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기 사어 수집가
황인찬 외 지음 / 유어마인드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은 소멸을 전제로 하기에 슬픔과 기쁨을 모두 가지고 있는 완전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멸 때문에 다시 불완전해진다.  나를 기억해줘란 말은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멸을 원해서가 아니라 소멸의 안타까움이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우리가 남긴 모든 말과 사물에 그 마음이 담겨 있을 거다.

 

 

나는 위 문장을 한참 바라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단어, 고민, 방식 그런 것들이 한눈에 보인다. 22세기 사어 수집가는 그런 걸 보여 준다. 그들도 자신의 글을 바라보며 나와 같은 심정을 느꼈을 테고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결단으로 글로 묶어 내놓았으리라.

 

 

 

인찬 시인이 고른 사어에는 그의 아날로그 취향과 문학인으로서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 산악회, 진정성, 파이팅, 핍진성, 교복, 경이, 정수, 오빠, 세계문학전집, 느낌, 퀴어, 귀농, 시간제 강사, 새내기, 학제(學製), 엠티(MT), 독설, 제본, 종언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한 성소수자들은 한국의 전통을 따라 부모를 모시고 살며 제사를 치르고 고부갈등과 시댁살이, 여타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들로 고충을 겪는, 매우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황인찬 퀴어

 

 

 

 

유주는 최근 우주까지 관심이 확장된 걸로 보이는데 대체로 이국성(異國性)으로 이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재주가 있는 소설가다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불시에 ! 하게 만든다. 작가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같이 발견하는 쾌감이다.

칫솔, 라이터, 비닐봉지, 안개, 다리미, 기적, 번지, 나일론, 페덱스, 조화, 우산, 심장병, 담배, 12, 응사(매로 꿩을 사냥하는 사람), 실바람, 낙조, 검정색, 명왕성, 간척지등 한국적인 소재가 많은데 외국인을 등장인물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끈다.

 

 

국제영화제에서 어느 영화의 상영이 끝난 뒤 한 관객이 묻는다. 왜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항상 비닐봉지를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감독이 되묻는다. 당신은 모든 한국영화를 보셨습니까. 그리고 질문했던 관객이 대답한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제가 본 모든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가방 대신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고, 제가 본 한국영화들의 숫자가 적다 하더라도, 제가 어떤 총체적인 상을 그리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연을 발생시키는 한국적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략) 비닐봉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될 때,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이 무엇을 들고 다닐지가 저도 궁금하군요.

한유주 비닐봉지

 

백 년 뒤에도, 이백 년 뒤에도 모든 사람들은 언제고 고아가 되겠지만, 그들은 그녀와는 다른 다리미를 사용할 것이다. 혹은 다림질이 필요하지 않은 나일론을 능가하는 섬유가 개발될지도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의해

한유주 다리미

 

제법 멀리까지 나온 그들이 다과회장으로 돌아가려 할 때, 잔디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인다. 일본인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는다. 이게 뭘까요? 일본인이 묻는다. 한국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비닐 조각이다. 잊힌 이름이다.

한유주 간척지

 

 

 

 

 

시원의 글에선 큐레이터 다운 소재와 현장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 특성들을 볼 수 있다.

파도타기, 관객, 샤프심, 두부, 연설, 삼박자, 백설탕, 스포일러(우리말 순화어:영화 헤살꾼), 기념비, 젊은작가, 우표, 자별하다, 경비실, !느낌표, 일기예보, 맴돌다, 창조, 얼음, 걷기 대회, 호신술

 

20146월 어떤 자는 일본의 한 작가에게서 소포를 받았다. 청록색 배경에 닭이 그려진 우표가 무려 26장이나 봉투 네 면을 둘러붙어 있었는데, 근 몇 년 만에 그는 우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살아있는 한 마지막으로, 우표를 오래 들여다본 일이라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현시원 우표

 

날씨가 세계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날씨교까지 등장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할지도 모르는 종교입니다.

현시원 일기예보

 

맴도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 집 앞에 가는 사람도 없다.

현시원 맴돌다

 

 

 

 

 

지현(aka 아밀) 역시 번역가이자 소설가 다운 문체의 재미를 준다.

그녀, 타다, 인형, 망하다, 폐지(廢紙), 자기관리, 영재, 비둘기, , 짓다, 당신, 불구하다, 돛대, 천연, 사이렌, 감성, 반려, 사이코패스, 자아, 등 별로 흥미롭지 않은 단어들을 화석으로 설정해 그 결정(結晶)을 살펴본다.

 

이렇게 부서진 망하다’의 파편들은 모두 또 다른 조그마한 망하다가 된다.

김지현(aka 아밀) ‘망하다

 

사람들은 종이가 버려질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잘하지 못하기에 이 화석을 보면 무슨 화석인지 알아보기 어려워한다. 대개 나룻배나 비행기와 같은 모양이다. 아마도 그것이 폐지가 추구한 진화의 마지막 단계 같은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추정한다.

김지현(aka 아밀) ‘ 폐지(廢紙)’

 

이 화석은 색색의 셀로판지 십수 장을 연속적으로 붙여놓은 것과 같은 형태다. 이 화석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여러 개로 비쳐 보인다.

김지현(aka 아밀) ‘자아

 

 

 

 

사진가는 사진이 말이다.

 

ㅡ 이윤호 '안마 맛사지' 

 

 

 

논객 정태가 가지고 온 사어(운전수, 스마트폰, 페이퍼백, 인디, 중산층, 비정규직, 전세, 개천의 용, 귀성길/귀경길, 세는 나이, 대안학교, ADHD, 삼한사온, 장마, 꽃샘추위, 참치회, 동물원, 안락사, 통일, 논객’ )는 딱 봐도 시사성을 담고 있다. 논객 다운 회의주의가 문장마다 가득하다자신이 논객이면서 '논객'의 사멸을 말하고 있으니.

 

엘론 머스크와 레리 페이지처럼, 선택받은 환경에서 자신의 운을 십분 활용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늘 그래 왔듯이 미래를 손수 개척하고 열어나갈 것이다. 반면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 평범한 우리에게, 미래는 어찌 보면 주어지는 것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다가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22세기에 사라질 말들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언어들에도 조금은 슬픔의 손길이 닿는 듯하다.

노정태 통일, 논객

 

 

 

음악가들의 위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과 흥을 가사와 리듬으로 싣기 위해 작가만큼 노력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목인이 가져온 사어(‘가수, 김치냉장고, 노파, 눈싸움, 당일 배송, 리얼리티 프로그램, 마가린, 백열등, 빌 게이츠, 사이버, 속물, 속셈학원, 스승, 썰렁하다, 야자, 연립주택, 일상적, 전공, 책받침, 프리메이슨)와 생각에서 가장 많이 웃었다.

 

마가린은 버터와 비슷한 종류의 20세기 풍 음식 재료로 여러 건강상의 논란 때문에 사라진 추억의 제품 중 하나다. 가끔 최초의 우주 비행사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가가린이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아 냉장 보관하는 경우가 많아 아이스크림으로 잘못 알고 구매해 먹은 사람들도 많았다.

