 벌고자 해 스마트폰과 자동차 산업에서 새로운 기술 도입이 늦어진 게 대표적이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하는 공무원 직업도 리스크 회피 컬처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건 실패를 감싸 안는 사회시스템이 안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실리콘밸리는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스탠퍼드대학교가 있고 그런 적극적 환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한국의 새로운 산업은 획기적인 산업 재편성이 이루어진 미국이나 중국과 큰 차이가 있다. 게임 산업(넥슨, 넷마블 등), 인터넷 비즈니스 산업(카카오, 네이버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BTS 등)으로 부상한 시장은 재벌 기업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진출하지 않은 분야였다. 새로운 산업으로 빠르게 움직이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도 필요한데, 고용 안정이나 보수-진영의 이념 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생산적 전환이 가능한 재교육 시스템 디자인을 구축해야 한다.

 

‘글로벌global’이라는 단어는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의 희망을 반영하는 시대적 키워드였고 경제 중심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다. 두 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시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화하는 불신의 키워드가 되었다. 앞으로의 키워드는 도시city다. 도시는 이제 하드웨어 인프라의 집적이 아니라 인재 가 집적하고 사회혁신과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플랫폼이다. 뉴욕, 워싱턴 시애틀(아마존), 캘리포니아 마운틴뷰(구글), 중국의 선전深?, 싱가포르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지역 사회 육성 사업은 보여주기식 행정이나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단순한 이벤트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될 수 없다. 기업과 공장을 도시에 유치함으로써 인재가 모이는 게 아니라, 인재를 도시에 모이게 함으로써 기업과 공장과 문화가 만들어진다. 미래의 도시 전략은 인재들이 모이는 복합적 도시 생태계를 디자인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도시 개발을 한다고 할 때는 ‘도시 진화의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하는 핵심 진화에 대한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도시들은 첨단 기술 직종들을 유치해 투자를 유도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많은데, 젠트리피케이션이라든지 중간 직종의 몰락이라든지 젠더 이슈라든지 이 상황이 파생할 수 있는 문제적 이슈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어떻게 함께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시화정책에서는 가치 지향이나 행정제도 실행 권한을 지닌 단체장 또는 정단이 누가, 어디가 되는가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경제적 이익만 바라볼 게 아니라 이처럼 핵심 진화를 생각할 수 있는 도시계획 모델이어야 한다는 거죠」(폴 김)

 

인간은 생산 도구인 ‘노동자’가 아니라 인적자본(노동자 개인이 보유한 능력, 숙련도, 지식을 아우르는 개념이자 기술 혁신을 위한 질적 노동)의 존재다. 경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축적하는 것과 기술 진보가 필요한데 이 두 개를 모두 이끄는 힘은 인적자본에서 나온다.

 

「저는 싱가포르도 인재 전쟁에 대해 수준 높은 문제의식을 지닌 나라라고 생각해요. 싱가포르는 2014년 국가 어젠다로 스킬스 퓨처Skill’s Future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한국말로 하면 미래 인재 로드맵이에요. 스킬스 퓨처의 목적은 모든 국민을 어느 시기 어느 곳에 있든 간에 평생 교육의 주체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25세 이상의 모든 싱가포르 국민에게 500싱가포르달러에 해당되는 ‘스킬스 퓨처 크레디트’를 지원하여 정부가 승인한 직업훈련 기관에서 온·오프라인 훈련을 받는 데 쓸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바우처 제도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기 주도로 학습을 하여 자기의 역량을 최대로 고양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거예요.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직능을 배우고, 직업 전환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엔지니어였는데 스킬스 퓨처를 통해서 건축가가 될 수 있어요. 그것을 정부가 도와줘요. 게다가 어떤 시기에든 할 수 있다는 거죠.

주목할 점은 이 스킬스 퓨처는 국가 최상위 정책이라는 말이죠. 보통 인력개발 정책이나 교육 정책은 국가 산업개발 정책을 지원하는 지원 정책입니다.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인재를 키운다는 발상에서죠. 그런데 싱가포르는 그게 아니에요. 앞서 제가 모토로라 사례와 싱가포르의 MRO 사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재 주도형 산업개발 정책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인재 우선, 즉 인재가 있으면 그다음은 뭐든지 가능하다는 거죠. 다시 말해 인재를 키우면 그 인재가 새로운 혁신을 통해 새로운 산업을 개척합니다.」(나성섭)

 

 

새로운 기술혁명 사회로 진입하며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일자리 창출이 능사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한국에 시급하다. 일사불란함과 효율성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하던 시절은 분명 지났다. 함돈균은 ‘계층, 지역, 세대 등 사회 갈등이 극심한 한국에서 사회적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사회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는 문화 형성’을 위해 시민성(시티즌십)의 교육과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학교에 방글라데시인이 총장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고 고위층 인사나 대기업 임원진 대부분이 남성인 한국 사회가 다양성과 수평적 관계, 위계와 나이와 서열이 아닌 능력 중심의 사회로 변화할 의지가 엿보이는가.

