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접경지역 기행 5 : 철원 DMZ 접경지역 기행 5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지음 / 경인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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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은 곡창지대 철원의 젖줄 역할을 하는 강이다. 한탄(恨歎)이 아닌 한탄(漢灘)을 쓰는 강()이다. ()을 크다는 의미로 쓰느냐, 은하수로 쓰느냐 하는 논쟁이 있는 듯 하다. 철원은 행정구역상으로 4개 읍, 3개 면으로 이루어진 군()이다. 철원읍, 동송읍, 김화읍, 갈말읍, 근남면, 근동면, 서면 등이다. 동북쪽의 근북면, 원남면, 원동면은 군사분계선과 접한 미수복 지역이어서 행정 기능은 다른 읍면에서 대신한다.


철원읍에 철원군청이 없다. 그 이유는 1954년 수복 후 군청이 지포리에 설치되었고 지포리와 신철원리가 분할되면서 현재의 갈말읍 신철원리에 군청이 위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강은 북쪽 김화읍의 수리봉에서 발원하여 비무장지대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김화읍 정연리에서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2009년 이전까지 남대천이라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남대천이 많다. 일제가 일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남쪽으로 흐르는 강을 남대천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2009년 김화읍장 이의현 씨의 노력에 힘입어 제 이름을 찾았다


철원 노동당사 앞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소이산이 있다. 이 산에 올라 북쪽을 보면 평강고원이 보인다. 평강고원은 한탄강 용암대지를 만든 용암의 시발점인 오리산이 있는 곳이다. 1000여 미터의 장암산이 아닌 400여 미터의 오리산이 한탄강 용암대지를 만든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리산 외에 검불랑에서도 용암이 흘러왔다. 오리산 분화구를 통해 나온 용암은 북동쪽으로는 추가령을 넘어 함경남도 안변까지 흘러갔고 서남쪽으로는 임진강 하류인 파주 율곡리까지 흘러갔다. 오리산 용암은 점성이 낮다


백마고지는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곳에 솟아 있는 화강암 바위산이다. 직탕폭포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폭포다. 베개용암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직탄(直灘)이 원래 이름이었으나 직탕(直湯)으로 바뀌었다. 송대소(松臺沼)는 적벽(赤壁)으로 유명하다. 고석(孤石)은 화강암을 덮은 현무암이 풍화되어 모습을 드러낸 화강암 바위를 말한다. 고석의 화강암은 약 1억년전인 중생대 백악기의 화강암이다. 고석은 임꺽정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해방 이후 철원을 장악한 북은 1948년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 김명여를 시켜 한탄교를 건설하도록 했다. 하지만 다리의 북쪽만 완성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으로 건설이 중단되었고 1952년 주한 미군 79 공병대와 국군 62 공병대가 남쪽 교각과 보를 완성하였다. 그래서 다리 중간을 경계로 건축양식이 다르다. 북쪽의 아치는 남쪽보다 기둥이 많고 가늘며 기둥 상부는 반원형 곡선이다. 남쪽 아치는 북쪽보다 기둥이 적고 굵으며 기둥 상부는 둥근 네모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외 남과 북이 함께 만든 다리로 고성 합축교를 들 수 있다. 승일교는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이 만난 말이다


순담계곡은 강 양안이 모두 화강암이다. 순담계곡은 물결이 세고 굴곡이 심하고 물결 변화가 심해 래프팅 장소로 선호된다. 월하리는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월음 마을, 하리 마을을 하나로 하면서 앞자를 따 부른 이름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궁예와 왕건에 얽힌 전설을 더 좋아한다. 과거 왕건이 궁예의 부장으로 있을 때 궁예를 해로, 자신을 달로 낮춰 부르기 위해 월하리라 했다는 것이다


