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시대
스티븐 J. 파인 지음, 김시내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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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재 역사학자인 스티븐 파인의 [불의 시대]란 책이다. 저자가 만든 용어인 Pyrocene은 화염세(火炎世)를 의미한다. 번역본 제목은 [불의 시대]. 저자는 세 가지 불을 이야기한다. 자연적인 불, 인위적인 불, 암석 경관을 태우는 불 등이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불은 약 42천만년전 관다발 식물이 번성하던 실루리아기 초반에 최초로 등장했다.(42 페이지) 실루리아기에 처음으로 자연발화한 것이라면 200만년전 처음 인공으로 불을 붙이기까지 상당히 긴 공백이 있었다. 세 번째 불인 암석 경관을 태우는 불은 화석 연료를 태우는 불로 첫 번째, 두 번째 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저자는 지금은 불이 더 많은 불을 만드는 시대로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연 불의 시대를 제대로 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어떤 곳인가? 유일하게 불이 있는 행성이다. 지구에서는 해양생물에서 산소 대기가, 육상 생물에서 불이 잘 붙는 탄화수소(테르펜, 송진)가 등장했다. 저자는 불이란 물질이 아니라 반응이라고 말한다. 즉 환경이 받쳐줘야 불이 난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홍수와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불은 허리케인, 홍수와 달리 생물과 별개로 일어날 수 없다.

 

지질 시대가 이어지면서 대기 중 산소 농도는 오르내리며 14~16%를 유지했는데 이것보다 적으면 생물군을 태우기 어렵고 30~35%가 되면 불길을 잡기 어렵다. 불이 빠른 연소라면 호흡은 느린 연소다. 인류는 200만 년 이상 불을 이용했고 불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불이 나는 곳에서 번성했고 건/우기가 없어 불이 나지 않는 암석 사막, 습한 우림, 그늘진 숲에서는 생존하려 고군분투했다. 지구가 결빙과 해빙 사이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요동치며 온갖 변화를 일으킨 탓에 육상 생물이 살기 어려워졌다. 서식지가 바뀌고 늘었다가 줄어들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숲이 초원으로, 초원이 사막으로 변했다.

 

해안가는 경사를 드러내며 확장하다 얼음 아래로 가라앉았다. 계곡물은 호수를 채웠다가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플라야로 흘러 들어갔다. 아한대 지역이 얼음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나 그랬듯 적응하는 종이 있는 반면 아닌 종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멸종에 가속이 붙었다. 홍적세는 260만년간 이어지면서 지구의 5대 멸종 중 최후의 막을 열었다. 홍적세는 거대 동물의 시대였다. 대륙 만한 빙상, 차디 차게 얼어붙은 환류를 일으킨 해양, 거대한 호수, 광활한 사막 그리고 온 세상을 점령한 거대 동물을 자랑했다. 홍적세 내내 결빙과 해빙, 멸종과 출현이 계속되다가 흐름이 멈췄다.

 

인간이 돌본 경우를 제외하면 거대 동물을 비롯한 여러 생물은 되살아나는 일 없이 계속 스러져 갔다. 얼음 없이 돌아오지 않고 녹아 없어지기만 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모든 호미닌처럼 빙하기에 등장했다. 그러나 불을 다룬 덕에 지구상에서 유일한 호미닌으로 등극했다. 그들은 불쏘시개를 지렛대 삼아 아르키메데스처럼 지구를 움직였고 때마침 유리한 환경이 그 받침점으로 작용했다. 불은 지형, 기후, 초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 빙하기가 찾아오자 화재 친화적 환경이 펼쳐졌다. 홍적세가 화염세로 넘어간 것이다.

 

스스로 불을 붙일 수 있었던 호미닌은 훨씬 더 유리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대를 열어젖혔다. 지구가 유일한 불의 행성인 것은 지구가 유일하게 생명체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호미닌은 불을 발명하지 않았고 주변에서 발견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불은 도구인 동시에 동반자였지만 무엇보다 힘이었다고 말한다. 불을 다루는 생명체가 화재 친화적 시대와 만난 시점은 매우 의미 있는 변곡점이다. 그래서 식물이 대륙을 장악한 이후로 지구상에서 불이 보여준 가장 큰 변화로 생각해야 한다.

 

요리는 중요한 기술이자 화염 기술의 근본이었다.(102 페이지) 이는 모든 화염 기술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모래, 광석, 점토, 진흙, 석회암, 나무, 석유를 요리하듯 가공해 유리, 금속, 도자기, 벽돌, 시멘트, 타르, 테레빈유를 생산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저자는 인간이 길들인 최초의 존재를 불이라 정의한다. 불은 생태계의 야생적 존재를 인류의 통제하에 두고 공생을 시작한 길들이기의 대상이었다. 돌은 통제의 대상, 불은 길들이기의 대상이었다. 돌은 일방적인 변형의 대상이다. 사용후 방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불은 지속적인 양육과 관리가 필요한 길들이기의 대상이다. 잘못 관리하면 인간 거주지를 태워 없앨 수 있다.

 

불만 있으면 생태계에서 무엇이든 모으고 뒤쫓고 포획할 수 있는 꿈같은 일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삼림과 이탄 지대를 베는 동시에 바싹 말리고 습지에서 물기를 없애며 가축을 풀어 덤불이 우거진 땅을 다지고 관목을 다듬으면서 불이 붙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후 화재 이후 환경에 적응한 식물을 도입해 식량을 재배할 수 있었다. 거의 어디서나 농경지를 넓혀주는 불 덕분에 범람원 바깥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불이 불답게 타오르려면 연료가 충분해야 했다.(116 페이지) 동물은 느린 연소를 하는 존재이고 불은 빠른 연소를 하는 존재이다. 동물은 느린 연소를 위해, 불은 빠른 연소를 위해 똑같이 풀, 잔가지 등 미세 연료를 두고 경쟁했다.(120 페이지)

 

화염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방화는 불로 공들여 이뤄낸 것을 파괴할 수 있었다. 불과 검()은 전쟁의 줄임말이었다. 화력은 군사력을 나타냈다. 사람들은 불을 통제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지만 만족할 줄 몰랐다. 과학적 화염 기술은 연료 유무에 따라 제약을 받았다. 당시 연료원이던 자연경관의 제약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적 화염 기술은 자연경관의 특성에 따라 벽에 부딪혔다. 때마침 물리학적 화염 기술이 실용적인 목적에 무한히 쓸 수 있는 화석연료라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인간은 여러 활동을 하며 이미 정해져 있는 밀란코비치 주기를 느리게도 빠르게도 바꿀 수 있다. 저자는 불이 기후에 딸린 부수 현상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손끝에서 기후변화를 진두지휘하는 선동가였다고 말한다.(134 페이지) 새롭게 등장한 세 번째 불은 자신의 연료처럼 무한(無限)했다. 게다가 자연적인 기후 양상을 조금씩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뒤엎을 정도로 거대했다. 연기는 하늘을 가득 메웠다가 비에 녹아 해양에 녹아들었고 화염은 보이든 안 보이든 지구를 채우고 있다. 연소(燃燒) 변이(變異)라고 하는 변화는 석탄, 석유, 가스로 대표되는 화석 생물량이 화로, 단조(鍛造), 용광로 등 불을 이용하는 다양한 기구에서 나무, 이탄(泥炭)과 같이 살아 있는 생물량을 선택적으로 대체하면서 시작되었다.(143 페이지)

 

저자는 에너지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 시대를 인류세 대신 화염세라 명명하는 편이 올바를 것이라 말한다.(149 페이지) 멀고 먼 지질 시대 속 연료를 캐다가 당대에 태우고 앞으로 맞이할 먼 미래를 향해 폐기물을 뿜어내는 것, 이것은 불이 그리는 새로운 서사이자 지구 역사상 중요한 표식 중 하나다. 인류가 일궈낸 주거지에 몰고 온 변화를 생각하면 연소 변이에도 좋은 점이 많다. 부엌과 마을에 연기가 자욱하지 않고 가연성 재료로 집을 짓고 도시를 조성한 탓에 자나 깨나 화재 걱정을 하던 시절이 지났으며 계속 장작을 구하러 다닐 필요도 없다. 세 번째 불은 사회 구성원의 끊임없는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어린이나 두 번째 둘과 다르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어느 지역에서나 어떤 종류든 불이 존재하고 불의 성질은 지역 내에서 바뀐다.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는 다루기 까다로운 화염을 피하려 화학물질을 사용하다 보니 오염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역의 변화가 전 세계적 변화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래서 대체로 이목을 끄는 것은 불꽃이다. 불꽃은 인간이 딛고 선 대지를 똑같이 딛고 타오른다.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크기만 하다. 그러나 불에서 훨씬 더 거대한 것은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이 솟구칠 수 있는 연기 기둥이다.

