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쏜살 문고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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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피츠제럴드를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로 꼽았다고 하는데, 하루키가 피츠제럴드에게서 가져온 정수(精髓) 청춘과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읽어왔던 피츠제럴드 작품을 관통하는 줄기였다.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와 함께 광기에 가까운 사교계 향락 속에서 살았다. 그런 생활이 창작의 거름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재정 상황과 알코올 중독에까지 이끌어 그는 마흔넷의 젊은 나이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 삶의 면면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그가 더 살았다면 이 책에 실린 다시 찾아온 바빌론같은 진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음악 큐~)
    

Acoustic Alchemy - Silent Partner

 

 

다시 찾아온 바빌론은 대공황이 오기 전 세계 곳곳에서 흥청망청 살았던 미국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찰리 웨일스는 대공황으로 재산과 가정을 잃고 재기를 하려 안간힘이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가정을 다시 꾸리기는 쉽지 않다. 아내는 이미 사망했고 술과 생활을 철저히 관리하며 처형에게 맡겨둔 딸을 데려와 가정을 꾸리려 하지만, 함께 유흥을 즐겼던 예전 인연들은 그의 다른 모습을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의 훼방으로 찰리는 딸을 데려오기 어려워진다. 이 줄거리는 피츠제럴드 실제 삶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아내 젤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외동딸을 양육하며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던 상황 말이다.
이 단편의 마지막 문단은 청춘의 상실에서 어른의 상실 시기로 넘어가는 걸 잘 보여준다.

 언젠가 그는 또다시 이 도시에 돌아올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에게 돈을 지불하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이를 원했고,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제 중요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혼자서 그렇게 많은 멋진 생각과 꿈을 가질 수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본문 中)

 

 

피츠제럴드는 목격한 사건이나 체험을 작품에 많이 반영하는 작가였다. 기나긴 외출은 아내 젤다의 정신 병원 입원을 소재로 상상력을 입힌 것 같다.

조현병으로 입원한 22살의 킹 부인이 퇴원하기 전, 여행을 떠나려고 남편이 그녀를 데리러 오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녀 상태가 다시 악화될까 봐 병원 측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귀찮아할 때쯤에도 매일 그녀는 의식처럼 옷차림에신경 쓰며 남편을 기다린다. 삶을 꾸리려면 어느 정도 미쳐야 다르게 말하면 어느 정도 자신만의 궤도를 고수해야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이다. 삶에서 정상과 비정상 정도 구분은 정말 쉽지 않다.
     
    
분별 있는 일 피츠제럴드와 젤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미래가 불확실해 파혼당한 피츠제럴드는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몰두해 1920낙원의 이쪽으로 경제적 여유와 인기를 얻어 젤다와 결혼하는데 성공한다.
이 단편에서 조지 오켈리는 존퀼 태리에게 청혼하지만 불안정한 경제력 때문에 거절당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 다시 돌아온 조지는 그에 대한 사랑이 싸늘하게 식은 존퀼을 마주하며 그들을 감싸고 있던 사랑의 마법들이 무대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도 익히 알듯이

 

 

그녀야말로 갖고 싶은 고귀한 그 무엇이었고, 분투한 끝에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옛날 어스름 속에서나 산들바람 살랑거리던 밤에 주고받은 그 속삭임은 이제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갈 테면 가라, 그는 생각했다.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본문 中)

 

해외여행은 장편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전신인 작품으로,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경험이 녹아있는 단편이다. 유산을 상속받고 여유로워진 젊은 미국인 부부 니콜과 넬슨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견문을 넓힐 겸 세계 여행을 다닌다. 니콜은 성악을, 넬슨은 그림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허영과 사람들과의 유흥 속에서 피폐해지기만 했다. 환상 공포 소설에서 볼 법한 멋진 엔딩 장면이 이 소설의 별미였다

 