월하리에서 노동당사를 지나 현재 민통선을 따라 백마고지 쪽으로 더 들어가면 대마리가 나온다. 북을 마주한 최전방이며 최초의 재건촌인 대마리는 남북의 가장 강력한 화기들이 집중된 냉전의 공간이다. 당시 국가는 북의 침략에 대응하면서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춘 사람들을 선발하여 6745150명을 15조로 나누어 대마리에 입주하게 하였다. 한 손에 총을, 한 손에 농기구를 들었던 이스라엘의 키부츠 사람들처럼 그들은 북과의 대치 상황 속에서 식량 생산의 일꾼이자 분단국가를 지키는 선두주자로 투입되었다. 땅을 준다는 국가의 약속을 믿고 이곳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땅은 잡초와 나무가 무성하며 바위와 돌들이 너브러진 데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뢰가 곳곳에 박히어 있는 전쟁의 땅이었다


김화읍 생창리도 개척 마을이다. 민간인 통제선 이북 마을을 민북마을이라 한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운행하던 116.6km의 전철로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전기철도다. 1924년 완공되었다. 월정리역에서 동북 방향으로 가면 금강산 전기철도의 28개 역 중 하나인 정연역을 만날 수 있다. 정연역이 있던 정연리는 원래 평강군이었다가 한국전쟁으로 철원에 편입된 마을이다. 정연리 마을 앞에서 한탄강과 화강이 Y자를 이루며 합류한다. 그 합류점은 평강군, 김화군, 철원군이 만나는 교차지점이기도 하다


전쟁 전까지 구 철원제일교회는 지하 1, 지상 3층 규모의 교회로 교인 수가 500여명에 달하였던 교회다. 1919310일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42년 강종근 담임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해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노동당사는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 비디오를 촬영한 곳이다. 1946년 완공된 건물로 규모가 참 크다. 한국전쟁 전까지 평강, 김화, 철원의 업무를 담당한 곳이다


소이산은 작은 산이지만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설치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국전쟁 당시부터 소이산은 미군의 미사일 기지와 레이더 기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철원평야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2012년 민간인에게 완전히 개방되면서 이 산은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의 고향이 철원이라는 사실은 그의 명성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의 책 문장강화와 짧은 산문집인 무서록80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판매되는 스테디셀러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철원의 지형은 동서로 넓게 뻗은 모양이다. 특히 북동부 DMZ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형이어서 철원평야가 펼쳐진 서북부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철원의 4개의 전망대 중 가장 동쪽에 있는 승리전망대는 이 지역의 육군 15사단 승리부대의 이름을 딴 전망대다. 군사분계선 155 마일 정중앙에 있다. 2002년 개관했다. 남북이 서로를 관측하기에 가장 쉬운 지형으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승리전망대에서 보이는 북녘땅은 바로 눈앞에 있지만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한 발짝도 들어가 볼 수 없다


평화전망대 바로 앞에 궁예가 세운 태봉국 도성터가 있다. 남북을 동서로 가르는 군사분계선은 정확히 태봉국 도성터를 반으로 가르고 있다. 백마고지의 원래 이름은 395고지다. 백마고지란 이름은 계속된 포격으로 온통 하얗게 피어오른 포연이 걷힌 뒤 드러난 모습이 수목을 태운 잿더미들이 쌓여 마치 백마가 쓰러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2106일에서 15일까지 열흘간 중국군 제 38군과 한국군 제9사단이 30만발이 넘는 포탄을 상대에게 쏟아부으며 고지의 주인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혈전을 치른 곳이다. 최종 승자는 한국군 제9사단 백마부대다


소이산(所伊山)은 눈 덮인 철원평야를 굽어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학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인근 협곡에서 물길을 모아 축조한 인공저수지다. 상류에 토고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저수량과 수계의 규모가 확연히 줄었다. 물이 말라 이제는 저수지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철원 두루미는 19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개체수가 늘었다. 북한을 덮친 대기근 때문이었다. 원래 두루미가 철원보다 자주 찾던 월동지는 철원 북쪽 70km 지점인 북한 안변 평야였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대기근이 북한을 덮치면서 북한 농민들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 논의 낙곡을 필사적으로 주워갔다. 그 결과 겨울에 두루미가 먹을 낙곡이 사라졌고 함께 안변의 겨울을 지키던 240여 마리의 두루미가 사라졌다. 철원이 두루미에게 매력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비무장지대의 습지와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주변 논이 두루미의 적합한 월동지역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철원의 동쪽 끝자락 화천과의 경계를 겹겹이 막아서는 대성산, 복주산 사이로 해발 1057미터의 복계산이 있다. 이 산기슭 해발 595 미터 정상에 깎아 세운 듯 우뚝 선 40미터의 층암절벽이 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 초기 방랑 시인으로 유명한 김시습의 호 매월당과 같은 이름을 가진 매월대다. 매월당(梅月堂)의 매월은 매화, 달의 결합어다. 상촌 신흠이 쓴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제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디 모습을 간직하고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는 시가 생각난다