 

화재적운(pyrocumulus cloud)이란 것이 있다. 산불, 화산 폭발 또는 대형폭발로 인해 발생한 강한 열기와 연기가 대기 중에서 급격히 상승하며 형성되는 구름이다. 이는 세 번째 불이 대기와 상호작용하면서 어떻게 자연경관에 더 많은 불을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불이 불을 먹고 살며 더 많은 불을 일으키는 환경을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다. 그러나 자연경관에는 불이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지 못하도록 막는 화재 방지벽이 있다. 암석 경관에는 없다. 그 대신 불이 연료를 재배치하고 기후를 바꾸며 또 다른 불을 일으켜 하늘 위로 연기를 피어 올린다.

 

처방화입(處方火入; Prescribed burning)은 무엇인가? 산불 예방과 생태계 관리를 목적으로 날씨, 시간, 장소, 기상조건 등을 미리 정해 계획적으로 불을 놓는 임업 기술을 말한다. 대형 산불로 번지지 않게 연료가 될 만한 물질을 미리 태워버리는 역발상적인 조치다. 홍적세에 전 세계가 빙상에 파묻히진 않았지만 얼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화염세의 불도 마찬가지다. 지구는 오랫동안 불의 행성이었고 이제 더 깊은 불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233 페이지)

 

저자가 내리는 처방을 보자. “우리는 땅속에 화석 바이오매스를 저장해야 한다. 오늘날 열기를 무섭게 뿜어대는 인류라는 존재를 식히는 것은 물론이고 미래에 귀환할 얼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축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석유를 매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가올 추위를 대비한 방책이기도 하다.”(238 페이지) 저자는 불이 없으면 안 되는 우리와 달리 불은 우리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잊지 말기를 주문한다. 우리 인간만이 갖는 화력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도 명심하라고 말한다.

 

그간 우리는 화력을 이용해 세상을 다시 열고 여섯 번째 태양을 띄웠다. 그러나 이제는 지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화염을 재분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구의 미래가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태양은 지구와 자연의 불(Fire and Earth), 두 번째 태양은 인간과 농경의 불(Fire and Water), 세 번째 태양은 식민지 개척과 유라시아 문명의 결합으로 불의 용도가 확장된 시대인 두 번째 자연, 네 번째 태양은 산업과 철의 불(Fire and Iron), 다섯 번째 태양은 현대와 공기의 불(Fire and Air), 여섯 번째 태양은 화석연료와 화염세(Pyrocene)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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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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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耽讀)이란, 책을 즐겨 읽는 것을 말한다.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란 부제를 가진 [탐독]은 철학자 이정우 교수의 책이다. 정확히 20년전인 2006년 아고라 출판사에서 나왔다. [탐독]은 내가 구입한 저자의 첫 번째 책이 아니다. 첫 번째 책은 1997년에 나온 [가로지르기]이고 두 번째 책은 1994년에 나온 [담론의 공간]이다. 순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책의 세계, 지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중학교에나 가서였다고 말한다. 목차는 문학, 철학, 과학의 3부로 이루어졌다. 이 순서는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읽는 순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저자는 철학자이기에 세 분야의 책을 두루 읽을 것이고 특히 과학과 철학을 함께 읽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문학 애호 시기를 지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평론에 대해서는 마음이 열려 있다. 저자는 에밀 졸라의 [목로 주점]을 철학과의 관계 하에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먼 훗날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매료되었을 때 [목로주점]을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재발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궁금한 것은 저자는 문학을 여전히 사랑하는가?. 저자가 중요하게 거론하는 책이 [삼국지연의]. 유비, 조조 등이 등장하는 책이다. [주름, 갈래, 울림]에서 저자가 라이프니츠 철학을 이야기할 때 유비, 제갈량 등을 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소설과는 다른 갈래의 인물들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연의]를 읽는 시간을 늘 행복했다고 말한다. 특히 제갈량은 자신에게 하나의 꿈이요 이상이요 낭만이었다고 말한다. 마지막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갸륵한 마음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면서 삶이 다할 때까지 온몸을 살라 쟁투하는 모습이 삶의 한 모델이 되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그 시간으로 아득한 저편으로 사라져 갔으니 시간이야말로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절대적 힘이 아니던가라고 말한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말처럼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지각을 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는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으나 우리의 둔한 지각이나 때묻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이야기한다. 이틀 또는 사흘이란 빠른 시간에 침식을 잊고서 몰두한 소설은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적인 성향으로 말한다면 자신은 과학적 성향보다는 인문학적 성향이 더 강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의 부모님은 저자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에 몇 달씩 입원했을 때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를 알게 된 어머니 덕분에 의사에의 길을 일찍 접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찰스 다윈의 사례와 비슷한 듯 다르다. 다윈은 1827년 에든버러 대학교 의대에 진학했으나 마취 없이 진행되던 당시 수술 장면과 끔찍한 시체 해부에 큰 충격을 받고 2년 만에 중퇴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다윈이 간 곳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였고 전공은 신학이었다. 나는 어떤 유형일까? 2020년 지질해설사의 길에 들어선 이래 과학에 집중하고 있지만 문득 문득 인문에의 향수 같은 것을 느낀다. 이는 아직 내가 과학과 함께 인문을 공부하는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과학의 세계에 접근하면서 세계의 또 다른 차원을 볼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자신의 사유를 아니 어쩌면 자신의 감성과 가치관까지도 상당히 바꾸어 놓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훗날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자는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말한다. 한 인간은 직업, 전공, 계층을 비롯해 자신이 속해 있는 장()의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장과 장 사이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간극(間隙)이 패여 있고, 한 인간의 삶도 옮겨 다니는 장들에 따라 뚝뚝 끊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훗날 저자는 가로지르기의 개념과 실천을 통해서 간극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로지르기]는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보고 매료되어 산 책이다. 출간 연도인 1997년의 일이니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간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은 [가로지르기]에서 [세계철학사 1, 2, 3, 4]까지 모두 27권이다. 그간 서평을 한 권도 쓰지 못했다. 저자의 '가로지르기'는 기존 학문의 격자와 고정된 담론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사유를 펼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저자는 가로지르기는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통해 기존 담론 체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새유를 창조했을 때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230 페이지) 

 

저자는 가로지르기를 하는 데 이공계 학문을 공부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물리학, 생물학, 독일 문학, 역사학 등 담론 세계를 가로지르는 긴 유목(遊牧)을 시작한 저자는 30대 중반까지도 그것이 힘들었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유목이 자신의 사유라는 것을, 그때까지 힘겹게 했던 가로지르기가 자신의 사유의 본질이고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정처 없이 유목하던 저자는 결국 유목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유목에, 가르지르기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유목 분야 중 물리학이 눈에 띈다. 나는 내가 관계하는 지구과학보다 더 물리학 책을 많이 읽는 때도 있다. 저자는 [주역(周易)]에서 늘 관심 있게 생각했던 지도리(; )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의 책 가운데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가 있다. 저자는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작은 문고본 책들을 통해 비로소 넓은 안목에서 과학을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교과서들만을 가지고서 과학 공부를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量子)가 진동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에너지의 불연속을 함축하며 이것은 에너지를 연속적인 무엇으로 파악했던 이전의 생각을 무너뜨렸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사유의 역사에서 중요한 하나의 지도리를 형성한다.(212 페이지) 주역(周易)에 나오는 지도리는 세상을 움직이고 인간의 삶을 바꾸는 가장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핵심 기틀을 의미한다. 

