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 이후에는 둘레가 굵어지지 않기에 조직해부학적으로는 풀이지만 형성층이 있다가 퇴화했기에 볏과의 나무로 인정하는 대나무는 줄기가 첫 해에만 자라며 키도 놀랍도록 빨리 크는 반면 다음 해부터는 더 이상 굵어지지도 않고 키도 크지 않지요. 물관과 체관의 관다발 세포벽이 두껍고 강하게 서로 묶여 있어 줄기가 딱딱해 나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대<>는 풀을 닮은 모습과 아울러 땅속 줄기에 의해 오랜 세월 영양 번식하면서 군락이 성장하기에 좀체 꽃이 피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무나 풀 어느 쪽도 닮지 않은 감자를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우리는 60년마다 대나무가 꽃 피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땅속 줄기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리좀이란 말로 상세히 분석해 철학 용어로 삼은 것이지요.) 꽃 없이도 오랜 세월 잘 번성하던 대나무가 갑자기 군락 전체가 고사(枯死)하기로 작정하고 꽃을 피우는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난번 숲 해설 수업 시간에 자신을 표현하는 나무를 하나 선정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정하지 못한 저는 60년이라는 숫자로 인해 대나무가 마음에 들지만 그 나무를 저를 표현하는 나무로 정한다고 해서 저절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다른 나무를 찾는 장정(長程)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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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비슷한 듯 다른이란 표현을 쓰고 관련 단서를 수습(收拾)하다가 찰스 다윈 이야기를 찾기에까지 이르렀다.(수습이란 어수선하게 흩어진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1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지만 파악; 把握하다는 말이 1차적으로 꼭 잡아쥐는 것을 의미하고 2차적으로는 어떤 일을 잘 이해해 확실히 아는 것을 뜻하듯 수습도 물건에서 나아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물건을 쥐어보아야 온도와 결 등을 통해 느낌을 알 수 있으니 이해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다윈은 딱정벌레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케임브리지에서 한 일 중에서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열의를 갖거나 큰 기쁨을 느낀 일은 없을 것이다.”(’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61 페이지) 알다시피 딱정벌레는 생물학자 홀데인(John Burdon Sanderson Haldane; 1892 - 1964)을 소환하게 하는 동물이다. 홀데인은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조물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를 병적으로 좋아하셨나 봅니다(that God is incredibly fond of beetles)“란 말을 했다. 동물 중 가장 많은 종()을 차지하는 것이 딱정벌레다.

 

다윈은 수많은 관찰 일기를 남긴 사람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그 방대한 기록도 그가 자연선택이론을 만들어 질서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해석 불가능한 단순 자료뭉치에 지나지 않았다(김경만 지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110, 111 페이지)는 사실이다. 갈라파고스에서 다윈은 핀치새의 부리 모양이 섬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핀치새들이 섬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자연선택이란 환경에 적응할 수단이 있으면 살아 남고 그렇지 못하면 자연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다.(장수철, 이재성 지음 아주 명쾌한 진화론 수업‘ 26 페이지) 정리하면 내가 어제 물은 사촌 종 사이에서 비슷하면서 다른 꽃이 피어나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이고 차이일 것이다.

 

어제 질문은 청계산에서 초본식물 야외 수업을 받고 하게 된 질문이다. 상당히 지치고 힘들었지만 집에 돌아와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란 책을 보았다.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같은 꽃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린 내용 12 꼭지로 구성된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시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고, 예민한 가시 같은 감각을 견지하고, 주제를 꿰뚫는 가시 같은 언어로 사물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118 페이지)

 

메타포로 빛나는 인문학자의 글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전문가란 자신의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다 해 본 사람이라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말보다 부담스런 말이기도 하고 의욕을 자극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보어는 전문가는 해당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굵직한 실수들 몇 가지를 알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여담이지만 보어는 노벨상 수상 이후 태극 문양(紋樣)을 가문의 문양으로 삼은 사람이다.(보어는 주역에 심취했던 서양인들 중 라이프니츠 만큼 흥미로운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의 자연과학자는 가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무에게는 가시가 방어기제의 하나이지만 사람에게는 방어뿐 아니라 각성의 도구이기도 하다.“(105 페이지) 어제 여섯 시간의 야외 수업을 받고 돌아와 지친 나머지 위의 글을 읽었으나 글로 연결하지 못했다. 각성(覺醒)의 내공이 부족해 나도 모르게 잠에 곯아 떨어진 나는 가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치면 눕게 되고 그러면 몸은 가시의 꼿꼿함과는 아주 다르게 연체(軟體) 동물처럼 무장해제된다는 말이 가능하다.

