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밤늦도록 집안-거의 책-정리를 했고, 몇 권의 책과 이별 예정이거나 이별했고, 서재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놓고 있고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불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늘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환해졌다. 거울이, 겨울이 평생 나와 함께 하듯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어떤 일은 완수보다 시작(始作)이 조급함과 불안을 더 달래준다. 책을 읽는 일은 의무감이 아니라 떨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괴로움과 두려움보다 떨림이 더 많은 일, 독서. 나는 많은 책들 속에서 그런 연애의 떨림을 바라는 독서 난봉꾼ㅎ;;

묵은 포장을 풀고 작년에 신던 털신을 꺼내 신으며 발끝으로 전해지는 올겨울 온기를 음미했다. 날카롭고 낯선 새 신이 아니어서 편안함도 같이 전해졌다.
새해란 새 시작의 의미보다 뒤를 돌아보며 한때 혹은 계속 원해 왔던 과거를 다시 불러오려는 제의(祭儀)이자 구호(救護)의 재정립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민음사 판, p15)려 한 이 책의 주제처럼 말이다.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읽으며, 국일 미디어에서도 눈길이 멈췄던 대목에서 멈췄다. 멈추고 나서 그 사실을 떠올렸다는 게 더 정확하다. 언제나 내 눈이 밑줄이다. 번역이 천차만별이어도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어떤 진실은 원석처럼 거기 있었다. 누군가 알아보고 깎고 다듬기 전까지 원석은 빛나지 않는다. 보석은 지고한 손길에서 탄생하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기쁘게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모두가 나눠 가질 수 있는 행복이며, 인간의 발명 중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다.


*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 (민음사, p19)

**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국일 미디어, p10)



현실적으로든(읽다가 자게 만든다) 소설적으로든(나도 불면! 나도 몽상! 공감하게 만든다) 모든 불면자의 친구, 프루스트. 그가 회고하는 방들, 밤들, 사람들.
잃어버린 창조의 시간을 꿈꾸며 잠 못 드는 이가 마술사가 되는 겨울밤들을 상상해본다.
이 순간 나는 조금 행복하다. 아주 어둡고 추운 밤에도 어떤 꽃은 피어 있다. 내 한밤의 꿈처럼.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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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12-17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파이팅이요. 저도 스완네 집 쪽으로는 읽었는데 다음 권부턴 책장에 있어요. 교수님이 완역해주시길 바라고 또 바랄 뿐... 이번에 나오는 3부도 일단 사둘거예요. 그래야 4부도 얼른 나올 것 같다는 생각...ㅎㅎ

AgalmA 2015-12-17 21:50   좋아요 1 | URL
최근에 민음사판 5권, 6권 나왔더군요. 우리 박차를 가해야 될 때가 왔어요^^

해피북 2015-12-17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는 `떨림이 중요하다`는 말이 깊이 공감되는 저녁입니다. 늘 읽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책장에서 방치된지 오래인데 저도 먼지 좀 털어줘야겠어요. 으흐흐^~^

AgalmA 2015-12-17 21:55   좋아요 1 | URL
책 하면 뭐니뭐니 해도 떨림 아닙니까. 만남부터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다들 집에 프루스트 책들 가지고 있잖습니까ㅎㅎ 연말은 늘 프루스트 먼지청소 주간~~
올해 제 독서계획에 프루스트 완독이 2순위였는데 이렇게 흘러가게 할 순 없다! 작정했지요. 새 번역판 1권이라도 봐야지! 하면서^^ 읽다보면 또 2권, 3권 그렇게 이어질테고 :)

2015-12-17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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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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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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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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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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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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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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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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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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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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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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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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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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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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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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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8 0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차를 가하려면 일단 말부터 ...있어야..할텐데..그쵸?

AgalmA 2015-12-18 05:45   좋아요 1 | URL
책이 말 아니겠습니까^^ 五車書라는 말도 있으니 통 크게 수레를 가져와야 할까요ㅎ;;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도면 수레급이긴 하죠ㅎㅎ 프루스트 평전도 샀다가 감당 못하고 보냈지요;;
아, 생각해보니 민음사 번역이 다 안 나온 걸 두고 말이 없다 말씀하신 게지요^^; 그동안 묵혀 둔 국일미디어를 읽으면 되지 싶어서 저는 조급하지 않던 중ㅎ;; 어차피 두 번역을 다 읽어야겠다 했으니까요.
감기는 좀 나으셨는지. 그장소님 약골이신 거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킁킁))