 

저자는 파()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를 이동시킨다고 말하며 입자들이 파를 전달시킨다고 말하는 것과 입자들이 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덧붙인다. 루이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저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삶 죽음 운명]에도 그 이야기가 나온다. 내게 특별히 재미 있게 느껴진 부분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 파라데이그마, 코라, 아낭케를 논한 부분 등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다시 읽을 필요를 느낀다. 

 

저자는 한국에는 유독 하이젠베르크의 책들만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여러 물리학자들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눈에 띄는 것은 이탈리아 물리학자들의 책이다. 특히 카를로 로벨리의 책이 그렇다. 이라크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짐 알칼릴리도 내가 즐겨 읽는 물리학 책 저자다. 저자는 양자역학과 더불어 열역학에 깊은 흥미를 가졌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열역학은 열이라는 존재를 한 계의 부피, 압력, 온도의 개념을 통해 다룬다.(233 페이지) 이는 열역학이 열 현상을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으로, 객관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뜨겁다는 감각적 사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몸의 차원에서는 현상학적으로는 열이란 무엇보다 뜨거움을 통해 지각된다. 저자에 의하면 기하학은 색도, , 냄새, 촉감도, 또 인간도, 의미와 가치, 역사도 없는, 오로지 형태만이 존재하는 추상성을 다룬다.(189 페이지) 그러나 이 추상성의 세계에 입문해야만 비로소 과학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 이를 지구과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은 지구를 위도와 경도, 판의 경계, 변환 단층이라는 기하학적 선과 도표로 파악한다. 지진을 릭터 규모나 진도(震度) 같은 추상적인 숫자와 에너지 단위로 다룬다. 그러나 인간에게 지진은 대지가 흔들리고, 서 있는 발밑이 무너지며,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절대적인 공포와 감각의 경험이다. 

 

과학은 지구를 선과 도형으로 단순화(추상화)하여 규칙을 찾아내지만, 그것이 현상학적 몸과 만날 때 재난의 역사가 된다. 저자가 말했듯 나이가 든다는 것은 관심이 점차 좁아진다는 것을 뜻한다.(249 페이지) 나의 경우 문학에 관심이 거의 사라진 것은 관심이 좁아진 것을 반영한다. 저자는 생물학은 꾸준히 공부해온 담론이고 앞으로도 평생토록 많은 시간을 바칠 영역이라 말한다.(250 페이지) 나의 경우는 어떤가? 생물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리 쉽지는 않다. 

 

저자는 물질, 에너지, 정보가 생명체 이해의 근간을 이룬다고 말한다. 2001년 무렵 기() 수련을 하며 기()를 물질, 에너지, 정보로 놓고 보려했던 것이 생각난다. 생명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화다. 저자는 진화의 과정이란 결국 생명체들이 시간에 처해서, 차이의 운동에 처해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계속 바꾸어 나간 역사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263 페이지)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다. 

 

2과학의 세계편에 특이하게도 계급 투쟁의 역사와 정치경제학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 말을 보라. “갈릴레오는 진공상태 및 마찰이 없는 바닥을 가정하고 역학적 법칙을 세운 후 거기에 실제 현실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들을 부가해서 물체의 운동을 위한 함수를 세웠다. 이런 인식 방법은 근대 과학의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주류 경제학 역시 이런 방법을 구사한다. 주류 경제학이 우선 전제하는 완전 경쟁 시장의 모델이 그것이다. 이 시장에서 이기성과 합리성을 본질로 하는 개인들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물건을 사고 판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개인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주류 경제학이 맞물려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273 페이지) 

 

과학과 경제학 또는 사회과학이 맞물려 있음을 알게 하는 글이다. 주류 경제학(신고전파 경제학)은 갈릴레오의 진공 상태를 사회과학에 그대로 가져왔다.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완벽하게 합리적인 존재(Homo Economicus)’만을 가정한 것이다. 마찰이 없는 바닥처럼 독과점이나 정보의 비대칭이 전혀 없는 완전 경쟁 시장이라는 가상의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 진공 상태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수학적 균형 함수를 세우고, 현실의 왜곡(정부 규제, 독점 등)은 나중에 고려해야 할 사소한 변수로 취급한다. 

 

저자의 맥락으로 돌아가면 갈릴레오의 이 선택은 생생한 현실(마찰이 있는 세상)을 배반하고 오직 형태와 수식만 존재하는 추상성의 세계로 진입한 사건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그대로 관찰하기를 포기하고 가상의 진공을 상상했기 때문에 인류는 근대 과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지적 유목을 시작한 후로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했지만 결국 철학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과학 철학, 그리스 철학, 프랑스 철학, 동양 철학 등 철학 세계 내에서의 유랑은 계속되었고 지금은 결국 철학의 테두리에서도 벗어나 버렸다고 말한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철학에 몰두했기 때문에 철학이 자신의 사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철학자라고도 또는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유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유목이 특별히 유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유가 흘러가는 대로 사유하고 글을 쓸뿐이며 그런 가로지르기의 사유, 유목의 사유가 자신에게는 오히려 더 편안하고 친숙하다고 말한다.(285 페이지) 

 

저자는 과학도 예술도 다른 모든 것들도 현실과 상관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 삶으로부터 괴리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메를로 퐁티의 존재론적 환원주의는 거부해야겠지만 우리로 하여금 지각된 세계의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현상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엇인가에 매료되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299 페이지) 

 

저자는 항상 철학, 과학, 문학 세 가지가 혼효(混淆)되어 있는 사유를 원했던 지금도 그렇다고 말한다. 혼효(混淆)란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 뒤섞여 하나로 합쳐짐을 뜻하는 말이다. 저자가 철학적 개안(開眼)을 하게 된 것은 박홍규 선생의 베르그송 강의를 들으면서부터다. 저자는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가지게 된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심사에 대해 말한다. 베르그송은 결정론과 자유의지 논쟁이 한참 절정에 올랐을 때 사유를 시작했다.(313 페이지)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는 성인을 모델로 한 편협한 개념일 뿐이라 말한다. 

