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지구과학 책들을 찾아 서울의 두 서점(광화문 교보문고, 종로 알라딘)과 서울의 대표 도서관(서울도서관)을 방문해 한 권의 중고 물리학 책을 사고 다섯 권의 도서관 책을 빌려 집에 왔다.  탄핵 관련 플래카드가 곳곳에 보였으나 시간대와 장소가 맞지 않아서인지 별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메일을 통해서는 1년 2개월 전 신청한 재출간 도서 알림을 확인했다.


카미유 리키에의 ‘베르그손 고고학: 시간과 형이상학’이란 책이다. 베르그손 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지만 내가 그 책 재출간에 대한 알림 메일을 신청한 것은 아마도 <1장 정초냐 용해냐: 형이상학의 바탕 데카르트의 암석과 베르그손의 대양 1. 땅, 지성의 이미지: 고체화, 고체성, 고체, 지반 2. 물의 원소와 그 이미지들?은유를 넘어서>에 꽂혀서였을 것이다.


어렵지만 흥미 있게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니 다른 본격 지구과학 책들이 많이 있어 언제 살 수 있을지, 산다면 얼마의 시간을 써서 어느 만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지, 그렇다 해도 유의미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서두르지 말고 늦추지도 말고 나아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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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paleolithic)의 lith가 암석과 관련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lith와 유사한 lite 역시 암석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유추하지 못했다. 가령 ophiolite 같은 단어. nite라는 접미사는 어떤가? 화강암을 의미하는 granite에서 nite를 볼 수 있다. 도자기용 흙인 고령토(kaolinite), 팔라고나이트(palagonite)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접미사 ite는 광물을 의미한다. 접미사 ite는 돌을 의미하는 lith의 형용사 정도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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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바꾼 지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를 바꾼 지도’는 지질학을 전공하고 지질학자로 활동한 저널리스트 작가 사이먼 윈체스터가 쓴 윌리엄 스미스(1769 - 1839) 전기다. 1815년 세계 최초의 지질도를 만든 스미스는 지질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태어난 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가 타계한 지 20년이 지나서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다. 다윈을 언급하는 것은 다윈이 지질학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울러스턴 메달의 주인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울러스턴 메달의 첫 수상자였다. 그 상의 수상자는 노벨상 수상자와 같은 정도의 영예를 누린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는 또한 영국 경제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던 산업혁명의 시대이기도 했다. 책은 에필로그와 연관되는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두 부분(프롤로그, 에필로그)은 커튼에 가려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지질도에 의해 연결된다. 지질도는 당연히 스미스가 만든 것이다. 책의 중요 키워드는 실용성 및 상상(想像)의 힘이다. 현장 감각이 탁월했던 기술자 스미스는 홀로 계획하고 착수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영국 국토의 지하 세계를 상상력에 의거해 지도에 그린 인물이다.


        그랬던 그도 처음에는 지질학회의 논외의 인물이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었고 배수(排水)와 측량(測量), 제방(堤防) 건설 같은 지질학의 실용적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스미스는 지나친 낭비벽 때문에 떠안은 부채를 갚지 못해 사설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미스가 지질학회(1807년 결성)에 받아들여진 것은 현대 지질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자 데본기라는 명칭을 제안한 애덤 세지윅이 회장에 오르고나서였다. 세지윅은 4반세기 동안 학회가 스미스에게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은 인물이다.


        처음 지질학회는 이론에 치우쳤고 스미스가 암석의 역사를 밝히는 데 유용한 단서로 여겼던 화석도 아름다움의 관점으로 보는데 그쳤다. 스미스는 화석 수집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었다.(149 페이지) 아이러니한 점은 성직자들이 화석을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들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화석을 연구하다 보면 가장 굳건한 종교적 믿음의 대상인 창조론과 홍수론을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다.(155 페이지) 성스러운 신의 섭리로 창조된 우주에서는 멸종이란 개념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다.(65 페이지) 어떻든 스미스의 발견은 동물의 멸종 및 진화에 관한 논의로 이어졌다.