금오신화를 지으면서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작은 집 푸른 담요에 따뜻함이 넘치는데 달이 밝아 오니 매화 그림자가 창을 가득 채우네. 김시습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것에 충격받아 전국을 유랑하며 은둔 생활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단종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공부하던 책을 불태우고 출가했으며, 이후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풍자하는 시를 남겼다


궁예도성으로 불리던 도성 터는 2005년 공식적으로 태봉국 도성으로 정정되었다. 궁예가 마지막 격전에 나선 곳이 보개산성이다. 보개산은 강원도 철원, 경기도 연천, 포천이 만나는 경계 지점에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부양)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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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령 구조곡의 지형 - 2025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민부.이광률 지음 / 가디언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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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북에서 2025년 1월 나온 ‘추가령 구조곡의 지형’은 사실상 추가령 구조곡을 총괄하는 유일한 저서다. 추가령은 楸哥嶺이라 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북쪽의 육진(六鎭)에서부터 곧바로 삼방곡(三防谷)·추가령(楸柯嶺)으로 달려 평강(平康)·이천(伊川) 사이로 나와서 고랑포에 도달하는 것도 또 3백여리에 불과합니다.” 경기 관찰사 이형규(李亨逵)가 상소한 내용 중 한 구절이다. 추가령 구조곡은 좁게는 북동(북북동)-남서(남남서) 주향(走向)의 원산-서울 사이의 구조선들을 포함한다. 


범위를 넓게 해석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북의 함북 길주, 명천에서 남의 충남 보령까지 단층대로 보는 것이다. 추가령은 철령과 함께 역사시대를 통해 자주 국경으로 사용된 듯 하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도 남북간의 교류에는 주로 철령이 이용되었으며 추가령 혹은 분수령은 보조적으로 또는 긴급할 때 사용된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빠른 교통로를 위해 추가령에 신작로와 경원선이 건설되며 주요 통로가 됨에 따라 철령은 쇠퇴했다. 원산- 연천-서울을 잇는 추가령 구조곡은 백악기 또는 신생대 제3기 초에 생성된 우수향(右手向) 단층이 그 이후에 재활된 단층선곡이다. 


연천군과 철원군 사이의 고대산, 지장봉, 보장산 일대의 산지에는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지장봉 산성 화산암류로 불리는 화산암이 분포한다. 이 화산암류의 대부분은 유문암질 응회암, 용결 응회암으로 담홍색, 담갈색, 회청색의 다양한 암색을 띠며 암편의 함량 변화가 심하다. 구 한탄강의 유로와 현 한탄강의 유로는 대체로 일치하며 추가령 현무암은 구 한탄강을 따라 유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추가령 현무암질 용암류가 만든 용암대지 지형은 형성 이후 하천의 침식 작용에 의해 원 지형이 파괴되는 개석(開析) 작용을 받았다. 


하천에 의한 개석은 주로 현무암층과 기반암 사이의 경계부에서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용암대지에는 수십 미터의 단애(斷崖)가 형성되었다. 개석이 용암대지 내부에서 진행된 곳에서는 대규모 협곡이 발달하여 한탄강의 특징적인 지형이 되었다. 추가령 구조곡 일대에는 지구조적 연약대를 따라 열하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철원-평강 용암대지로 불리는 대규모 화산 지형을 형성하였다. 이는 제주도와 함께 해양성 지각으로 분류되는 울릉도, 독도와는 다른 경향을 보이며 하와이와도 다른 경향을 보인다.


