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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서 영원까지 ㅣ 문학동네 시인선 85
박정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평점 :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1987) & Nick Cave & the Bad Seeds "From Her to Eternity(그녀에서 영원까지)"
평생 자신을 사로잡는 것들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 천사도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린 삶에도 영원에도 묶인다. 먹고 자고 질투하며 자식을 낳는 우리 모습을 神에게 투영하기도 하면서. 오늘도 "말갈이나 숙신의 언어로 비가 내리고" (<그때 나는 여리고성에 있었다>) 셀 수 없는 비처럼 언어처럼 "여진(女眞), 여진(女眞)", "아무르, 아무르" 를 가만히 입안에서 굴린다.
이 시집의 첫 시는 <아무르>이다. 박정대 시인의 시를 꾸준히 읽어온 사람에겐 익숙한 단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언제나까지나 반복할 단어. Amour, 사랑. 이 시에는 짐 자무시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도 스며 있다. 그들이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성과 제약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에서 이 사랑의 속성은 같다. 모두 사라져도 사랑은 살아남아 존재(사람이 아니라도)의 사랑을 키울 것이다. 뱀파이어도, 천사도 벗어날 수 없어라.
"상처 입은 것들의 내면은 모두 한 채의 절"(<금각사>)이라고 했다. 같은 시에서 "상처 입은 것들의 표면은 모두 금각사"라는 말도 했다. 상처로 반짝이는 것이라면, 사람과 별과 부러진 칼의 차이는 없다. 비유는 때론 야멸차지. 반짝이기 때문에 가끔 서로 마주하지만 말은 건네지 않는 사이. 어두워서 마주하고 차가워서 마주하고 어떤 이유로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사이와 사이. 이유가 없는데도 따지면 이유가 있는 사이. 양자역학과 우주의 끝을 말하지 않아도 이유는 아주 쉽게 만들어지고는 한다.
"인류를 구원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시인이란 존재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시인의 말에서 나는 "속해 있기 때문에"를 되풀이해서 읽는다. 속해 있기 때문에, 속해 있기 때문에. 神은 인류에 속해 있는가. 인류의 기원이기에 구원도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인가. 인과를 따질 때 나는 화가 나기보다 슬프지만 냉정해지려고 한다.
한참 생각 중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게 무엇을 더 해 주면 좋겠니.
아니오, 아니오.
결코 와 영영은 모두에게 아픈 말이다.
우리는 다른데 이토록 속해 있다.
뜨거운 차가 1도 정도 더 식고 밤이 더 깊어지고 비가 더 적셨다.
자네, 너무 멀리 나간 거 아닌가. 시인은 말한다.
'내면의 깊이를 획득한 말의 싱싱함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어쩌면 이런 것.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는 함께 잠들 수 있지만 아침이면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로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깨어나야 한다"는 애정 공산주의의 수칙에 공감하면서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콜로이드 소노르Colloides sonores, 즉 교착적 음향의 사랑을 꿈꾸는 나는 어쩌면 애정 라이프니츠주의자에 가깝다 // 타자(他者)에 대한 영원한 동경 때문에 나는 삶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 고독과 분별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의기양양(계속 걷기 위한 삼중주>)
"전직 천사"라 천진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세계를 배회하던 시의 날개를 접고 시인은 말한다.
"삶이란 스스로 꿈꾸는 한 편의 시이다. 전직 천사는 날개 달린 발로 온 세계를 떠돌며 단 한 편의 시를 쓴다. 허공을 살다 영원으로 사라진다. 영원이라서 가능한 밤과 낮이 여기에 있다. 그럼 이만 총총"
이 순간 시를 쓰고 있는 사람, 시가 필요 없는 사람에게 '시적 상상력'이란 쓸모없는 말. 그것은 설명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니피앙이자 시니피에. 그 조차 아직 반짝이고 있긴 한 걸까. 몇몇의 귀를 위해 말하려는 노력.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내일 구름은 몇 개나 뜰까. 확실한 건 내가 알 수 없는 만큼 존재하고 사라질 거라는 거.
짐 자무쉬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4)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