 

민주주의가 경제 번영을 보장하지 않는다.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은 민주주의여도 경제적으로 어렵다. 스탠퍼드대학교 프랜시스 후쿠시마 교수는 사회적 신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신뢰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가치와 원칙의 공유가 작동하고, 저신뢰 사회는 개인적 연고, 혈연적 연고에 의한 사적 신뢰에 기반한다. 한국은 OECD 기준으로 신뢰 정도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사건, 삼성 백혈병 문제,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감옥까지 간 전직 대통령들 등 일련의 사건과 그 처리를 보며 국민들은 행정부, 사법부, 모든 공권력, 국가 운영시스템에 사회적 신뢰가 많이 깨졌다. 방송과 언론까지 망가져 개인 팟캐스트 같은 미디어를 통해 공적 정보를 얻고 신뢰하는 문화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정부든 실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신뢰를 위해 구축해놓은 객관적 시스템이나 제도적 프로세스가 작동을 제대로 못하니 청와대 국민청원은 늘 문전성시다. 새로운 기술 매체의 등장과 대중문화의 압도적 양상과 전문가의 몰락 현상도 사회적 신뢰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가짜 뉴스는 여러 형태로 진화하며 점점 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가 발달해갈수록 기계를 통해 인격적 관계를 맺은 아이들은 감각 프로세스도 그런 식으로 코딩될 것이고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도 떨어질 텐데 사회적 신뢰까지 추락된 상황이라면?

 

우리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매뉴얼 없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걸 자동화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 해도 인간이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다. 매뉴얼을 넘어서거나 매뉴얼이 무용지물인 상황이 오히려 늘어나는 구조적 ‘위험사회’(울리히 벡)로 향하는 만큼 종합적이고 전체를 보는 눈을 키우며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이 필요하다. 후쿠시마의 쓰나미에서 매뉴얼대로 따르지 않고 상황 판단을 해 산으로 간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많이 살아남은 사례는 자율적 판단 능력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이 책이 제안하는 컬처들은 가장 기본이었어야 할 것들이라 새삼 놀랍다. 모나지 않게 처신하며 안정적인 사회적 틀에 맞춰 사는 패턴이 한국인이 바라는 삶이고 행복인가. 진실을 말하자면 사회안전망이 불충분하니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두려움으로 평균적 삶을 살기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악전고투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한국은 미래학교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성숙한 미래 사회로 향한다면 나는 비판적인 시선, 질문과 함께 그 실패에 동참할 의지가 있다. 무수한 실패와 가까스로 얻는 성공은 끝없이 계속되겠지.

 

 

「미래학교라는 건 아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학교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수능에 전부 쏟아붓는 게 아이의 대입을 결정할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학벌로 결정되는 사회가 끝나가고 있어요. 취직했던 회사가 없어지고 직업군 자체가 없어지는데, 일시적 취직이 평생을 보장할 수가 없죠. 자기 주도성은 대입이 아니라 평생을 결정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면 자기 스스로 결정을 할 기회가 많다는 것은 그런 결정을 통해서 실패할 기회를 많이 갖는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실패할 기회를 효과적으로 자꾸 만들어주는 학교가 미래학교인 거예요.

이건 동시에 컬처이기도 해요, 잘못된 결정도 해봐야 하고, 거기에서 배우고, 실패할 기회를 주고,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배우고, 더 발전된 나를 찾는 그런 기회와 환경을 제공해주는 학교가 미래학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보다 나은 미래는 실패의 계기, 실패를 학습하는 일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육 프로세스와 그런 학교를 디자인하는 것이 사회가 한 단계 진화하고 성숙해지기 위한 컬처 엔지니어링이기도 한 것입니다.」(폴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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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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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인간관계와 그 중요성에 대해 숱하게 고민하지만 성공을 약속하는 자기 계발서처럼 나를 위한 이기심에 그러할 때가 대부분이다. 나도 좋고 타인도 좋으면 좋겠지만 그게 참 쉽지 않다.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옆 사람의 맘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요즘의 행복이 각자 자기 충족에만 그치는 건 아닌지 싶을 때도 많다. 점점 더 자기 앞만 보고 내달리게 하는 사회에서 오늘 아침 풍경은 좀 달랐다. 이른 아침부터 투표를 하러 가거나 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뒤라 내 맘이 더 복잡한 건지도 모르겠다.

 

 

 

신영복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자유를 되찾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감옥에서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결심했다. 당시 교도소 규정 때문에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어 현실적인 이유로 오래 볼 책을 고심하다 그리된 것이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했다고 하겠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선생님.

이 책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고 사회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며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 변혁기였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였다. 신영복 선생은 춘추전국시대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 무한 경쟁의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은 서양 중심의 질서가 반드시 변화할 때이기도 하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흄과 칸트의 견해) 이었다. 많은 역사서들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조화된 구조여서 서양 문명이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축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게 결정적 결함이다. 비종교적인 과학과 비과학적인 종교.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는 와해되었다. 종교의 역할 축소와 함께 현재 과학은 자본 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 패권 국가의 일방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는 동양적 구성 원리에 가치를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같은 위기에 처한 지금, 차이가 아니라 공존을 위한 관계망을 강조하는 이 강의는 현실적인 공론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시작하며 많은 미래 담론들이 나왔지만, 신영복 선생은 그것들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다고 보고 새로운 담론을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아닌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는 담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중용中庸)이 특징이다. 인본주의 유가儒家와 자연주의 도가道家의 견제도 그랬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진다.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읽다) 해 읽은 『주역』의 탄생은 그런 배경이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리의 자리에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담론(『논어』)에서 보편적 개념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은 『자본론』과 『논어』가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이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이다. 한국의 문제도 바로 이것 아닌가. 경제 발전과 돈을 좇으며 사람을 함부로 대하던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목격되고 있다. 무왕불복(無往不復 :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주역』 지천태괘地天泰掛의 효사爻辭)을 우리는 더 참담하게 마주하고 있다.

 

「『노자』의 서술 방식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설辭說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제1장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입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의 첫 구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로 시작됩니다."