        스미스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지만 주의 깊은 관찰과 대범한 사고로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내었다. 지하 세계의 공간 기하학적 특성을 인지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녔던 그는 지면 위에서 그가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지면 아래의 세계를 유추해냈다.(127 페이지) 그는 암석들에 대한 추론을 통해 논리적이며 놀랄 만큼 아름다운 결론을 이끌어낸 인물이었다.(129 페이지)


        그는 두 층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부정합(不整合)에 대해서도 인지했다. 즉 위층에는 동물 화석만이 존재하고 아래층에는 식물 화석만이 존재하는 등의 현격한 격차를 보고 그것이 중요한 지질학적 경계인 부정합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지하 세계의 역사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암석의 경사라는 사실도 알았다.(227 페이지)


        스미스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울러스턴 메달 수상, 지질학회 가입 등의 복을 누렸다. 여기에 더해 정부로부터는 남은 생애 동안 연금을 받게 되는 가시의 성과도 얻어냈다. 아이러니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영국 지질학의 아버지인 그가 영국 본토의 대학이 아닌 아일랜드의 대학(트리니티칼리지)으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지질학은 근본적으로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설명한다.(359 페이지) 스미스는 너무나 많은 시골 사람들이 탄광 찾기에서 실패를 맛보는 것을 보며 지표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스미스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바다 생물이 하나의 특이한 형상으로 암석의 일부가 된 것일까? 어떻게 한 고체가 다른 종류의 고체에 그토록 단단히 들어가 박힐 수 있는가? 바닷가에나 있을 법한 것이 옥스퍼드셔 지방의 깊은 암석층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관찰력이 뛰어났던 스미스는 각각의 석탄층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은 물론 어느 탄광에서든 같은 패턴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느 탄광에서든, 어느 채석장에서든 변함없이 특정 석탄층 간의 상대적 위치가 언제나 동일하다는 점이 관건이었다. 가령 던지드리포트는 언제나 페링크 위에 존재하고, 러지는 언제나 템플 클라우드 위에 있는 식이었다.(106 페이지)


        스미스를 통해 우리는 화석의 아름다움보다 자연이 화석을 생성하고 특정 화석을 특정 지층에 배치하는 데 보여준 놀라운 질서와 규칙성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65 페이지) 화석은 지층의 순서를 밝힐 때 핵심적인 요소였다. 즉 화석을 이용해서 지하 지층의 계열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지층의 순서가 예측 가능하다면 지도 위에 표시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의미다.(109 페이지)


        점토 - 실트 -  사암  - 석회암, 그리고 또다시 점토 - 실트 - 사암 - 석회암의 순서로 쌓이는 층에 대해 알아보자. 그것은 바다 가장자리의 밀물과 썰물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기는 순서였다.(235 페이지) 보이지 않는 지하 세계의 복잡성을 나타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던 스미스는 엄격한 교회법과 교리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새로운 과학이 날개를 퍼덕이게 했다. 스미스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귀족들을 미워했지만 그의 이론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상류층과 대귀족의 후원 덕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미스는 정신병을 앓는 아내의 남편이었고 부모를 잃은 조카 존 필립스의 양육자이기도 했다. 스미스는 일생을 따라다닌 실망감이라는 감정에 눌려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질학회 가입 수락 연설에서 스미스가 한 말은 아주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말은 아이작 뉴턴 경이 울라이트 지층 위에서 태어났는데 만일 그가 땅 위의 사과 대신 그 아래의 땅에 관심을 가졌다면 지질학이 지금 얼마나 달라졌을까란 말이다.


        혹자는 스미스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우리의 고산자 김정호와 비교하며 김정호는 지표를 보았을 뿐이지만 스미스는 지하 세계를 상상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미스가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결과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영국의 산업적, 상업적 관심이 땅 아래로 향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서 고단하고 힘들었던 스미스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감기가 폐로 침입한 탓이었다. 책은 그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표현했다.


        지질 해설을 하는 사람으로서 스미스로부터 배운 바가 있다면 언제나 땅을 파고, 물을 빼고, 물레방아를 건설하고, 물을 끌어올리는 작업에 대해 기술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탄광 깊은 깊은 곳까지 몸소 내려간 그의 부지런함,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여행을 하고, 샘플을 모으고 ,기록하고, 지하 세계에 관한 정보를 머리 속에 집어넣고 밀어넣은 그의 노력이라 하고 싶다.