 

위 책의 자연과학자가 사람에게 가시는 각성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말을 했거니와 나는 가시의 꼿꼿함을 보며 경책(警策)이란 말을 떠올린다. 사실 피곤하고 지쳤을 때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은 잠을 부르는 초면(招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독서는 잠에 빠지기 전의 공허한 짧은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눕지 말고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란 책에 공부는 독하게, 시험은 즐겁게란 챕터가 있다. 연우라는 아이의 이야기로 그녀는 어떤 일을 하다가도 책상에 앉으면 곧바로 공부에 몰두하는 스타일로 MIT에 입학해 박사과정(2014년 기준)을 밟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9포인트 크기의 작은 글씨로 노트를 빼곡하게 채웠다는 점이다.(연우는 고교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230등의 순위를 받고 독하게 공부해 2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20등에 올랐고 그 해 기말고사에서 전과목 1등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대체의학서처럼 말하자면 눕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각성과 수면의 경계가 와해되지 않도록 가로막는 빗장을 푸는 일이다. 반면 앉기는 읽을 수 있고 구상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성과를 모을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다윈이 노트했듯, 연우가 노트했듯 해야 한다. 단 의미부여나 완전한 파악이 수반되어야 한다. 책을 쓰거나 이론을 만들려면 의미부여를, 시험을 보려면 최소한의 의미 파악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화룡점정은 그런 상황에 쓸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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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해설을 할 때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고 지금도 그런 편인 말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의미의 천원지방(天源地方)이란 말이다. 그러다가 '동의보감'에 사람의 머리는 둥글고 발은 네모나다는 의미의 천원지방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사람이란 말을 했지만 발이 땅을 향해 있는 것은 모든 동물의 고유성이지만 머리를 하늘로 향해 둔 것은 사람 외에는 없을 것이니 천원지방을 방향과 관련해 사람의 형태를 수식하는 말로 써도 무방하리라. 즉 사람의 머리는 둥근 하늘을 향해 있고 발은 네모난 땅을 향해 있다는 뜻이란 말이다.)

 

각설하고 이렇듯 궁궐 외의 분야에서도 천원지방이란 말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태()라는 글자도 주역의 지천태괘(地天泰卦) 외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물론 나는 주역에서 만나는 태라는 글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기는커녕 좋아하는 주역 괘 중 하나다. 어떻든 주역 외에서 태라는 글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심장과 신장의 기운이 막혔을 때 교태환(交泰丸)을 처방한다. 교태환의 교태는 교태전(交泰殿)의 교태처럼 주역이 출처다. 중요한 사실은 태()란 글자가 소통하다, 뚫어주다 등을 뜻한다는 점이다.

 

내 이름에도 태가 있다. 그러면 그런 나는 소통과 해결의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까? 하늘을 상징하는 가벼(워서 위로 향하는)운 건괘가 아래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무거(워서 아래로 향하는)운 곤괘가 위에 있어 소통한다(만난다)는 지천태괘가 상징이듯 내 이름 가운데 글자인 태 역시 상징일까? 나는 태()란 글자를 좋아한다. 위축되고 지쳤지만 아니 그렇기에 이름 값을 하도록 나를 이끄는 태란 글자가 좋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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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로널드 롤하이저는 '()과 성()의 영성(靈性)'에서 스러움을 사랑의 광기에 비유했다. 이 사실을 언급하며 신학자 김화영 교수는 영성(靈性)의 과제는 에로스의 생명력을 통합과 균형을 통해 아가페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설명했다.('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170 페이지)

 

16세기 가르멜회 수녀 아빌라의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우리 영혼이 신을 찾는 과정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연인을 찾는 과정에 비유했다.(제임스 러셀 지음 '영혼의 책 54' 63 페이지) 신에 대한 인간의 찾음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찾음도 근본에 있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김화영 교수는 관건은 에로스의 지향성이지 에로스 자체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

 

앞서 언급한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녀의 고해 신부인 디에고 수사가 (신비체험에 대해) 쓰라고 하자 "저는 글을 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만한 체력도 재주도 없기 때문입니다."란 말을 했다.

 

그런가 하면 로널드 롤하이저가 에로틱하다고 표현한 마더 데레사는 "나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만을 먹일 수 있습니다."란 말을 했다.(이현경 지음 '영혼을 깨우는 책읽기' 197 페이지) 경제성의 원칙을 생각하게 하는 사실이다. 글과 일과 사람에 대해 두루 적용되는 바이고.

 

힘이 소진되면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걸었던 특별한 여정(페요테 선인장에서 추출한 메스칼린 섭취를 통해 의식의 변형을 체험한 것)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곤 하던 나는 에로스와 아가페가 뿌리가 같듯 이성주의와 신비주의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뿐이다.(헉슬리가 행한 메스칼린 퍼포먼스는 호흡법으로 대체되어 향유되는 듯 하다.)