이 첫 구절의 차이가 사실 노장老莊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道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有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노자』를 우리는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읽었습니다만 『노자』에는 그러한 사회성과 정치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지요. 『장자』에는 이러한 차원의 정치학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자』의 정치학은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소요를 장자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궁극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노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즉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별애別愛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相利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리의 관계는 개인의 태도나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적·법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에는 겸애와 교리의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보다 진전된 논의가 없습니다. 애정愛情과 연대連帶라는 원칙적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략)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性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禮論, 제도론制度論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중략)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임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악론」편은 대체로 묵자의 비악론非樂論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화순’和順입니다. 분계와 법과 규범과 제도라는 각박하고 비정한 것들을 음악으로 화순시키는 것입니다.」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실제로 수隋 당唐 이래로 선종 불교가 그 지반을 널리 확장해가면서 이러한 의식의 무정부성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그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송대의 신유학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중략)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족의 지배 기간인 원사元史와 청사淸史마저도 각각 송宋과 명明을 계승하는 정통 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망’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중국이 불교에서 받은 충격은 이러한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것입니다. 사이팔만四夷八蠻이라는 세계 인식은 중국 이외에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며 오만이었습니다.

중국 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인 것이지요. 불교 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유학을 대신하여 사회의 이념 형태를 규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건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지요. 특히 불교 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해체 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신유학의 등장은 불교의 이러한 해체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상 영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고 통일 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철학 즉 philosophy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문화 전통에서 비롯된 특수한 문화 아이템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 이후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서양 철학은 현실과 이상, 현상과 본질 등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구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적 구조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구조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사유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철학을 인류의 보편적 문화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이 됩니다. 따라서 철학이라는 지적 활동을 보편적인 것으로 추인하기보다는 그것을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반론의 요지입니다. 철학은 서유럽 중심의 특수한 지적 활동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송대 유학이 철학화했다는 평가는 서양 철학 고유의 범주와 개념을 송대 유학에 적용하여 바라보았을 때만 부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략)

송대의 유학자들에게 불교 사상은 현실의 물질성을 제거하고 사회 제도 그 자체의 존립을 부정하는 지극히 위험한 반사회적 사상이었으며 비윤리적 사상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해탈解脫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일종의 초윤리적이고 탈사회적인 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탈에는 일체의 사회적 관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책무도 사회적 윤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송대 유학자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주자朱子로 대표되는 송대 신유학자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감으로 『중용』과 『대학』을 장구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원래 『예기』禮記 제42편이었습니다만 주자가 그것을 따로 떼어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주석했습니다. 경은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대漢代 유가儒家의 공동 저작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유가 사상 중에서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이라 평가됩니다. ……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혹은 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를 3강령三綱領이라 합니다. 그리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8조목입니다.

우리는 『대학』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주자가 왜 『예기』의 이 부분에 주목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장구하고 주를 달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자 이전에도 사마광司馬光이 『중용대학광의』中庸大學廣義를 지어 『중용』과 함께 『대학』을 따로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대학』을 주목하게 된 배경이 중요합니다. 『대학』은 일반적으로 대인大人, 즉 귀족, 위정자의 학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지식 계층의 학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덕이 있는 사회, 백성을 친애하는 사회,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해탈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송대 지식인들의 사회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反불교적이고 반도가적입니다. 불교의 몰沒사회적 성격에 대한 비판입니다.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입니다.」

 

서양철학을 좀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인용을 통해서도 보듯이 동양 사상이 인간 중심의 관계지향적 성찰이라는 게 와닿을 것이다. 동양 사상을 현실적이라거나 논리가 부실하다고 폄하하는 경향도 보는데, 서양철학의 그 치열한 이성 중심주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 말미에서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고 사상과 생각을 결정하는 것도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많은 어지러움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문제를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라고 했던 묵자,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盡心 上」)이라 엄정히 말하는 맹자,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상서尙書』,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美貌보다는 건강健康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을 『백범일지』에 쓰고 맘에 새기려 했던 백범 선생처럼 내 맘만이 아니라 많은 맘을 살피는 실천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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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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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시각계는 빛의 패턴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십억 개의 신경을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해석을 보여준다. 뇌는 과거 우리가 보았던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보게 될 사물의 형태를 예상한다. 우리의 숱한 판단 착오부터 귀신이나 UFO를 봤다는 착각도 이에 기인한다. 자세한 얘기는 차차하게 될 테지만 뇌는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만든다.

 

「뇌의 무의식계는 인식한 조각을 모두 모아 패턴을 예상하고 필요할 때는 빈틈도 알아서 메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의미 있는 해석을 하게 된다. 무의식계는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의식계도 같은 이야기를 경험하되 곰곰이 되풀이해 생각해보고, 심지어는 맞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뇌의 다른 영역은 멀쩡히 작동하지만 이마앞엽겉질만 손상된 환자들이 만들어내는 시나리오에서는 자기숙고라는 이마앞엽겉질의 인지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의식의 감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의 빈틈 메우기 과정은 중간 점검 없이 예측하고, 경험 조각을 모으며, 심하면 말도 안 되는 해석과 기괴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뇌가 손상되었을 때에만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사고, 기억, 두려움, 바람 등에 맞춰 무의식이 이은 조각보가 우리의 정신을 차지하고 은유적인 이야기까지 탄생한다. 우리의 꿈이 대체로 기괴한 이유이다. 또한 고차원적인 의사결정이나 자기숙고에 개입하는 이마앞옆겉질이 밤에 휴먼 상태에 빠지는 것도 그에 일조한다. 케테 콜비츠와 루이스 캐럴의 기록을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들 작품에서 그러한 증상을 감지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가 예술과 문학에서 추앙하는 상상력과 표현력의 큰 근거는 흔히 연결짓는 ‘광기’가 아니라 뇌의 여러 증상이 발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환각’이라고 하면 정신질환, 신경질환, 불법 약물 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시각적 환각 증상이 많이 생기는 찰스보닛증후군 환자에게는 신경학적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 문제 때문이다. 안톤증후군 환자는 시각계와 그것을 감독하는 상위 계층의 감각 영역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있어 시각겉질이 타협하는 순간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시각에 문제가 없다고 착각한다. 찰스보닛증후군 환자처럼 방출 환각이 생기면 뇌는 진짜 시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든 이미지를 진짜로 본 것이라고 착각한다. “찰스보닛증후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 대뇌다리환각증의 환각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겹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겹침 현상은 무의식 회로가 만든 꿈이 잠들지 않은 의식에 침입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생겨난다.”