한참 후에 부사다(알제리 중북부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시장의 유랑객들이 모자 달린 외투를 둘둘 감고 꼼짝 않고 누웠을 즈음 그녀도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삶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되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입으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선례도 생겨난다. 그래도 이 같은 사랑 싸움은 상당히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녀와 넬슨은 젊은 시절에 외로웠다. 이제 그들은 살아 있는 세계의 맛과 냄새를 원했으며, 지금까지는 서로에게서 그것을 갈구했다.   (본문 中)


 

피츠제럴드 자신이 재밌으려고 썼다는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그 때문이었을까. 피츠제럴드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판타지 특성으로 가득한 단편이었다. 다이아몬드의 형형한 빛처럼 인간의 부에 대한 환상, 부를 둘러싼 인간의 양태들이 경쾌하게 펼쳐진다. 도덕적인 훈계조로 끝나 우화 같았던 게 흠이었지만 의외성 때문에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로알드 달 소설 같았다고 하면 감이 오실 런지?  

 

 

삼십 분 후에 황혼이 어둠으로 변했고, 말없이 마차를 끌던 흑인이 어둑한 앞쪽에 서 있던 불투명한 물체에게 인사를 했다. 물체는 흑인의 인사에 대한 보답으로 빛나는 원반을 비추었는데, 그 원반은 측량할 수 없는 밤의 사악한 눈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그 원반에 다가간 후에야 존은 그것이 커다란 자동차의 미등인 것을 확인했는데, 그 자동차는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차보다 크고 위엄이 넘쳤다. 주석보다 화려하고 은보다 가벼운 금속의 몸체가 반짝이고, 바퀴통에는 초록색과 노란색의 기하학적인 물체가 무지개처럼 박혔는데, 존은 그것이 유리인지 보석인지 감히 물어보질 못했다.   (본문 中)

 

키스마인이 한숨을 쉬며 별을 올려다보았다. "대단한 꿈이었어. 입을 거라고는 이 드레스 하나뿐인 데다가 무일푼인 약혼자와 여기 있다니 정말 이상해! 그것도 별빛 아래에서 말이지. 전에는 별이 있다고 인식해 본 적이 없어. 늘 다른 사람에게 속한 커다란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했지. 이제 별이 두려워. 별은 모든 게 꿈이었다고, 내 젊음이 모두 꿈이었다고 느끼게 해."

 존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 이 모든 이들의 젊음은 꿈이야. 일종의 화학적인 광기야."

"미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존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들었어.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어쨌든 일 년 정도 우리 서로 사랑하자. 그게 우리로서는 유일하게 신처럼 마취될 수 있는 시도이니까. 이 세상에는 다이아몬드들이 있어. 또 다이아몬드와 환멸이라는 시시껄렁한 선물이 있겠지. 음, 그건 마지막에 갖고 무시해 버릴래."   (본문 中)

 

 

겨울밤 한가하게 읽기 좋은 작품 구성이었다 민음사 쏜살문고 시리즈 다른 책도 찾아보니 작품 선별이 다 훌륭했다. 디자인도 예쁘고 가격도 저렴해서 어제 한 권 또 주문했다.(과연 무슨 책일까요~)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으로 세계문학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그래서 명칭을 쏜살문고라고?) 추천할 만한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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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2-12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좋아요~,
어쩌자고 이렇게 사랑스럽단 말입니까, 췟~ㅅ!

전 님의 서재 음악들, 맹세코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__)

쏜살 문고, 흥미롭지만 당분간은 자제해야 합니다, 불끈~!

AgalmA 2016-12-12 18:07   좋아요 1 | URL
😊 그런데 사랑스럽다고요? 제 글이 그런 게 아니라 그건 아무래도 피츠제럴드의 문장들이 이 글에 가득해서 그런 느낌을 주는 거 같아요. 그래서 하루키도 푹 빠졌던 거 겠죠^^

음악도 가져온 약간의 제 수고만 있었을 뿐이지만 좋다고 하시니 저도 빙그레^^

쏜살문고 좀 고민인 게....책이 앙증맞아서 도서관에 신청해도 되나 싶어 그냥 샀어요ㅎ;;
적은 분량의 책은 도서관에 신청하기 좀 그래요. 공공재를 쓰는 거니까. 저는 주로 무겁고 비싼 자료성 책 위주로 희망도서 신청해서 대출할 때 후회가 많음요ㅋ;; 무겁고 대출기한에 쫓기고;;;
 
제사(題詞)에 대한 단상

 

 

 

 

 

 

 

 

 

 

 

 

 

 

 

찬미가

 

 

 

아무도 우리를 또 다시 흙과 점토로 빚지 않으리라.