[그장소] 2015-12-18 05:52   좋아요 0 | URL
에구..본전 못찾을 곳에서..ㅎㅎㅎ
한번만 봐 주십쇼~^^;;;
수레고 말이고 놓고 줄행랑 36계 할랍니다..!
저도 잘 익혀먹을까..녹여먹을까...
남는게 시간이라..
바쁜 분들껜 죄짓는 말인데..ㅋㅎ...
감기 약 먹고 칠일 안먹어도 일주일..이런다..
! 농담이고요..약이 영..고때뿐..ㅠㅠ

AgalmA 2015-12-18 06:52   좋아요 1 | URL
취향 차이일 뿐인데, 뭘 그렇게 땀을;;; 장르 소설 열혈 탐독에는 제가 땀을 좀;;;;
정말 그렇죠. 약은 먹으나 안 먹으나 비슷하고 주사가 좀 빠른 듯도 하고...앓고 난 뒤의 개운함을 어서 맞으시길 빌 뿐입니다/
귤과 따뜻한 차가 제겐 감기 마들렌^^

[그장소] 2015-12-18 06:33   좋아요 1 | URL
주사 이번엔 다들 주사를 권하는데 몸이 붓고있을땐 주사도 함부로 못맞아서..상처가나면
안된다고..침도 뭐도..암튼 그렇다네요..면역이 약해서..ㅇㄹㅈ
차는 종일..마시고..카페인 금지..중..ㅎㅎ;
저야 취향존중!^^
얼른 깨운해지고 시포요~
축농증인분들 어찌 사는지..참..ㅠㅠ;
감기 조심하세요 ^^♡

AgalmA 2015-12-18 06:51   좋아요 1 | URL
면역력 강화 음식을 찾아봐야 하는 우리ㅜㅜ...운동은 또 얼마나 안 하는지(저만은 아니죠ㅎ;;;? 이봐, 어디서 도매질이야! 하셔도 됩니다;;;)
카페인은 탈수 증상을 만드니 감기엔 정말 안 좋죠. 몸을 건조하게 만든니까...
크리스마스 케익을 아무 맛도 못 느끼고 드시면 안될 텐데 어쩌나요;;; 어서 쾌차~ 으쌰으쌰~~🍰

[그장소] 2015-12-18 06:56   좋아요 1 | URL
크리스네랑 마스네 생일은 같이 축하 안할려구요.
관례처럼 다들하니 인사는 하지만. .저한텐 별 의미없어요.. (카톨릭은 ..이제 그만 ㅋㅎ)
걍 빨간날...
집에서라도 좀 움직움직거렸던 때가 있었는데..
멸치근육이라도 좀 만들어보려구...걍 살기로했어요.
여기서 면역강화를 핑계로 먹기를 더 잘함..생계에 빨간불들어올 지도 모름..엥겔지수 높다고..ㅎㅎㅎ

AgalmA 2015-12-18 06:5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생일축하는 핑계고 맛난 거 먹는 건수 올리는 거 아니던가요. 어떻게든 엥겔지수는 강력ㅎㅎ

AgalmA 2015-12-18 06:59   좋아요 1 | URL
근육 그장소님 상상이 안돼😅 하지만 건강한 미소는 상상됨. 어서 쾌차하세요 :)

[그장소] 2015-12-18 07:03   좋아요 1 | URL
계란한판 채우고 생일 안챙기고 있어서..
우핫~아무날도 아닌 날로 조용히지나가 주는게
선물인데...^^
Agalma 님! 고요를 침묵을 2종셋트 선물로 받아요..그날은..ㅎㅎㅎ

AgalmA 2015-12-18 07:08   좋아요 1 | URL
이장욱 시집<생년월일>이 문득 읽고 싶어지네요ㅎ

[그장소] 2015-12-18 0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이~곧 접수토록하겠나이다~^^
이까짓 감기 ..ㅎ,,ㅎ ! ㅋㅋㅋ
고마워요 ~^^Agalma 님!!♡

[그장소] 2015-12-18 07: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생년월일

 

                          이장욱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

 

  수평선은 생후 12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36년 전의 그날이 12년 전의 그날이다가,

 

  수평선이다가,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연인들은 슬픔에 빠지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 시집, 생년월일 중 수록


AgalmA 2015-12-18 07:51   좋아요 2 | URL
전 역시 이장욱 소설가보다 시인이 더 좋더라는 :)


[답시]

자동차 안에서*
ㅡ불한당들의 세계사 5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찾아보았네.