뇌는 감각 경로의 상호 교차를 허용하고 감각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을 때 입 모양을 보면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 요즘처럼 코로나19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대화할 때 답답함을 느낄 텐데 바로 이 때문이다. “시야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눈을 통한 시각적 탐지가 아니라 그런 시각적 탐지와 관련된 의식적 경험일지도 모른다.”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습관인지, 의식인지에 따라 선수의 성적이 바뀐다는 사실은 뇌에는 행동을 지배하는 두 개의 평행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충분히 많이 연습하면 습관 체계에 통제권이 넘어가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의식의 비습관 체계는 그 행동에서 해방되어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멀티태스킹 존재지만 이 시스템이 항상 잘 돌아가는 건 아니다.

 

「뇌에 정보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억을 절차기억(procedural memory)과 사건기억(episodic memory)으로 나누는 것이다. 절차기억은 방법에 대한 기억으로 자전거 타는 방법, 매듭 묶는 방법, 키보드 치는 방법, 운전하는 방법 등이 해당된다. 행동 절차를 많이 연습할수록 절차기억도 강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건기억은 과거의 경험, 감정, 장소, 집에 오는 길에 우유를 사오기로 하는 일과 같은 생각 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평생 일어난 여러 사건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절차기억과 사건기억은 저장하는 정보 유형도 다르지만 일어나는 뇌의 영역도 서로 다르다. 사건기억은 뇌 안쪽 깊숙이 관자엽 옆에 위치한 해마에 저장된다. 사건기억은 습관화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활성화되고 십자형 미로 속의 생쥐처럼 습관적 행동을 할 때는 잠잠하다. 반대로 절차기억은 바깥줄무늬체에서 일어난다. 이곳이 습관 형성을 책임지는 영역과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습관적 행동은 바깥줄무늬체의 담당이고, 해마는 습관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해마를 비활성화시켜도 실험쥐가 무의식적으로 길을 찾아 움직이는 데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습관 체계를 이용해 행동하면 그 행동에 대한 기억은 사건기억을 이용하는 해마에는 저장되지 않는다. 출근길 운전자가 그날 아침 운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동은 사건기억에 저장되지 않으면 그 행동과 관련된 이미지(옥외광고판 등), 소리, 감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행동은 습관적 절차를 조용히 강화한다. 그것이 전부다. 습관은 사건기억에 정보를 기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건기억에서 정보를 가져오지도 못한다. 사건기억에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깜빡 깜빡 하는 이유다.

상상과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심상 훈련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믿을만한 연습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졌다. 단 조건이 있다. 저자는 뇌과학자였던 질 테일러가 뇌질환을 앓고 회복하며 도움된 기법을 담은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에서의 오류도 지적한다. “심상 훈련이 뇌중풍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질 테일러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 효과가 없는 것일까? 부상 선수와 뇌중풍 환자 모두 근육이 약해진 것은 똑같은데, 왜 심상 훈련이 선수에게는 효과가 있고 뇌중풍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는가? 이쯤에서 심상 훈련이 운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심상 훈련이 자극하는 뇌 영역은 신체 동작에 영향을 미치는 뇌 영역과 똑같다. 심상 훈련이 성공하려면 먼저 운동겉질에서 근육까지의 신경 경로가 온전해야 한다.”

뇌가 손상되면 정체성의 여러 부분, 즉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는 능력,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기억, 인격의 일관성, 자신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능력, 사고와 행동에 대한 통제감 등이 파괴되는 걸 볼 수 있다. 뇌는 우리가 ‘인간’이자 ‘나’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

 