즉 추가령 현무암은 해양 도서(島嶼)나 호상열도와는 달리 대륙 내에서 구조선과 관련된 열점에서 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리산과 검불랑 북동 4km 지점의 성산(680m)이 중심이다.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은 주로 구 한탄강 유로를 따라 남쪽으로 흘렀으며 추가령을 넘어 북쪽으로는 흐르지 않았다.(53 페이지) 한탄강 상류인 철원군 철원읍 일대에서 최고 11매, 철원군 동송읍 일대에 최고 6매,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에 4매,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에 1매의 용암이 온 것으로 추정된다.(55 페이지) 


화산 활동에 의한 용암대지 형성 시기는 10만년전, 4만년전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신생대 제4기에 형성된 대규모 화산체 또는 화산지역으로 백두산 화산체, 한라산 화산체, 울릉도-독도 화산체, 철원-평강 용암대지, 신계-곡산 용암대지 등 모두 다섯 곳을 꼽을 수 있다. 철원-평강 용암대지와 신계-곡산 용암대지는 인접했다. 추가령 구조곡의 용암 대지는 평강 지역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안변, 남쪽으로는 파주까지 분포한다. 그러나 하천이 매우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는 세포와 고산 사이의 남대천 구간과 연천군 부곡리와 포천시 운산리 경계부의 한탄강 하곡 구간에서는 좁은 용암대지 지형면이 하천의 침식에 의해 대부분 사라져서 용암대지가 상류 쪽과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추가령 구조곡의 용암대지는 화산 분출의 중심부인 철원-평강 지역, 하곡을 따라 흐른 용암류에 의해 형성된 북쪽의 고산-안변 지역, 남쪽의 연천-파주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추가령 구조곡 일대에 발달한 용암대지의 총 면적은 약 825.84km²다. 중심부인 철원-평강 구역의 면적은 약 546km², 고산-안변 지역 구역의 면적은 135km², 회양-창도 구역은 약 91km², 연천-파주 지역의 면적은 약 54km²다. 연천-파주 구역의 용암대지는 면적에 비해 둘레가 매우 크다. 이는 한탄강과 임진강의 좁은 하곡을 따라 용암대지 지형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59 페이지) 


철원-평강 용암대지의 평균 고도는 329m, 회양-창도 구역은 454m, 연천-파주 구역은 46m에 지나지 않는다. 회양-창도는 淮陽-昌道로 쓴다. 정리하면 연천-파주 지역은 면적도 가장 좁고 고도는 가장 낮다. 철원-평강 용암대지를 형성한 후 남쪽으로 진행한 용암류는 좁은 한탄강 하곡을 완전히 메우며 흘러내려 한탄강의 곡저에는 30-40m 높이의 두꺼운 현무암층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한탄강에 합류하는 지류 하천의 하구에는 수십 m에 달하는 용암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용암댐에 의해 지류 하천의 중하류부 하곡에는 용암댐에 막혀 본류로 흘러들지 못한 유수가 정체되면서 거대한 호소(湖沼)가 형성되었다. 


한탄강의 지류 하천 중 차탄천과 영평천에서 용암댐 형성 후 고호소(古湖沼)가 형성되었다. 철원-평강 용암대지를 이루는 우리나라의 철원, 포천, 연천 지역에서 나타나는 주요 화산 지형은 용암대지, 주상절리, 베개용암, 스텝토, 다양한 부정합면, 클링커, 현무암 풍화층, 용암댐에 의한 고호소 퇴적물 등이다. 베개용암은 용암의 성분, 온도, 점성, 냉각 속도, 수온, 수압, 수심, 경사도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1) 한탄강을 따라 흘러온 용암이 지류인 영평천이 한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막음에 따라 호소(湖沼)가 만들어진다. 어느 정도의 깊이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뒤이어 온 용암류가 (먼저 흘러온 용암류에 의해 만들어진) 호소(湖沼) 속으로 흘러들어 급격히 냉각한다.


평강의 오리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용암은 고도가 낮은 구 한탄강의 하곡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고결되며 하곡을 모두 메우고 주변으로도 흘러넘쳐 고도가 낮은 평지와 구릉을 메워 현무암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은 봉우리가 용암에 의해 매몰되지 않아 그대로 남는다. 용암대지 내에 섬처럼 고립된 상태로 돌출되어 있는 원래의 기반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이나 봉우리를 스텝토라 한다. 클링커는 현무암질 용암이 기반암이나 퇴적층과의 접촉부에서 식어 형성된 불균질한 암석 조각이나 덩어리를 말한다. 철원-평강 용암대지의 하곡은 갑작스러운 용암 피복에 의해 주인 없는 유역분지가 되면서 현재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으로 크게 양분되었고, 부분적으로 남대천이 잠식했다.


