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논어 한마디 - 거친 물결에 흔들리는 삶을 잡아줄 공자의 명쾌한 해답
판덩 지음, 이서연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공자가 자신이 겪는 고통과 근심을 겪었다는 데에서 위안을 받았다. 공자는 도(道)와 먹을 것 사이에서, 도에 대한 걱정과 가난에 대한 걱정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침이 된 인물이다. 저자는 ‘논어’를 읽고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를 공자의 글에 비추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술처럼 달콤한 사이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구절이다. 청나라 대학사 장정옥은 일 중독에 빠진 황제 옹정제를 보필했다. 그들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가 지켜졌다. 장정옥은 황제가 자신을 찾지 않으면 굳이 찾아가지 않았고 옹정제는 장정옥을 공적인 일에만 불렀고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하지 않았다.

 

군자의 사귐은 물처럼 담백하고 소인의 사귐은 술처럼 달콤하다고 한다. 물처럼 담백한 사귐이 필요하다. 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자요산 지자요수를 보자.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로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게 본다. 어진 사람의 즐거움은 산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의 즐거움은 물과 같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진 사람은 왜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왜 물을 좋아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저자는 인자요, 산.. 지자요, 수라고 읽는다. 어짊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면의 덕을 쌓기에 산처럼 중후하고 포용적이며 관대하고, 지혜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배움을 좋아하며 즐기기 때문에 흐르는 물처럼 활달하고 역동적이다. 어진 사람은 안정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오랜 시간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다양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어짊과 지혜로움은 함께 추구되어야 할 덕목이다. 산과 물이 어우러져야 아름답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상반되는 두 어구 또는 사상을 내세워 주제를 강조하는 대조법을 많이 사용했다. 어짊과 지혜는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은 어떤가? 저자는 군자와 소인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자와 소인은 완전히 다른 두 유형의 사람이 아니며 단순히 누구는 군자이고 누구는 소인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군자적 면모와 소인적 면모가 두루 존재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인적 면모가 더 많을 것이다. 공자는 방탕하게 행동하지도 않고 자신을 너무 구속하지도 않는 평온한 중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중용은 논란이 있는 개념이다. 상론할 수 없고 다만 평온한 경지는 뿌리를 뽑는, 끝까지 하는, 용감한 태도가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군자는 염옹은 남면(南面)을 할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군주가 될 사람이라는 말이다. 반면 자공은 호련(瑚璉)이라 평했다. 호련이란 기장과 피를 담아 종묘에 바치는 제기(祭器)다.

 

이는 자공이 고귀한 인물이지만 아주 비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공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또는 지혜롭게 말했다. 저자가 든 ‘나를 살리는 논어 한 마디’ 가운데 행불유경(行不由徑)을 빼놓을 수 없다.

 

지름길이 주는 욕망의 유혹에 발을 딛지 말라는 말이다. 군자대로행과 상응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과도 통한다. 저자의 책은 인자요산 지자요수가 아니라 인자요, 산, 지자요, 수라는 해석에서 가장 빛난다.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이 만든 세계
션 B. 캐럴 지음, 장호연 옮김 / 코쿤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우연(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이다. 이를 뒷받침할 말이 “그저 우연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신을 우주의 권좌에서 끌어내리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저자 션 캐럴은 ‘우연과 필연’의 저자 자크 모노가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자크 모노는 인간은 셀 수 없이 많은 우발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말을 한 분자생물학자다.

 

저자는 6600만년전 소행성 충돌로 지구에 살았던 종의 3/4이 멸종한 사건을 예로 들며 그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기 어려웠을 것이라 말한다. 소행성 충돌로 공룡이 멸종했는데 그 사건 이후 포유류 몸집의 평균 및 최대치가 가파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승자와 패자는 우연이 판가름했다. 이 사건을 K - Pg(Cretaceous - Paleogene; 백악기 - 고제삼기; 古第三期) 멸종이라 부른다.

 

우주에서 날아온 거대한 돌이 마지막 1초 동안 5만 피트의 대기를 가르고 지구(멕시코 칙슬루브 총돌구)에 떨어졌다. 이 충돌로 진도 11이 넘는 지진(역사상 기록된 최악의 지진보다 100배 이상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고 유카탄 대륙붕이 내려앉았으며 높이 200미터 이상의 초대형 쓰나미가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휩쓸었다. 화재로 인해 다량의 그을음이 생겨났고 여기에 충돌로 발생한 먼지, 엄청난 양의 유황 수증기까지 더해지면서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빛이 여러 해 동안 대거 감소했다.

 

그 결과 육지와 바다에서 광합성과 식량 생산이 끊어졌다. 육지의 기온은 금세 영하 7도까지 곤두박질쳤고 최소 수십년 동안 그런 수준이 이어졌다. 탄산염이 풍부한 충돌지에서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방출되는 바람에 바다는 급격하게 산성화되었다. 생명은 뜨겁게 구워졌다가 차갑게 얼고 굶주림에 허덕였다.