몇몇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엽서를 써서
우리에게 최종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했지.

몇몇은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어.
밤에도 태양을 보기 위해서였지.

하나의 인생이 결코
사적이 아님이 확실한 곳에서도
몇몇은 사랑에 빠졌지.

몇몇은 어떤 혁명보다도
더 극단적인 각성을 꿈꾸었지.

몇몇은 세상을 뜬 영화배우들처럼 앉아서
이 세상에 살아남을
올바른 순간을 기다렸어.

몇몇은 자신들의 일을 위해서 죽지 못한 채
그냥 죽어갔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찾아보았네.


(자동차 안에서* :볼프 본드라체크의 시. 이 시를 읽고 읽노라면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 아름다운 노래를 듣듯이, 나는 자주 이 시를 내 두 눈으로 쓴다. 내 몸이 갈 수 없는 곳에도, 아름다운 노래는 여전히 간다. 가서는 또 다른 노래가 되고, 노래가 되지 못한 것들은 별이 되거나 나뭇잎이 되어, 여전히 이 세상의 풍경이 일부가 되어, 나를 흔들고 내 속의 또 다른 노래를 흔든다.

박정대 <단편들> (세계사, 1997) 중


두 시인 사이는 별로 안 좋은데 우리끼리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ㅎㅎ;;;

[그장소] 2015-12-18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 시를 읽은지 얼마 안되서..소설을 먼저 알았거든요.
시를 더 잘 써요..확실히..^^
느낌도 좋고..

[그장소] 2015-12-18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안좋은데요?난 그런건 몰라서..둘이 싸울일이..있었나요?
그러든지 말든지..시로는 뭐 화해시키죠..화합의 장 이랄지..
우리끼리 파티랄지..^^

AgalmA 2015-12-18 07:59   좋아요 1 | URL
제 농담이었어요ㅋ;;

[그장소] 2015-12-18 08:00   좋아요 0 | URL
아...저 혼자 밥상차려 먹은거군요..그러니까..
아침 일찍 부지런 떨어서 ㅋㅋㅋ
덕분에 배 두둘기며 띵가띵가..놀아야겠어요~^^

AgalmA 2015-12-18 08:06   좋아요 1 | URL
그러나 저는 문득 치명상을...입고 이젠 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시길. 그장소님. 뮤즈 같은 친구님 :)

[그장소] 2015-12-18 08:10   좋아요 1 | URL
해뜨니 환함을 덮고 주무시구려~
치명상은 눈감았다 뜨면 사라지고 말터~^^
잘 자요~(성시갱)
잠옷을 입자 ㅡ (이 제목이 맞던가?)ㅎㅎ
또 봐요!♡

물고기자리 2015-12-18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책에도, 스쳐 지나가며 잠깐 본 어느 영화의 한 장면에서도 이 책 이야길 하더라고요. 1Q84에선 아오마메가 모처에서 은신해야 했을 때, 이 책을 완독할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읽기 시작하는데 하루키가 말하는 이 책의 감상은 제가 카프카를 읽을 때의 느낌과 거의 흡사해서 깜짝 놀랐어요^^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읽을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뜻인 것도 같은데,, 조만간 제게도 기회가 오긴 오겠죠..ㅎ

AgalmA 2015-12-18 20:06   좋아요 1 | URL
자꾸 내 눈에 띈다는 것은 내 관심이 행동으로 진입하려는 조짐 아닐까요. 관심 없음 소 귀에 경읽기ㅎ;; 하지만 관심은 점점 쌓여서 결국 펼치게 만들고... 우리가 우연을 필연으로 느낀다? 만든다? 그렇게 되듯 말예요.
1Q84 1,2권만 읽고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는데 그런 내용이 있었군요. 읽었던 책 얘기는 한때 사귀고 헤어진 연인의 몰랐던 혹은 공감하는 얘길 듣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해요...싱긋
 
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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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형 컨버터블 `들라주`로 느리게 드라이브 하는, 생각해보면 제임스 설터의 소설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지겨워하면서도 삶을 치장하는 데 노련한 왕년의 스타 같은 눈썰미. 그것은 밉지 않으면서 어쩐지 처연하다. 소설 속 욕망들도 그렇게 다가온다. 여가나 백일몽 같이 기회를 살피며 충동적이다.
나는 투우에서 투우사와 황소의 현란하며 긴 대결, 지치고 노한 황소에게 내리꽂는 창, 열광들 그 모든 게 끔찍했다. 그것은 에로스적 사랑과도 닮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서도 그런 비유가 있었고, 조르주 바타유는 투우와 에로티즘을 연결해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설터의 표현은 좀 더 건조하고 예리하다. 19금 표현 수위가 많아 다소 낮은 것으로 가져왔다.

