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써본 사람이라면, 시종일관 맞장구치게 되는 명문이다. 황유원 씨 번역도 참 깔끔.
이렇게 깐깐한 (글을 쓰는) 사람이 카버에게 자기 집필실 열쇠를 줬다니ㅎ!



1.
이 책에 제시된 원칙들을 완벽히 숙지한 작가라면 어조와 스타일의 기묘하리만치 아이러니한 사용법이 내러티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마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게 어떤 기술이 됐든 그 몸통을 단단히 붙들라. 그러면 그 기술의 잔가지들을 장악하게 될 테니.
지금 대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비관습적 소설unconventional fiction들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덧붙여야겠다. 메타픽션이란 본성상 관습적 소설conventional fiction에 대한 유사–소설적fiction-like 평론이며 소위 해체주의 소설deconstructive fiction은 관습적인 방법들을 따르는 까닭에(로버트 쿠버Robert Coover의 「노아의 형제Noah’s Brother」를 생각해보라), 나는 젊은 작가들이 근본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보다는 관습적 소설의 복잡다단한 특성들을 모두 제대로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2.
작가 지망생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정통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책들을 탐독해야 하며, 신중하게 글을 쓰되 꾸준히,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를 사려 깊게 평가하고 또 평가하면서 써야 한다는 말이다. 콘서트 피아니스트와 마찬가지로, 작가에게는 연습이 곧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문학 애호가가 괜찮은 이야기를 써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란 피아니스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테크닉이 몸에 완전히 배어버린 자다. 보통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 소설과 시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몇몇 중요한 소설가들은 정반대되는 말을 했는데, 가령 헤밍웨이는 소설가가 기술을 익히는 방법은 멀리 떠나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셔우드 앤더슨Sherwood Anderson과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라는 최고의 두 선생에게로 공짜 ‘교습’을 받으러 떠났다가 그들 곁에서 살아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길.

3.
어떤 작가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잭 런던과 같은 작가들은 거의 스스로의 힘으로 작가가 됐다는 것도 사실이다. 배 위에서, 벌목 캠프나 금광 캠프, 농장이나 공장의 근무교대 시간에 책을 읽는 것으로 교육을 대신한 자들이 있다. 대학 교육이 예술가의 작품에 여러 면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화가들은 미학자들이나 미술사 교수들에 대해 딱히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진지하고 ‘학구적인’ 작가들이라 할지언정 ‘영문학 교수’를 애정 어린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대학에서의 삶이 정말 좋은 소설을 위한 소재를 만들어낸 적은 거의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사소한 일들과 평범한 일들, 연속극 같은 일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라.
무식쟁이들ignoramuses—교육을 계속 멀리해온 작가—이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 적은 없다. 읽을 만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의 큰 문제는 그가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자신의 주장이 낡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는 점(사실 모든 주장은 낡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적으로 내몬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절대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저지른 잘못을 보라. 이 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들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타인벡은 오클라호마의 촌뜨기들과 그들이 일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느꼈던 끝없는 서러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던 반면, 그들을 고용하고 착취했던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농장주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며 딱히 관심도 없었다. 그리하여 스타인벡은 결과적으로 위대하고 빈틈없는 소설을 쓰는 대신 한 무리의 선이 지독하고도 믿기 어려운 악에 대항하는 실망스러운 멜로드라마를 쓰고 만 것이다. 객관성, 공정함, 그리고 정당한 평가에 대한 체계적인 추구는 대학 생활의 가장 큰 장점들로 내세워지는 것들이다.

4.
단지 공정한 논쟁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식쟁이들이 나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위대한 글은,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글을 흉내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그 소설이 얼마나 혁신적이든지 간에—하나의 명확하고도 거대한 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효과란 우리가 좋은 소설들에서 흔히 얻곤 하는 그런 효과와 다른 것이 아니다. 테크닉이 얼마나 기괴하든, 소설의 방식이 어떻든 간에 우린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바로 이런 게 소설이지!" 하고 말한다.
(중략)
인간이란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본보기가 없으면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존재다. 누군가가 혼자서 셰익스피어를 읽고서 그를 사랑하게 될 수는 있겠지만—무식쟁이는 심지어 이런 일을 할 리도 없을 것이다—반 강제로 『오셀로』 『햄릿』 『리어 왕』을 한 줄 한 줄 지도받는 일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 이것이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강의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심지어 강사가 머리가 좀 안 좋고 감성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대학에서는 분명 도움이 될 비평서와 논문, 살아남은 책과 신간 들 중 가장 좋은 책을 발견할 수가 있다. 대학에서의 선별적인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가 실은 무신론자였다는 둥, 혹은 공산주의자였다는 둥, 아니면 그건 그저 프랜시스 베이컨이 사용했던 필명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둥 떠들어대는 괴상한 책들이나 읽게 될 뿐이다. 대학 밖에서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 초서Chaucer나 단테와 같은 위대한 대가들—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 문명이 이룩한 것들 중 최고의 본보기가 되어줄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라도 문학에서 가능한 최고의 효과들에 익숙하지 않으면 사실상 그는 그보다 덜한 수준의 효과들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5.
견습 작가가 기본 원칙들을 마스터했다고 치자. 그는 어떻게 소설을 시작해야 할까? 그는 무엇에 관해 써야 하며, 자신이 잘 썼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한 흔한 대답, 그리고 대개 유감스러운 대답은 "당신이 아는 것에 대해 쓰라"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 성공회 교도 어머니, 몸이 불편한 여동생에 대해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상상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 정신의 검열 장치와 왜곡 체계를 재빨리 작동시키는 것은 없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이 조언이 먹힐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보통 그것은 특이한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잘 쓰는 건 단지 그가 그런 종류의 소설만을 주로 읽어왔기 때문이다. 『뉴요커New Yorker』나 『월간 애틀랜틱Atlantic Monthly』, 『하퍼즈Harper’s』에 나오는 리얼리즘 소설들 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인생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특정 문학 장르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이상적인 대답은 아니겠지만 이게 더 나은 대답이다. "당신이 알고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유령 이야기, SF 작품, 당신의 유년기를 있는 그대로 다루는 이야기 같은 것들—를 쓰라."
비록 늘 한 번에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시간을 들여 예술 작품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때 알게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술가가 사고하는 최소 단위—그가 작품의 디테일들을 선별하고 체계화하는 주된 의식적, 무의식적 바탕—가 바로 장르란 사실이다.