 

세(世)와 세(世)의 경계는 일반적으로 암석을 살펴서 바다와 육지에서 생명의 조건이 바뀐 것을 반영하는 변화가 있는지를 보고 정한다.(56 페이지) 중요한 점은 지구 자전 속도(시속 1000마일)를 고려하면 소행성이 30분만 일찍 왔다면 대서양에 떨어졌고 30분 늦게 왔다면 태평양에 떨어져 공룡은 살아 남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과(호미니드)는 80만년전에서 100만년전 사이에 불을 통제하는 법을 익혀서 그것으로 사냥하고 요리하고 몸을 따뜻하게 했다.(78 페이지) 누구보다 먼저 신의 섭리를 우연으로 대체한 사람이 다윈이다. 비판자들은 우발적 변이가 담고 있는 의미를 물고 늘어졌다. 조물주나 지성이 행하는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였다.(109 페이지)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여러 이유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다. 동물과 식물의 유전체에는 실질적 기능이 전혀 없는 DNA 서열이 많다.(인간의 경우 95퍼센트) 이런 부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아미노산을 생산하도록 하는 유전 암호가 여러 개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중복성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단백질 서열이 바뀌는 것이 아닌 이유다. 단백질 서열을 바꾸는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해도 기능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창조적 돌연변이는 소수이며 희귀하다. 우연은 창조하고 자연선택은 발명품을 확산시킨다. 포유류와 조류 같은 동물들 사이에서 완전하게 종분화가 일어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200만년으로 놀랄 만큼 일정하다. 생명의 나무에서 가지가 갈라지는 것은 개체군에서 무작위적 돌연변이가 꾸준하게 축적되어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다.(160 페이지) 모든 유기체, 모든 세포에서 DNA(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가 복제될 때마다 변화(치환, 삽입, ‘결실; 缺失‘)가 일어난다.

 

돌연변이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의 현상이다. 저자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점은 심오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맹목적 우연이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새로움, 다양성, 아름다움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212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신의 뜻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여기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 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뇌르 이야기와 관련해 기억하는 것은 루소와 보들레르의 차이다. 루소는 18세기 사람이고 보들레르는 19세기 사람이다. 보들레르는 루소보다 109년 후에 태어났다. 루소와 달리 보들레르에게 자연은 선하고 순수한 것이 아닌 악으로 더럽혀진 것이자 타락한 것이었다. 루소는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부분적으로만 맞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자연을 단순한 향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파악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는 어려움이 따른다. '사이언스 블라인드(Science Blind)'의 부제가 '우리는 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가?'인 것을 보라. 가령 우리 중에 누가 과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해가 뜨고 지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저자 앤드루 스톨먼에 의하면 우리의 직관적 이론들은 과학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스톨먼이 말했듯 자기 성찰만으로는 불멸의 착각(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착각)을 깰 수 없다. 아이들은 인간의 필멸(必滅)의 운명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미국의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Edna Saint Vincent Millay: 1892 - 1950)는 '어린 시절은 누구도 죽지 않는 왕국(Childhood is the kingdom where nobody dies)'이란 말로 아이들의 죽음관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정신의학 박사 에드윈 풀러 토리는 현생 사피언스가 갖춘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전적 기억이라는 말을 한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활용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자신을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이는 이점이자 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게 됨에 따라 불안을 부산물로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블라인드'의 논리에 공감, 동의하는 나는 상식은 실제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과학은 이론적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 바슐라르를 더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의 유학자, 조식
허권수 지음 / 뜻있는도서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 - 1572)을 안 것은 2009년 나온 한형조의 ‘조선 유학의 거장들’을 통해서였다. 칼을 찬 유학자라는 점이 이례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용미 시인의 ‘탐매행’이란 시에서 남명매(南冥梅)란 말을 들었다. 남명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로 유명한 분이다. 대비 문정왕후를 과부, 그의 아들인 임금 명종(明宗)을 일개 고아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글이다.

 

때는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일으키는 분탕(焚蕩) 패악질이 극에 달한 때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황, 2년 연상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직언을 하지 못한 가운데 단성현감에 제수(除授)된 조식은 죽음을 무릅쓴 사직 상소를 올렸다.(단성은 조식이 태어난 경남 합천에서 가까운 곳이다. 조정에서 조식이 벼슬을 사양하지 못하도록 삼가현과 가까운 단성현 현감 자리를 내린 것이다.) 사직이 죽음을 무릅쓸 일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의 폐단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으로 인해서였다는 말이다.

 

조식은 임금dl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집 짓는 목수가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은 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전하의 큰 은혜를 감히 독차지 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조식은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느냐, 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냐, 문장을 잘 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조식은 문장을 잘 쓴다고 꼭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고 도를 지닌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다고 말했다.