*
그건 그저 하나의 달콤함 사건, 어쩌면 환상의 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토록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고립된 느낌, 나아가 살기殺氣까지 느껴진다. (p85)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주인공들이 한밤 내내 돌아다니던 풍경들이 겹쳤다.
나-딘-안마리를 서술하는 격자식 구성, 시점 변화도 흥미롭다.
˝닳아 없어지지 않는 암석면 같은, 이미 지나갔으나 줄곧 어른거리는 프랑스의 이미지들˝(p125) 같은 묘사와 비유는 문장 사이사이 빛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며 느끼게 되는 심상처럼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화법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 소설은 거의 풍작이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 이 사람은 참 소설가 같군, 바보 같은 감탄을 여러 번 했다.

˝고요하다는 점에서만 탁월한 겨울의 나날˝(p97), ˝아침이 점차 추워지는데 나는 아무 대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p66) 처럼 그의 소설을 또 읽게 되는 밤.

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 소설을 나보코프 <롤리타>와 비교한 건 타당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서로에게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주인공은 딘과 안마리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리저리 대입해본다.
이 책 덕분에 사놓고 읽기를 미뤄두고 있던 <롤리타>를 좀 더 빨리 펼칠 것 같다~
겨울밤 독서로 꽤 괜찮았다.


ㅡAgalma

몇 가지 것들을 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기억한다. 양복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동전처럼 시간이 흘러 조금 퇴색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부들은 오래전에 변형되었거나 재편되어 다른 세부들이 전면에 드러났다. 실제로 몇 가지는 분명히 진짜가 아닌데, 그렇다고 덜 중요하지는 않다.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바꿔야 한다.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그 양식에 진짜 의미가 있다. 실제로 내가 줄곧 변화를 시도할 경우 그때까지 조화롭던 모든 일이 오래된 신문지처럼 내 손 안에서 부서져버릴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만 해도 참기 어렵다. 무수한 과거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사라져간다. 다만 그 안 어딘가에 다이아몬드처럼 소비되기를 거부하는 파편들이 존재할 뿐이다.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수집한다면 우리는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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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12-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소설 에로틱의 걸작, 포르노 그래피 등등 이란 말에 혹해서 사 읽었는데 눈이 쫑긋해지지는 않고 몸이 늘어지던데요 ㅋㅋ 롤리타는 읽는 재미는 있던데 말이죠. 소설은 잘 모르겠습니다. ^^

AgalmA 2015-12-17 02:55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느리게 드라이브 하는 들라주 얘길 괜히 한 게 아닙니다. 예전 미키루크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던 에로틱 영화 보면 굉장히 느슨하잖아요.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은근한 제스춰로 서로에게 뭔가 여지를 주잖아요. 주인공이 딘과 안마리 사이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고 서술하는데 그걸 포르노 그래피적이라고 보는 거죠. :)
 
꿈의 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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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언젠가 만날 카에이루가 있다.

엎치락뒤치락 일어나고 눕는 여러 날을, 자라는 풀의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어둠을 향해 가는 노을을 안타까워하기보다 빛을 품은 어둠을 주시한다. 잠속에서도 빛은 오색으로 터진다. 사실 이 모두는 서로의 끝을 잡고 순환하는 하나 잖은가.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꿈의 꿈>인 거라 생각한다.
현실의 꿈도, 잠속의 꿈도 결국 나를 무너뜨릴 것이다. 결국 무엇을 두려워하리. 내가 나를 철저히 마주하며 무게를 감당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빅뱅은 물리적 현상만이 아닌 우리가 은유화했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알아보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창조해야 할 무엇을 느낀다. 일종의 의무감. 안토니오 타부키는 그런 재창조를 원했고 이 책을 썼다.
`다이달로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체코 안졸리에리, 프랑수아 비용, 프랑수아 라블레, 카라바조라 불린 미켈란젤로 메리시, 프랑시스코 고야 아 루시엔테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카를로 콜로디, 자코모 레오파르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아르튀르 랭보, 안톤 체호프, 클로드 아실 드뷔시,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페르난두 페소아,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패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ㅡ 페소아가 탄생시킨 異名들과는 조금 다르게 ㅡ 안토니오 타부키가 원했고 이미 존재하고 있던 異名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서로의 꿈을 꾸다 만나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안토니오 타부키를 만나 그의 꿈과 내 꿈을 맞춰보게 됐다. 그가 페소아와 자신의 꿈을 맞춰본 순간처럼.