6.
참신함은 주로 장르 간의 기발한 크로스오버나 친숙한 소재들의 격상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크로스오버의 한 예로 포크너의 「얼룩무늬 말들Spotted Horses」의 세 버전들 중 가장 훌륭한 버전("저 플렘That Flem"으로 시작하는 버전)을 떠올려보라. 이 작품에서 포크너는 설화체 문학yarn의 테크닉—주로 화법과 우스꽝스러운 과장, 그리고 잔인한 유머—과 상징적 리얼리즘 단편소설realistic-symbolic short story에서 사용되는 테크닉을 결합하였다. 이런저런 종류의 장르 간 크로스오버는 영문학 전통에서 대부분의 위대한 문학 작품들이 해왔던 것들이다. 초서는 계속해서 하나의 형식을 다른 형식과 겨루게 하는데, 이를테면 『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의 「기사 이야기Knight’s Tale」에서 그는 서사시epic와 중세 기사 이야기romance 형식에다 보다 덜 알려진 형식들을 뒤섞고 있다. 가장 위대한 중세 두운체alliterative 시인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는 (유혹의 장면에서) 초기 우화시fabliau와 중세 기사 이야기적 요소를 함께 사용한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강력한 테크닉들은 모두 장르 간 크로스오버의 결과물들이다. 극의 정서적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산문과 운문의 결합, 영국 민속극folk play과 떠들썩한 중세 기적극mystery play (또는 길드의 연극) 등에서 차용한 전통과 최신 로망Roman 전통과의 결합, 그리고 ‘어두운 희극’을 위한 비극 전통과 희극 전통과의 결합 등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다.

7.
어떤 소설 작품에서건 작가의 첫번째 임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야기하는 사건이 (우주의 법칙들의 사소한 변화를 가정하여) 실제 일어났거나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혹은 명백히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독자가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리얼리즘 작가가 사건들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핍진성verisimilitude을 통해서다. 작가는 유령, 변신하는 존재, 혹은 절대 잠을 자지 않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때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그럴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그리고 비판적 지성을 흐트러뜨리는 각종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가 "시적 신념을 야기하는, 순간적이고도 자발적인 불신의 유예the 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 for the moment, which constitutes poetic faith"—문학사상 가장 꼴사나우면서도 가장 유명한 문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부른 효과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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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영화 말들의 흐름 2
금정연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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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

 

 

자기 암시를 성공 비결로 과대 포장하는 자기 계발서들은 요리조리 끼워 맞추면 뭐라도 하나 맞출 수 있는 오늘의 운세 같다. 그렇다면 서평을 쓰면서 서평을 안 쓴다고 말하는 서평가이고, 실패라고 하면서 계속 글을 발표하고, 문학과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글 또한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금정연의 포즈는 뭘까. 그는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가 픽션이고, “픽션은 언제나 하나의 현실이고 그것은 현실을 수선”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포즈는 픽션이면서 현실이다.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untruth’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지만 픽션이 아닌 것들이 무수히 많고, 사실에 근거한 명제로만 이루어진 글쓰기도 여전히 픽션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픽션은 언어의 인식론적인 위상보다는 독자가 그 언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와 더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픽션은 근본적으로 ‘믿어주기make believe’의 문제이며, 우리는 동화 이야기를 ‘믿어주기’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믿어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적인 목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ㅡ 「89」, 원문은 테리 이글턴 「‘2020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3기 해외석학강좌 제2강 문학의 내면’ 강연자료집」, 25~26쪽

 

 

저자는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으로 사용하고, 독자인 우리는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처럼 믿어준다. 금정연 텍스트는 장점이 많지만, 그의 문체가 주는 재미의 주요 기반은 바로 그것이다. 픽션의 무대가 넓어질수록 글 쓰는 이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고, 상상의 폭이 넓어지면 독자도 즐겁다. 사실 중심의 보고서 같은 글은 한정된 정보는 차치하더라도 (더럽게) 재미가 없다. “웰즈는 말한다. …… 리얼리티라고요? 그건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물컵에 담긴 칫솔 같은 거죠. 버스표나 월급 그리고 무덤 같은 거요.”(「90」) 모든 일이 그렇듯 픽션이 늘 성공적인 건 아니라서 금정연이 시나리오 작업을 한 <나랏말싸미>(2018)의 흥행 참패는 그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반복해 오열했다. 영화의 상영 및 해외보급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픽션 같은 파장이었다.