「거울신경은 하품 전염과 관련 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사회적 친밀함도 하품의 전염성을 높인다면 사회적 친밀함과 거울신경의 활동에 서로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는 거울신경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머릿속으로 흉내내는 것이 그 순간의 경험을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주위 사람을 이해해야 할 때 흔히 하는 말처럼 거울신경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기억은 우리라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우리의 개인사는 우리의 자아상을 만들고 저장된 지식을 모은다. 무의식계는 기억을 암호화하면서 우리의 인격도 형성한다. 무의식은 비디오카메라처럼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은 그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이 맡은 역할에,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집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순간의 감정은 무엇인지, 무엇을 기대하고 두려워하는지, 그 순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맥락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맥락을 바탕으로 뇌는 초고를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감정을 발산한 순간을 기억한다. 9/11 테러 공격 뉴스를 들었을 때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격동시킨 뉴스를 들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인생사에 한 축을 차지했다. 그날 그의 하루에서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세계무역센터가 정확히 몇 시에 공격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뇌는 개인사를 담은 스냅사진을 배열할 때 자아를 보호하는 방식을 자주 따른다. 뇌의 무의식을 뉴스 채널이라고 한다면 이는 한쪽으로 치우친 뉴스 채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원이 진보 성향의 텔레비전을 자주 시청하고 공화당원이 보수 성향의 라디오 대담을 청취할 때가 많은 것처럼 뇌의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인식과 세계관에 들어맞는 경험을 합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뇌는 우리의 관점이 유지되게 도와준다. 뇌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을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가끔은 시간 순서를 조금씩 뒤섞거나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와 맞지 않는 사소한 세부 사항을 멋대로 생략한다. 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적 사고와 결정 능력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건강하고 적응적인 기제다. 기억억제는 뇌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생략 오차를 사용하는지 알려주는 극단적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억억제가 감정적 트라우마에서 자아를 보호하듯이 말짓기증은 기억 손상이나 혼동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경학적으로도 이치에 맞는 추론이다. 말짓기증은 보통 자기중심 사고를 책임지는 안쪽관자엽의 손상으로 생긴다. 안쪽관자엽은 열혈 대학 농구팬이 경기를 보면서 선수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점화되는 영역이다. 안쪽관자엽이 손상되면 자아의식에 위협을 느낀다. 어쩌면 말짓기증은 뇌가 그런 자아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는 신체적 증상들은 곧장 현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외계인에 납치되어 생체 실험이나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이 비슷비슷한 것은 ‘수면마비’ 증상으로 보인다. “수면마비는 종종 환시와 환청도 함께 가져온다. 수면마비가 왔을 때 이상한 소리를 내지만 나중에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선뜻 알아내지 못한다. 방에서 섬뜩한 존재가 보이거나 낯선 존재가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환각은 으레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심하게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까지 갖는다. 그러면서 수면마비의 환각 경험은 의식이 있는 상태의 악몽으로 변한다.”

‘영적 체험’도 신경학적으로는 다르게 본다. “신경과 의사는 관자엽 뇌전증을 앓는 환자들이 겪는 증상을 “과종교증(hyperreligiosity)”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관자엽 뇌전증 환자 100명 가운데 한 명에서 네 명은 로버트가 본 것 같은 하늘의 존재가 등장하는 종교적 허상이나 각성 상태를 경험한다. 어떤 환자는 발작의 영향이 이마엽까지 미쳐 행동방식이 영원히 변하게 된다. 종교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신도가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관자엽 뇌전증이 원인이 되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도 관자엽 뇌전증 증상을 많이 보였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등 여러 번 종교적 환상에 빠졌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모세, 마호메트, 부처 등 종교적 상징 인물도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같은 질병을 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밝은 빛을 보았고, 환희를 느꼈으며, 우주의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는 ‘임사 체험’도 심장마비 생존자나 전투기 조종사가 뇌의 산소 결핍에서 겪은 환상이나 뇌와 눈으로 향하는 혈류가 줄어들어서 겪는 렘방해 상태와 유사했다.

‘카프그라증후군’은 주변인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가짜로 바꿔치기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강렬한 기억은 더 확신하며 떠올리고 이야기에 구멍이 있다는 생각은 거부한다.” 외계인이나 신을 만났다거나 사후세계를 봤다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지적을 했을 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기이한 경험에는 기이한 해석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뇌는 외계인 납치 같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정말로 이상하지만 그것이 딱 맞는 설명이다. 이런 해석에는 감정적 경험을 풀이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건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무의식계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왜 조현병 환자들이 이상한 기술(광선총이나 헬륨 전류)이나 종교적 존재(성령이나 악마)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고 말하는지, 왜 그들이 텔레비전 등장인물(패트릭 더피)이나 가상 인물(존스 씨)과 소통한다고 주장하는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불가사의한 힘이 머릿속에서 혼란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뇌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믿고 싶은 것에 알맞은 해석을 만들어낸다. 종교적 믿음이 강한 사람은 머릿속 목소리가 신성한 존재의 목소리라 주장하고, 스릴러 소설 애독자는 FBI나 CIA 요원에게 감시당한다고 걱정한다.” 음모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자신의 예측이 맞았을 때 “거 봐라.” 하지만 더 많은 예측 오류는 눈 감는다. 우리는 진정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 있고 이용할 수도 있다. 진정 나를 위해서라도.

 

「왜 무의식계는 완전한 서사를 유지하려 하는가? 왜 무의식계는 혼란스럽거나 모순된 경험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해석을 만들어내는가? 이유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주변 세상의 질서와 체계를,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우리가 처한 위치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있다. 욕구와 욕망을 고민하고,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신의 개인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개인사를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 상실, 인지나 사고의 빈틈, 모순된 경험, 외적 파괴 등은 뇌가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개인의 서사에 위협을 가한다. 무의식계는 자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도 일삼는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뇌는 자아를 유지한다는 목표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자아를 분열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의식계 덕분에 뇌가 만드는 이야기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러면 무의식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무의식계는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무의식계는 단편으로 끊어진 경험 조각들을 끌어와 필요하면 빈틈을 메우고 우리의 인생사를 순서대로 배열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구축한다. 또한 자아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며, 심지어는 분열까지 이용해 나쁜 생각과 기억을 몰아낸다.