ㅡAgalma

곧바로 물의 자비로움을 느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바다를 사랑했고, 바다에 음악을 한 편 헌정하고 싶었다. 태양은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고, 물의 표면은 반짝거렸다. 드뷔시는 숨을 잔뜩 들이쉰 채 조용히 다시 들어갔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 샴페인 병을 꺼내 반쯤 마셨다.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음악은 이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

ㅡ 음악가이자 심미주의자, 클로드 아실 드뷔시의 꿈



고모할머니가 큰 쟁반을 들고 왔고, 거기에는 차와 과자가 있었다. 카에이루와 페소아는 과자와 차를 들었다. 페소아는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었는데, 그건 우아하지 않은 태도였기 때문이다. 페소아는 선원복의 칼라 매무새를 가다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저의 선생님입니다. 그가 말했다.
카에이루는 한숨을 쉬고 나서, 잠시 후 미소를 지었다. 긴 얘깁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걸 꼬치꼬치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똑똑해요. 줄거리를 건너뛰어도 이해할 겁니다. 이것만 알아두시오. 내가 당신입니다.
더 설명해주세요. 페소아가 말했다.
난 당신의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카에이루가 말했다. 당신의 어두운 부분이지요. 이것 때문에 난 당신의 선생입니다.
근처 마을에서 종이 몇 번 울렸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페소아가 물었다.
내 목소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카에이루가 말했다. 밤을 새우거나 잠을 잘 때 내 목소리를 들을 텐데, 때로는 흐트러져 들릴 것이고, 때로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들어야만 하고, 이 목소리를 들을 용기를 가져야만 할 겁니다. 위대한 시인이길 원한다면 말이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페소아가 말했다. 약속드리지요.
그가 일어나 작별인사를 했다. 마차가 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 성인이 되었고 수염이 자라났다. 어디로 모셔야 합니까? 마부가 물었다. 꿈의 끝으로 데려다주시오. 페소아가 말했다. 오늘은 내 삶이 승리한 날이오.
3월 8일이었고, 페소아의 창문으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ㅡ시인이자 위장꾼, 페르난두 페소아의 꿈


*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1887~1935, 포르투칼, 시인)는 죽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1914년 3월 8일 "그의 내부에서 그의 주인이 솟아났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세 필명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알베르토 카에이로(Alberto Caeiro)고, 다음은 "젊어서 죽은" 이 사람의 두 제자, 리카르도 레이스(Ricardo Reis)와 알바로 드 캄포스(Alvaro de Campos)다.
페소아는 이름마다 다른 다른 이력과 기질, 외양 등을 부여해 칠십 여 개 넘는 이명異名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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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2-1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소아 혹시 남자 아니였나요? 제가 잘 모르는 작가라서요. 차 마실 때 새끼손가락 얘기는 `번지점프를 하다`가 생각납니다. 70여개 이명을 사용할 걸 보면 정체성을 적절히 분리할 줄 알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2015-12-15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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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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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15 22:39   좋아요 2 | URL
˝정신이 아닌 육안으로 전원시˝를 쓴다는 건 카에이루가 유물론자 설정이기 때문이겠죠. 헌데 카에이루 시집보면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성향도 강해서 정신을 멀리 한다는 개념으로 단정해서 볼 수 없습니다. 그 신비주의, 정신성이 더 강해진 캐릭터가 의사 시인 레이스고, 그걸 극단으로 가져간 게 캄푸스라고 생각합니다.