아무도 우리의 먼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

아무도.

 

 

찬미 받으소서, 아무도 아닌 자여.

당신을 위해

우리는 피어나오니.

당신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

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꽃술과

함께 영혼 환하게

황량한 하늘에 꽃실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했던 심홍색 말의

꽃관으로 붉게

가시

위로, 오 그 위로.

 

 

*제여매 역자의 말 발췌 인용: 이 시에서 아무도 아닌 자 Niemand'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독일어에서 niemand가 부정대명사임에 비하여, Niemand는 부정의 뜻을 지닌 명사이다. 첼란은 이 단어를 제1연에서 부정대명사로 사용함으로써 성경이 전하는 신의 인간 창조 신화를 부인하고, 2연에의 아무도 아닌 자는 미지의 누군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문학은 그가 자신의 문학을 대화의 문학이라고 밝혔듯이 이러한 미지의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한다.

 

 

 

 

 

 

 

튀빙겐, 정월

 

 

 

눈멀도록

설득당한 두 눈.

그 눈은 순수하게

솟아올랐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물 위에 떠 있는 휠덜린 탑을

그 눈은 회상하는 것이다, 갈매기

소리.

 

  

말이 물에 잠길 때

익사한 목수들이 찾아온다.

 

 

한 인간이 온다면,

온다면,

한 인간이 세상에 온다면, 오늘,

족장들의

빛의 수염을 달고 그가 온다면,

이 시대에 대하여

말하리라, 그는

아마도

단지 랄라랄라 웅얼대리라,

자꾸자꾸

또또.

 

 

(“팔락쉬, 팔락쉬”)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제여매 옮김, 시와 진실, 2010)

 

 

* 제여매 역자의 말 발췌 인용: 1960년에 첼란은 골 사건'이라는 표절 시비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19601월에 독문학자 발터 옌스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하여 튀빙겐을 방문하는데, 이 시는 이 방문 바로 다음 날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첼란은 튀빙겐에서의 개인적 체험과 튀빙겐에서 말년을 보냈던 휠덜린의 전기적 요소를 도입하여 시적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다. “순수하게-/ 솟아올랐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는 휠덜린의 라인 송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익사한 목수들은 휠덜린 예술관과 관련되어 있는 표현으로 파악되는데, 휠덜린은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짐머라는 훌륭한 목수를 그리스의 조각가와 비유하였다고 한다. 휠덜린은 말년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으며, 라인 강에서 익사하는데, “팔락쉬, 팔락쉬 Pallaksch, Pallaksch”는 휠덜린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을 때, 때때로 긍정하는 말(ja)로 때로는 부정하는 말(nein)로 사용한 말이다. 첼란은 여기에서 휠덜린의 문학과 전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문학이 죽음이라는 심연을 관통해야 비로소 진실을 표현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정월 스무 날”은 그가 뷔히너 문학상 수상 시 언급하기도 했는데, ‘1942120유대인 말살 정책이 결정되었던 날이며, 1942년에 수용소에서 파울 첼란이 부모를 잃는 등 유대 민족의 비극과 고통을 상징하는 날짜이다.