고석정에서 약 2km 떨어진 순담계곡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한탄강 협곡과는 달리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순담계곡에서 볼 수 있는 화강암은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으로 동송읍 장흥리, 양지리 일대와 김화읍 생창리 일대에 분포한다. 일반적으로 화강암을 이루는 장석은 흰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순담계곡의 화강암은 분홍색을 띠는 장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용암 분출 후 한탄강은 주로 현무암과 화강암의 접촉부를 따라 흘렀으나 순담계곡은 드물게도 한탄강이 순수한 화강암 지대를 관통하면서 형성시킨 계곡이다. 


이로 인해 순담계곡의 하식애는 현무암 주상절리가 아니라 덩어리 형태의 화강암에서 특징적으로 발달하는 판상절리가 주를 이룬다. 한탄강 현무암 협곡에서는 기반암인 화강암이 현무암에 의해 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동송읍 장흥리에 자리한 고석정 주변이다. 고석(孤石)이란 한탄강 골짜기에 홀로 솟아 있는 화강암을 가리킨다. 이는 현무암 용암대지와 화강암의 접촉부가 유수에 의해 침식을 받아 드러난 것이다. 이 화강암은 철원이 용암으로 덮이기 이전의 기반암으로 뚜렷한 홍색을 띠어 주변의 흑운모 화강암과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서로 다른 종류의 암석이 만나는 곳은 다른 곳에 비해 쉽게 침식을 받아 하천이 흐르게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깊은 계곡을 형성한다. 그 결과 기반암인 화강암 곡벽은 완경사를 이루고 현무암 곡벽은 주상절리에 의해 수직절벽을 형성하고 있어 하천 양안이 비대칭을 이룬다. 고석정 부근에서 한탄강 본류로 흘러드는 대교천은 하천 양안뿐 아니라 하상까지도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현무암과 화강암의 경계에 형성된 고속정의 하천 양안이 비대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현무암으로만 이루어진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대칭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재인폭포 폭호(瀑湖) 수면 부근에 위치한 단애면 최하단부 암석의 표면에서는 유수에 의한 굴식(掘蝕; plucking; 빠른 물살이 하천 바닥이나 기반암에 있는 암석의 일부를 뜯어내는 작용), 마식(磨蝕; abrasion), 건습풍화, 동결파쇄 작용 등이 일어난다. 


용암대지 형성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침식기준면과의 고도 차가 크게 발생하여 불안정해진 한탄강은 침식기준면에 가까운 안정적인 하천의 고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침식기준면과 접한 하류 쪽에서부터 하방침식과 두부침식을 진행하였다. 특히 과거 하곡 충적층 부근이나 기반암과 용암대지 사이의 지질 경계부는 풍화침식 작용이 집중되면서 새로운 하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침식기준면이란 하천이 침식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높이의 이상적인 면으로 일반적으로 바다의 해수면이 된다. 이런 하방 및 두부침식 과정을 통해 현재의 한탄강 협곡이 형성되었다. 


한편 주변 산지에서 발원하여 용암대지를 흘러 한탄강에 유입되는 지류 하천은 적는 유량으로 인해 침식 능력이 작아 한탄강 본류와 같은 속도로 하방 및 두부침식을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용암대지면 부근의 고도에서 하도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류인 한탄강과 지류 하천의 고도 차이로 인해 지류가 유입되는 한탄강 협곡의 단애면에는 폭포가 형성된다.