페소아의 이명 캐릭터들이 ˝정체성의 분절-분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융의 정신분석처럼 우리 안에 내재된 모든 속성을 드러내며 그 캐릭터들이 각기 다른 삶을 겪도록 만들며 페소아 자신도 그 삶을 같이 살았다고 봐요. 사실 작가들이 캐릭터를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한한 삶 속에서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대리만족이자 실험같은... 매순간 불변하는 존재로 살 수 없는 인간 삶 자체가 이미 불안이라는 걸 페소아는 잘 알았던 것이기도 하고.
한 인간으로 우리는 어린이와 청년, 노인 등 많은 삶을 겪게 되는데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희한한 경험입니까. 사회적 역할이 더해지며 또 무수한 정체성을 갖게 되고...
리처드 세라의 조각을 보니 저는 70여 명의 페르난두 페소아에 대한 공동비문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 비문에는 아마 70여명의 작품 구절들이 다 들어가 있을 걸요^^ 그러니 사람으로도, 글로도, 그 관계성으로도 검은색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일테고.

<불안의 책>과 <말테의 수기>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생각해요. 언제가 이 둘을 비교해 볼 시간이 날런지..ㅜ,ㅜ

페소아는 포루투칼에서 거의 체 게바라 급이더군요. 거리, 대문에 페소아 그래피티 엄청 나답니다ㅎ 그래서 페소아를 슬픔의 아이콘으로 보기보다 생의 다층을 보려한 혁명가로 보는 게 더 타당할 지도...그 투쟁의 지도를 공감하며 보는 우리에겐 매우 비극적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2015-12-15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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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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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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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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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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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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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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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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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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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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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네루다가 사망하기 직전에 마무리한 시집이다. 잠언 같기도 한 316개의 물음표를 가진 시들. 시가 무엇인지 그는 아주 빠르게 스케치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는 시. 새삼 내게 시간이 있다니 놀랍다. 그게 내 관념으로 충만한 매트릭스 세계일 지라도.

시로 시를 가르치기. 최근 나온 이성복 시론집과 또 다른 시창작 강의라 할 수 있다.
이성복 시론집 중 <무한화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집과 같이 번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25
말 앞에서 나를 열어두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쓰세요. 말을 앞세우면 감정은 따라오지만, 감정을 앞세우면 감정도 날아가버려요.

ㅡ 이성복 <무한화서>(2015)

네루다의 이 시집은 정확히 그 지침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네루다의 이 시집이 내 생각엔 더 직접적이며 창의적이다.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야 된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넌? 대화 수업 같다고 할까. 답을 줄 수도, 줄 생각도 없는 선생님. 네루다식 시창작 강의로 한국 대중 감성에 맞는 시가 나올 지는 미지수. 통할 것은 통하는 법. 물음으로 가득한 문장 형식이 이성복 시인도 강조하는 ˝입말˝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쉽고 가볍게 와서 독자를 툭 건드린다.

질문 앞에 당황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 생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번호로 이루어진 제목에 4~5개의 질문이 달려 있다. 한 문장만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확장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여백이 많으므로 노트 필요없이 여기저기 내 생각을 쓸 수 있다. 해마다 들춰보며 해마다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피사체 하나를 두고 이리저리 수많은 데생을 하듯.
질문 하나에 한 편의 시를, 소설을 쓸 수도 있다. 혹은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 수도. 세상의 모든 걸 생각하게 될 테니까.

잘 알다시피 좋은 글은 많이 읽는 것보다 많이 써보는 게 더 효과가 큰데, 그 속에서 생각하고 수정하며 스스로 배우고 터득해나가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의외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라고 하진 않겠다. 쿨럭)) 중요한 건 훌륭한 맛의 음식이 좋은 재료에서 나오듯 좋은 질문을 가져야 한다. 이 시집은 그런 질문 자체이며 그런 질문을 갖게 한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에서 시에 눈 뜬 우편 배달부가 섬 가득 울리던 종소리 같이 정신을 깨우는 울림. 그렇게 이 시집을 읽고 시를 쓴 시인들도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한다. 어딘가에서 지금도.
국내 번역된 네루다 시집 중 가장 좋았다. 네루다 전문 번역인 정현종 선생 :)


네루다가 임종을 맞은 이슬라 네그라 바닷가 집에서 쓴 질문 49를 마주 했을 땐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소설이 스쳐갔다. 바다와 육지의 좁은 간격을 모래밭에서 느끼듯 다가온 죽음과 삶 사이에서 느끼던 그 복잡한 심경이.


49

내가 바다를 한 번 더 볼 때
바다는 나를 본 것일까 아니면 보지 못했을까?

파도는 왜 내가 그들에게 물은 질문과
똑같은 걸 나한테 물을까?

그리고 왜 그들은 그다지도 낭비적인
열정으로 바위를 때릴까?