김목인 마가린

 

 

  

 

 

숲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버섯같이 글에서 향기가 나는 제니 시인의 사어(버섯, , 바람, 음악, 침묵, , 사람, 희망, 감정, 기억, 동물원, , , 거짓말, 겨울, , 그림자, 예언, 죽음)와 생각은 읽는 이를 사유의 숲으로 이끈다. 그 사유의 숲은 로 이뤄져 있다.

 

유예시키고 유예시켜도, 지연시키고 지연시켜도, 좀처럼 맘처럼 다가오지 않는 깊이와 높이. 다가오지 않는 것을 이제 곧 다가온다고 믿으려는 어리석고도 간절한 마음. 오래전부터 누이는 부모로부터 선물 받은 아마포 손수건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누이의 부모는 작별 인사로 그것을 누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누이가 받은 얇고 흰 아마포 손수건은 그의 품을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매 순간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에게 감시당하는 일이 전부였던 수용소의 삶에서 소중한 사물들은 그저 머릿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무엇이었다. 빼앗긴 채 사라진 물건들만큼이나 그들은 자신의 말 또한 잊으려고 애썼다. 단어를 많이 간직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었으므로 때때로 말이란 위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제 고통을 더욱더 세분화시키고 심화하는 무엇이었으므로 희망, 그것은 소중한 것을 빼앗긴 사람이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그려보는,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입속말로 가만히 중얼거리고 중얼거려보는, 보이지 않는 저 하늘의 날개처럼 흔들리고 흔들리는, 엷고 고운 천 조각이었다.

ㅡ 이제니 '희망'

 

*작가가 붙인 희망에 대한 주석: (어떤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는 바람./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또는 전망.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하기 때문이고 기억하고 때문이다 책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된 단어는 "물원"이다. 작가들은 왜 '동물원"에 그토록 열중하는가도 연구 거리이다. 내가 아는 소설만도 몇 개나 된다. 동물원의 동물들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일까.

사어를 말하며 그들도 박제된22세기 사어 수집가는 책 제목을 따라가는 운명 탓인지 사어 수집가들의 뜻에 따라 그런지 현재 품절 상태다. 도서관에도 잘 없다.  품절된 책만 찾아 읽는 품절 독서가는 아닌데 내가 읽는 책은 어째 품절이 많다. 위로와 함께 기억한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우표 26장 대신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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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09-0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눈이 안졸아 북플에 잘 안들어고 북플애선 댯글도 잘 안남기는데 말얘요. 눈을 희생하며 댓글을 남기고 싶은 페이퍼예요.
김목인을 얘기하시는데 김목경이 생각났을뿐이고, ㅋ~.
아흑~, 우효도 조오쵸~?^^ 자정이 넘어가는 이 시간에 딱입니다여. 호사를 누리고 갑니다, 꾸벅~(__)

AgalmA 2016-09-06 01:12   좋아요 0 | URL
저도 북플은 한 눈에 글을 볼 수 없어서 좀 답답.
그래서 긴 글은 되도록 PC로 보려고 해요.
김목경 저도 생각했었음ㅎㅎ 아니, 그 분이 이렇게 재미나게 글을 쓰시나 하며ㅎ

피곤하지 않으면서 읽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라 저도 이웃을 괴롭히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까다로운ㅎ 양철나무꾼님 호응에 덩실^^

북다이제스터 2016-09-06 0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한국 영화에서 한국 남자들은 비닐봉지를 자주 들고 다니네요, 그것도 까만색...ㅋㅋ

읽어보진 않았지만 <Vanishing Voices>라는 책이 연상되는 글입니다. ^^

AgalmA 2016-09-06 18:17   좋아요 0 | URL
빼먹지 않을 게 또 있죠. 그 검정 비닐엔 뼈처럼 초록 소주가...ㅎ
예전에 북다이제스터님 읽고 싶은 책 목록였나요? <사라져가는 목소리들> 책 본 적 있어서 저도 보고 싶었는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저만큼 다른 이들도 관심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감정은 본능 아닌가 싶습니다.

[그장소] 2016-09-06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봉다리 ㅡ라고 하는!^^
한유주 작가를 잘 몰라서 , ㅎㅎㅎ
Aglama 님처럼 볼 순 없을 것 같아요..전!^^
아, 프로필 바뀐거죠?

AgalmA 2016-09-06 18:22   좋아요 1 | URL
봉다리ㅎㅎ 오랜만에 듣네요.
그장소님은 한유주 작가 아니어도 챙기는 작가가 어~~~~엄청 많잖슴요ㅎ
코드가 맞으니 관심이 간다고 봐야죠^^
작가는 모두의 사랑을 원할까요,자기와 코드가 맞는 독자의 호응을 원할까요. 많은 작가들이 그런 걸로 알고 있고 한유주 작가도 아마 후자겠죠. 코드가 안 맞으면 책 속 내용에 몰입하기 어려우니까. 서로에게 고역; 독서 편식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ㅎ; 우리가 독서를 넓히려는 노력은 자신의 그런 독단을 꾸준히 개선하는 자아 수련이 되는 거죠.
프로필 사진은 마음 내킬 때 자주 바꾸니까...^^

[그장소] 2016-09-06 19:08   좋아요 1 | URL
이상하게 한유주작가는 기회가 잘 안오네요~그치만 Agalma 님땜에 관심생겼어요~ 호기심!^^ ㅎㅎㅎ
아무래도 만인의 연인을 원하겠죠~~ 아..이 작가 이름이 넘 예뻐요~
우리도 작가를 만인의 사랑으로 대하자고~^^
ㅎㅎ프필은 사랑 입니당
프로필없는 분이 친구신청해오면 살짝 난감~
닉넴도 잘모르는데 ...말이죠 . 있는게 훠얼씬 좋아요.^^

AgalmA 2016-09-06 19:18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이장욱 시인/소설가에게 관심 생겼다 말하실 때처럼 기쁘네요^^
한유주 작가 실물은 모델급이죠. 얼굴도 작고 키도 크고. 이름에 정말 잘 어울림~
프로필에 대해선 <특성없는 남자>처럼 살 자유도 주시라능ㅎㅎ

[그장소] 2016-09-06 19:28   좋아요 1 | URL
음음 ..이장욱 작가 ㅡ더없이 애정하잖에요~^^
한마디로 딱 정의하긴 어려운 ㅡ그렇지만 대분분의 작가들보단 확실히 자기 세상이 있는 ~^^
반가우신다니 저는 더 기쁘네요~^^
ㅎㅎㅎ
아 . 자유를 허하노라~! ( 프필자유를 줄게 새집다오!) ㅎㅎㅎ

AgalmA 2016-09-06 19:39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애정받기 시작하면 그런 복이 또 없으니 당연하지 않겠음? ㅎ
자기 세계 확실한 작가가 쓰는 글은 호불호를 떠나 매력 있죠.
삐뚤어지지 않게 헌집 대용으로 애정을 선사하셔야 자유가 발생~ 그러자니 내가 또 괴로워지는 우로보로스 상황ㅎㅎ;