왜 그러는가? 정체성을 그토록 신성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적 관점에서 말하면 자기숙고를 하는 유기체일수록 생존 확률이 높다. 우리는 생존을 중요시하며, 자신과 후손을 보호하는 데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 뇌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유지해주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통찰할 수 있다. 뇌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고, 곰곰이 추론하고, 결정을 심사숙고하고, 목표와 욕구에 딱 들어맞는 행동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정체성을 파악할 때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뇌가 건강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유지하는 일에 특히 중점을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매 순간마다 뇌의 바탕에 깔린 논리 회로는 쌓아온 경험을 흡수하고 빈틈없이 조사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성숙하게 만들고 개선하기 위해서다. 깨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매일 밤 꿈을 꾸는 동안에도 무의식이 골몰하는 목표는 같을 수 있다. 일부 신경학자들은 꿈에 자아의식 발달을 돕는 기능이 있다는 가설을 말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꿈이 항상 1인칭 시점인 것일지도 모른다. 꿈은 행동을 하고 직접 관찰을 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미리 알아보는 예행연습이다. 꿈은 자아의식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종합해보면 이 책은 뇌를 의식계와 무의식계라는 두 평행 시스템으로 본 개념, 정체성이나 자아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고(《워싱턴 포스트》 수석 편집장 메리엔 세게디의 평), 감각 지각부터 습관, 최면, 언어, 학습에 이르기까지 뇌의 작동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뇌과학 백과사전(V. S. 라마찬드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등의 평)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비논리적인 이유를 또 한 번 밝히며(마이클 셔머의 평), ‘올리버 색스의 발자취를 좇으면서도 그만의 새롭고 참신한 호소력으로 새로운 신경과학 교양서’(예일의학대학 교수 할 블루먼펠드의 평)의 모범을 보여줬다. 내게도 지금껏 읽었던 신경과학 책의 종합이었다. 뇌과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은 분명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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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3-1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무의식>을 읽었었는데 흥미로웠죠. 이 책으로 제가 발견한 건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논리적임, 이에요.
뇌와 관련한 것들은 인간을 알게 해 줘서 늘 관심이 갑니다. 소개하신 책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AgalmA 2020-03-16 16:38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읽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책 읽고나니 뇌과학 책은 더 새로운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 당분간 안 읽어도 되겠다 싶더군요.
어수선한 날들 평안하시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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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이다.’ - 프로이트

 

 

훌륭한 품성과 재능, 좋은 스승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있다면 이런 책이 나오게 된다. 올리버 색스의 신경과학 책은 알렉산드르 R. 루리야의 영향이 매우 컸다. 휴링스 잭슨, 쿠르트 골드슈타인, 헨리 헤드와 함께 알렉산드르 루리야는 신경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는 그들의 여러 면모가 비판 비교되었는데 색스는 알렉산드르 R. 루리야를 특히 존경해 활발히 서신 교환을 하며 교류했다. 루리야는 신경학 분석에 있어 연구적 저작물 ‘고전적 과학’과 소설에 가까운 전기풍 이야기책 ‘낭만적 과학’이란 이중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후기에는 후자에 더 집중했다. 고전적 과학이 담을 수 없었던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을 담은 그의 후기작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국내 제목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2008, 도솔)가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2007, 갈라파고스, 품절)가 과잉에 대해 다뤘듯이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1985) 글의 줄기도 그러하고, 『깨어남』(1973)도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증,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 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은 병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사(이야기)가 필요했다.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룬 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의 도래와 함께 쇠퇴하였다. 루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 남기는 힘, 이것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보편적인 자질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 우리는 이 힘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루리야가 각각의 환자에 긴 세월 전념하며 책을 썼듯이 올리버 색스의 모든 책이 환자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것도 이런 신념에 기반한다. 우리가 뇌와 정신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건 160년도 되지 않는다.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86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브로카가 뇌 좌반구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장애 즉 언어상실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대뇌신경학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그후 수십 년에 걸쳐 사람 뇌의 ‘지도’가 그려짐에 따라 언어, 지각 등의 능력은 각각 그에 해당하는 뇌의 특정 ‘중추’들이 관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세기 끝 무렵이 되자, 좀더 예리한 관찰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특히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언어상실증》에서 기존의 뇌 지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며, 모든 정신활동에는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가 있고 그와 똑같이 매우 복잡한 생리학적 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인지나 지각 능력에 발생하는 특정한 장애를 연구하면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인식불능증’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언어상실증이나 인식불능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더 새롭고 세련된 과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A. R. 루리야(그리고 그의 부친 R. A. 루리야), 레온체프, 아노킨, 번스틴과 그 밖의 여러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그것에 ‘신경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로운 과학은 루리야의 일생에 걸친 연구에 힘입어 풍부한 결실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중요성에 비해, 신경심리학이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경심리학은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영어판은 1966년)이란 기념비적인 책 안에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또한 일종의 전기 즉 ‘병적학’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영어판은 1972년)에도 실렸다. 이 책들은 그 나름대로 거의 완벽하지만, 루리야가 전혀 손을 못 댄 영역도 있었다.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은 뇌의 좌반구가 관장하는 기능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의 주인공 자제츠키 역시 좌반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우반구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경학과 신경심리학의 역사는 좌반구 연구의 역사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열등한’ 반구라고 불리는 멸시를 당할 정도로 우반구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좌반구의 손상 부위와 그에 따른 증상을 밝혀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었던 데 반해, 우반구의 각 영역에 해당하는 증후군은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우반구는 좌반구보다 좀더 ‘원시적’인 것으로 비하되곤 했다. 반면 좌반구는 인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주장이 옳다. 좀더 정교하고 전문화되어 있으며 영장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에서는 가장 나중에 발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 즉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능력을 담당하는 것은 우반구이다. 이 우반구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있고 그 컴퓨터에 해당하는 것이 좌반구이기 때문에 이쪽은 말하자면 프로그램과 도식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정신학은 사실보다 도식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우반구에 원인을 가진 증후군이 나타나면 그것을 특이하고 기묘한 현상으로 간주했다.」

 

 

색스가 생각하기에 병은 상실이나 과잉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를 넘어, 병에 걸린 생명체인 개인이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며 주체성을 지키려는 현상에 주목했다. “정신의학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 즉 수단과 결과가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였고, 이후 이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과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복구와 재통합을 다루려 했다.