그들은 모래에게 하는 그들의 선언을
되풀이하는 데 지치지 않을까?


ㅡ파블로 네루다(1904~1973, 칠레)



(그 외 발췌들)

10
내 피를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내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11
어쨌든 11월은 몇 살이나 되었을까?

13
오렌지 나무 속에 들어 있는 햇빛을
오렌지들은 어떻게 분배할까?

15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17
겨울은 어떻게
그 많은 청색 층을 모았을까?

누가 봄한테
그 맑은 공기의 왕국을 청했나?

19
파타고니아에서는, 한낮에
안개가 초록이라는 걸 당신은 아나?

21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

24
죄수가 빛에 대해 숙고할 때
그건 당신한테 비추는 빛과 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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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2-13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좋은 글을 위해 많이 써야 한다는 것,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

AgalmA 2015-12-14 01:22   좋아요 1 | URL
늘 파수꾼이 돼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한데, 교대자가 없다는 악조건이 있죠....
 

옴니버스 선집인 『견딜 수 없는, 미쳐 버리고 싶은』, 『히치하이킹 게임』 왜 둘 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책 제목으로, 책의 첫 작품으로 두었는지 누구나 젤 처음 떠올릴 짐작은 그의 유명세일 것이다. 그러나 연애적 사랑을 말할 때 결정적 파국의 낌새를 밀란 쿤데라만큼 잘 집어내는 작가도 드물지, 하며 내 결론은 마무리된다.
밀란 쿤데라 <히치하이킹 게임>과 <견딜 수 없는, 미쳐 버리고 싶은>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편인데, 이 외에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다 함께 묶인 단편집은 없나. 이 궁금증 때문에 밀란 쿤데라 전집 도전을?


*
주위의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도 자기 육체를 편하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설득하는 특별한 방법을 개발한 적도 있었다. 거대한 호텔의 수많은 방 가운데 하나를 배정 받듯, 모든 인간은 수많은 몸 가운데 하나를 배정 받아 태어날 뿐이라고 혼자 되풀이해서 중얼거리곤 했다. 따라서 육체는 지극히 비개인적인 기성품 하나를 임의로 빌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을 바꾸어 가며 이런 생각을 되풀이했지만 사실은 조금도 그렇게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정신과 육체의 이원성은 그녀에게 자꾸만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기 몸 하나도 버거웠고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도 많은 걱정을 했다.

ㅡ밀란 쿤데라 <견딜 수 없는, 미쳐 버리고 싶은>


요즘 아니 매순간 나는 인간과 감옥에 대한 연관성을 자주 생각하는데, 위 단편에서 `존재-호텔` 얘기를 보니 다른 비유도 생각났다.


*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축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나는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내게 있어서 은혜의 불빛이다.
내가 내 방문을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칸토르는 학생들에게 무한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한한 수의 객실을 가진 호텔 주인 한 사람이 있고,
이 호텔 객실에는 손님이 모두 들어차 있다. 거기에 손님 한 명이 더 도착한다.
그래서 호텔 주인은 1호실에 있는 손님을 2호실로 옮겨준다.
2호실에 있던 손님은 3호실로 옮긴다. 3호실 손님은 4호실로.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렇게 하면 1호실은 새로 온 손님을 위해서 비워진다.
이 이야기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점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손님들과 주인 모두가, 한 손님이 자기 방에서 평화와 고요를 얻을 수 있도록 무한한 수의 작업을 지극히 당연하게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독에 대한 커다란 존중의 표시다.

ㅡ페터 회 『스밀라의 눈(雲)에 대한 감각』



인간과 자신을 가장 치열히 인식할 수 있는 고독한 공간, 감옥.....


*
하늘에서 쏟아진 빛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들의 얼굴을 비추면서 거기에 담긴 진지함과 순수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여주었다. p 32

인간의 선량함은 보편성을 띠지만(마샥도 담배에 불을 붙여주거나 영화관에서 자리를 양보하기도 할 것이다) 지능까지 그와 같은 보편성을 띠지는 않는다. p165

그러나 교도소와 숲은 차이점이 있었으니 패러것이 사랑하며 거닐었던 숲의 공기에서는 늘 새로움의 향기가 묻어났으나, 여기 교도소에는 늙은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오래되고 고약한 냄새와 기만당하고 있는 뻔뻔한 죄수들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죄수들은 속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다. 더 월에서 들려온 소식은 죄수들에게 새로운 기운과 변화의 힘을 불러일으켰지만(대부분이 그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임질과 성경 그리고 손목시계 끈을 둘러싼 말다툼 때문에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p175