[그장소] 2016-09-06 20:17   좋아요 1 | URL
ㅎㅎㅎAgalma 님 덕에 오늘저녁을 웃으며 보👋내요~!^^
^^ㅋ 한번 좋아하면 그냥 쭉 좋은 걸로~
 

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특히 좋았던 장면을 묻는다면 나는 이걸 말하겠다. 로빈슨이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방드르디(프라이데이) 때문에 모두 잃고 웃는 장면과 때때로 물시계 작동을 멈춰 시간을 무화(無化) 시키는 장면이다. 예속을 벗고 자유를 얻는 멋진 장면이었다. 병철심리정치에서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그걸 보여줬다. 하지만 태평양의 끝이었기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로빈슨의 천애 고독(天涯 孤獨)이 이곳에서는 무연사회(無緣社會) 현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태평양의 끝에서도 이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는 유대를 갈망한다. 관계 속에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우리는 버리지 못한다. 이는 유와 예속 혹은 자립과 의존 문제이기도 하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노동-관계에 얽매여 있다. 선사 시대 사냥이나 로빈슨의 경작이나 김씨표류기에서 김 씨가 짜장면을 먹기 위해 옥수수를 키우는 행위는 순수한 노동이었겠지만, 이 소비 사회에서 노동은 착취 관계로 이어진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성과 성과를 높이기 위해 기분이라는 자원을 동원한다. 규율사회의 매체인 합리성은 생산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한계에 봉착한다. 이제 합리성은 강제와 장애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합리성은 하루아침에 융통성 없는 경직된 매체가 된다. 합리성은 감성으로 대체된다. 감성은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반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분의 자본주의, 감성 자본주의는 자유를 이용한다. 기분은 자유로운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환영받는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주체성을 착취한다.

 

한병철 심리정치 

 

 

 

 

육체가 얽매여 있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우리의 .

는 정보 차단으로 생각을 주입하거나 정보 과잉으로 판단력을 잃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빅데이터를 가진 권력 집단은 정보 차단과 정보 과잉을 동시에 쥐고 있다.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보며, 볼 수 있는 것만 볼 뿐이다. 외적 통제뿐만 아니라 심리 조작까지 같이 이뤄지고 있다. 일례로 예스 세트’, ‘더블 바인드 기법’, ‘서브리미널 효과를 살펴보자.

  

 

 

스 세트는 상대가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방법으로, 신뢰성을 높여 최종적인 질문에도 yes라고 대답하도록 이끄는 방법이다.

 

블 바인드 기법’은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랄 때, 그 일을 할 생각이냐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선택지를 준비해 질문하는 방법이다. 복수의 선택지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결과로 유도된다. 이 기법은 영업이나 판매 등에서 응용되고 있다. 자동차를 살까 말까 갈등하는 고객에게 이 장치를 달아놓을까요?” 등등을 말하며 구매를 기정사실로 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법이다.

 

브리미널 효과는 판매하고 싶은 상품은 긍정적인 이미지와 연결해 반복해서 내보내면서 경쟁 후보는 불쾌한 영상이나 음악을 이용해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한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잠재의식을 자극하는 위험한 심리 조작이라 광고계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암암리에 쓰고 있다.

 

카다 다카시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 참조 (* 2016 개정판 심리 조작의 비밀》)

 

 

 

예스 세트’, ‘더블 바인드 기법은 밀턴 에릭슨이 심리 치료를 위해 개발한 기법이지만 심리 조작으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FBI가 비밀리에 심리 조작 연구를 지원했다면, 우리나라는 국정원이 비밀리에 댓글을 다는 뭐 그런 상황.

즉흥적인 기분, 척하는 삶, 셀프 노출증 속에 우리 이성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군주는 신의나 성실을 정말로 갖추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갖추고 있는 척을 해서 그렇게 여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키아벨리 군주론

 

 

 

심리 이용은 오래전부터 정치술에 중요한 요건이었다. ‘심리 정치는 신자유주의만의 특색이 아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버트 제이 리프턴이 쓴 사상 개조와 전체주의의 심리학(1961)을 보면 전체주의, 테러집단, 다단계 집단, 사이비 종교가 심리를 조작하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첫 번째, 외부의 정보나 사람의 접촉을 차단해 내면적인 생각까지 규제한다.

두 번째, 신비감을 조성해 목적을 위해 사명을 다하도록 신념을 만든다.

세 번째, 순수성을 요구해 다른 것은 불순한 악으로 만든다.

네 번째, 자기 폭로와 자아비판을 하도록 해 동료 사이 연대감을 높인다.

다섯 번째, 그들만의 교리를 과학적인 이념으로 만들어 의심하는 것을 죄로 만든다.

여섯 번째, 교조주의적인 정해진 표현을 사용한다.

일곱 번째, 이념을 개인보다 높은 위치에 놓는다.

여덟 번째, ‘생존 불허라는 사고방식으로 복종을 강요한다.

 

카다 다카시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 참조 (* 2016 개정판 심리 조작의 비밀》)

 

 

 

 

밀턴 에릭슨 경우처럼 리프턴의 책도 심리 조작 용도로 많이 악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자본의 간계만이 아니라 종교, 이념, 사람으로 인한 심리 조작으로 사람은 갖가지 형태로 착취당해 왔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거다. 이득을 얻고자 하는 심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사회 속에서 애착과 신뢰 관계는 생존과 관련되어 있고 문제가 발생하는 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피하기 어렵다. 의존성 인격 장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속으면서 또 믿을 수밖에 없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우린 안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마르크스

한병철 심리정치

 

 

로빈슨으로 인해 방드르디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방드르디를 통해 로빈슨은 새로운 자유를 깨달았다. 방드르디가 다시 로빈슨의 하인이 되긴 하지만 이후 친구이자 동료 관계로 변화하는 과정은 자유와 종속의 상관성을 보여 줬다. 그렇다면 그 끝은 어떻게 되었나. 좋은 작품이 늘 그렇듯 셸 투르니에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이 속했던 문명을 거부하고 섬으로 돌아오지만, 경이롭게 자유롭던 방드르디는 새로운 문명에 심취해 섬을 떠난다. 그리고 죄디(목요일 - 어린아이들의 일요일)가 나타난다.

관계는 또다른 환경과 관계를 만나며 끝없이 변증법처럼 이어진다.