 

 

비평가 데이비 히키는 ‘비평은 글을 가지고 하는 에어기타’라고 했다. 작가가 되지 못한 자들의 직업=비평가라는 평은 조롱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비평가가 비평 대상에 대한 기억 속에서 공허하고 공감의 제스처가 난무하며 조용한 발광을 하는 에어기타 연주자이기만 할까. 작가나 영화감독처럼 비평가도 무엇을 보고 어디에 배치할지에 대한 고민은 동일하다. 그들은 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그 속에서 자기만의 α를 말하는가. 튀어 보이려고?(물론 그런 사람도 없지 않다)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데이비드 실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낡은 시네필리아는 보수적이고 향수적인 구석이 있고, 시네필적 경험(특히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의 경험)은 소중히 간직되면서 신성시되고, 한 사람의 생애를 걸쳐 고정된다”(기리쉬 샴부, 「새로운 시네필리아를 위하여」, 영화 평론가 한창욱의 네이버 블로그 인용을 금정연이 인용)라고 하듯이, 우리의 글은 살아오면서 겪은 직간접 경험과 상상과 사유의 배수로를 통과해서 나온다. 비평가는 확대경이 될 수도, 현미경이 될 수도 있고, 그저 관심종자가 될 수도 있다. 비평이 단순히 ‘배설’이나 ‘자기충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픽션을 정의하듯 ‘크로노스(물리적 시간)를 카이로스(의미화된 시간)로 전환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현실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픽션(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는 남자가 과거를 돌아보는 픽션)을 만들어내는 <화양연화>와 이미 만들어진 픽션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 현실과 겹치는 이야기(잊고 있던 기억을 누군가 도용해(적어도 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는)를 만들어낸 픽션을 보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극장전>을 연결하며 금정연은 ‘담배’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걸 꼬집을 때 비평가는 얼마나 신나는가.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본질인데, <화양연화>에서 클로즈업된 시계와 담배를 피우는 양조위의 모습이 반복해서 제시되는 것은 영화의 수많은 신들과 조각난 시간들을 한 편의 영화로 매끄럽게 이어주는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현실(혹은 픽션과 픽션)을 연결하는 비평은 꾸러기 같은 재미를 준다.

 

 

우리는 내일 당연히 살아있을 것처럼 예상하고 살아간다. 잠에 빠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게 픽션이 아니면 뭔가. 진실과 허구를 명확히 가를 수 없는 픽션처럼 담배도 많은 해석을 양산한다. 애초에 흡연은 태우는 행위인가 피우는 행위인가(두 표현은 엄밀히 다르다). 2018년 4월, 아내의 임신 소식에 금정연은 담배를 끊었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 담배 한 갑(하필 담배 이름이 HOPE!)을 펴서 금(정이 사라진)연의 세계에서 즉시 제명된다.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했으니 흡연자가 되고, 다시 담배를 안 피우면 비흡연자가 되는 게 아니다. 흡연과 금연 사이에는 보완해야 할 많은 결손, 언제든 변할 수 있든 가변성이 상주한다. 중독과 상술로만 말할 수 없듯이 흡연과 금연의 잣대로 담배가 존재하는 세상을 평가할 수도 없다. 다른 어디에서보다 담배는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카메오 출연자였다. 담배는 즉시 시선을 잡아끈다. 금정연은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키스신 모음처럼 흡연 장면만 모았다.

 

 

“또 다른 기억들: 담배를 피우는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으며 등장해 담배 연기를 뱉으며 죽는 장 폴 벨몽도(<네 멋대로 해라>). 턱을 괸 채 훗날 헵번 파이프라고 불리게 될 기다란 담배 홀더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오드리 헵번(<티파니에서 아침을>), 정장을 빼입고 침대에 누워 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알랭 들롱 (<고독>), 복제인간 여부를 가리는 테스트를 받으며 불안을 감추기 위해 두꺼운 궐련을 피우는 숀 영(<블레이드 러너>),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주윤발(<영웅본색>). 하얀 러닝셔츠에 브리프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며 날개 없는 새에 대한 독백을 하다가 뜬금없이 탱고를 추던 장국영(<아비정전>).야구모자를 거꾸로 쓴 채 택시를 몰며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위노나 라이더(<지상의 밤>). 1966년 포드 썬더버드를 타고 달리며 담배를 피우는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델마와 루이스>), 담배를 입에 물고 대화를 나누던 개 같은 남자들(<저수지의 개들>), 사람들 가득한 극장 관객석에 앉아 시가를 피우며 큰소리로 웃는 로버트 드니로(<케이프 피어>). 침대에 엎드려 정면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우마 서먼(<펄프 픽션>). 살인 업무를 앞두고 금색 가발에 선글라스를 쓰고 어두운 복도에 기대어 앉아 긴 담배를 짧게 피우는 임청하(<중경삼림>). 이어폰을 꽂고 오토바이에 기대 눈을 감고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정우성(<비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따로 또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국영과 양조위(<해피 투게더>), 연신 담배를 피우던 양조위와 딱 한 번 담배를 입에 문 장만옥(<화양연화>), 60년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스파게티웨스턴)와 70년대의 잭 니콜슨(코에 반창고를 붙인 채 담배를 피우며 무섭게 웃는 <차이나 타운>), 80년대의 알 파치노(특히 <스카페이스>)와 90년대의 브루스 윌리스(물론 <다이하드> 시리즈). 함께 출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에 따르면 영화에서 한 일이라곤 담배를 피우는 것밖에 없었다던 빌리 밥 손튼(<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정신병동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는 위노나 라이더와 안젤리나 졸리(<처음 만나는 자유>), 담배를 피울 때마다 헵번 파이프를 잊지 않던 1940년대풍의 스칼렛 요한슨(<블랙 달리아>), 해변을 바라보며 데킬라와 함께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뇌종양에 걸린 틸 슈바이거(〈노킹온 헤븐스 도어>). 자신이 흘린 피에 마지막 담배를 비벼 끄던 폐암 말기의 키아누 리브스(<콘스탄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조각난 기억을 더듬으며 담배를 피우는 안더스 다니엘슨 리(<리프라이즈>) 혹은 공원 벤치에 앉아 친구의 충고를 따라 인생을 먼발치에서 돌아보며 담배를 피우는 안더스 다니엘슨 리(<오슬로, 8월 31일>) 담배를 피우며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받아쓰는 엠마 스톤(<헬프>). 침대에 누운 채 한 손으로 지포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는 라이언 고슬링과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엠마 스톤(<갱스터 스쿼드>), 2000년대의 공효진(<품행 제로>와 <행복>), 2010년대의 고아성(<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ㅡ 「19」