 

 

 

§

파울 첼란도 휠덜린처럼 1970년에 파리 센 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건 언어 밖에 없었을 텐데, 원망스럽게도 그의 모국어는 독일어였다. 유대교에도 회의적이었으나 그가 유대인인 건 전후에도 그에게 내내 주홍글씨로 작용했다 반유대주의와 보수적 분위기가 전후에도 여전해 파울 첼란은 당시 독일 문단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의 푸가는 아우슈비츠 비극을 미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참상과 무도곡을 연결한 것을 꺼림칙하게 여긴 탓이 아닐까 나는 짐작하는데, 산문이 아니라 왜 시였어야 했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좀 더 깊게 봐야 한다.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죽음의 푸가」가 1947년 한 잡지에 최초로 발표될 때 제목은 '죽음의 탱고'였다. 같은 시기에 다른 잡지에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표되었다. 제목 때문에 '푸가'라는 음악 형식에 따른 작품이라 오해될 수 있으나 아무 관계가 없다고 제여매 역자는 전한다.  내가 보기에 "새벽의 검은 우유~또 마신다"를 독립한 복수의 성부로 보고 각 연에서 그 주제가 반복된다고 보면 푸가 형식과 아주 관계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파울 첼란이 시를 쓸 때 푸가를 토대로 하진 않았을 거다.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바꿀 때 푸가와 연결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이런 접점들 때문에 내가 시와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아무튼 '죽음의 탱고'에서 '죽음의 푸가'로 고친 건 잘한 일이다.  

 

 

죽음의 푸가」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반성적 성찰을 되돌려 준 시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통 속에서도 파울 첼란이 인간 속에서 끝끝내 보려고 한 공존, 부정을 통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긍정의 모색을 본다.

한국의 많은 시인들조차 파울 첼란 시가 난해하다고 여겨 그를 비의적 hermetisch' 시인이라 말하고 있는데, 파울 첼란 자신도 그것을 부정했고, 그런 규정은 폄하의 의도가 있으며, 최근 파울 첼란 문학 연구 방향도 비의성을 배제하는 추세라고 제여매 역자는 전한다. 파울 첼란 문학관을 봐도 그렇고 그의 수상 연설들을 봐도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시를 쓰려는 시인이 아니었다.

 

 

 

 

시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며, 움직임이며, 또한 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 질문은 시계의 시침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시는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시는 무한성에 대한 요청이 있지만 시대를 관통합니다. 시대를 관통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

 

 

창조된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닌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만이 예술의 유일한 척도이다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파울 첼란이 인용한 뷔히너의 말

    

 

 

 

죽음의 푸가찬미가가 연결된 듯한 파울 첼란의 다음 詩도 보자.

 

 

 

 

흙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팠다.

 

 

그들은 파고 또 팠다. 그렇게 그들의 밤이 지나고,

그들의 낮이 지났다. 그들은 신을 찬미하지 않았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원했다고 그들은 들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았다고 그들은 들었다.

 

 

그들은 흙을 팠고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현명해지지 않았고, 아무 노래도 짓지 않았다,

아무 말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팠다.

 

 

고요함이 찾아왔고, 폭풍우가 몰려왔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는 판다, 당신이 판다, 그리고 벌레도 판다,

그들은 판다고 저기서 노래한다.

 

 

오 한 사람, 오 아무도, 오 아무도 아닌 자, 오 당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을까?

오 당신이 파고, 나도 파네, 나 자신을 당신에게로 파묻네,

우리 손가락에 반지가 깨어나네.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제여매 옮김, 시와 진실, 2010)

 

 

 

 

찬미가」와 마찬가지로 이 시도 성경의 창조 신화를 신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의 중기 시집인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서시이기도 하다. 인간을 초월적 존재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창조된 모든 것의 생명력을 강조한 파울 첼란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무도 아닌 존재들이지만 서로 속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빛날 수 있다고 이 시는 강조하고 있다

 

 

 

여울 물, 그 위에서

신들의 안짱다리가

절뚝거리며 건너온다 -

어떤

별의 시간에 너무 늦었단 말인가?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시집 마지막 시 허공에》마지막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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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11 05: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 시들 잘 보고 가요!^^
아무도 아닌자의 장미 , 죽음의 푸가 , 극(?)적인 시들...