동전의 양면 같은 자유와 예속처럼 사유 심리도 한 몸에 있는데, 과연 사유하는 백치를 신뢰할 수 있을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했지만 어쩐지 의심만 가득한 내 노력이자 한계로 이 글도 남는다. 끝이 아닌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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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9-04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심리정치>에서 아쉬웠던 게 글의 결론이었는데, 그 부분을 마지막에 지적해주시네요^^
아마 한병철은 ˝빅데이터˝를 토대로 한 심리정치에 주목했을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예전에 말씀하신 거 듣고 읽었는데, 아쉬운 점도 분명했지만 여러모로 제게 자극이 많이 됐었어요 ㅎㅎ
삐삐밴드 새 앨범 나왔을 때 엄청 좋아하면서 계속 들었었는데.. 작년인가요 벌써? 오랜만에 들으러 가야겠어요..^^

AgalmA 2016-09-04 19:47   좋아요 2 | URL
저는 한병철 저자 책에서 늘 아쉬운 게 밖의 것을 얘기하지만 늘 철학 안에서만 머문다는 느낌입니다. 사유에서 머무는 바보란 표현처럼 딱 그래요. 물론 그것이 들뢰즈의 침묵 시위처럼 세상을 향한 발언의 포즈로서 자신만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죠. 타인이 보기에 아쉽더라도.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대중으로서의 욕심일까요ㅎ;

말씀하신대로 한병철 저자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집중해 그 비교로 규율 메커니즘 오웰 1984와 푸코 등을 가져왔죠.
자유로 시작해 자유로 끝내면서 자유를 추동하는 심리 근본은 안 건드리고 신자유주의 간계만 다루는 외형이 저는 맘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거론하는 게 많아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건 저도 인정~

삐삐밴드, 예전의 참신함이 살아 있어서 반갑더라고요^^

2016-09-04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04 19:50   좋아요 2 | URL
ㅎㅎ 마지막 문장 저도 아주 공감. 매우 많은 사유들을 향유하고 있어 제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죠. 그게 한병철 저자 글의 매력이라면 매력?ㅎㅎ

[그장소] 2016-09-04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의나 성실을 정말로 갖추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갖추고 있는 척을 해서 그렇게 여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ㅡ!!!
마키아벨리의 통찰 ! ㅎㅎㅎㅎ 날카로운 반면 지금의 웃픈 현실까지 두루 생각한 이 괴물!

AgalmA 2016-09-04 23:55   좋아요 1 | URL
거짓도 자꾸 말하면 믿게 된다는 것과 상통하죠.
마키아벨리는 `암시` 정도로 말했다면 요즘은 찌라시 폭로전이라 정말 노골적이 됐죠. 그래서 뭐 어쩔 건데 하는...이게 자정작용으로 고쳐질 현상인 건지 암담...

[그장소] 2016-09-05 00:19   좋아요 1 | URL
암시에서 암담으로 라임 넣어 끝내주는 울 Agalma 님~ 나날이 라임기술이 늘어가는 ~^^
( 이 거 이거..절망적 얘기에도 웃고 있는 나는 삐에로?) ㅎㅎ

AgalmA 2016-09-05 00:24   좋아요 1 | URL
둥지는 잃지 마시고요. 도시의 삐에로님ㅎㅎ 아니, 둥지가 너무 많으신가a;;;
나는야 암굴왕~ ㅋ 암기나 좀 잘 해라! 윽

[그장소] 2016-09-05 00:36   좋아요 1 | URL
아 ..추억의 노래~ ㅎㅎ 그 노랫말도 좋은데 ~^^ 둥지라면 ㅡ끊여야...하는 ? 라면인가 아닌가...둥지냉면과 살짝 헷갈려오고 .^^

AgalmA 2016-09-05 01:35   좋아요 1 | URL
그 노래 노래방에서 부르면 분위기가...옛날 노래들은 어렵지 않으면서 페이소스를 끌어내잖아요. 100년 뒤에도 유재하 노래는 사라지지 않겠죠. :)
둥지냉면 먹고 싶...🤔

[그장소] 2016-09-05 02:45   좋아요 1 | URL
우린 먹고 싶은것도 많은 사람들 ~^^
100년뒤 ㅡ유재하는 몰라도 우린 서로 기억에도 남지 않을텐데 ..ㅎㅎㅎ
다음 생을 예약해 둘까요?^^ㅋ

AgalmA 2016-09-05 02:48   좋아요 1 | URL
생각하고도 싶지 않지만 담 생에 태어나면 제가 라면 살게요. 기억하시라능~ 그때도 라면은 있겠지;
왜 라면이냐! 제가 지금 라면을 먹을 것이기 때문ㅎ

[그장소] 2016-09-05 02:52   좋아요 1 | URL
얼른 ㅡ얼른 한젓가락 뜨고 ~~ 김치도 한점 ~ 먹고 ~,
그러고도 심심하면 ㅡ다음 생 ㅡ라면 예약 이야기로 계속 이어보자고!^^ ㅋㅋ

AgalmA 2016-09-05 03:44   좋아요 1 | URL
담 생에도 만나면 우리는 `자별한` 사이.
오늘 읽은 책에서 봐서 한번 써먹어 봤음요~
한글은 낯설어도 어감으로 어떤 뜻인지 잘 와 닿는데, 한문 표현은 만나자는 건지 헤어지자는 건지 애매한 게 많음

자별하다:친분이 다른 사람에 비해 각별하다

[그장소] 2016-09-05 06:09   좋아요 1 | URL
본디 남다르고 특별하며 , 더욱이 친분이 남보다 특별하여 , 우린 이 생도 자별한 걸로 갑시다!^^
다름 생은 말할 것도 없고!^^
꼭 ㅡ 다음 생엔 라면 먹고 갈래요? 이 대사를 해볼것이야~!!^^ㅋ
 
과학을 위한 생각이 아닌 생각을 위한 과학 - KOREA《SKEPTIC》창간호

 

어떤 가족의 확신에 대해서

 

2016820일 뉴스 중에 동생이 애완견 악귀에 씌어서 죽였다는 기사가 있다. 오빠 씨와 여동생, 어머니는 애완견이 악귀가 들었다고 생각하고 죽였고, 이후 그 악귀가 여동생에게 옮겨간 걸로 판단해 두 사람이 그녀를 살해한 사건이다. 이런 구마(驅魔) 행위로 인한 죽음은 콜린 윌슨 인류의 범죄사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흔하다. 한국에서만도 한 달이 멀다하고 구마(驅魔) 행위로 인한 살인 뉴스가 검색된다.

정신 병력도 없는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살해할 만큼 확신하는 이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들이 '악귀'라고 판단한 근거가 어디에서 왔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어떤 사람의 확신에 대해서

 

최근 <궁금한 이야기 Y>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는 자칭 의학 비평 작가로 활동한 허현회 씨를 다뤘다.

<그것은 알기 싫다> 과학과 허현회https://soundcloud.com/xsfm/189b

 

 

 

 

 

 

 

 

온라인 서점에 허현회 씨 책이 다수 등록되어 있는데,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72가지 이유,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등이 주목받았다고 한다. 사이비 과학이라는 평이 자자한데도 책 내용을 신뢰하는 리뷰가 더러 보여 섬뜩했다.

허현회 씨가 저런 생각을 하고 주장을 내세운 여러 가지 이유를 추정해 봤다.