 

 

「제1부 ‘상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불능증’의 예, 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상 보고는 고전적인 신경학에서 공리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기존의 견해에 따르면 뇌의 손상은 그것이 어떠한 손상이든 ‘추상적·범주적인 태도’(이것은 쿠르트 골드슈타인의 용어이다)를 마비, 상실시킨다. 이것이 마비 또는 상실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감정과 구체적·즉흥적인 태도뿐이라는 것이다(1860년대의 휴링스 잭슨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음악가 P선생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그는 감정, 구체성, 개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은 시각의 세계에 대해서 뿐이지만) 추상적·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살며 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나 이런 환자들의 경우에는 개별성을 인식하는 능력과 판단력이 거의 재앙 수준에 가까울 수 있는데도, 신경심리학은 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 원인은 신경학 그 자체가 상정하고 있는 가정들 즉 신경학의 진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학은 고전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기계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뇌를 기계에 비유한 잭슨부터 컴퓨터에 비유하는 오늘날의 신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무서운 비유일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의 인지신경학과 인지심리학은 P선생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시각인식불능증이나 얼굴인식불능 증세는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만 사는 삶을 누가 원할 것인가. 데이비드 흄처럼 인간을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 한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색스의 지적처럼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고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한 통일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코올로 인한 기억 손상이 심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환자를 살펴보자.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알렉산드르 R. 루리야)이기도 하다. 문제는 깨달을 자신마저 잃어버릴 때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2012)에 나오는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올리버 색스의 이 책에 소개되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지미(<길 잃은 뱃사람>)와 매우 유사한데 난폭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정신 집중에 몰두하는 행위(ex 종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연속성과 현실성을 되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색스는 자기 정체성의 극복 힘을 믿는다.

 

 

「지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가 ‘흄이 말하는 식’의 거품 같은 존재, 인생의 표피 위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일관성 즉 그가 앓고 있는 흄식의 질병을 초월하는 어떤 길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경험과학에는 그런 길이 없다. 경험과학 즉 경험주의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쩌면 진료와 관련된 교훈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교훈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나 치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렸더라도, 혹은 심각한 기질적인 장애나 흄이 말하는 식의 용해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예술이나 교감, 영혼의 접촉을 통한 재통합의 가능성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 않을까? 신경학적으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걸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오감 외에도 자신이 자신임을 아는 ‘제육감(고유감각-근육,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의해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 1890년대에 셔링턴에 의해 발견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도 제기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이런 확실성이야말로 모든 지식과 확실성의 출발점이자 기초’라고 생각했고 『확실성에 대해서』에서는 ‘우리 몸의 확실성을 빼앗아버리는 원인, 조건, 상황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고유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드러나는 장애가 없어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되는데, 이들이 느끼는 ‘존재 상실감’ 혹은 ‘비현실감’은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것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았다. 편마비 증상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신체 이미지 장애’ 환자 경우 동작과 지각이 완전히 어긋나 버려 실존적 궁지에 빠진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다. 언어상실증 환자나 음색인식불능증 환자는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해 보통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 표정 이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손이 마냥 장애인 것은 아닌 셈이다. 신경학에서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두 가지 가능성에 주력해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는 엄밀히 따지면 신경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능의 과잉에서 오는 질환을 논하는 것은 신경학의 기본개념에 대한 도전이다. 자주 볼 수 있고 흥미롭기까지 한 이와 같은 질환에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환도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주목을 받고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흥분성 장애나 생산적인 질환(상상력 과잉, 충동 과잉, 조증燥症 등)을 질환으로 문제삼는다.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 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신경계를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개념과 비전은 지극히 편협하다. 따라서 좀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개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제1부에서 다룬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을 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 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 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적어도 상상 기능, 기억 기능, 지각 기능과 같은 고도의 기능이 거기에 나타난다. 기존의 신경학은 결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신생활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실제의 뇌와 정신 상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뇌와 정신이 고양된 상태, 과도하게 활발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병은 단순히 결손적 기능 장애가 아니다. 도취나 흥분에 대한 광적인 탐님 등 과잉의 상황도 나타나는데 이때 “자아가 병과 제휴를 맺고 한 몸이 되어 독립된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병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1885년 질 드 라 투렛이 발견한 투렛 증후군은 기묘한 동작이나 생각이 과잉 현상을 보이는 신경학적 장애다. 정서, 본능, 상상에 관련된 모든 면에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면병 환자(기면성뇌염후 증후군)이나 투렛 증후군은 기존 의학 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한 채 잊혔다. 두 증상이 운동과다장애 즉 과도한 흥분 증세의 공통점이 있다는 건 최근에 다시 주목되었다. 이 두 증후군에 대한 건 색스의 『깨어남』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흥분과 충동 강박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병리 상태는 역설적인 행복감이다. 발작적 회상이 주는 행복감도 있고, 마음의 평온과 순수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간질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병리 상태이든 정상 상태이든 우리가 탄 배는 ‘나는 누구인가-정체성’을 향한다.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傳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감각・사고・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 아마도 그것이 톰슨 씨가 장광설 만들기에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연속성, 즉 연속적인 내면의 이야기의 상실이 그를 일종의 이야기광이 되게끔 내몬 것이다. 끊임없이 말할 수밖에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껄이며 몽상을 말한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가짜 인간들 즉 유령들이 사는 가짜 세상 속에서 그리고 가짜 연속성 속에서 가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상태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색스의 표현대로라면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한 것이 아니라 병과 싸우고 이겨내는 의지력이 ‘건강’이라 하겠다.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규제된다. 우리는 인간이 ‘신경기능과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라고 여기지만 기질적인 병의 개입으로 변화할 때도 있다. 3부에서는 그러한 환자들이 소개되었다. “제3부의 주제는 관자엽과 변연계에 특이한 자극을 가한 결과 발생하는, 사람을 과거로 이행시키는 심상과 기억의 힘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뇌 속이 어떻게 될 때 환영과 꿈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다.