 

전하는 물론 정승들 또한 신의 능력이나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하는바 그 사람됨을 모르면서 등용한다면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될 것으로 그 죄가 어찌 보잘 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나는 을묘사직소에서 가장 준엄한 부분은 과부, 고아 운운한 부분이 아니라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덜려 있습니다란 말이라 생각한다.

 

조식은 명종에게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판단하는 일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안(代案)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은 신하들이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여 조식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끝내 바른 말을 한 조식을 공손하다고 여기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경연의 시강관으로 있던 정종영의 말과 사간원정언 이헌국의 말이다. 정종영은 조식은 세상에 숨어 사는 인물인지라 성격이 소탈하여 예를 차릴 줄 몰라 그런 것이니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태도를 책망하기보다 물러나려는 욕심 없는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조식 같은 사람은 세련되지 못했고 옛 사람들의 책만 읽었으므로 말을 바르고 곧으나 문채(文彩)가 없으나 어려서부터 책을 읽은 사람인데 어찌 군신간의 의리를 모르기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구양수가 황태후를 아낙네라고 했으나 벌을 받지 않은 송나라의 사례를 아울러 언급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는바 조식은 질(質)이 문(文)을 압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인 한편 성성자(惺惺子)라는 쇠 방울을 차고 다닌 분이기도 하다. 조식은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1519년 19세의 조식은 기묘사화를 목도한다. 조광조를 비롯 현사(賢士)들의 부고를 들은 조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벼슬살이가 험난할 것이라 느꼈다.

 

조식이 평생 벼슬하지 않는 데에는 가장 절친한 벗인 성운(成運)의 형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영향이 컸다. 조식은 원나라 유학자 허영의 글을 읽고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의 학문을 모본으로 삼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을 때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란 글이다.

 

조식은 강직(剛直)했던 유학자다. 그는 아버지의 묘갈명을 쓰며 나의 아버지에게 일컬을 만한 덕이 없는데도 장황하게 미화한다면 그 글은 아첨하는 글이니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했다. 조식은 낮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길지 않은 시간 깊이 자는 것으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한 구절 구절 자세히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며 읽지 않고 마음으로 글 전체의 큰 뜻을 터득하고자 읽었다.

 

조식은 학문을 하는 목적은 낱낱의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견을 높이면 태산에 올라섰을 때 사방의 높고 낮은 산이 다 눈에 들어와 지형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자가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조식은 바다와 관련이 큰 사람이었다. 산해(山海) 선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산해정(山海亭)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서 취한 호로 남쪽의 아득한 바다를, 나아가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을 뜻한다. 그가 거처하던 방은 계명실(繼明室)이란 이름을 가졌다. 옛 현인들의 밝은 덕을 계승하여 사방에 펼친다는 의미를 가진 방이다. 그의 시기는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 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 - 45세), 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산 시기(48 - 61세), 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 - 72세)로 나눌 수 있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뇌룡사(雷龍舍)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의미로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림을 뜻했다. 산천재는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조식은 산천이라는 말을 통해 강건하고 독실하게 공부해 크게 덕을 쌓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해도 힘껏 제자를 길러 훗날에 큰 덕이 쌓이기를 기대했다. 조식과 이황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편지를 주고받았을뿐 일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기질이나 학문적 경향이 달랐다. 조식은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조식이 다른 사람은 권세를 자랑한다면 자신은 학문과 지조로써 긍지를 갖겠노라고 한 것을 언급하며 형식만을 위한 형식은 있을 수 없지만 내용을 담은 형식은 필요한 것이라 덧붙인다.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이기를 장차 사람을 해칠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학문에 대해 물어오자 병이 많아 한가하게 지내면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뿐으로 의리의 학문에 대해서는 공부한 것이 없다고 답한 것을 일러 조식이 아무리 학문을 좋아해도 사람 같지도 않은 자와 무슨 학문을 이야기하겠는가?란 말로 설명했다.

 

본문에는 조식의 절친 청송(靑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 이야기도 나온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백악산 자락에 청송당을 짓고 숨어들었다가 파주로 간 사람이다.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성수침, 성수종, 백인걸, 성혼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이 많이 나왔다.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사람이 조식의 외손녀 사위였던 곽재우다. 1558년 58세의 조식은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진주 목사로 있었던 김홍, 자형 이공량(李公亮), 고령현감을 지낸 벗 이희안,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李楨) 등과 함께. 고려 인종(재위; 1122 - 1146) 때의 은자(隱者) 한유한(韓惟漢)이 살던 삽암이란 곳이 나온다.