 

3철학 마을 가로지르기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 자신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동안 몰두했던 작업은 베르그송과 바슐라르의 비교였다.”(321 페이지) [담론의 공간]에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 철학은 베르그송의 철학이 대전제로 삼고 있는 연속의 원리를 포기함으로써 성립했다. 바슐라르, 캉길렘, 알튀세, 푸코, 세르 등의 인식론, 다양한 구조주의적 인간과학들, 카타스트로피 이론, 분자생물학, 아날학파, 게르의 철학사 등등 우리는 오늘날 도처에서 불연속의 개념을 만난다. 불연속은 현대사회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275 페이지)  

 

저자는 맹목적 탈주도 시대착오적인 회귀도 아닌, 탈주와 회귀 사이에서 근대성을 제고한다는 것, 그로써 전통 근대 - 탈근대가 모두 균형 있게 성찰되는 사유를 시도한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고 말한다.(338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다산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적 주체와 대비되는 도덕적 주체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실학이라고 통칭하는 담론들이 대체적으로 실사구시의 성격을 띤 담론이었던 데 비해 다산만은 동북아 전통의 핵을 형성하는 경학(經學)의 세계를 정면 돌파하려 했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자로서의 다산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경학은 좁은 의미의 경학만이 아니라 사서(四書)까지 포함한다. 사서를 편찬한 것이 주자이고 보면 다산에게 사서의 새로운 독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202511월 나온 한형조 교수의 [두 개의 논어]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새롭다. 두 개의 논어란 주자가 본 논어, 다산이 본 논어를 말한다. 이정우 교수에 의하면 다산은 주자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한평생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두 개의 논어]의 많은 부분에서 다산의 해석에 공감했다. 이런 대립 구도는 주자와 다산의 맹자 이해로 이어진다. 다산은 [맹자요의]를 통해서 도덕적 주체를 다루고 있거니와 그가 맹자의 해독을 통해서 말하려 했던 것은 주자와 상반된다. 주자와 다산의 맹자 이해 - 사실 맹자는 두 가지의 해석을 다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 는 칸트와 스피노자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칸트가 현실적인 좋음과 나쁨으로부터 아예 단절을 이루는 도덕을 세우려 했다면 스피노자는 기독교적인 선악을 넘어서 현실 내재적인 윤리를 세우려 했다. 이와 유사하게 다산은 주자의 본질주의 및 초월적 도덕주의를 비판하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윤리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341 페이지) 나는 이런 대립 구도를 좋아한다. 저자에게는 레비스트로스의 투명한 초합리주의보다 클라스트르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클라스트로의 [폭력의 고고학]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고 저자는 말한다. 클라스트로의 인류학은 과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나는 고고학보다 인류학에 마음이 간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서구 존재론의 용광로다. [차이와 반복]이 세계의 심층을 다룬다면 [의미의 논리]는 표층을 다룬다. 전자가 잠재성의 세계를 다룬다면 후자는 현실성의 세계를 다룬다. 저자에게 [차이와 반복]은 기()의 사유로, [의미의 논리]는 역()의 사유로 다가왔다. 세계의 잠재성은 기()이고 기화(氣化)의 결과로서의 생성이 역()이기 때문이다.(358 페이지) 

 

심층과 표층은 본래 지질학 및 지형학에서 쓰이는 용어이지만 질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이를 인간의 존재와 의미의 발생을 설명하는 공간적 은유의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프락탈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무릎을 쳤다고 말한다. ()과 라이프니츠를 읽으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주름 개념이 그야말로 시각적으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프락탈의 주름이 구상적인 주름, 기하학적인 주름이라면 역()과 라이프니츠의 주름은 훨씬 추상적인 주름, 존재론적인 주름이라는 점에서 즉물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363 페이지) 

 

나는 라이프니츠의 주름 논의의 핵심인 접힘과 펼쳐짐론을 보며 접힘을 지구 내부의 단층에 의한 스트레스 축적으로, 펼쳐짐을 스트레스가 한계를 넘을 때 에너지가 급격히 표출되는 것으로 설명하다가 그만 두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는 겉으로는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의 이면(裏面)에 엄격한 수학적 질서가 있다. 단층론에는 종잡을 수 없는 현상 이면에 엄밀한 물리학적 질서가 있다. 

 

모나드론이 한 개체에 다른 개체들이 반영된 채 세계의 시간이 그물망처럼 접혀 있다고 보듯 단층에 의한 지진론 역시 프랙탈 같은 구조로 엮여 있다고 본다. 물론 모나드론은 형이상학적이다. 이 세계가 신이 창조한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그런 거부감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메커니즘이 절묘하다는 생각은 더해진 느낌이다. 

 

책의 결론격의 이야기는 이렇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과학적 관심을 인간과 문화에까지 확장시킬 때 늘 불만족스럽고 나아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결과들이 나오곤 한다. 자연과하기 사회과학, 인문학을 가로지르면서 종합적 사유를 하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에서 세운 어떤 관점이나 이론을 사회과학,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과정 없이 곧바로 확장해서 인간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경우다. 그럴 경우 늘 조야(粗野)한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은 문학적 자연관을 자연과학 공부를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연에 투사해서 얻게 되는 결론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똑같이 우스꽝스럽다.”(368 페이지) 철학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과 함께 하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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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26-08-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6년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던 시간이었다. 기억으로 뜨겁고 건조한 고기압이 하늘을 덮어 낮 기온이 극단적으로 치솟는 형태였던 1994년 여름도 숨막히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뜨거워진 바다가 막대한 수증기까지 공급함에 따라 낮에는 폭염, 밤에는 역대급 열대야가 동시에 타오르는 양상을 보인 올해는 1994년 더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기후학자들은 2026년 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했다. 2026년이 실제로 시원했다는 뜻이 아니라 가속되는 지구온난화 때문에 다가올 여름은 올해보다 무조건 더 뜨거울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이다.

 

이럴 때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분화로 빚어진 풍경을 그리게 된다. 당시 화산 분화로 엄청난 양의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퍼져 다음 해 지구 평균 기온이 0.5°C~0.7°C 떨어졌다. 이산화황이 산소, 수증기 등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미세 액체 방울 또는 입자 형태의 황산염 에어로졸을 형성해 지구로 들어오는 햇빛을 우주로 반사한 결과다. 1991년의 피나투보 대분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지던 지구온난화 흐름을 약 2년 동안 완전히 멈추게 했다. 1992년을 기점으로 약 2년이 정점이었던 냉각 효과는 1994년 피나투보 화산의 우산 효과가 완전히 끝나며 지구온난화 열기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이산화탄소는 상온·상압의 지구 대기 환경에서 액체나 고체 입자로 뭉치지 않고 오직 안정된 기체 상태로만 존재해 햇빛을 반사할 수 있는 알갱이(입자) 상태가 되지 못한다. 화산재는 짧은 기간 빛을 가리고, 이산화황은 성층권에 오래 머물며 기후 변화(냉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맨틀 깊은 곳의 유황 성분이 풍부한 해양 지각이 섭입하면 지각이 녹으면서 안산암질이나 유문암질 마그마가 생성된다. 이런 화산대에서 이산화황이 많이 나온다. 석회암 등 탄산염 암석이 많은 대륙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화산에서 이산화탄소가 많이 나온다.

 

화산재가 많이 나오는 화산은 이산화규소 함량이 높은 화산이다. 안산암질(중성), 유문암질(산성)이 그것으로 마그마가 너무 끈적끈적해 가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부에 갇힘에 따라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올라올수록 가스 주머니가 팽창하며 압력이 극도로 높아진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끈적끈적한 마그마가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내부의 가스 주머니들이 풍선처럼 일제히 펑펑 터지며 마그마 전체를 잘게 찢어놓는다. 찢어진 마그마 파편들이 공기 중에서 급격히 식으면서 유리에 가까운 미세 돌가루가 된다. 이것이 화산재다.

 

지각 밖에서 식는 중성 마그마가 안산암질이라면 내부에서 식는 중성의 마그마는 섬록암질이다. 지각 밖에서 식는 산성 마그마가 유문암질이라면 내부에서 식는 산성 마그마는 화강암질이다. 지각 밖에서 식는 현무암은 이산화규소 함량이 낮은 염기성으로 분류된다. 내부에서 식는 염기성 마그마는 반려암이다. 지질에서 말하는 염기성, 중성, 산성은 이산화규소 함량에 따른 분류다.(52%까지; 염기성, 52~66%; 중성, 66% 이상; 산성)

 

미래의 여름은 올해보다 무조건 더 뜨거울 수밖에 없다는 경고는 1) 온실 가스 누적 효과와 풍선 효과, 2) 한계에 다다른 바다라는 온수매트, 3) 역설적인 '맑은 하늘'의 부작용 등에 근거를 둔 경고다.