 

 

 

위 문장은 언어로 된 영화 액자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담배의 효과가 그렇듯 라쿠나(Lacuna, 잃어버린 조각들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저 이미지들은 우리 기억 속에 있지만 불러내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처럼 영화가 제시하는 이미지들도 라쿠나를 살리는 마술이다. 감독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FAKE가 가미되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감으로써 실존적 공허함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는데, 궁극적으로 무의미할 뿐인 인간의 이야기는 시작, 중간부, 결말을 산뜻하게 지닌 질서 있는 유기체를 기만적으로 엮어낸다. 이렇듯 예술은 형식이 지닌 위안적 힘을 활용한다. 허구의 연금술은 사소한 일상사를 문학 속의 모험으로 변모시키지만, 그 결과 발생하는 이야기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모든 내러티브는 기표들의 시간적 연속체를 상상된 사건들의 연속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자들이 post hoc ergo propter hoc('이 이후에 있는, 따라서 이 때문에)이라고 부른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기도 하였다. 단순히 연결된 것을 실제 결과로 혼동함으로써 내러티브는 단순한 반복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에 대해 인과법칙을 강제로 부여한다. 따라서, 모더니즘적인 예술의 '탈인간화에는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소망성 - 심지어는 가능성 - 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 함축되어 있다. 허구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비판을 과격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까지 제안한다.

*더욱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한데, 결국 모든 인간은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로버트 스템,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

 

ㅡ 「70」

 

 

 

위작 예술의 거장이었던 엘미르 드 호리를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명작을 만들었지만 장 뤽 고다르의 잔인한 인성과 로만 폴란스키의 아동 성범죄가 그것을 덮어줄 면피는 되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걸 뭉텅 그려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소문난 골초였던 프로이트는 의사들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금연을 거부하다 그로 인해 구강암으로 사망했다. 인간 내면을 깊이 탐구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신을 충실히 돌봤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한 실패담일까. 한 사람의 삶은 이렇듯 많은 이율배반, 이해하기 어려운 불협들도 이뤄진다. 금정연이 절필하고 싶다! 책을 태워버리고 싶다! 노래를 하면서 글을 쓰듯이. 피우고 끊기를 반복하는 담배처럼, 평생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듯이, 금정연의 실패 담론은 불가능의 다른 말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공간이 필요한 담배 같으니까. 연기와 꽁초와 냄새는 나중 문제고 기어코, 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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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08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 양반도 진짜 책 좋아해요. 지긋지긋, 그래도 쓴다! “연기와 꽁초와 냄새는 나중 문제고 기어코, 쓰고 만다.” 담배 나오는 장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모았지...금(정)연이 그랬구나.. 사랑이네여! 소설 쓰시는 중이라는 건 어디선가 들었는데 시나리오도 하셨구나. 그게 망하면 또 그걸로 글을 쓰는구나ㅋㅋㅋ

AgalmA 2021-01-10 21:56   좋아요 1 | URL
이렇게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사람이 입과 손이 근질거려 어떻게 참는다고 참나ㅋㅋ
자긴 자면서 요즘 불면 때문에 도통 잠을 못 잔다고 말하는 격이죠ㅎㅎ 한국에 이런 작가도 있어서 좋아요^^
 
영화와 시 말들의 흐름 3
정지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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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가 있는데, 정지돈도 그런 것 같다. 작법과 문체가 뚜렷한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는 같은 이유로 싫어하고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인물의 정서나 인물 간의 갈등 중심인 통상적인 소설과 다른데, 낯선 소재(지명, 인명, 역사적 사건, 예술과 문화 가십 등)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먼저 당부할 것은 독자가 느끼는 당혹과 거부감은 정지돈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인지적 특성에 있다. 인간은 정보 과잉의 피로와 해석의 부담을 싫어한다. 정지돈이 그런 것을 감안해 글을 썼다면 지금의 모습은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돈이 정말 독자나 기성 문단과 싸우자는 걸까. 작가는 영감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골몰할 뿐이다. 언어를 전달 매개로 쓰고 있지만 다분히 영화적 사고 특성도 반영되고 있다. 정지돈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런 글을 썼다.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나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 내가 그 거리를 좋아한다거나, 혹은 빛 때문에, 혹은 인상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면 찍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찍지 않고 그걸 잘라낼 것이다.