 

 

「‘무의식의 기억’에 대한 훌륭한 저서를 남긴 에스더 살라만은 자신의 책에서 ‘어린 시절의 신성하고 귀중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 혹은 그것을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역설했다(《순간순간들》, (1970년)). 만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면 인생은 아주 무미건조하고 근거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러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얻는 깊은 환희와 존재감에 대해,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 등의 자서전에서 많은 인용문을 뽑아 논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살 수 없는 망명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학창시절도, 암페타민에 찌들었던 시절도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때와 비슷한 일은 그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촉망받는 젊은 내과전문의가 된 스티븐은 친구이자 동료로서 나와 함께 뉴욕에서 일하고 있다. 후회랄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는 때때로 향수에 잠기곤 한다.

“냄새로 가득 찬 세계,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그런 세계였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순수한 지각의 세상, 모든 게 선명하고 생기 있는, 자족적이고 충만한 그런 세상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후각에 대해 인간이 성장하고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억압된 ‘희생양’이라고 쓴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는 인간이 직립을 하고 전생식기 단계의 원초적인 성욕이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후각도 함께 억압당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시각이 지나치게(혹은 병리학적으로) 예민해지는 현상은 성도착증, 물품음란증의 경우에 흔히 나타나며 퇴행이나 도착倒錯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실제로도 보고되어왔다. 그러나 스티븐의 예에서 보인 탈억제는 그보다는 훨씬 더 일반적으로 보이며 비록 흥분(아마도 암페타민으로 인해 유발된 흥분일 것이다)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성적인 것이나 성적인 퇴행과 연관된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한 후각과민증(때로 발작을 동반하기도 한다)은 도파민 과민 상태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뇌염후유증 때문에 엘도파를 투여받는 환자나 투렛 증후군 환자들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어쨌든 억제가 가장 기본적인 지각단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세련되고 범주화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식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헤드가 ‘원시 감각’이라고 이름 붙인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인 느낌에 대한 억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의 중요성은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처럼 과소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부는 지적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질’을 더 헤아릴 것을 강조한다. 관념적·추상적 능력이 지능의 우위일까. 이 장에서 소개되는 지적 장애인들은 구체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례였다. 그들을 이해하고 제대로 돕지 못해 상황을 좋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헤아리는 능력은 없지만 비상한 수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쌍둥이 형제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적응시키려고 억지로 조치를 취해 그들을 그저 우둔한 존재로 만든 경우라든지(<쌍둥이 형제>) 스케치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폐증 소녀에게 가차 없이 치료를 가해 예술능력을 잃게 만든 경우(<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등이다. 백치천재나 자폐증 천재의 재능을 창조적인 인격이나 개인으로서의 인격조차 고려하지 않고 ‘단 하나 남아 있는 능력’이라든가 ‘조각조각 난 단편적인 기술’로밖에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 입장에서의 편견일 수 있다.

 

 

「자폐증 환자는 추상적이고 범주적인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 하나하나가 소중할 뿐이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자폐증 환자에게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자폐증 환자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일반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다중 우주’ 즉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정확하고, 엄청나게 열정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살고 있다. 그것은 ‘일반화’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존재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리얼한 하나의 현실적 태도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일찍이 자폐증은 유아의 정신분열증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증후학적으로 볼 때 완전히 정반대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항상 외부 세계에서 오는 영향을 호소한다. 소극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반면에 자폐증 환자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한다면(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전혀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섬처럼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라고 존 던은 말했다. 그러나 자폐증 환자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이다. ‘정통적인’ 자폐증이라면, 그 증상이 3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본토’의 기억이 전혀 없다. 반면에 호세처럼 나중에 뇌장애로 인해 야기된 ‘2차적인’ 자폐증의 경우에는 기억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 옛날에 관계를 맺었던 본토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호세는 다른 자폐증 환자보다 영향을 받기 쉬웠고, 적어도 그의 그림에는 자신과 외부 세계와의 상호교류가 나타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내 리뷰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인간과 한 인간이 그의 정체성을 이루며 만들어가는 삶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색스의 면면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다. 그의 다른 책에서도 그런 따스한 마음의 질을 느낄 수 있다. 620쪽에 달하던 벽돌책 『깨어남』이 그저 임상 분석 글이었다면 읽기 굉장히 고역이었을 텐데 그의 그런 면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기이한 환자나 병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그가 본문에서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우리를 닮은 이야기로서 삶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길 원한다. 최근 색스의 첫 저서 『편두통』(1970)이 국내 출간되었다. 보나 마나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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