 

1. 의술이 아닌 돈벌이로 변질된 한국 의료 체계에 대한 불만과 불신

2. 확증 편향에 빠진 오만함

확증 편향: 자신의 가치관, 기대, 신념, 판단에 부합하는 확증적인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편향된 현실 인식 방식

3. 노이즈 마케팅 효과 : 철저한 검증 없이 '의학 지식'이라고 언론에 발표하고 그것이 논란이 돼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좋든 나쁘든 그의 인지도와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

 

일명 카레 놀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허현회 씨가 해외 기사에서 'Health Care''건강한 카레'로 해석해 기사 트윗을 올렸고, 트위터리언에게 조롱거리가 된 일이다. 논란이 많았던 허현회 씨 주장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킨 사례였다. 그 사건으로 허현회 씨는 트위터에서 탈퇴했다.

관련 트위터 자료 http://ppss.kr/archives/11300

 

결핵과 당뇨를 앓았던 허현회 씨는 자연 치유를 고집하다 얼마 전 사망했다. 문제는 그 만의 죽음이 아니라는 거다. “술과 담배, 성관계를 많이 하고 짜게 먹어도 좋다라는 황당한 주장에도 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의 죽음이 모두 허현회 씨 탓이라고 할 수 없다의학계가 허현회 씨 주장이 너무 터무니없어 논할 거리도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게 더 일을 키웠다. 커뮤니티를 만들기 쉬운 요즘, 자신의 불안과 불만을 달래줄 것을 찾는 사람들은 쉽게 모인다. 건강에 대한 것은 늘 사람들의 관심사다. 정보인지 독인지 검증도 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나쁘다고 생각했던 일을 전문가라는 사람이 좋다고 하니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받아들인다.

너 자신을 가장 의심하라.

 

 


 

확신의 긴 그림자

 

위에서 논한 어떤 가족의 착각이나 허현회 씨의 착각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악령이라 판단하는 자신을 의심하기보다 스스로 악령에 빠져 살인을 저지른 것과 의학은 사기다라고 판단하는 자신을 의심하기보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일찍 자초한 것이 말이다. 생활에서도 과학에서도 그들의 사례가 최초이자 최후가 아니라는 게 안타깝고 두렵다.

 

일찍이 마스 쿤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 전체에게 확증 편향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특정 과학 공동체가 인정한 과학적 성취(패러다임)에 확고히 기반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는 정상과학(nomal science)은 새로운 발견이 목적이 아니라 인정받은 정통을 이어받는 성격이라고 말이다.

 

 

 

“18세기 내내, 운동과 중력에 관한 뉴턴의 법칙들로부터 달의 관측된 운동을 유도하려고 했던 과학자들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 결과 일부 학자들은 역제곱 법칙 대신에 가까운 거리에서는 그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법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는 것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퍼즐을 정의하고, 옛 퍼즐들을 풀지 않아야 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기존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다가 1750년에 마침내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게임의 규칙에서 한 가지를 바꿈으로써 비로소 대안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p122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E.H.역사란 무엇인가를 많이 떠올렸다. 두 사람 다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인 '역사'와 그에 대한 '정의'의 모순을 따지는 데 모범을 보여준다.

토마스 쿤이 보여준 합리적 회의주의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도 곧 읽어봐야 할 거라 생각했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그리 합리적인 구조로 이뤄진 게 아니라고 말한 트겐슈타인을 다시 집중해서 봐야 할 때인지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 속에서 큰 불행과 좌절을 느끼지 않고 만족하며 산다면 운일까 복일까. 하지만 우린 개인으로서만 살 수 없다. 사회인, 젠더, 부모, 자식, 친구, 타인 여러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내 작은 확신으로만 산다면 낭패다. 우리 조상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과 함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라는 속담도 줬다. 필요한 것만큼이나 경계할 것도 우리 가까이에 있고 신경 써야 한다. 

내 앎과 행동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더 치열해야 할 고투라는 게 또 버거운 오늘이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문 독서가 리인지 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먼 훗날엔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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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29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걸보고 떠올리는건 참 다른 ㅡ 전 스티븐 킹 ㅡ애완동물공동묘지 ㅡ를 생각했는데 ...^^
아하핫 ~ 무식이가 뚝뚝 ...죄...송...푸하핫

AgalmA 2016-08-29 02:53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무식이면 저는 무다리 -,.-?
그장소님이랑은 유머가 안 들어가면 대화가 아닌 듯한 기분ㅎ;

서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세상은 더 풍부해진 거 잖습니까. 그 때문에 복잡하고 아플 때도 많지만~_~

[그장소] 2016-08-29 01:26   좋아요 1 | URL
퍽 몹시 무진장 위로 되는거 있죠~~^^
진지하면 배고파서 안되어요!^^
넘 진지하게 정색하고 물으면 아파 ..ㅋㅋㅋ

달라서 풍부한 상상 마당~~!! 좋음!!
우린 같은 방향으로 보지않아 같이 할 수 있는거라는!!

북다이제스터 2016-08-29 0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웬만하면 책 읽기 중도 포기 잘 안 하는데요, 올해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는 1/3 부분에서 포기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이미 뼈속 깊은 회의주의자라 새삼 새로울 것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ㅎㅎ

AgalmA 2016-09-02 03:02   좋아요 1 | URL
마이클 셔머 책이 스켑틱 내용과 상당수 겹치는 거 같아 읽을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북다이제터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도서관에서 빌려 짧게 스캔하는 정도로 봐야겠네요~ 도움 말씀 감사^^
회의주의자 환영합니다~ ㅎㅎ

cyrus 2016-08-29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에 뒤늦게 페미니즘 바람이 분 것처럼 스켑티시즘 역시 국내에 정착되어야 합니다.

AgalmA 2016-09-02 02:59   좋아요 1 | URL
스켑티시즘ㅎㅎ 요즘 페미니즘으로 소란하죠. 긍정적인 관심과 효과를 낳길 기대합니다. 그런 와중에 스켑틱 9월호가 성 이슈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역시 스켑틱이군! 하며 장바구니로^^

물고기자리 2016-08-30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섣부른 확신은 다른 의미에서 보면 빠른 포기인 것 같아요. 빨리 정리해서 서랍에 넣어 놓고 다신 열어보지 않겠다는 의미로요.

또 다른 면에선 폭력이 되기도 하죠. 확언도 마찬가지고요..