 

우리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에 최소 수백 년에서 수만 년 동안 축적된다. 이산화황 대방출처럼 일시적으로 햇빛을 가려 기온을 낮춰주는 자연의 우산이 매년 생겨주지 않는 한 대기 중에 켜켜이 쌓인 온실가스는 매년 지구 밖으로 나가는 열을 더 촘촘하게 가두게 된다. 다음 해의 온실가스 농도는 올해보다 높을 것이므로 지구가 머금는 열에너지의 총량은 매년 늘어나게 된다.

 

지구 지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는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낸 열의 90% 이상을 대신 흡수하며 방패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 한반도 주변 및 전 세계 해수면 온도가 관측 사상 최고치를 매년 갈아치우고 있다. 바다가 뜨거워지면 대기 중으로 엄청난 양의 수증기(열을 품는 온실가스 역할을 함)를 뿜어내며, 기온이 쉽게 내려가지 않는 '거대한 온수매트'로 돌변한다. 이 가열된 바다는 단기간에 식지 않기 때문에 다음 해 여름의 기초 온도를 더 높여 시작하게 만든다.

 

수증기의 짧은 생명은 별 의미가 없다. 개별 수증기 분자는 비나 눈으로 쉽게 내려오기 때문에 생존 기간이 평균 약 10일로 매우 짧다. 하지만 바다에서 끊임없이 리필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개별 분자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뜨거운 바다가 공급하는 전체 시스템 관점에서는 수증기의 총량이 계속 유지되거나 늘어나면서 강력한 보온 효과를 낸다. 이산화탄소의 생존 기간은 수백 년에서 수만 년에 달할 정도로 매우 길다. 즉 한 번 배출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자가디시 슈클라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바다가 거대한 열 흡수원으로서 지구 온도를 방어하는 동안 육지 표면 역시 기후 체계를 조절하고 예측하는 데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핵심 인자임을 평생의 연구를 통해 입증했다. 바다가 양적인 방패(90% 이상의 열 흡수)라면 슈클라 박사가 주목한 육지는 기후의 방향과 변동성을 결정하는 질적인 조절자에 가깝다. 슈클라 박사에 의하면 육지 역시 토양 속 수분을 통해 기후를 기억하고 조절한다.

 

슈클라 박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인도 등 아시아 지역의 몬순(계절풍) 예측을 현대화한 것이다. 몬순은 대륙(육지)과 바다가 햇빛을 받았을 때 데워지는 속도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육지 표면이 얼마나 뜨거워지느냐에 따라 바다로부터 습한 바람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의 강도가 달라지며 이는 수억 명의 생존이 걸린 비의 양을 결정한다. 육지의 상태가 기후 예측의 핵심 경계조건이 되는 것이다. 슈클라 박사의 논의에서 지질학적 의미도 길어올릴 수 있다. 지각의 가장 바깥층(토양과 식생)은 멈춰있는 돌덩이가 아니라 대기층과 동기화되어 실시간으로 지구의 기후와 환경을 조절하는 거대한 지질학적 기관(Organ)이라는 것이다.

 

2026년 우리는 그래도 유럽보다 나았다. 유럽의 여름 기후는 기상 관측 사상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다섯 차례의 살인 폭염'과 초대형 산불로 얼룩졌다.

 

자가디시 슈클라는 나비 효과에도 불구하고 계절 예측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방적인 우상향(지구온난화) 추세 속에서도 자가디시 슈클라의 계절 예측은 여전히 매우 강력한 의미와 실용성을 갖는다. 기후변화로 인해 평균 기온이 계속 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절 고유의 '오르락내리락(변동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준선이 올라간 상태에서도 여느 해보다 더 혹독한 폭염이 오는 여름이 있고 온난화 중에도 일시적으로 지독한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 있을 수 있다.

 

슈클라의 계절 예측 덕분에 올해 장마철에 비가 너무 안 와서 가뭄이 들지,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날지를 몇 달 전에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수억 명의 식량 생산과 직결되는 문제다.

 

올해 유럽을 덮친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알프스의 거대 빙하가 폭포수처럼 녹아내리는 재난적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유럽이 유독 폭염이 심한 것은 주변의 북극 해빙과 대륙의 눈(Snow) 커버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육지의 햇빛 반사율(알베도)이 무너진 결과다. 하얗게 빛을 반사해 주던 눈과 얼음이 사라진 자리를 어두운 맨땅과 바다가 채우면서, 유럽 대륙 전체가 태양열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빙하가 녹는 현상은 단순히 물이 늘어나는 것을 넘어 지구의 고체 땅을 움직이고 전 세계 바다의 높이를 비틀며 거대한 지형을 순식간에 바꾸는 연쇄적인 지질학적 폭주를 일으킨다. 빙하가 녹으면 지진이 나기도 하고, 주변이 아닌 다른 지역 수위가 올라가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한다. 빙하, 하면 프랑스의 빙하학자 클로드 로리우스 생각이 난다. 1965년 남극 탐사 당시 위스키에 빙하 얼음을 넣어 마시다 탁탁 소리를 내며 터지는 기포를 보고 이 기포가 수십만 년 전 지구의 대기를 그대로 간직한 타임캡슐임을 직감한 인물이다.

 

[빙하여 안녕]은 지구 기후 시스템의 거대한 브레이크이자 인류 문명을 지탱해 온 안녕(Peace)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뜻하는 슬프고도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읽어야겠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후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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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 경이롭고 유쾌한 파동의 과학 관찰자 시리즈
개빈 프레터피니 지음, 홍한결 옮김 / 김영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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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인력으로 인해 지구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며 바닷물이 부풀어 오른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이 바닷물과 해저면 사이에 강한 마찰이 일어나 지구 자전이 느려진다. 이때 발생한 에너지가 달로 전달되어 달의 공전 궤도가 넓어진다. 이 때문에 지구와 달의 거리는 매년 약 3.8cm씩 멀어진다. 개빈 프레터피니의 [파도 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는 조석파(潮汐波)를 세상에서 가장 큰 파도라 정의한다. 그것은 달과 태양의 인력(引力)이 작용해 지구 전체의 바다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외형의 크기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라 범위와 스케일이 그렇다는 것이다. 쓰나미가 가장 큰 파도라면 조석은 지구 반 바퀴에 달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범위에 작용하기에 크다는 것이다. 개빈 프레터피니는 [구름 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란 책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구름과 파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두 현상은 파동이 본질이라는 점에서 하나다. 파도와 구름은 물질 자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매질(媒質)을 타고 흐르며 만들어내는 형태다. 또한 두 현상 모두 물과 공기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의 산물이다. 두 현상 모두 끊임없이 변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에너지가 앞으로 나아갈 때 물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파도가 칠 때 물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원운동을 한다. 저자는 구름관찰자(cloudspotter)는 파도관찰자(wavewatcher)이기도 하다고 말한다.(11 페이지) 흥미롭게도 spotter은 숨겨진 것을 찾아내거나 포착한다는 의미가 강하고, watcher는 시간을 두고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의미가 강하다. 저자는 파도를 갓난 아기기(잔물결), 아동기(풍랑), 성인기(성숙한 파도), 원숙기(너울), 종말기(쇄파) 등으로 분류했다.

 

에너지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이다. 파도가 자갈에 밀려와 부서질 때 에너지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소리를 내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소리도 파도처럼 일종의 파동이다. 다만 물이 오르내리는 파동이 아니라 기압이 변동하는 파동이다. 저자는 파도가 지구에 가하는 맥동이라는 이름의 진동을 지진으로 발생하는 충격파의 미약한 버전으로 본다.