그들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비록 어설프고 잔인한 대안이긴 해도 고행은 그들의 타락이 지닌 미스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적절한 척도였다. p175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보게 될 마지막 장소가 법정이라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지만 패러것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되받아쳤다. 하지만 마룻바닥이든 침을 뱉는 통이든 낡아빠진 벤치든 그 무엇이라도 패러것은 붙잡고 매달렸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를 구원해줄 수만 있다면. p225

패러것은 치킨 넘버 투가 기꺼이 그에게 주고 싶어했던 무엇을 온몸에 흡수하는 듯했다. 갑자기 오른쪽 엉덩이에 통증이 느껴져 엉거주춤 일어나 살펴보니 의자에 치킨의 틀니가 놓여 있었다. ˝오, 치킨.˝ 패러것이 외쳤다. ˝내 엉덩이를 이런 식으로 꼬집는군요.˝ 패러것의 웃음은 가장 깊은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이었고 그것은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p228

두 개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고 몸이 기울어지는 것으로 보아 경사진 터널을 통과하는 듯했다. 그가 기억하기로 자신이 이런 식으로 운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래전에 죽은 그의 어머니가 필시 어딘가에서 다른 어딘가로 그를 안고 간 적이 있었겠지만 그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들려 가고 있노라니 순수와 깨끗함이라는 낯선 느낌이 엄습하면서 패러것은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나이 든 내가 누군가에게 실려 내가 지니고 있던 노골적인 정욕이나 경솔한 경멸, 원한에 찬 가식적인 웃음 따위는 결코 없을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런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그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그 경험만은 비록 높은 나뭇가지에 걸쳐 있는 오후 햇살처럼 유용하진 않아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또 이렇게 어딘가로 들려 간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경험인가 말이다. p230

ㅡ존 치버 『팔코너』



중력 법칙과 인식의 한계를 생각하면, 인간은 더욱 죄수 같다. 11차원은 고사하고 3차원도 감당하기 어렵다. 시간이 부가된 4차원만 생각해도 패닉이 되기 일쑤다.


*
내 할아버지 스톤은 달 세계가 인류 역사상 유일한 개방형 감옥이라고 주장했다.

ㅡ로버트 A. 하인라인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개방형 감옥, 지구라고 다를까. 머물면서 갇힌 자.
밀란 쿤데라가 최근작 『무의미의 축제』에서 왜 그토록 ˝배꼽˝과 ˝방광˝에 집착했는지 이해되기도 한다.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없었을 테니 인간 근본에 대한 처절한 고민 아닌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배출본능 ˝방광˝은 또 어떤가.

잉태하고 배출하는 세계.
없음과 있음이 끝없이 산출되는 세계.
폭발은 왜 밖에서 안으로 오는 것이 아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구조인가. 차원이 밀려나며 다음 차원의 폭발이 일어난다. 빅뱅. 어느 차원에서도 객실은 대기 중이다. 손님은 말한다. ˝어, 이거 내가 생각한 것과 좀 다르네요.˝
커피를 마시며 답없는 생각을 잘도 한다. 쓸모없는 죄수 같으니. 나는 밖으로 전화를 몇 번 걸었다. 실질적인 밖인지 알 수 없다.
예약도, 투숙도, 감금도 지루한 경험이다.
호텔과 감옥, 입실과 퇴실은 반복된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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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2-0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토르의 예시를 그렇게 평화와 고요에 따른 자발적 행위(?)로 느낄 수도 있군요. 참, 내용은 경우 따라 다차원적 입니다

AgalmA 2015-12-06 23:1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책도, 예술도 이렇게 산처럼 많은 거 아니겠습니까~_~

cyrus 2015-12-07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옥이라면 ‘사드’의 존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샤랑통 정신병원,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소돔 120일> 같은 글을 썼거든요. 사드는 자신의 성적 상상을 종이에 분출했어요. 프로이트식 해석이라면 펜은 성기, 잉크는 정액으로 볼 수 있겠어요. 사드의 글쓰기는 자위행위와 같아요.

AgalmA 2015-12-09 17:43   좋아요 0 | URL
사드와 장 주네는 감옥에서 빠질 수 없는 아이콘이죠. 한국엔 신영복 선생님이....상당히 다른 아우라ㅎ;;;

2015-12-09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9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9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