 

삽암은 꽂힌 바위라는 의미다. 섬진강가의 이곳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석각(石刻)이 있다.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곳이라는 대(臺)다. 조식의 실천 위주의 삶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자신이 사는 삼가현은 산세가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하고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10여 차례 찾았다. 조식은 장중한 사람 즉 어진 사람으로 정적인 산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민첩한 사람이기에 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조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으면 천 년 만 년 썩지 않고 자기 이름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놓은 것이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다면 사관이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넓은 땅 위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할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날다람쥐나 살쾡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고는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새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다.”

 

조식은 “산에 들어온 사람 중에 누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겠는가? 또 누가 스스로 소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잠시 마음을 씻는다고 해서 소인이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란 생각도 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일뿐 단기간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조식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유 있게 유람이나 하는 자신을 겸연쩍게 여겼다. 물론 선비들에게 유람은 단지 먹고 노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경치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그리고 스승, 제자, 벗들의 학문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식은 산천재의 왼쪽 벽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벽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 경은 내면의 수양 방법이고 의는 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 원칙이다. 조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봉을 스승으로 여겨 배우고자 했다. 조식은 덕천강도 스승으로 삼았다. 조식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폐백(幣帛)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정탁(鄭琢)이 있다. 윤원형의 악행을 서슴없이 탄핵한 사람이고 원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의 무죄를 밝혀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만 몰두한 문약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그는 병법에도 정통했다. 문무를 함께 갖추어 밖으로 나아가서는 무장이 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세상을 구할 사람이었다. 조식은 황진이도 만났다. 조식은 임꺽정이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홀로 가만히 앉아 눈물을 흘렸다. 선량한 백성들을 도적떼로 내모는 현실을 탄식하는 한편 근본 원인을 찾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벼슬아치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조식은 젊은 문인들이 공허한 말장난을 하는 쪽으로 공부 방향을 정해가는 것에 이황의 책임이 크다고 느꼈다. 조식은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쇄소응대의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동서 분당(分黨) 이야기도 나온다. 동인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한 것이다. 서인은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한 것이다.

 

조식은 친구 이준경이 영의정에 오르자 출사할 생각을 가졌다. 조식은 경의(敬義)를 주로 하여 지식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산술, 병법 등을 깊이 연구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조식은 스스로 벼슬길에 나서려고 설레발을 치며 부산을 떠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학자에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올바르게 수양한 후 백성을 교화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이양소(李陽昭)가 고려,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할 수 없어 친구 이방원의 부름을 거절한 것과 달리 강회백(姜淮伯)은 두 왕조에서 벼슬했다. 이에 조식은 강회백이 심은 매화(정당매; 政堂梅)를 보고 어제 꽃을 피우더니 오늘도 또 꽃을 피웠다고 했다. 변절을 풍자한 것이다. 조식은 학문의 근본이 선 다음 여러 가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부터 이것저것에 관심을 쏟다 보면 올바른 학문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조식과 이황에게서 배운 정구(鄭逑)의 학문은 제자 허목에게로 이어졌다. 허목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와는 달리 원시유학의 육경을 중시했다. 이런 학풍은 이익, 정약용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을묘사직소(1555년) 이후 11년만에 조식은 다시 명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만나 명종이 능동적으로 정치를 펼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리산 덕산동으로 돌아왔다. 조식은 한 인사가 그릇된 이기론을 펼치자 지인에게 자신은 평생 다른 기술은 없고 다만 책 읽는 일만 했으니 입으로 성리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만은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라고 말했다.

 

조식은 분신처럼 아낀 정인홍에게 평소 차던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정인홍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5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식의 문인들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을 의병에 참여하도록 해 충의를 실천했다. 조식은 은거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조식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이 사화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그들과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간 것은 간신들의 탓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시대의 기미를 보고 출처(出處; 나아감과 물러남)를 바로 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조식은 곽재우에게 유학자로서 읽어야 할 경서와 함께 병법에 관한 책도 두루 읽게 했다. 조식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자신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했다. 조식은 인재 등용은 임금이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이 자신을 닦는 수양이 부족하면 자신만의 저울도 거울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식은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은 채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조식은 전하(선조)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관대하게 받아들인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바 어찌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만나 본 후에라야 신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신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일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조식은 출처의 절조를 중요시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식은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처사(處士)를 자처한 조식에게 정3품 대사간을 추증했다. 평소 조식에게 맡기고 싶어했던 관직이다. 조식은 저술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대상이 되었다. 대원군은 문묘에 배향되었거나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을 모신 서원이나 사당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을 모두 없앴다, 조식의 문묘 종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제자 정인홍이 처형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경(强硬)해야만 제대로 공부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논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자신이 옳다는 무근거의 믿음에 기반해 "실천하지 않으면 공부가 헛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저격(狙擊)에 동참할 것을 강권(强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책임하다고 몰아붙이며 나서지 않는 이들의 공부를 무익한 열정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이론과 실천이 대립하는 항목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