이래저래 생각하며 사는 건 참 어렵네요;;


갑자기 가을 같아졌어요^^
A 님 독서(꼬리에 꼬리를 무는)에서 양식을 섭취하고, 제 영혼을 살찌우겠습니다! ㅎ

AgalmA 2016-09-02 03:24   좋아요 1 | URL

정보를 빨리빨리 처리하려는 인간 뇌구조의 단점도 있겠죠ㅎ; 가치관과 행동의 기반이 사실 턱없이 부족한데도 우린 그걸 잘 모르죠. 심리 관련 책 보니 그게 문제가 될 때를 ˝터널효과˝라 하더군요

가을이라 물고기자리님 독서에 물이 오르겠네요^^!
구워먹지 않을테니 리뷰를 내놓으세요~ㅎㅎ

[그장소] 2016-08-31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봐요! 서재주인! 저 댓글들 얼른 답하시라궁!! ㅎㅎㅎ
바쁜가봉가~~^^ㅋ

AgalmA 2016-09-02 03:09   좋아요 1 | URL
바쁘신 분이 남의 서재 댓글 관리까지ㅎㅎ; 그장소님 서재에 댓글 테러 할까 말까 봉가~

[그장소] 2016-09-02 03:22   좋아요 0 | URL
나 ..한가해요! ㅎㅎㅎ 책보고있는데 ㅡ뭐가 바빠요!^^ 여긴 우뢰가 막 굴러다녀요..으르르 우르륵~여기저기서 번쩍! 잠깐씩 기침처럼 비가 쏟아지고요!^^

AgalmA 2016-09-02 03:26   좋아요 1 | URL
여기도 그랬어요. 제가 수년째 소중하지만 막 키우는; 화분이 구르고 그래서 부랴부랴 밖에 나갔다가 쫄딱;_;) 지금은 귀신같이 사라짐. 요즘은 날씨가 악마에 귀신에 다 해먹으려는 기세ㅎㅎ;;

[그장소] 2016-09-02 03:37   좋아요 1 | URL
날씨 같은 ㄴㅗㅁ˝ ㄴㅕㄴ` 이런 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이 변덕같은 날씨에도 집 앞 정자에 젊은 청년이 연애에대해 친구에게 아까부터 계속 일장 연설중임..ㅎㅎ 사는건 연애구나 ..저렇게 치열하니..ㅎㅎㅎ 싶은 시간~~^^
그래서 화분은 무사히 구하셨오~~?

AgalmA 2016-09-02 03:51   좋아요 1 | URL
저랑 같이 살면 이런 것도 견뎌야 한다 이젠 적응할 때도 된 애들이죠ㅎㅎ 불쌍한 화분 녀석들...
제 집 앞도 늘 문전성시; 여기가 경찰서인가 싶을 때도 있음;;
연애싸움, 집안싸움(형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하다가 시끄럽다 누가 말하니 공손히 죄송합니다 하고 나서 다시 고래고래 소리지르다 울고 그러다 엄마가 말리며 동네 일주를 하던;;;), 직장문제 토로(사장님 그 인간이 어쩌고 저쩌고) 기타등등 바이올린 짱짱

[그장소] 2016-09-02 03:49   좋아요 1 | URL
ㅎㅎㅎ연애이야길 시사토론하듯 열띤 목소리로 떠드는 열정이 대단한데 한쪽은 그냥 별 말없이 듣기만 해요!^^ 다행이 오늘은 같은 일행중 여자가 빠져서 과시적 욕설이 안나오고...ㅎㅎㅎ
이 동네는 너그럽네요~ 저런 열정에~^^
기르는 화분이 있다니 ..그건 부럽네요! 전 봄쯤 무 꽃이후 식물은 더 안기르는중...시체처리 어려움..안습임!!^^;;

AgalmA 2016-09-02 04:15   좋아요 1 | URL
무꽃 앙증맞고 이쁘던데^^ 다 그렇게 노란색인가... 시체처리ㅋㅋ 저도 괜히 키우다 죽일까봐 겁나서 요즘은 잘 안 사요^^; 봄 되면 화분 가게 지나가는 게 괴로워요ㅎ;;
있는 애들 죽는 날까지 같이 살자 그런 맘으로 같이 사는데, 의외로 오래 사는 장수형 식물들이 있음! 선인장은 그 질긴 목숨 보는 것만도 숨막혀 잘 안 삼. 집에 있는 유일한 선인장(선물로 받아서;)이 벌써 십년 째 살고 계심~ 나보다 오래 살 지도!

과시적 욕설ㅎㅎ 공감!

[그장소] 2016-09-02 04:16   좋아요 1 | URL
울집 무꽃은 연한 보랏빛였는뎅~^^ 무꽃이 노랗게 핀건 어릴때 ㅡ본것같아요 .
그러고보니 보라 무꽃도 신기했음!!
선인장 ㅡ십년 ㅡ 곧 이무기 되려냐~^^ㅋㅋ
아 사람만큼 질기네요 ..우린 곧 죽을 것처럼 사는것 같아요~^^ 앞도 없고 뒤도없이 ..그쵸?

밤 산책 나감 ㅡ남의 집 화분으로 대리만족한다는!

AgalmA 2016-09-02 04:45   좋아요 1 | URL
오, 보라색도 있군요. 역시 다 같으면 재미없지ㅎㅎ
이무기ㅋㅋ선인장은 속내야 자세히 모르겠고 내내 살 것 같은 무서운 자태ㅎㅎ; 선인장에 대해 누가 단편썼던 게 있던 거 같은데...김중혁 씨였나 한유주 씨였나a
저도 주택가 걸을 때 그 집 식물 생활계를 유심히 관찰합죠ㅎ 어느 집에서 거북이 위에 닭이 올라탄 형세의 화분을 보고 인도전설에서 거북이 위에 올라탄 코끼리 세계상을 반영한 화분인가 한참 웃음ㅎㅎ;

[그장소] 2016-09-02 0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대화가 이젠 골목 탐험까지 나올기세~^^
은근 국내 소설도 많이 읽으신다는!! 다독다독!!
여긴 좀 시골틱해서 골목에 화분보다 쑥갓이나 상추..
그런게 더 많은데 ~~^^
와 또 막 쏟아지는중!! 빗방울

AgalmA 2016-09-02 04:59   좋아요 1 | URL
우리가 번화가 체질은 아니다보니ㅎㅎ

다독가는 그장소님이잖음요ㅎ~ 요즘 문학 책을 잘 안 읽고 있어서 뜨끔;

역시 먹는 걸 심어야...봄마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그냥 지나가고ㅎㅎ

투시럭투시럭 토시락토시락(어느 시인의 표현) 빗방울 형제가 창가에서 저도 그래요.
위 시 말고 빗소리에 대한 인상깊은 시가 있었는데 기억이...아아, 메모 좀 해둘걸...흑

[그장소] 2016-09-02 05:09   좋아요 1 | URL
시 ㅡ생각나면 들려줘요!^^
아..우리 대화 반만 블로그에 올려도 거의
하루분인데!^^ ㅎㅎㅎㅎ
아..소설만 읽다 다른책 읽으려니 전환이 왤케 안되던지 ...ㅎㅎㅎ

AgalmA 2016-09-02 05:17   좋아요 1 | URL
누구나 하자고 들면 그장소님과 대화로 블로그 글 정도는 만들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ㅎㅎ 국내 댓글계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ㅋ

저도 요즘 문학이 안 읽혀서 울상; 가을부턴 노력해 봐야죠;; 민음사 북클럽 책도 받을 거고 하니;;;

[그장소] 2016-09-02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번에 민음 북클럽 뭐 한다고 문자왔던데 ..기부데이 ㅡ어쩌구..ㅎㅎㅎ
댓글계 전문 인터뷰어...탐나는 데 ㅡ그런타이틀 ~ 근데 전 깊이가 없어서 패쓰 ^^ㅋ
안 읽히면 무조건 소리내 음독 ! 들으면서 한번 더 생각하는것 같아요 .. 그렇게라도 한다는 ...속도는 느리지만 ..울 문학 사랑합시다~
이번 오늘의 작가상 ㅡ장강명작가 .. 댓글부대가 받았어요 . ㅎㅎㅎ 한번을 못맞춘다는 ...수상자 ..ㅠㅠ;

AgalmA 2016-09-02 06:09   좋아요 1 | URL
파주까지 갈 정도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아 전 패스~ 기부도 귀찮아서 동네 도서관에 그냥 해요ㅎ; 2000년대 이후로만 받아서 그게 좀 난관...