(중략)

필립 그랑드리외는 <음지>의 제작노트에 영화를 만들지 마라, 이미지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 저절로 프린트되도록 하라, 라고 썼다고 동기는 말하며 영화 이미지란 사진 이미지와 어떻게 다르고 저절로 형성되는 이미지는 시간과 인물 사이에서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 운동은 시간과 인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운동이 시간과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사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후에 벌어지는 시간이 역사라면 우리는 역사 없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필립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시간과 인물에 전혀 다른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ㅡ 정지돈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은 소설에 요구되는 사건의 인과와 그에 따른 교훈에는 흥미가 없다. 몽타주처럼 인상적인 무엇들의 배치에 흥미가 있고, 시간과 인물을 교직(交織)하면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의 글이 에세이 같은 문예 편력기 같은 것도 이 때문인데, 그래서 정지돈은 소설가보다 창작자라는 게 더 적확하다. 소설이 영화화되고 영화가 소설로 옮겨지는 게 다반사인데, 장르 구분은 작법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찍을 돈도 없고 수많은 스텝을 통솔할 능력도 없는 히키코모리라도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렵더라도 유튜브에 올린 단편 정도는 혼자 만들 수 있다(과연 히키코모리일까??). 노력의 문제일까, 재능의 문제일까, 운의 문제일까를 따지며 허송세월하지 말고 닥치고 만들어라! 시를 써도 시 같지 않고, 영화관에서 콜라를 보고 미친 듯이 잠을 잘 지라도 정지돈의 소설은 자기 탐닉에 빠진 창작은 아니다. 현실을 벗어난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그가 곧잘 소재로 쓰는 1960년대 뉴욕의 예술과 가십의 세계는 예술에 진지한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에게 “진지함이란 시를 포함한 예술들이 살아남는 최고의 전략이다.”(「점심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시」, 65~66쪽) 무엇과 무엇을 잇는 불가분의 관계는 없고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지만, 이미 이루어졌기에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게 되는 ‘삶’은 그에게 끝없는 탐구 거리다.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군의 말처럼 ‘꿈’을 가진 우리는 이미 최고의 영화를 소유하고 있다. 영화는 그런 꿈을 모방하려는 노력 중 하나다. 우리는 영화에서 수다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품고 있는 진귀한 무엇을 원한다. 시에서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은 감정이나 영원성의 결여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것”(「좋아하는 것 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 21쪽)이듯, 우리는 안개 너머의 진짜를 원한다. 정지돈은 시와 관련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두 권을 꼽았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은 『회상』을 써서ㅡ“예술가에게 세계 탐지 감지는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와 마찬가지로 무기이자 도구다. 그리고 유일하게 실제적인 것은 작품 자체다(아크메이즘의 아침)”ㅡ 남편 오시프 만델슈탐의 작품이 조명되도록 만들었다. 시인 이장욱은 『혁명과 모더니즘』을 써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과 이론가들을 소개했는데, 정지돈은 이장욱의 평론을 통해 ‘아름다움과 분석적인 것은 반대 항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과 편파적인 것 역시 반대가 아니다’라고 느꼈다.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좋은 글이었다고 평가하며, 말을 하기 위해서 배제와 적대가 가치처럼 쓰인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결여나 허물도 인정하는 게 좋은 글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이 두 책을 고른 정지돈의 선택은 그가 자신의 글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상통한다. 묵혀 있는 걸 찾아내고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 분주한 세계 탐지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의 글은 다름 아닌 그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통해 그가 원하는 ‘순수한 긍정과 기쁨’을 얼마나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환멸 속에서도 계속 쓰고 있는 건 성공적이란 소리가 아닐까. 마감과 밥벌이에 쫓겨서만 썼다면 몇 년이나 가겠나.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또는 일부만 진실이다. 언어는 아무리 완벽해도 50퍼센트 부족하며 수사는 100퍼센트 오류다. 언어가 100퍼센트 진실일 때는 오로지 언어가 언어 그 자신으로 작동할 때뿐이다. 이것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진실에 대한 감각은 뭘까. 어떤 언어를 접했을 때 정확히 표현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 것일까.”

 

ㅡ 「나는 ~한다, 로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 ~다.」, 43쪽)

 

 

 

정지돈은 예술의 진정성에 기대지 않고 신변잡기적이고 가십에 가까운 시를 쓴 프랭크 오하라를 옹호했지만, 위의 문장을 보면 그가 문학의 진정성 딜레마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그는 낡은 시네필리아, 작가주의, 기성세대로서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문체는 모로 가는 반항적 글쓰기가 아니라 정형에서 벗어나려는 탐구의 글쓰기다. 그가 소설가든 창작자든 문제 될 건 없다. 마음껏 쓴 뒤에 돌아보면 그가 만든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ps) 정지돈, 금정연, 이상우, 오한기 등의 작가들이 ‘후장 사실주의’를 기치로 소통하는 게 흥미롭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던 기성 문단과 얼마나 다른 변별을 보여주는지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이슈가 됐던 ‘미래파’가 자멸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그들도 문단을 이루는 한 흐름이고, 권력도 없는 우리에게 뭘 바라나!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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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1-01-08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말해서 정지돈의 글(소설)들이 왜 이렇게 잘 읽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요.