AgalmA 2016-12-11 05:51   좋아요 2 | URL
또 안 주무시고 무슨 책 보고 계세요 ㅎㅎ

[그장소] 2016-12-11 06:02   좋아요 2 | URL
자면서도 꿈에 리뷰를 쓰더라고요. 푸핫~^^
지금은 ㅡ제대로 책도 못 보겠다는, 그래서 그냥 시간보내고있어요. 잡스런 일들 하면서.. 누웠더니 머리 아프고 ㅎㅎ 일어나니 숨 막히고..코 막혀서 ..이런..ㅎㅎㅎ

AgalmA 2016-12-11 06:11   좋아요 2 | URL
책 악몽 꾸는 그장소 님 그림 그리고픈 에피소드네요ㅋㅋ
그장소 님도 참 한 슬랩스틱 하신다는ㅋㅋ

[그장소] 2016-12-11 07:05   좋아요 2 | URL
대충 쓴 리뷰가 맘에 걸린 모양 ㅡ 책은 두권인데 그내용이 짬뽕되서 이렇게 썻어야지 ㅡ하는 느낌으로 꿈에나오더라고...그런데 깨서 옮겨보려고하니 , 재채기 한번에 ...응? 뭐였지...감각만 남고 내용은 사라짐..ㅎㅎ;;; ㅎㅎㅎㅎ
 
한국 (대중)음악 평론가들에게 "징후를 가져 오시길"
미지를 향해 가는 이성적 타건 - Pierre-Laurent Aimard
슈만, 내면의 풍경
미셸 슈나이더 지음, 김남주 옮김 / 그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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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러 언어로 누구나 참여해 만들어가는 위키 백과 인간의 은유로 자주 느낀다.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탐구해 기록하고 누군가 그것을 보완 수정한다. 이곳 알라딘에 있으면서 나는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누군가(작가) 썼고 우리(독자)는 그것을 읽고 또 글을 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작가일 수도 독자일 수도)가 또 다른 글(작품일 수도 리뷰일 수도)을 쓴다. 삶과 기록의 향연.

 

《슈만, 내면의 풍경》을 다시 읽으며 '나와 누군가(의 고통과 고뇌)를 다시 만나 읽는' 기분이었고 이렇게 옮긴다.

 

 

고뇌가 그것을 느끼는 어떤 사람, 자신 안에서 그것을 불러일으키거나 고갈시키는 누군가를 상정한다면, 육체적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익명의 존재를 건드린다. “나는 고뇌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어 문장에는 육체적 고통 곧 '둘레르(doueleur)'의 동사형을 쓸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뇌는 내게 와 닿는다. 나는 그 고뇌를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뇌는 나의 대상이거나, 내가 고뇌의 소유이다. 고뇌는 주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고뇌는 주체를 만들고, 주체에게 미래를 주고, 주체의 주요 기질을 구축한다. 우리가 때때로 자신의 삶보다 자신의 고뇌에 더 집착하는 것은, 오직 고뇌만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고뇌한다는 표현은 수동성의 능동적 형태를 표상한다. 객체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

하지만 비주체적인 육체적 고통은 뭔가를 해체시킨다. 고통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탈인격적인 국면에 직면해야 한다. 고통에는 소유격을 붙이기가 어렵다. 그 정도로 고통은 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우리와 관련한다. 고통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는 특정한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정신병자에게 고뇌라는 말을, 신경증 환자에게 고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휠덜린이 그의 시 <사랑스러운 푸른빛으로>에서 그랬듯이, 신경증 환자는 특정한고통, 혹은 불특정한고통에 대해 말하게 된다. 이런저런 고통을 내가 갖는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라고 할 수 없는 나와, 내가 더 이상 속하지 않는 세상 사이에 고통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하나의 고뇌로 보자면, 그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할 대상을 찾지 못한 고뇌다. 그것은 그 어떤 도 고려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 아픔,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아픔, 인격 없는 아픔이다.