        감탄스러운 점은 스미스가 스승도 없고 참고할 책도 없는 가운데 길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스미스가 아브라함 베르너의 수성론(모든 암석은 바닷 속 물질의 침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의 관련 지질 정보도 유용하게 읽히는 책이 세계를 바꾼 지도다. 축융토(縮絨土; Fuller’s earth), 라놀린(lanolin), 윤회층(輪回層; 235 페이지) 같은 생소한 단어를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처음으로 쥐라기의 암모나이트 화석을 발견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저자는 15년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탐사하고 위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세부적인 사항을 수집할 무렵 남부 도싯 지방에서 요크셔까지, 해안에서 해안으로 스미스가 다녔던 길을 다시 걸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것은 저자가 단순히 잉글랜드 중부 지방의 지형이나 쥐라기의 암석학 또는 고지리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윌리엄 스미스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기를 희망한 결과 나타난 노정(路程)이었다.(224 페이지)


        일본의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가 다윈 진화론의 산실인 에콰도르령 갈라파고스 제도(諸島)를 탐험하고 쓴 생명해류라는 책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언급했듯 다윈과 윌리엄 스미스가 지질로 연결되었다면 후쿠오카 신이치와 다윈은 생태로 연결된 것이 흥미롭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지질과 생태의 연결점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흥미와 숙제를 동시에 주는 사이먼 윈체스터의 ‘세계를 바꾼 지도’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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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유학에 빠지다 - 퇴계와 바흐‘란 제목의 음악 프로그램을 보았다. 재작년 10월 방송된 프로그램이다. 마지막 곡이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2번 중 7번째 곡인 농담이란 의미의 바디네리인 것이 흥미로웠다.  연천(수레울아트홀)에서도 참고가 될 만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다. ’바흐, 한국사를 만나다! 바흐학개론‘(12월 18일)이란 프로그램이다. 바흐(1685 - 1750)가 활동했던 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을 조명한다고 한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등이 연주된다.


        바흐 시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숙종 재위 중 기사환국(1689년), 갑술환국(1694년) 등이 있었고 영조가 오래 집권했다. 1746년 동지(同知) 김응호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지석과 석물이 장단에서 나와 이를 정비하는 일로 아뢰다란 기록이 눈에 띤다.  영조는 이듬해(1748년) 경순왕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했고 다시 이듬해(1749년) 경순왕의 능에 수총군 5인을 두도록 명했다. 영조는 1757년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경주 김씨)의 행록(行錄)에서 경주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이고 27대손 김부(金傅)는 고려조에서 경순왕으로 봉해졌다는 말을 했다.



        바흐학 개론은 들을 여유가 없다. 바흐의 시대에 경순왕 이야기를 한 것은 그 인물이 내 관심을 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산한 계절에 마음을 추스르도록 하자. ‘클래식, 유학에 빠지다 - 퇴계와 바흐‘란 제목의 음악 프로그램을 보았다. 재작년 10월 방송된 프로그램이다. 마지막 곡이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2번 중 7번째 곡인 농담이란 의미의 바디네리인 것이 흥미로웠다. 연천(수레울아트홀)에서도 참고가 될 만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다. ’바흐, 한국사를 만나다! 바흐학개론‘(12월 18일)이란 프로그램이다. 바흐(1685 - 1750)가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을 조명한다고 한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등이 연주된다.



        바흐가 시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숙종 재위 중 기사환국(1689년), 갑술환국(1694년) 등이 있었고 영조가 오래 집권했다. 1746년 동지(同知) 김응호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지석과 석물이 장단에서 나와 이를 정비하는 일로 아뢰다란 기록이 눈에 띤다. 


        영조는 이듬해(1748년) 경순왕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했고 다시 이듬해(1749년) 경순왕의 능에 수총군 5인을 두도록 명했다. 영조는 1757년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경주 김씨)의 행록(行錄)에서 경주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이고 27대손 김부(金傅)는 고려조에서 경순왕으로 봉해졌다는 말을 했다. 바흐학 개론은 들을 여유가 없다. 바흐의 시대에 경순왕 이야기를 한 것은 그 인물이 내 관심을 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산한 계절에 마음을 추스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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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팔라고나이트(palagonite)를 친견했다. 그것도 연천에서. 지금껏 흑요석(obsidian)을 친견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았다. 아우라지와 은대리가 아닌 곳에서는 베개용암도 보았다.(연천은 대단한 지질 수업장이다.) 흑요석이 비결정형 고체인 화산 유리인 것처럼 팔라고나이트도 화산 유리다. 흑요석은 검은색, 회색, 암록색, 붉은색, 노란색, 분홍색 등으로 다양하고 팔라고나이트는 갈색, 황색이 주류다.


        베개용암의 바깥층에 유리질이나 미세한 결정질 껍질이 있는 경우가 있으니 흑요석, 팔라고나이트, 베개용암은 유리질이라는 공통 요소를 가졌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Galapagos) 제도의 화산쇄설류에서 발견한 것이 팔라고나이트다.(아나그램 사이 같은 갈라파와 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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