AgalmA 2021-01-10 21:48   좋아요 0 | URL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문장에 정보가 너무 많아요. 게다가 생소하기까지 하니 더 독해가 까다롭죠.
개념 가득한 철학책이 잘 안 읽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안 쓰는 뇌근육을 좀 움직여줘야 하는^^;

하나 2021-01-08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지돈 새 소설 읽어볼까말까 고민하다가 아갈마님의 포스트에서 보니 궁금해지네요. 저는 소설가라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렇게 경계에 있는 사람쪽의 이야기도 좋아해요. 창작을 하다 보니 그게 소설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하고 영화가 되기도 하는 ^^ “마음껏 쓴 뒤에 돌아보면 그가 만든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AgalmA 2021-01-10 21:52   좋아요 1 | URL
저도 경계에 있는 글쓰기를 더 좋아해요. 문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런 스타일 안 좋아해요ㅎㅎ;;;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닥친 삶을 사는 인간일 뿐이니까. 지나친 의미 부여는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쉬워요.
직진 스타일의 외골수형도 장점이 있겠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전방위로 유연할 수 있을까? 싶어요.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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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반복된다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역사가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거대담론의 정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어도 인생에서는 많은 것이 반복되고, 삶은 비극과 희극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순간의 지리멸렬한 반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단편집 『일인칭 단수』의 표제작이자 마지막 단편이었던 「일인칭 단수」를 읽은 뒤에도 그랬다. 하루키는 연례 행사처럼 평소 입지 않는 슈트를 입고 산책을 즐겼고 낯선 바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가 문득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에서도 말했듯이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은 이곳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는 중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삼 년 전에 여자의 친구에게 그가 몹쓸 짓을 했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터무니없는 오해와 불쾌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기분 좋고 평화로웠던 저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라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나도 들은 적 있다. 내가 누군지 확인도 없이 대뜸 긴 장문의 비난을 쏟아낸 이가 있었다. 사연에 대해 물으니 답은 돌아오지 않아서 혼자 억울하기만 했다. 이 외에도 시시때때로 불쾌한 일을 당하는데 살면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왜 하필 이렇게 께름칙한 뒷맛의 단편을 마지막에 배치했을까 한참 생각했다. 이 단편집에는 달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가 사는 삶은 달콤하지만 날카롭게 찌르는 맛의 보드카 김렛 같은 맛이 더 많다는 걸 시사하려던 걸까. 모종의 악의는 「크림」에서도 등장하는데, 열여덟 살의 하루키는 친하지 않던 소녀의 초대장을 받고 찾아갔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노인이 선문답 같은 인생 지침을 선물했다.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처럼 설명도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면서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을 겪을 때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것이 쉽지 않아서 우리는 다른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중략)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루키의 ‘크림’은 글쓰기 작업으로 되었고 우리는 공감하며 읽게 되었다. 세계의 일들과 하루키라는 작가와 독자로서의 우리가 만들어내는 서클은 정말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같다.

 