 

 

그것은 시대의 테마이기도 하다. 슈베르트 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아무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타인의 즐거움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타자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엇갈릴 뿐.” 루트비히 티크는 이렇게 썼다. “즐거움은 고통의 보다 강렬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은 이렇게 썼다. “아름다움은 제일 먼저 사라지는 어떤 것이다.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은 고뇌뿐

하지만 슈만의 고통은 이런 감상적인 염세 Weltschmerz'와는 다르다. 이 감정은 슈만 자신이 고통을 말하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이제비우스가 플로레스탄에게 맞서는 것처럼 그 감정은 즐거움에 맞선다. “그들 둘 다를 내 안에 두자. 마치 즐거움과 고뇌처럼이라고 슈만은 쓴다. 이 대조에서 고통은 아래쪽의 안정된 층에 있고, 즐거움과 고뇌는 둘다 그 위층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해 있어 고꾸라질 위험이 있다. “그동안 나는 결코 고통을 알지 못했다. 이제 그것이 왔다. 나는 고통을 제압할 수 없다. 고통은 나를 무수히 넘어뜨린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모든 고통을 침묵시키는 것이었지만 슈만의 경우는 다르다. 음악은 고통을 잡아두지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음악은 고통의 극단이다. “이 마지막 시간, 나는 더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칼로 내 신경을 자르는 것 같다.”

게다가 낭만주의자들 자신에게 음악이 언어와 완전히 다른 것인 양 말하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라, 음악이여,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 다오. 단어를 찾아내는 이 고통스러운 노력으로부터 나를 구해다오.” 라고 빌헬름 바켄로더는 외쳤다. 여기서 우리는 고뇌와 고통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점을 만난다. 곧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고뇌는 의미를 갖지만 고통에는 의미가 없다. 고통이 물리적인 것 이상이거나 추상적인 데 반해, 고뇌는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문제다.

   (*Agalma 첨언 : 빌헬름 바켄로더의 저 외침은 신해철 <불멸에 대하여> 가사에도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병든 슈만은 온순하게 의사의 지시를 따랐는데, 아픔을 잠재울 수 있는 처방만은 거부했다. 그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싶어 했는데, 그 원인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뇌는 쾌락의 정반대로서 나타나, 쾌락과 번갈아들고 때로는 뒤섞인다. 하지만 고통은 불쾌나 쾌락 너머에 있다. 고뇌 속에는 쾌락이 감추어져 있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다. 고통 속에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가 우울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슈메르츠(Schmerz, 아픔)’가 아니라 틀림없이 라이트(Leid, 상심)’이다. 고뇌 속에는 말할 수 있는 즐거움이 남아 있다. 적어도 고뇌에 대해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말하고 싶은 욕망, 충동까지를 앗아가 버린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다시 빌려오자면, 슈만의 음악은 쾌락의 원리 너머에 있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또한 언어의 원리 너머에 있는데, 아마도 이 둘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고통은 다른 범주, 이를테면 반복, 죽음의 충동, 비참의 범주에 속한다.

이 음악은 종종 힘겹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음악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건드린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광기, 우리 자신의 죽음을. 슈만을 연주할 때 우리는 쇼팽이나 브람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마치 그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봐, 그로부터 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음악인가? 이런 음악은 상처 입은 살갗, 일상의 균열, 완만한 고통의 점령, 돌연 민낯을 드러낸 삶이나 다름없다.

 

 

존재의 고통, 그것은 그저 존재의 고통이다. 슈만은 자신의 존재가 뿌리까지 찢겨버렸다고 생각했다. 존재를 박탈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고뇌를 가질 수 있지만, 고통에는 그저 점령당할 뿐이다. 그것은 결핍이나 근친의 죽음 같은 상실로 인해 생기는 고뇌와는 달리, 그저 하나의 구멍이다. 검은색이 고뇌의 빛깔이라면, 고통의 빛깔은 흰색, 그 위에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절대 흰색이다. 고뇌 속에서 가능한 작업이나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애도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가능한 작업 같은 건 아예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 깊은 곳에 갇혀 있는, 더는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고통을 갖고 있다. 때때로 무엇인가가 그 문을 연다. 하나의 시선, 하나의 기억, 하나의 음악이. 하지만 그 고통은 더는 아무 의미도 담지 않는 말처럼, 혹은 침묵을 이야기하는 음악처럼 비어 있다. 어느 날 슈만은 그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내 고통의 이름을 묻는다면, 나로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건 그저 고통 자체인 것 같아. 더 적절하게 지칭할 수가 없어.” 묘사를 불허하는 무한하고 순수한 고통. 자신의 모든 음악 속에서 결코 말하지는않지만, 노래하고 조바꿈하고 때로는 혀짤배기로 표현하는 고통(음악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고뇌다. 쇼팽이나 슈베르트의 음악이 그런 것처럼).