 

보이지 않지만 파동임에 분명한 것은 소리다. 반사, 굴절, 회절은 파동이 방향을 바꾸는 세 가지 방식이다. 파동은 무엇인가에 부딪히면 튕겨 나온다. 이것을 반사라고 한다. 파동은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들어갈 때 방향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굴절이라고 한다. 굴절은 파동이 가진 비장의 무기다. 파동이 방향을 바꾸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파동이 경계면에 직각이 아닌 비스듬한 각도로 도달해야 한다. 둘째 파동이 두 물질에서 자연적으로 진행하는 속도가 서로 달라야 한다.

 

빛 같은 것이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들어갈 때 파동의 방향이 바뀌는 현상과 속도 차이는 관련이 있다. 속도가 바뀌기 때문에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결합 구조가 단단할수록 소리의 속도가 빨라진다. 금을 통해서는 초속 3240m, 다이아몬드를 통해서는 무려 초속 12000m에 이른다. 저자는 파동 관찰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파도를 바라보는 것에서 충분히 낙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최고의 명상법이 될 수 있지만 더 넓은 의미의 파동 관찰자란 종류가 전혀 다른 파동 즉 해변의 파도처럼 눈에 잘 보이는 파동과 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 사이에서 연결고리와 유사성을 찾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119 페이지)

 

파동은 작은 장애물을 만나면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완전히 감싸며 돌아 나간다. 좁은 틈을 통과할 때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회절은 파동의 이치 중 하나이지만 소리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회절의 효과는 온갖 종류의 파동에서 나타난다. 날카로운 낚시꾼이 눈으로 수면의 파문을 읽어 물고기의 위치를 파악하듯 우주 학자들은 마이크로파를 감지하는 우주탐사체를 이용해 과거의 중요한 우주 교란에 관한 증거를 찾는다.

 

탐지된 마이크로파 덕분에 우주의 기원과 구성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수십 년간 이어졌던 우주의 기본 성분에 대한 논쟁이 종결되기도 했다.(137 페이지) 자신이 만든 파동 탓에 존재를 들키는 것은 물고기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움직이는 교란체여서 본의 아니게 늘 이런저런 형태의 파동을 발산하므로 감지할 줄 아는 상대에게 정체를 들키고 만다.(139 페이지)

 

뜻하지 않게 발생한 파동 신호 탓에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는 것은 참 불운한 일이다. 하지만 동물이 파동을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진화의 막다른 길 끝에서 굉장히 외롭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번식이란 본질적으로 협력이 필요한 일이니 모종의 소통은 모든 종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책의 원제인 [The wavewatcher's companion]에서 wavewatcher은 파도 관찰자라기보다 파동 관찰자라고 해야 더 좋을 것 같다. 파도뿐 아니라 파도의 상위 범주인 파동 일반을 다룬 책이니 [파동 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라 해야 좋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재미 이상의 의미도 느낄 수 있다.

 

파동과 진동의 관계에 대한 내용도 그 중 하나다. "파동과 진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진동이 파동을 만들지만 그 관계는 단방향이 아니다. 파동 역시 진동을 만든다. 특히 주기적인 파동은 결국 진동의 움직이는 패턴이기에 더욱 그렇다."(149 페이지)는 글이 그 중 하나다. 지진 역시 진동-파동-진동의 순서로 진행된다. 진행파를 progressive wave라 하고 정상파(定常波)standing wave라 한다.

 

정상파는 한 자리에 머무는 파다. 저자는 풍성 지형학자를 찾아 나섰다. 영국 런던 킹스 칼리지 자연 지리학과의 안드레아스 바스 교수가 주인공이다. 저자가 안드레아스 파스 교수를 찾은 이유는 물살이나 바람 속에서 나타나는 모래의 움직이는 굴곡이 비록 느리고 입자 형태이긴 해도 파동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드레아스 바스는 "저희 지형학자들은 사구(沙丘)를 파동으로 간주하기를 항상 아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사구의 형성 메커니즘 자체가 바다의 파도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란 말을 했다. 저자는 불변하는 존재를 찾는 과정에서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에너지라고 말한다.(211 페이지)

 

충격파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파동이든 너무 격심해져서 평소의 순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작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충격파라 부른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지구 표면은 여러 개의 거대하고 단단한 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들의 상대적 위치는 계속 서서히 변한다. 지진은 판들이 맞닿은 경계에서 엄청난 마찰력이 갑자기 해소되면서 주로 발생하며 이때 판들이 격렬하게 엇갈리면서 발생하는 충격파는 지구의 겉과 속에 울려 퍼진다.

 

지진 피해의 대부분을 일으키는 것은 실체파가 아니라 표면파다. 지진이 나면 빠른 P파가 도착해 작게 위아래로 덜컹거리고, 뒤이어 S파가 도착해 좌우로 흔들린다. 그 직후 가장 느리지만 가장 거대한 에너지를 품은 표면파가 도달하면서 본격적인 지상파괴가 시작된다. 표면파의 하나인 러브파는 파동이 좌우로 흔들리고, 레일리파는 위아래로 출렁인다. 레일리파는 바다의 파도와 비슷하다.

 

표면파는 지각 내부를 통과하던 실체파가 지구 표면과 부딪혀 굴절하고 반사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상호작용하여 새롭게 합성하여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하루에 두 차례 밀물과 썰물이 일어난다. 하지만 하루에 한 차례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곳도 있다. 멕시코만과 남중국해 등이다. 일반적인 바다는 하루에 두 차례 밀물과 썰물이 생기지만 대륙으로 꽉 막혀 입구가 좁아진 만 형태의 바다에서는 지형과 물의 출렁임 주기가 맞물려 하루에 한 번만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독특한 현상이 생긴다.

 

일반적인 파도는 해안에 다가오면서 심해파에서 천해파로 바뀐다. 파도 속의 물은 원래 원운동을 하지만 수심이 얕아질수록 원운동을 하기가 어려워지므로 찌그러져 타원이 되고 결국엔 왕복 운동만 남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친숙한 해변에 밀려왔다가 쓸려 나가는 파도의 움직임이다. 수심이 파장의 약 20분의 1 이하로 얕아지면 심해파가 천해파로 바뀐다. 일반적인 파도는 바다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서로 겹치기 때문에 해안에 상당히 불규칙한 패턴으로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조석파는 철저하게 태양과 달의 규칙적인 운동을 따르므로 훨씬 더 규칙적이다. 조석 현상이 거의 없는 바다도 있다. 이유는 바다 자체가 크지 않아서이다. 조석이란 달과 태양의 인력과 지구의 자전 및 공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원심력이 합쳐져 일어나는 해수면의 주기적인 상승 및 하강을 의미한다.

 

조석이 지구의 생명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약 45억 년 전 지구가 형성되던 시기에 화성 정도의 크기인 테이아라는 행성이 지구에 날아와 충돌했다고 본다. 이른바 거대충돌 가설로 크게 퍽 후려침 정도를 뜻하는 빅 웩(big whack)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닷물이 대륙을 휩쓸며 땅을 깎아내려 미네랄을 바닷가로 운반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책은 빛이 가진 파동 입자 이중성과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자연스럽게 전자현미경 이야기도 다루어진다. 전자현미경은 전적으로 전자들의 흐름이 갖는 파동성을 이용한 방법이다. 주사(走査) 전자현미경(SEM: Scaning Electron Microscope)은 가늘게 집중된 전자빔을 시료에 쏘아 시료 표면에서 반사되거나 튀어나오는 전자들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상을 얻는다.