대부분의 폭포는 두부침식에 의해 위치가 상류 쪽으로 이동한다. 폭포가 형성되어 단애면을 따라 유수가 낙하하면서 기저 굴식과 굴착에 의해 폭호가 단애의 내부로 점점 확장되면 단애면이 점차 불안정해져서 단애 상부가 붕괴하면서 단애의 위치가 상류쪽으로 이동하는 두부 침식(headward erosion)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폭포의 위치가 하천의 상류 쪽으로 점차 이동해가는 폭포의 후퇴(recession)가 일어난다. 용암대지의 하부에는 기저굴식이 용이한 연암(軟巖)의 현무암층이 놓여있어 폭포의 형성조건인 폭호와 노치(notch; V자나 U자형으로 움푹 팬 자리)가 형성되기 유리하고 용암대지 중부의 현무암층은 주상절리가 매우 조밀하게 발달되어 있어 풍화침식을 받아 암석이 붕괴할 경우 수직의 단애면이 형성되고 유지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진다.


재인폭포는 후빙기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유량이 늘면서 후퇴 속도도 조금 더 빨라졌을 것이다. 아직은 현무암 용암대지 내에 자리하고 있지만 후퇴가 계속되어 중생대 백악기 화산암류 지역까지 도달하면 주상절리에 의한 단애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폭포는 사라질 것이다.


추가령 구조곡은 서울 노원구- 의정부 - 양주 - 동두천 - 전곡 - 연천 -철원 - 평강 - 세포 -고산 - 안 변- 원산을 잇는 길이 약 160km의 좁고 긴 직선 골짜기로 지표에 뚜렷한 선형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신생대 제4기에 화산분출이 발생한 구조곡 중앙에 철원, 평강, 세포 남부 일대는 현무암 용암의 열하 분출에 의해 직선상의 추가령 구조곡이 완전히 매몰되어 선형성을 확인할 수 없는 평탄한 용암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남한의 연천, 동두천, 양주, 의정부 일대와 북한의 세포 북부, 고산 안변 지역은 용암이 및 구조곡을 따라 흐르다가 곡 내부에만 소규모의 용암대지나 현무암층을 형성하였다. 용암류의 이동 경로와 거리가 멀어 용암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북북동 남남서 또는 남북 주향을 이룬 직선상의 구조곡이 현재까지 뚜렷하게 발달되어 있다. 단층선에 발달한 하천을 적종(適從)하천이라 한다. 차탄천, 신천, 중랑천이 대표적이다. 차탄천과 중랑천은 남류하지만 신천은 북류한다. 하천의 남류, 북류는 발원지와 하구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하천의 흐름은 지구의 자전과 관련이 없다. 지형적 의미에서 추가령 구조곡의 폭은 약 3~10km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가장 폭이 좁게 나타나는 지역은 연천 일대이며, 가장 폭이 넓은 지역은 덕정 일대다. 이는 기반암의 특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덕정 지역은 중생대 화강암 지질로 풍화작용과 하천에 의한 침식작용이 활발하여 수지상의 하계와 상대적으로 넓은 침식 분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분수계가 넓게 나타나며 연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암인 중생대 화산암이 분포하며 이 지역을 흐르는 차탄천 하류부에 해당하는 전곡 지역은 현무암 용암 대지로 이루어져 있어 하천이 협곡을 만들며 흐르기 때문에 하천의 형성과정에서 활발한 측방침식과 퇴적 작용보다는 주로 하각을 통한 하천의 발달이 우수하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좁고 긴 분수계를 형성하고 있다. 


연천 전곡읍 일대와 철원 율리리 지역에는 용암대지가 분포한다. 이러한 용암들은 평강 지역으로부터 한탄강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하곡을 메워 형성된 것으로 현재의 하천은 용암 대지 아래로 깊은 협곡을 형성하고 있지만 용암 대지 형성 직후의 옛 하천의 유로는 용암 대지의 표면을 따라 흘렀거나 넘치면서 한탄강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하천은 침식기준면에 도달할 때까지 고도를 낮추는 하방 침식작용을 일으키는데 이렇게 하천이 지표를 좁고 깊게 침식하는 하각 작용을 통해 하안 단구가 형성된다. 따라서 하안단구의 형성시기와 하천과의 고도 차이를 알면 하천이 고도를 낮추는 침식 속도인 하각률을 계산할 수 있다. 