 

 

 슈만의 시간은 거칠고 제대로 구조화되지 않음, 아이의 시간이다. 고도로 건축적인 베토벤의 시간과 대조적이다. 그것은 방향성을 지닌 화살이나 가능성을 품은 전망이 아니라 오고 감이 얽히고설킨 그물망이다. 긴 몽상의 강을 급히 내려가기 위해서만 연주를 멈추는 어린아이, 언제라도 잠에 빠져들 수 있는 어린아이는 가장 빨리 달리 수밖에 없고, 자신이 금방 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뒤이어 올 것에 대한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느린 악장을 연주하거나, 경쾌한 가운데 속도를 늦추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하여 음악적 시간은 기분을 귀로 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전환한다(슈만의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 ‘아첼레란도(광적으로)’, ‘칼란도(차분하게)’와 더불어). 그 리듬, 불안의 발작처럼 미친 듯이 두드려대는 것은 먹먹하게 상승하는 죽음의 충동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연주자로서 슈만은 박자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1852,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일하면서 악보대 앞에서 그는 종종 의기소침의 상태로 빠져들었다가는 연주자들에 맞서 화를 냈다. 그러고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대로 작품을 지휘했으며, 악장의 템포를 늦추었다.

 

 

 평이하기 짝이 없는 이행을 보여주는 후기의 저작들을 제외하면,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벗어나는 수수께끼 같은 코다(종결부), 갑작스러운 화음의 중단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으로 불안이 종식되지만, 음악 역시 끝나고 만다! ‘후모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작들 속에서 기지 넘치는 화려한 악구가 양분되는 것처럼(유머는 갈등, 긴장의 소산이다). 사태의 핵심, 고통의 핵에 지나치게 가까이 있지 않기 위해, 신랄한 기미가 나타나고 소극성이 무기력함에 대한 냉소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연주는 긴장을 풀어주지 않는다. 슈만의 유머는 그 자신을 고발한다. “보라, 나는 비판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들 역시 나처럼 존재의 모순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하는 식이다.

 

 

고통을 화음으로 표현하자면, 활주라기보다는 고정, 거의 차이가 없는 음들의 집합이다. 고통이 몸속 여기저기에 이해할 수 없는 과정으로 쏠리듯이, 이런 음들이 중간 단계 없이 다른 조성이 불쑥 등장할 때까지 뭉쳐 있다. 이 화음은 틈새라기보다는 균열에 가까운 것으로, 귀에 거슬리는 이런 음정에 특유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위치다. 그런 균열이 강한 박자 위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예를 들어 환상소곡집 op.121석양). 고통, 다시 말해서 펼쳐지지도 전개되지도 않는 이 뾰족한 끝은 마치 지나가듯 건드려진 미세한 차이 속에서만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Robert Schumann, Fantasiestücke op. 12 (1837) - I. Des Abends(석양)

 

 

고통은 종종 유성음과 연결된다. 고통은 일종의 울림, 반사, 잔향의 성격을 띤다, 우리는 고통을 둔중하다고, 날카롭다고, 찌르는 듯하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고통은 울리고 반향하고 두드리고 외치는 것, 혹은 침묵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실체를 끌어내지 않는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면서는 그런 고통의 핵에 이를 수 없다.