그장소님, 요즘은 깊이보다 넓이가 승부수 같던데.... 지식인들이 이를 갈려나ㅎ;

음독,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서구에서 책 귀하던 시절에 살롱에서 그렇게 책 읽었다죠^^ 우리로 치면 서당? ㅎㅎ

그렇더라도 댓글부대를 읽을 정도로 호기심 발동은 안 나는데...흐헛;

[그장소] 2016-09-02 06:09   좋아요 1 | URL
전 벌써 읽은거라 오늘의 작가상 ㅡ이전처럼 원고투고를 받음 싶어요 . 상이 너무 많고 겹치는 단편들도 많고 ..희소가치 떨어져서 어쩐지 좀 그래요 ..뭐 작가님들은 상 많을수록 좋겠지만 ㅡ식상해진기분 ...ㅎㅎㅎ
댓글부대 ㅡ 그의 작품중 최로 라곤 못하겠어서 ..그냥 그렇네요~^^
저도 파주는 패쓰 ㅡ ^^
아 ...지식 얇고 넓게 ㅡㅡ;;
음! 아가씨 ㅡ에 나오는 바로 그거~!

양철나무꾼 2016-09-0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저 요즘 서사무엘에 그렇지 않아도 확 꽂혔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책들은 말걸기 넘 어렵고,
그래도 음악은 제가 님의 부분집합 정도 될 것 같은데,
교집합이 있어서 좋아요~^^

날이 차요, 감기 조심 하시구요~^^

AgalmA 2016-09-04 10:05   좋아요 0 | URL
요즘 인디계에서 나온 멋진 뮤지션들 너무 많더군요.
혁오, 우효도 좋죠^^
정녕 양철나무꾼님이랑 음악 교집합밖에 없는 겁니꽈 ;_;)...

건강까지 챙겨 물어주시다니 몸둘 바를;;ㅎ
양철나무꾼님도 감기 안 걸리게 양말 꼭꼭 챙겨 신고 다니시고요ㅎ/

2016-09-05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05 19:59   좋아요 0 | URL
허현회씨 책을 다 보셨다니 장단점을 잘 아시겠네요.
자연치유 효과도 당연히 있는 걸 알지만 만병통치약처럼 주장하는 건 곤란하죠. 특히 불특정다수를 향할 땐. 의료기관과 의사에 대한 불만과 공감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될 일.
갈수록 자기 고집에 빠져 죽음을 자초한 게 안타까운..
예전에 남성연대 성재기 씨가 살 수 있다는 걸 자신이 증명해 보이겠다며 한강에 투신해 어이없이 사망한 사건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암튼 반갑^^

오쌩 2016-09-07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현회는 분명 전문가라고 할수 없죠.
하지만, 전문가에 의해서 유통되는 정보를 신뢰할수 없는 사회이고, 또 건전성을 확보할수 없으니.
저는 고인의 노력이 모두 희화화 되거나 선무당 취급되는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왜 한인간이 저토록 현의료에 불신을 하게 되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포커스 하는게 중요한데 말이죠.
소위 전문가라는 양반들 비타민에 대한 복용의 유용성에도 이견이 있고 방송에 나와 검증되지 않은 논문 내용도 대중에게 소개하는걸 보면...

아무튼 대중에게 전문가의 영역이란 장막을 둘러친 지식에 대한 고발은 계속되어야 할것 같아요. 제2의 허현회가 아닌.

AgalmA 2016-09-08 23:33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것 모두에 공감합니다.
제2의 허현회와 언론은 계속 양상될 테지만 그걸 검증하려는 노력도 함께 가는 길밖에 없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참 아득한 삶입니다.

오쌩 2016-09-0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hankookilbo.com/m/v/b7fa3c38b05742c099d9efa2e6a44afc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 남깁니다.^^

AgalmA 2016-09-08 23:33   좋아요 0 | URL
참고 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갠지즈 강물에 세균을 죽이는 성질이 있다는 말은 허현회 씨가 세균이 많은 계곡물이 몸에 좋다라고 말한 것과 똑같은 논리네요. 허허;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대한 허실은 <스켑틱> vol.3에도 잘 나와 있죠.

 
자화상 작가의 옮김 1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자화상이란 제목처럼 자서전에 가까운 이 소설에는 특별한 줄거리라고 할 게 없다. 에두아르 르베의 짧은 프로필이 더 소설 같다.


 

 

 

이 소설은 사건 중심으로 진행되는 외부적 소설이 아니라 오로지 르베의 생각과 감정 선을 따라 흐르는 내부적 소설이다 1965년 생으로 겪은 시대상과 자칫 흩어졌을지도 모를 일상과 풍경과 생각들을 잘 포착하고 있. ‘의식의 흐름 소설과는 다르다. 르베는 플롯, 인물, 배경, 사건 같은 구체적인 소설 장치를 전혀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가상의 '지면(紙面)' 공간만 있다고 봐야 할 텐데 그래서 더 독특하다.  소설 속에 그의 의향이 드러나 있다.

 

 

나는 단편소설을 쓰지 않는다. 나는 희곡을 쓰지 않는다.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나는 추리소설을 쓰지 않는다. 나는 공상과학소설을 쓰지 않는다. 나는 단편적인 글을 쓴다. 나는 내가 읽은 이야기 또는 내가 본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고, 인상들을 묘사하고 의견들을 표명한다. (p117)


 위 태도는 이 소설이 일기나 수필이 아닌지 의심스럽게 한다. 문장 구조 또한 그렇다. 불필요할 정도로 강조된 라는 주어와 함께 ‘-했다,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문장들은 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나뭇잎 점처럼 하나둘 떨어져내린다. 어떤 격정도 없이.

다음 문장은 또 어떤가.



 거울을 보면서 얼굴을 돌릴 때면 더 이상 나 자신을 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p22)


에두아르 르베는 지면에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지만 그도 우리도 그를 완벽히 볼 수 없다. 비추고 있지만 비친 그것은 의문스럽다. 이게 진짜 그 일까? 이 거울상은, 이 자화상은 유일무이한 무엇이 아니라 그때 혹은 이 순간에 남은 어떤 결과 중 하나이진 않은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존재하는 양상이 된다.