철원, 전곡 용암 대지의 형성에 따라 한탄강과 지류 하천의 고도가 급격하게 상승하였고 이들 하천은 원래 또는 이상적인 하천 고도를 회복하기 위해 매우 활발한 하각 작용을 진행하였다. 용암 대지 형성 직후에 용암 대지 표면을 흘렀던 하천은 현재까지 대체로 0.5-0.9미터/ ka의 매우 높은 하각률을 나타내고 있다. 연천 한탄강 유역에서는 신생대 제4기뿐 아니라 중생대 백악기에도 격렬한 화산 분출이 있었다. 


그 결과 일부 화산지형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좌상바위다. 현무암에는 분급(分級)되지 않은 수cm에서 수십 cm 크기의 화산력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이들 암석이 화구 또는 화도 부근에 퇴적된 것임을 말해준다. 좌상바위 부근의 한탄강 하상은 중생대 응회암질 퇴적암이다. 주로 궁신교 아래의 하천 바닥에서 관찰되는 녹회색 또는 담갈색을 띤다. 이들 퇴적암은 화산 폭발 시 분출한 화산재가 물이나 바람에 의해 이동해 와 쌓인 데다가 둥근 자갈들이 섞인 것이다. 


연천 전곡읍 은대리에는 1999년 9월 18일 천연기념물로 제412호로 지정된 연천 은대리 물거미 서식지가 있다. 물거미는 공기 방울을 이용하여 물속에서 대부분 생활하는 역진화 생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1994년 전곡 용암대지 점토층에 궤도 차량의 바퀴 자국으로 만들어진 식생이 있는 얕은 물웅덩이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물거미 서식지의 기본적인 지형 조건으로는 불투수(不透水)층의 토양과 표면 늪지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의 보존과 유지에 미치는 지형과 토양 수문 등 생물환경의 안정성도 중요하다. 전 세계 물거미의 서식지 분포는 과거 빙하 지형 또는 주빙하(周氷河) 지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빙하 지형의 작용으로 호소(湖沼)가 형성되어 육상 생태계가 거대한 수중 생태계로 바뀐 지역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한반도는 빙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으로 물거미가 수중 생태계로 역진화한 원인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연천 전곡 용암대지의 용암은 평강에서 남서쪽 3km에 위치한 오리산을 중심으로 열극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린 것이다. 은대리 일대는 선캄브리아대 연천층군의 변성퇴적암류가 기반암을 이루고 그 위에 두께 30~40m의 두꺼운 현무암층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전곡리 일대에서 한탄강에 유입하는 지류 하천인 차탄천은 용암댐에 막혀 연천 일대에는 과거에 넓은 호소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곡리와 은대리 지역의 용암대지에는 홍수시 용암댐을 월류하여 운반된 제4기 운적물들이 분포한다. 이 운적층은 대부분 점토와 실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입자가 미세하여 토양 공극이 작아 수분의 투과를 억제하여 불투수층을 형성하여 많은 수분을 지표면에 고이게 하여 습지 형성 요인을 제공하는 중요한 지형적 특성을 갖는다. 여기에 유기물층이 형성되면 보수력의 증가로 습지의 물 수지는 더 높아지면서 영구적인 습지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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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질학에 재미를 붙이게 된 이래 고고학이나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었다. 지질학과 함께 고고학, 인류학이어야만 하겠지만 당면한 과제 외에는 주의를 계속 둘 여유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전환은 이상한 일이 결코 아니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이는 몇 년전 공주대학교 지리학과 학생들에게 50분 짜리 선사박물관 해설을 해 호평을 받기도 했던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의외일 수도 있는 전환이다. 단 내가 지질학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은 기본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정도이고, 고고학이나 인류학에 대한 관심도 기본적이었다.

     

    최근 두 가지 이슈를 계기로 고고학이나 인류학에 대해 다시 흥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는 평론가 김나현이 고고학자로 살았던 시인 허수경의 고고학 시에 대해 한 분석이다.

     

    허수경 시인이 고고학을 전공해 관련 시를 쓴 것은 들어 알았지만 평론가가 고고학의 발굴을 수직의 시간으로 분석한 것은 생각하지 못한 구체적이고 획기적이기까지 한 독법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분석은 고고학의 발굴(진행방향)과 일상의 삶(진행방향)을 대비시킨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지질학의 탐사와 비교해보고 싶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 병사들이 흑요석 화살촉을 썼다는 글이다. 이런 류의 글은 한 필자의 글 외에는 없지만 흑요석을 백두산과 연결지을 수 있고 고대 문명권에서 흑요석을 화살촉으로 썼다고 말하는 외국 사이트의 글을 확인했으니 중요 시사점을 얻은 것 같다.