 

투과 전자현미경(TEM: Transmission Electron Microscope)은 비교적 굵은 전자빔을 극히 얇은 시료에 쏘아 상을 얻는다. 전자현미경이 엄청난 배율로 확대된 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입자의 흐름에 따른 파동인 물질파 덕분이다. 모든 미세한 입자는 충분히 빠르게 가속하면 파동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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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세계사 - 미래의 자연재해에 맞서기 위한 과거로부터의 교훈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 / 눌와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지질학 박사 루시 존스의 [재난의 세계사]는 지진, 화산분출, 홍수, 허리케인 등의 재난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지진을 말해주는 여성(Earthquake Lady)이라는 별명을 가진 지진학자다.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기도 한 저자는 지진학과 지질학 연구에서 얻은 방대한 수치 데이터를 음악의 음정(Pitch)과 선율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다. 저자에게 비올라 다 감바 연주는 지구의 진동인 지진과 기후 변화를 인간의 언어와 감성으로 번역해내는 또 다른 형태의 재난 연구이자 대중 강연인 셈이다.

 

저자는 지진은 피할 수 없는 지구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재난이 될지 아닐지는 우리 공동체의 준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재난 관계를 말해주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거대한 원뿔 모양의 산이다. 이는 용암이 침식 작용으로 깎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흘러나온다는 뜻이므로 활화산이라고 한다. 땅이 침식작용으로 깎여 없어지는 속도보다 단층이 땅을 밀어 솟아오르게 하는 속도가 더 빠를 때 생기는 것이 산이다.(100 페이지) 땅이 솟아오른다는 것은 아래에서 주기적으로 강력한 압축력이나 비트는 힘이 누적되다가 지진을 통해 방출되고 있음을 뜻한다.(화산활동을 통해서도 땅은 솟아오른다.)

 

산은 중력의 중심 방향과 반대로 높게 솟아 있는 거대한 흙과 암석의 덩어리다. 단층 운동으로 산이 가팔라질수록 중력이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에너지도 극대화된다. 지질학적 시각에서 산은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단층의 솟구치는 힘과 중력의 끌어내리는 힘이 격렬하게 싸우는 전쟁터다. 화산이 분출하면 화산재, 용암, 돌멩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때 물질들은 무한정 멀리 퍼지지 않고 중력과 돌멩이들끼리의 마찰력으로 인해 특정 경사각을 이루면 멈춰 선다. 중심점에서 사방으로 똑같은 힘이 작용하여 물질이 쌓이므로 위는 뾰족하고 아래로 갈수록 넓은 원뿔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화산이 분출하는 곳에서는 원뿔 모양의 산이 만들어지지만 지진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거대한 성벽이나 계단 모양의 산이 만들어진다. 화산이 만들어지는 곳은 세 가지다. 1) 중앙 해령, 2) 섭입대, 3) 열점이다.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다.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된다.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천연 요새가 되어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만들어준다. 폼페이는 활화산 베수비오에서 남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위험한 곳에 세운 도시였고 결국 멸망했다. 베수비오는 변함 없는 활화산이다.

 

지진파에는 두 가지가 있다. P파와 S파가 그것이다. P파는 지각을 압축시키고 S파는 지각을 비튼다. 지각은 비트는 힘에 더 약하다. 단단한 콘크리트 건물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도 S파 때문이다. 압축할 때는 암석 내부의 미세한 틈새나 균열들이 서로 단단히 맞물려 닫힌다. 힘이 분산되어 버티는 힘이 강해진다. 비트는 힘은 암석의 내부 균열을 찢어 열어 젖히는 인장력을 발생시킨다. 균열이 쉽게 벌어지며 파괴로 이어진다.

 

비트는 힘이 발생시키는 인장력은 정단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지각이 양옆으로 잡아당겨지는 인장력으로 인해 지각이 벌어지면서 쪼개지고 중력의 영향으로 한쪽 블록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정단층을 형성한다. 정단층의 정()은 물체를 지구 중심으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기준으로 볼 때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에 정상이라는 뜻이다.

 

역단층을 발생시키는 힘은 압축력이다. 암석이 양방향에서 강한 압축을 받으면 약 30° 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가진 대각선 모양의 단층면(파괴면)이 생긴다. 경사면 위에 얹혀 있는 암석 블록이 양옆에서 밀어붙이는 힘에 의해 중력을 거슬러 경사면을 타고 위로 밀려 올라간다. 이 강력한 압축력은 대륙판끼리 부딪히는 수렴형 판 경계에서 생긴다. 역단층의 역()은 중력을 거슬렀다는 뜻이다.

 

P파와 S파의 시간차는 두 지진파가 8 km를 이동할 때마다 1초씩 벌어진다. 어느 지점에 P파가 도착하는 시각과 S파가 도착하는 시각의 차이가 30초라면 지진이 시작된 곳이 240km 떨어져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대기의 수분 함량을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인공위성들이 쏘아 올려진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대기 중에 좁고 긴 수분 기둥(대기의 강)이 있어서 적도 근처의 열대지방에서 중위도로 수분을 운반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보통 길이는 수천에서 수만 km, 폭은 수백 km에 이른다. 이런 대기의 강이 캘리포니아주 연안으로 넘어오면 폭우가 내린다. 폭우는 대개 하루나 이틀이면 지나간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대기 조건 때문에 폭우가 더 오래 머물고 홍수가 난다.

 

저자는 인간은 포식자와 기근의 위협과 같은 단기적 위기에 대한 신속한 반응이 생존의 필수적인 세계에서 진화했다고 말한다. 위험은 도처에 만연해 있었고 임박한 위험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후손을 남겼다. 우리 대다수는 홍수를 급박한 위험으로 여기지 않는다. 직접 경험한 적이 있거나 부모나 조부모가 기억하고 있었다거나 하는 등의 개인적인 의미가 없다면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감정은 금세 사그라들고 만다. 그리고 위험을 가늠할 때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의 좌우된다.

 

홍수는 큰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홍수의 근원인 비를 친숙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비를 다른 자연재해보다 온건하다고 여긴다.(117 페이지) 우리는 땅 위에서 살기 때문에 수면 위로 드러난 것과 강, 호수, 바다 밑에 잠겨 있는 것이 애초부터 다르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강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땅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강 기슭을 이루는 흙을 땅의 흙과 특별히 구별할 수 없고 강바닥의 지각에도 독특한 점이 전혀 없다. 다만 주변의 땅보다 고도가 낮을 뿐이다. 물은 중력이 잡아끄는 곳으로 흘러내리므로 고도가 낮은 곳에 고인다.(154 페이지)

 

저자는 물과 땅 사이, 강물이 흐르는 곳과 흐르지 않는 곳, 강의 액체 상태와 땅의 고체 상태 사이에 절대적인 경계선을 그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릴 것을 주문한다. 강에 물만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흐르는 물에는 많은 것을 품고 운반할 수 있는 힘이 있다.자연이 작고 가벼운 물질일수록 운반하기 쉽고 물의 흐름이 빠를수록 더 많은 물질을 운반할 수 있다. 미시시피 강의 별명이 빅 머디(Big Muddy; 거대한 흙탕물)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모든 강이 그렇듯 미시시피 강의 강물은 이동하면서 모래알과 흙을 침식해 바다로 가져간다.

 

물의 흐름이 느려지면 품고 있던 퇴적물의 일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데 크고 무거운 모래알이 먼저 떨어진다. 이 두 원리를 종합하면 자연 제방이 어떻게 생기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물이 중력에 의해 강으로 흘러갈 때 종종 다량의 진흙과 실트를 운반해 간다. 눈 녹은 물과 비는 강의 특정 구간의 수위를 높인다. 그곳의 고도가 하류보다 높아졌으니 낙차가 심해진다. 그러면 수량이 증가해서 더 많은 실트를 운반할 수 있게 된다. 강 기슭을 넘어설 정도로 수위가 높게 올라가면 물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이제는 바다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강 바깥으로, 강을 둘러싼 땅으로도 흘러내린다.

