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그림 - 우리는 모두 무너진 적 있다
우리는 무서운 그림을 왜 그릴까요.
그 원인으로 화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병을 자주 거론하기도 하죠. 사람에 따라 매우 큰 요소이기도 할 겁니다.
저는 더 큰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성 본능(에로스)과 자기 파괴를 향한 죽음 본능(타나토스)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죠. 기질적으로 어두운 이미지를 더 좇는 사람도 있겠고, 상황이나 환경, 병으로 인해 타나토스 성질이 우성(優性)으로 표출될 수도 있겠죠.
아름다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만큼 어두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심리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이리언을 디자인한 Hans Rudolf Giger의 작품들에서 두 성질의 연결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무서운 그림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간의 예술 환경 요인도 따져 봐야 합니다. 감각보다 이성을 중시한 인류가 도덕적 잣대로 아름다움을 善으로 보려 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 안 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바니타스(Vanitas, 덧없음) 같이 종교적 관념도 합세하죠. 공포를 이용한 회화와 전통이 꽤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는 서사가 아니었다면 기독교가 그토록 강력한 힘으로 작동했을까요.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인 죽음을 거머쥔 힘이죠.
종교적 영향과 반대로 살펴볼 면도 있는데요. 예술은 늘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고 표현하려 했습니다. 현대 들어 더 강력해졌죠. 종교의 힘이 약화되고 인간과 개인의 지위와 표현의 자유가 커진 영향도 있을 겁니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죽음과 불멸은 인간이 관심을 거두지 못하는 영원한 주제입니다. 밝든 어둡든 아름답든 추하든 알 수 없는 이미지와 힘에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며 이 자체가 예술의 속성입니다.
가치 판단의 문제도 있습니다. 실물 그대로를 추구하는 미메시스 사상이 우리 환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 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회화가 사실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좋다고 여겨왔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형태와 색이 뭉개진 인상파 그림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멸시를 당했나요. 존재하지 않는 무서운 재현을 시도하는 그림은 더욱 좋아할 수 없겠죠.
좋은 작품은 불쾌하거나 무서운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창작자도 수용하는 우리도 이 비밀스러운 그림들에 대해 극복하려 하고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수긍할 수 없더라도 무서운 그림의 존재 의미는 있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술가의 창조력을 극구 칭찬한 바 있다. 회화를 예찬하는 찬송가 『파라고네(Paragone)』가운데에서, 그는 화가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태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주(主)'라고 부른다. "만약 화가가 자신이 사랑할 만한 미인을 보고 싶다면, 그는 자기 힘으로 그들을 불러낼 수가 있으며, 만약 무섭거나 어리석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정말 동정할 만한 괴물들을 보고 싶다면, 그 자신이 그들의 주군이며 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ㅡ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중
위 글에서 다 빈치는 화가의 창조력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미인을 그리는 것과 괴물을 그리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뭔가 얘기를 하다 마는 거 같은데, 이후 얘기는 공부를 더 해야 구체화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쯤에서 마칠게요. :)
ㄱ님이 궁금해하는 회화와 심리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은 아마도 E. H. 곰브리치《예술과 환영》 아닐까 싶습니다. 덕분에 저도 잊고 있던 이 책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Zdzislaw Beksinski (Poland, 1929-2005)
"Embrace"
David Lynch (네, 그 영화감독)
"Man Talking", 나무패널에 혼합재료, 68.58×78.74cm,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