 

소설의 정의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라면 에두아르 르베의 소설에선 허구가 없다많은 사람들이 유독 소설에서 개연성과 진정성을 요구한다본질이 허구인데 그것을 위해 더 많은 사실이 필요한 것은 소설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건 허구를 즐기기 때문인가, 사실을 찾기 위함인가. 둘 다라고 말하긴 쉽지만  글로 쓴다면 둘 다 성취하긴 어렵다. 그리고 작가의 입장이 우리와 일치하기도 어렵다. 르베는 말한다.



내 생각들이 내 말들보다 더 내 스타일이다. (p42)

   

문체 특성이 르베가 흠모한 조르주 페렉(작가, 비평가, 영화제작자)과 기 드보르(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작가, 영화 제작자)와 비슷하기도 한데, 본인이 직접 밝히기도 했지만 그는 이 글을 소설이라는 틀로 써 내려가지 않았다. 독학파인 그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 대중 소설을 쓰는 작가보다 예술가로서의 창작 자세가 더 강하게 읽혔다.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는 창작이었다면 이보다 정교하고 친절했을 것이다. 인정을 받든 받지 않든 그에겐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왜' 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어떻게'가 더 앞서 있다.

 

 

나는 멀리서 베르사유를 그리기보다는 가까이서 껌을 그리고 싶다. (p25)

 

나는 장르 구분이 차후적이며 부차적이지 선행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공감을 구걸하는 노예가 아니며, 장르 구분도 법이 아니다. 지금껏 수많은 창작물들이 고정관념을 깨면서 더 의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줬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작품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쓰고 노래하고 만든다. 창작자에겐 만족이나 가능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그 만듦 속에 있기에.

사람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려는 이야기 형식으로 소설을 좀 더 넓게 본다면 이 소설도 분명 소설이다. "에두아르 르베"라는 한 인물이 살다간 유적으로.

르베가 삶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스타카토(한 음 한 음씩 또렷하게 끊는 듯한 연주)처럼 담은 문장 흐름 속에는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묘한 정서가 있다. 나는 이것이 에두아르 르베가 만들어낸 소설적 특징이자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날 르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살아 돌아와 "정말 모르겠어? 이건 시도 소설도 아니야. 이름표 따윈 당신들에게나 필요한 거지."라고 말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는 내 사물들이 슬플 때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모른다. 나는 기념물보다는 유적을 더 좋아한다. 나는 동창회에서 조용히 있는다. 나는 망년회에 대해 아무런 반감이 없다. 내가 언제 죽든 열다섯 살은 내 인생의 중간이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나는 단 한 번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나는 죽어가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p144)

 

 

 

 

 

 * 에두아르 르베 사진작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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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2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머릿속에 시적 상상력이 넘쳐보여요!
산문체여도 시같은 ..구석이 엿보인달까...!^^

AgalmA 2016-08-29 06:38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제가 시면 어떻고 소설이면 어떤가 했다는^^ 한국에서는 뭔소리야! 내가 지불한 책값, 투자한 시간 값을 해라! 요구로 가득하지만.

[그장소] 2016-08-29 22:15   좋아요 0 | URL
그쵸~?? 장르나눔이 애매한것 .그걸 가는것도 힘든일 같은데 ..우리나란 꼭 분리하려고 한단 말이죠 ..( 난 아닌것마냥 ~^^;;)
 
더스티 블루 - 카엘 탈라스의 진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6
제니페르 D. 리샤르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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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때문에 슬퍼졌는지 안다 해도 우리는 그 슬픔을 근원부터 해결할 수 없다. 쏟아진 우유를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것을 슬픔의 자리로 가져와 바꾸는 노력을 할 뿐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행복은 그런 대체 행위들인지도 모른다.  행복은 일시적일 뿐 항구적일 수 없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이럴 때 사람은 종교로, 돈으로, 권력으로, 사랑으로, 꿈으로 각기 달려 간다.

 

소설 초반부터 울적함이 밀려왔다. 소설의 내용도 구성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서였다. 내겐 좀 식상했는데 이럴 땐 소설을 다 읽고 다가오기 마련인 작가와의 대면이 빨리 시작된다. 그리고 작가와 하는 무언의 대화인 책 읽기 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내가 짐작하는 그것입니까.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이 바보 같은 질문은 국제 공용어인 듯했다. 내가 뭘 생각하든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ㅡ 『더스티 블루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든 창작물에는 DNA처럼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게 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열망이다.   그 이전에 있었을  ‘잘 하고(살고) 싶다’가 대개 실패하기 마련이어서 말이다.  

작가든 등장인물이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고 싶다'라는 열망엔 새로 시작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자신감이 녹아 있다. 과연 그럴까.

 

 

스무 살 생일 파티가 끝나고 숙취에서 깨어난 라디슬라스 바랑은 카일 탈라스라는 전도 유망한 인물로 깨어난다. 자신이 알던 세계의 정보들이 재배치된 세계에서 그는 전혀 다른 삶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 그의 상상과 호기심은 이 세계와 불화한다. 그럴 수밖에. 라디슬라스 바랑과 카일 탈라스라는 두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건 어느 세계에서건 미치광이 아니면 범죄자의 삶이 되기 십상이다. 스스로가 꾸미는 여러 페르소나와 헷갈리지 마시길.

가가 배치한 카일 탈라스의 세계는 우리가 한 번쯤 상상해 본 세계이다친절함이 넘치는 안전하고 깨끗한 세계, 결혼제도는 그저 계약일 뿐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한 세계, 기억이 지워지고 주입되는 세계, 나이에 관계없이 성년 시험을 치르고서야 성년이 되는 세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부합해 사는 세계, 자살이 절차로 마련되어 있는 세계. 그러나 이러한 이상(理想)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억제와 폭력도 수반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비정상으로 치부되어 개인들을 가차 없이 처단한다. 다름에 대한 포용은 어느 세계에나 참 어려운 딜레마다.

선택의 여지없이(무의식중에 그가 원한 것이 투영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카일 탈라스의 삶을 살면서도 라디슬라스 바랑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려 애쓰던 그는, 또다시 죽은 쌍둥이 동생의 이름인 라즐로 바랑으로 깨어난다. 그가 알던 이들은 모두 새로운 이름으로 재배치되어 있다.

라디슬라스 바랑이 카일 탈라스라는 인물로 깨어났을 때부터 짐작되다시피 작가는 윤회와 다중우주와 꿈을 섞은 러시안룰렛 식 소설을 만들었다. 왜? 

하나의 총알로 단 한 번의 방아쇠로 죽는 것은 이 순간의 나일뿐이지만, 어딘가에서 나는 또 다른 정체성의 옷을 입고 악전고투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의 안식은 우리의 희망이자 착각인지도 모른다고.

 

 

잠에서 깨어나면서, 카일 탈라스의 침대에서 처음 눈을 뜨던 날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여행을 떠나면 첫날밤에 으레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만, 대개는 몇 초 후면 답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똑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ㅡ 『더스티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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