하루키 단편집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단편집도 편안했다.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읽는 게 아니라 소파에 파묻혀서 앨범을 넘겨보듯이 그렇게 읽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추억과 감각들, 그리고 나를 간간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잊고 지낼 사람들도 떠올렸다. 자기만의 짝사랑 속에서 살며 자비출판으로 단카短歌 가집을 출간한 「돌베개에」의 그녀도 꼭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를 읽을 때 나는 찰리 파커의 음악을 틀었다. 비틀스 열풍이던 시절엔 비틀스 음악이 벽지壁紙처럼 둘러싸이게 놔두고 앨범으로 듣게 되는 건 한참 나중 일이었던 일화나 기억 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소녀, 첫 여자 친구와의 이별과 나중에 황망히 듣게 되는 죽음, 누군가의 기묘한 병 등등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에 나오는 이야기도 내게 오버랩 되는 게 많았다. 사람 삶의 패턴과 확률은 비슷해 이런 우연의 일치가 놀라울 것도 없지만 하루키의 단편은 이해가 바로 되어서 거리 두기가 어렵다. 비틀스 음악에 대해서라면 故 신해철의 표현을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한다. 라디오를 틀면 언제나 만나게 되는 비틀스 음악을 구닥다리 선곡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겐 처음 듣는 명곡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자고. 연예인 중 내가 유일하게 덕질 했던 신해철처럼 어느 때의 우리는 누군가의 팬이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진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듯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하루키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으로 남기는 글이다. 자비출판으로 정말 이런 시집을 냈던 걸까. 가상의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음반이 있었다는 단편을 읽고 난 뒤라서 이걸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어쨌거나 약체 팀이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구단 창설 이십구 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달성하고 일본시리즈도 제패한 1978년은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에 처음으로 소설을 완성하고 소설가가 된 해이기도 했다. 이런 우연들이 겹치면 깊은 인연으로 발전한다.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여전히 건재하고 하루키의 소설 쓰기도 그의 인기도 건재하다. 「사육제」는 하루키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을 만나 그 가면과 민낯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단편에서는 인물보다 음악 이야기에 더 교감했는데, “우리는 피아노곡을 좋아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물론 오페라도 듣고, 교향곡도 듣고, 실내악도 듣는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애호하는 작품이, 신기할 만큼 정확히 겹쳤다. 우리 둘 다 쇼팽의 음악에는 그다지 항구적인 열의를 품지 못했다. 적어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듣고 싶어지는 음악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는 아름답고 차밍하지만, 솔직히 말해 너무 많이 들어서 질렸다. 바흐의 평균율은 근사한 작품이지만 집중해서 듣기에는 너무 길다. 컨디션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는 가끔 너무 빤한 대목이 거슬린다. 해석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브람스의 피아노곡은 가끔 들으면 멋지지만, 매일 듣다가는 피곤해진다. 가끔은 따분하기도 하다. 드뷔시와 라벨의 피아노곡은 감상하는 시간과 상황을 잘못 고르면 영 와닿지 않는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바 없이 훌륭한, 이른바 궁극의 피아노곡으로 선택한 것은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 몇 곡과 슈만의 피아노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곡만 남긴다면 뭐가 좋을까?” 대목에서 내 마음도 맞장구 물개 손뼉을 쳤다. 슈만의 '사육제'를 들으며 이 단편을 읽으니 더욱 좋았다. 못생긴 여자와 훌륭한 취향의 간극처럼 그녀의 드러난 삶과 드러내지 않았던 삶의 위태한 균형은 슈만의 ‘종잡을 수 없는 몽상적인’ 색채와 잘 어울렸다. 하루키 소설에서 인간 외 생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섭섭하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일본 민간 설화의 현대판 구성이다. 온천마을에 들러 어렵게 숙박하게 된 온천 료칸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원숭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원숭이는 연모하는 인간 여자들의 이름을 훔치고 다녔다고 고백한다. 흔히 잃어버린 것을 한참 못 찾다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건 정령들의 장난이라는 괴담도 있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하루키는 이렇게 소설로 풀어놓았다.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에서도 사요코의 오빠가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는 설정이 있었는데, 이런 소재를 자주 쓰는 건 하루키가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 퇴화에 관심이 많아져서 일까. 이 단편집이 60~70년 대 청춘에 대한 회고성 단편이 많은 것도 그렇고 하루키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정리하고픈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도 덩달아 정리를 하게 되고.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이 소설을 읽는 중에 맥주도 많이 마셨고 스파게티도 해먹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습관인지 우연인지 나도 이젠 모르겠다. 읽는 내내 달콤 씁쓸했고, 한참 지난 뒤 하루키 수제 크림이 토핑 된 도넛과 커피처럼 이 책을 또 읽으리란 건 안다. 이 반복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기쁨이다. 하루키 소설을 접할 때 늘 드는 마음인데, 엄청난 작품이 아니어도 된다. 하루키 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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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3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엄청난 작품이 아니어도 된다. 하루키면 된다. ^^ 동감입니당! 생각해보니까 저도 이 소설집 읽고 파스타랑 맥주 자주 먹었네여... 저도 신해철 라디오부터 라디오 듣기 시작해서 좋아합니다. (거의 끝물이었지만) 오늘 차를 오래 탈 일이 있어서 민물장어의 꿈 들었는데 되게 좋았어요. 사육제 물개 손뼉넘 귀여워... 아갈마님 리뷰에서 은근히 귀여움이 묻어나와... (죄송)

AgalmA 2020-12-30 21:54   좋아요 1 | URL
하루키 책을 펼치면 늘 정겨워요☺
신해철도 늘 그렇게 좋았죠. 나중엔 멀리서 잘 살겠지 하며 공연도 잘 안 가고 그랬는데 결국 그렇게 허망하게 보낼 줄이야... 있을 때 잘해야!
글의 귀여움 뿜뿜은 하나 님 글이 더 하시기 때문에 저는 순위권 밖에서 흐뭇해 하겠어요🤭🤭🤭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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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작품에서 내가 봐온 '아버지'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성실하지만 그 시스템밖에 모르는 NHK 수금원이나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남성들이었다. 하루키의 아버지뿐 아니라 주위를 돌아봐도 전쟁 세대들은 원하는 대로 살기는커녕 생계가 아니라 생사를 고민해야 했고 그 고됨과 상처들을 삭이느라 과묵해지고 가족과도 잘 소통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하루키는 아버지와의 세대차로 연을 끊다시피 하며, 혈연의 관계 개선보다 창작과 자신의 가정에 더 노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하루키 작품에서 부모의 자리는 매우 적다. 그러나 하루키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것이다. 『1Q84』에서 덴고가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를 향해 독백하던 장면도 소설을 통한 일종의 살풀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자신을 키워줬지만 그 양육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덴고는 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 실마리가 풀려야 자신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와 아버지 두 사람만 공유하는 추억이 두 가지 나온다. 가장 애틋한 기억 하나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폭력에 대한 얘기 하나다.