 

어느 정도 흘러내리면 경사가 원만해져서 물의 흐름이 느려지고 물에 떠 있던 실트 알맹이가 바닥에 퇴적된다. 큰 알갱이일수록 강에서 가까운 쪽에 먼저 쌓이고 대부분 알갱이는 원래 강바닥에서 더 먼 곳에 쌓인다. 그 결과 큰 모래알로 이루어진 자연 제방이 형성된다. 이 자연 제방은 강기슭을 높여 미래의 홍수 가능성을 낮춘다. 하지만 수백년의 미시시피강 홍수 내륙이 보여주듯 자연 제방 또는 인공 제방 위로 넘치는 홍수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155, 156 페이지)

 

일본 열도는 네 개의 판 사이의 계속되는 충돌로 형성되었다. 서쪽의 유라시아 판은 북동쪽으로 태평양판, 남동쪽으로 필리핀 해판과 충돌하고 있고 그 사이에 북아메리카 판의 작은 부분이 끼어 있다. 네 개의 판이 서로 충돌해 유라시아 판과 북아메리카 판을 서쪽 위로 밀어 올렸다. 물론 마그마도 솟아올라서 후지산과 같은 화산이 만들어졌다.

 

여러 종류의 판 경계 중에서도 이런 섭입대에서 지진이 가장 자주 일어난다. 판끼리 멀어지거나 옆으로 스치는 대신에 서로 밀면서 생기는 강한 변형력 때문에 마찰력도 더 크고 쌓인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지진을 통해 발산된다. 네 개의 판이 충돌하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일본의 지진은 판 경계에 국한되지 않고 열도 전역에서 일어난다.(132 페이지)

 

하나의 지진이 일어나면 추가로 지진들이 더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단층의 움직임은 주변의 모든 곳에 힘을 가하고 변형력을 집중시켜 지각의 울퉁불퉁한 부분들을 새로 만든다. 이 새로운 변형력을 해소하기 위해 잇따라 지진이 일어난다. 이런 지진들은 바로 전에 일어난 본진의 직접적인 결과이므로 그 지진의 여진으로 분류한다.

 

단층의 움직임은 에너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각의 힘의 균형을 깨뜨리기에 새로운 불균형이 생기고 바로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지진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거대한 본진 이후 몇 차례 여진이 발생하지만 결국 그치는 것은 지각이 새로운 역학적 균형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200412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서쪽 해안에서 일어난 규모 9.1의 남아시아 지진은 움직인 단층의 길이가 1,500km가 넘었다. 파열면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9분이나 되었다. 지질학 박사 케리 시(Kerry Sieh)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을 예측한 사람이다. 저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야기를 하며 이런 말을 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피해자를 탓하는 경향은 자연재해 앞에서 너무나 흔한 반응이어서 거의 불가피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고통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힘에 의해 유발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안심하기 위해 피해자를 책망한다. 이 본성은 자선을 베풀려는 충동 만큼이나 인간답고 따라서 없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도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리고 적어도 다음 재난이 닥쳤을 때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256, 257 페이지)

 

인간은 무작위성을 무척 싫어하고 예측 가능한 패턴을 만들기 위해 종종 극단적인 수단을 이용한다. 인간은 패턴을 찾기 원하는 강한 욕구와 확증 편향 때문에 패턴에 부합하는 사례를 강렬하게 기억하고 부합하지 않는 사례를 무시하기 쉽다.(261, 262 페이지) 1920~1930년대에 지진 데이터를 처음 수집하고 패턴이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대다수 과학자는 지진을 예측하는 대신 지진이 왜 발생하는지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적어도 1975년 중국 랴오닝성 하이청 지진에서 뭔가가 맞아떨어져 예측에 성공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때 미국, 일본, 소련 정부는 마침내 이 수수께끼를 풀겠다는 희망을 품고 공식적으로 지진 예측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당시 본진이 있기 전 규모 5.0 안팎의 미소(微小) 지진들이 수일 동안 연속적으로 발생했고, 한겨울임에도 뱀과 나비 등이 땅으로 나와 얼어 죽었고, 거위들이 날아다니고, 우물 및 지하수의 수위가 급변하거나 흙탕물이 되는 등의 이상 현상이 있었다. 행정력의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져 안전지대로 대피한 주민들이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다음 해인 19767월 가까운 탕산 지역에서 아무 전조 현상도 없이 규모 7.5의 강진이 일어나 25만 명이 사망했다.

 

지진 예측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진의 절대적 강도를 나타내는 릭터 규모(리히터 규모)를 고안한 미국의 지진학자 찰스 릭터는 오직 바보, 거짓말쟁이, 그리고 사기꾼들만이 지진을 예측한다(Only fools, liars, and charlatans predict earthquakes.)란 말을 했다.

 

지진에는 한참 동안 꽤 규칙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예측할 수 없다는 본성이 있다.(268 페이지) 저자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지금도 지진의 작동 메커니즘을 연구할 지진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왜 어떤 지진의 단층은 수m를 미끄러지다가 멈춰서 규모 1에 그치고 어떤 지진의 단층은 수백 km를 미끄러져 규모 7의 지진이 되는지 모른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지구 내부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인지 아니면 지진이 일어난 중에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부딪히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후자라면 지진학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종류의 예측을 영원히 제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과학자가 지진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지식은 전진, 여진, 그리고 지진이 다른 지진을 유발하는 현상뿐이다.(283 페이지)

 

남아시아 지진은 도호쿠 지진보다 7년 앞서 일어났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가장 큰 피해는 육지의 흔들림이 아니라 해저면의 이동에 의해 일어난다. 도호쿠 지진에서는 400km 길이의 암석 덩어리가 최대 80m 미끄러졌으므로 막대한 양의 물을 이동시켜 필연적으로 쓰나미를 초래했다. 일본에서 쓰나미는 지진처럼 삶의 일부이고 대부분의 마을에 대비 시설이 세워져 있다. 원자력 발전소는 우라늄처럼 질량 수가 큰 원자의 핵을 붕괴시킬 때 발생하는 엄청난 열을 이용해서 증기를 만든다.

 

이 증기로 전기 터빈을 돌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생산한다. 그런데 이런 핵 반응에서 생성된 열은 핵연료에서 재빨리 분리시키고 주의해서 관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핵연료가 녹고 핵연료가 담긴 원자로가 폭발한다. 따라서 핵연료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그 둘레에 냉각수를 순환시킨다. 냉각을 쉽게 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는 항상 물이 많은 곳 종종 바다 가까이에 짓는다. 그리고 냉각 체계가 중단되지 않도록 여분의 예비전력을 갖춘다.

 

지진과 쓰나미가 항상 일어나는 일본에서 바다 근처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울 때에는 발생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쓰나미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로스엔젤레스는 지진 덕분에 존재하는 도시이다. 무척 건조한 미국 남서부에 위치한 로스엔젤레스는 도시를 둘러싼 산들이 없었다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활성 단층들이 밀어 올려 생긴 산들은 바다에서 온 구름에서 비가 내리게 한다. 이 단층들은 또한 지하수를 가둔다. 초기 정착민들은 그 덕분에 생긴 샘에서 물을 내서 농사를 지었다. 20세기 초 석유가 발견되면서 로스엔젤레스는 현대적인 도시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석유 역시 단층 때문에 고인 것이었다. 단층은 로스엔젤레스를 존재할 수 있게 하지만 언제라도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자산이기도 하다.

 

저자는 여섯 가지를 제안한다. 1) 더 많이 배운다, 2) 정부가 알아서 보호해줄 것이라고 안심하지 않는다, 3) 지역 지도층과 교류한다, 4) 공동체와 함께 일한다, 5) 자연재해는 일어난 순간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6) 스스로 생각하라 등이다. 인상적인 말은 다른 사람들이 정보를 주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그 정보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행동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연재해 발생 시점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무작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33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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