 

사려 깊은 좌파 지식인이었던 발터 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한 다음의 말로 내 지원군을 삼고자 한다. "달빛에 의해 잠이 깨면 나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왜냐하면 그 방은 달빛 외에는 누구와도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 이성(理性)을 잠시 맡기고 (신학자 로널드 롤하이저가 광기로 불타오르는 것이라 표현한) 삶을 얻어오고 싶다. 근원적으로 "내 것이 아닌 열망들"(기형도 시인이 '빈집'이란 시에서 쓴 표현)이라 해도. 이렇게 2020년의 반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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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6주 일정으로 계획된 건국대 통일인문학 연구단의 연천 강의를 듣고 있다. 간략하게나마 앙리 르페브르 이야기도 언급되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가 언급한 앙리 르페브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르페브르는 시간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인류 지성사를 비판하고 공간 생산을 사회변화의 주된 요소로 주장한 철학자다.

 

시간 순서에 따라 진보와 발전의 정도가 정해지는 수직적 시간 중심적 세계관은 문제다. 이 세계관에서는 남성이나 서구가 발달의 기준, 모델이라는 가정 아래 여성, 장애인, 유색 인종은 남성, 비장애인, 서구의 앞서간 시간을 따라간다고 여겨진다.(‘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수록 정희진 글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 222 페이지)

 

공간은 장소와 다르다. 공간은 사물들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이고 장소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공간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기하학이다.) 르페브르는 그릇으로서의 공간 개념을 공간에 대한 본질화의 오류라고 비판했다. 정희진씨는 공간을 그릇으로 인식하는 것(공간의 대상화)은 위계적 인식론을 동반한다고 말하며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공간론을 소개한다.

 

그로츠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공간을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공간으로 보았다. 그로츠에 의하면 사회적 공간은 운동하고 변화하면서 다른 공간을 만드는, 계속적인 다른 거주의 가능성이다. 통일인문학 연구단의 워크북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회적 공간은 서로 침투하면서 서로서로 포개진다.”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문제의식과 공명함을 알 수 있다.

 

워크북에는 이런 글도 있다. “사회적 공간 특히 도시공간은 고전적인 수학의 동질성과 등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보다 얇은 조각들이 층을 이루고 있는 밀 푀이유(mille feuille; 천 개의 나뭇잎) 페이스트리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DMZ를 평화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다른 거주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지?란 생각을 한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기원을 추구하는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가 기본적으로 시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권정화의 논의도 있다. 이 논의를 통과해 되기론으로 가볼만 하다. 어떤 배경에서인가? 노마디즘(’유목주의; 遊牧主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실이 배경이다. 나는 지난 번 동료 해설사에게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무장하고 자동차로 기동력을 발휘하며 이곳 저곳 다니는 것을 노마디즘으로 알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했다.

 

유목주의란 사막이건 시베리아건 자기가 선 자리를 초원으로 바꿀 수 있는 것, 그렇지만 그 초원을 결코 고향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 거기에서 더 나아가 고향이라는 표상성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다.(‘사회변동과 여성주체의 도전수록 고미숙 글 노마디즘과 여성 - 되기‘ 219 페이지)

 

되기란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이하고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정우 교수는 되기의 존재론에 대해 말한다. 현실성보다 더 많은 존재, 실존하는 세계보다 더 큰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윤명을 타고 난 존재인 인간은 늘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 안목으로 물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배우는 DMZ에 대한 것이리라. 2회차 워크북에 이런 내용들이 있다. “그동안 DMZ, 하면 떠올랐던 생각이나 이미지들은 무엇인가요?”, “두 번의 강의를 들으면서 DMZ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거나 생각이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연천은 파주, 김포(이상 경기도),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이상 강원도), 강화, 옹진(이상 인천) 등과 함께 DMZ와 맞닿은 10개 지자체들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초점은 변화다. 구체적으로 말해 적대적 서사의 극복이다. 르페브르는 지배적 공간과는 다른 이질성을 보이는 차이의 공간을 의미하는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곳에서는 다른 무엇인가가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궤도를 정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데이비드 하비 지음 반란의 도시‘ 20 페이지) 하비는 르페브르의 도시권을 언급한다. “도시권은 도시 일상생활이 쇠퇴하는 위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였다. 또 도시권은 이 위기를 똑똑히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였다. 여기서 르페브르가 말하는 대안적 도시생활이란 소외가 덜하고, 더 의미 있고 활기가 넘치는 것이지만 생성과 만남(두려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만남)의 여지는 물론 미지의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할 여지가 열린 감동적이고 변증법적인 도시생활이었다.”(데이비드 하비 지음 반란의 도시‘ 9 페이지)

 

서울 답사를 종로, 중구 중심으로 해온 입장에서 그간 광화문과 서울역사박물관 앞 거리 등의 중심지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도시론, 공간론 등으로 새롭게 보는 광화문과 서울역사박물관 앞 거리 답사를 가을쯤 시연(示演)하고 싶다. 르페브르, 하비, 그리고 최민아 등의 논의로부터 단서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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