아버지는 고양이 식구가 늘자 암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기로 하고 하루키와 함께 그 고양이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암고양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낯선 길에서 자전거보다 빠르게 고양이가 돌아온 것도 놀라웠지만, 이 사건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절에 동자승으로 보내졌다가 집으로 돌아온 기억을 환기시켰다. 버려지는 상처를 알면서도 그는 똑같은 행동을 했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가 돌아왔기 때문에 삶은 같은 듯 달라진다. 아니 전혀 다른 궤도이다. 아버지가 절에서 집으로 돌아왔기에 살게 된 삶처럼. 스님이 되었다면 겪지 않았을 전쟁의 소용돌이,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강제 동원되어 타국까지 가야 했던 고된 여정과 각종 전쟁 트라우마, 전쟁에서 연인이 사망해 하루키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어머니, 하루키의 탄생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키와 아버지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자신을 위무하고 표현하는 데 글을 쓰는 건 같았다. 아버지는 하이쿠로, 하루키는 소설로. 아버지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듯 전쟁에 대한 참회도 그와 유사했다. 아침마다 조그만 불상 앞에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행위는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키가 작가로 쓴 소설이 결코 자기 충족만의 결과물이 아니듯. 전쟁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던 아버지가 하루키에게 들려준 유일한 이야기였던 중국인 처형은 ‘역사’로 전달된다.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일이든 또는 그저 목격한 일이든, 아마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가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해도, 피를 나눈 아들인 내게 말해서 전하고 어떤 형태로 남겨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야기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재구성되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 아니었을지 내내 의구심을 가졌다. 진실을 감당하기 두려웠던 걸까, 아버지의 과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루키는 아버지가 2008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도 어떤 것은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긴긴 시간이 걸린다. 나도 당신도.

마지막에 하루키는 마당에 있던 소나무 위로 올라간 어린 고양이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가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하는 그런 일이었다. 하루키는 어린 고양이가 소나무 위로 올라가는 걸 무심히 봤고 고양이가 구조 요청의 울음을 울 때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고양이를 찾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린 고양이의 호기심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막지 못한 어린 하루키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더 열심히 찾지 못한 하루키 부자를 탓해야 할까. 삶은 원인과 결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달라질 수 없었다고 자조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하루키 소설을 몇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실종’ 이 잦다는 걸 안다. 그게 단순히 재밌는 작품을 위한 작법의 기능이 아니라 작가의 풀 수 없는 갈증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자주 느꼈다. 소나무 한 그루로 인해 영문을 모르게 된 고양이, 전쟁 때문에 삶과 정신이 깊게 바뀌어 버린 평범했던 한 시민, 이 우주의 우연 속에서 그들은 다르지 않다. 교환 가능한 것이라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한 빗방울의 궤적은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그런 것을 살피지 않으면서 나라는 존재의 자리는 가능할까. 하루키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풀어놓은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이면서 근본적인 거대한 이야기, 버려지고 상처받았으며 무거운 체험을 충분히 얘기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내 부모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듣고 싶었던 입장이어서 하루키 부자 이야기를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한 방울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위) 책에 수록된 가오 옌의 일러스트

(아래) 이 책의 내용이 처음 실린 <문예춘추> 2019. 6월 호에서의 하루키 부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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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버려지는 경험˝에 대한 생각들이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 됐구나 생각했었어요. 태엽감는 새와도 연관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그 책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하루키 풍년이라 좋았어요. 이 책은 약간 하루키의 다른 글과는 무게나 질감이 다른 것 같았고요. 저도 아갈마님처럼 내 이야기는, 내 부모님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던 책입니다.

AgalmA 2020-12-19 12:04   좋아요 3 | URL
이번에 나온 <일인칭 단수>도 사라지는 사람들, 관계들 잔뜩 출현이더군요ㅎㅎ;
살아갈수록 사실 그렇죠. 그렇게나 애틋한 관계, 감정이었는데도 어느 순간엔 소식도 모르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부모 자식 간 관계는 천륜이라는 게 수긍돼요. 지지고 볶아도 반드시 돌아보게 되는...

하루키 글은 겉은 모던해도 솔직한 낭만이 있어서 읽을 때 편하고 정감이 가요. 그게 찐매력.

scott 2020-12-18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하루키 새 단편집 자신이 그동안 즐겨 듣던 음악들에 붙이는 주석같은 ‘side note‘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 글은 읽고나면 뭔가 취미를 공유 하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보게 만드는것 같아 매번 비슷하다고 해도 다음작품이 기다려 지네요.
저도 이에세이 읽으면서 ‘태엽 감는새~‘
떠올렸는데 요즘 이작품 다시 읽으면서 하루키에 모든 작품세계가 이책속에 들어 있는것 같더군요
아버지에 어린시절-청춘-장년 그리고 노년 시절을 아들이 이렇게 한권에 연대기 처럼 남겨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묘비명 같다고 느껴졌어요.

AgalmA 2020-12-18 23:3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하루키 음악 단편 같은ㅎ?

그쵸. 나도 그런 거 있는데! 하면서 미주알 고주알 수다 떨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이 에세이 읽고 하루키 작품 연보를 다시 살펴 봤어요.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상당히 예전에 쓴 소설이었다는 게 좀 놀라웠어요. 1994년 발표인데...아버지 사망은 2008년이니. 그래서 하루키 작품 속 아버지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 많이 했는데, <1Q84>(2009) 덴고 아버지와 <기사단장 죽이기>(2017)에서의 노인 화가 설정이 하루키가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을 많이 담았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