     

    이는 호로고루 해설에 쓸 것이지만 그 관심사가 최종적으로는 어디로 갈지 나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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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의 금강(金剛)이 금강경이 아닌 화엄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제 춘천박물관에서 알게 된 내용이다. 이는 오늘 지난 신문을 통해 확인한 바이기도 하다. 금강산은 불교식 이름일 수밖에 없다. 화엄경이 금강경보다 먼저 작성되었다. 금강산은 2018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산이다


    ()보다 화()가 이야기거리가 많다. 오오누키 에미코의 '사쿠라가 지다 벚꽃도 지다'에서 알게 된 내용 중 하나가 산화(散華/ 散花)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꽃을 뿌려 부처를 공양하는 것도 뜻한다는 사실이다. 꽃은 피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도 산화라 한다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에 의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산화(散華; 목숨을 바치는 것)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젊은 학생들의 희생을 부추겼다. 더 나아간 꽃 이야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김승철의 '벚꽃과 그리스도'를 참고한다. 문학으로 읽는 일본 기독교의 계보를 부제로 하는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엔도 슈샤큐와 물의 성사(聖事)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엔도 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으로 평가되는 작품이 바다와 독약이다. 저자는 이 작품에도 액체성의 제목이 붙어 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규슈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윤동주 시인이 겪은 생체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에 의하면 바다는 독을 끝없이 희석해 무화(無化)시킨다. 바다는 생체 해부를 자행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신 없는 일본인의 정신풍토의 메타포다


    1114일 서촌 해설이 예정되어 있다. 윤동주 타계 80주년을 중심으로 해설할 생각이다. 서촌에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 시인이 자주 이용했던 보안여관 등이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로 시작하는 자화상이 눈에 들어온다


    윤동주 시인의 물은 성찰, 고뇌, 극복 의지 등의 의미를 지닌다. 윤동주 시인의 일본식 이름 히라누마 도쥬(平沼 東柱)를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도 물과 관련된 단어인 소(; 연못, )란 글자가 있다. 그런데 평()은 윤동주의 본관인 파평(坡平)에서 가져온 것이고, ()는 파평 윤씨의 시조와 연관된 잉어 전설이 일어난 장소인 연못을 지칭한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했다. 창씨개명 5일 전 윤동주는 참회록(懺悔錄)’이란 시를 썼다. 이 시에 구리가 나온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의식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를 비추는 공동체의 거울이다.(이미옥 지음 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주’ 90 페이지


    김현자 교수는 자화상의 이미지를 아청(鴉靑)빛이라 표현했다. 큰 부리 까마귀 아와 푸를 청을 쓰는 아청은 검은 빛을 띤 푸른 빛을 의미한다. 아청은 구리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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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쌀쌀해진 날씨였으나 움츠러들지 않고 미용실에 다녀왔다. 미용사가 의식 있는 불교 신자이기에 이진경 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를 소개해드렸다.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고 같은 저자의 신간이 나온 것을 알았다. 나온 지 한 달이 채 안된 '불교를 미학하다란 책이다.

     

    요즘은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에 한 달 가까이 된 책 출간 소식을 알지 못하다가 아침에 '불교를 철학하다'를 소개한 것을 계기로 지은이 이름을 검색해 알았다. 읽을 책들이 많아지고 있다. '불교를 미학하다'640 페이지나 되는 벽돌책 수준의 책이다. 배울 점이 많은 책으로 손색 없어 보인다. 혹시 불교를 과학하다같은 책도 나올까?

     

    201811불교의 의미를 어떤 전공자보다 래디컬하고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 자유롭게 풀어쓴 책이 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이다.”란 글로 시작하는 리뷰를 쓴 기억이 새롭다. 저자가 기울인 지적 노고의 결과물을 2만원~3만원 정도의 금액으로 수고를 기울이지도 않고 얻는 점을 감안하면 독서란 참으로 효율적인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많이 생각하고 배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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