고통, 그것은 말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말을 하는 목소리다. 단어 아래의 어조, 지각하기 어려운 유성음이다. 하나의 소리,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어떤 화음은 아니고 그 소리나 화음으로부터 남는 것, 어디에도 없는 듯이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유령처럼 고통은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돌아온다.

 


 

  부재로 이루어진, 포착할 수 없는 그 실재 속에서 후모어’(Humor, 유머와 기분)는 대상이나 주체 그 자체의 실재와 부재로 하는 게임, 혹은 나아가 무엇보다도 언어로 하는 게임이다. 음악은 언어의 한계다. 단어 없는 사상이다. 그리고 소리의 나라를 택한 슈만(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의 결정 속에는 그것, 곧 언어를 배제한 사상이 있는 것 같다. 말의 바람에 날려가는 지푸라기, 언어의 객체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정신 속에서 생물학적인, 호르몬상의 육체의 무게를 끊임없이 환기한다 해도, 이런 언어와 음악의 갈마듦으로 인해 멀어진 언어의 자리가 정신 속에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기분에, 그 분위기에, 그 변주에, 그 무질서에 집중되는 관심은 감정적인 것일 뿐, 언어 밖의 것에 대한 매혹은 아니다. 그 관심은 오히려 각 개인의 언어에 대한 관계를 밝히려는 데 있다. 감정적이든 명백히 비감정적이든 간에 언어 안에 머무는 방식, 언어를 떠나고 언어를 증오하고 언어를 잃어버리는 방식에 대한 각자의 관계 말이다.


 

 

 우리는 슈만에게서 전개에 대한 공포, 틈새에 대한 열정, 분리에 대한 광기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친단 말인가? 슈만은 자신을 부동不動과 근본으로 몰아가려는 강물 속에서 싸워야 했는데, 프로이트 이후 그것은 죽음의 충동이라고 명명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 곧 언어와 환각을 통해서이다. 언어가 그 다의성(‘후모어를 가지고의 경우가 그렇다)과 더불어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때인 1836~1839년에 위대한 피아노 작품들이 나온다. 그리고 언어가 자신의 수수께끼의 몫, 삶의 기회, 그의 움직임을 되찾을 때에는, 손가락과 건반의 말없는 감금에서 빠져나오는, 고백의 작품인 가곡의 행복한 시기가 온다. 하지만 언어가 멈추고 나면. 응고되고 나면 무엇이 오는가?

수수께끼에 대한 취향이 점차 사라지면서 마지막 시기의 작품에서 깊이가 없어졌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났고, 드러난 내용이 더는 잠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은 것 같다. 더는 의문이 없고, 그저 대답만이 있는 것 같다. 소통이나 변장을 그리 즐기지 않는 음과 글자들이 이제 분리된다.

 

 

 

Grigory Sokolov - Schumann 《Geistervariationen(유령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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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2-04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작 ^^..

AgalmA 2016-12-05 00:53   좋아요 2 | URL
땡~ 북플로 보셔서 잘 안 보이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인용이 너무 많아서 당선작은 안됩니다. 제가 파악하기로 알라딘 당선작은 정리를 잘한 글도 받지만, 글쓴이의 사유가 많이 드러나 개성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글이 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알라딘 당선작은 다른 서점에 비해 그 점에서 더 뛰어난 듯^^ 대중성보다 작품성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할까. 그래서 제가 알라딘 당선작을 신뢰하는 것도 있죠.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이렇게 썼나.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싶으니까요ㅎㅎ~

clavis 2016-12-04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려요^^

AgalmA 2016-12-05 00:35   좋아요 1 | URL
오해요^^ yureka01님이 잘 읽으셨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

책읽는나무 2016-12-05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리 축하하고픈 멋진글인데요?^^
슈만!!!
그의 음악을 들을때 그의 고통과 고뇌를 생각할 듯요^^

AgalmA 2016-12-06 03:25   좋아요 1 | URL
이 글에 왜 김치국도 없이 축하 인사가^^;;;
슈만의 불협화음에 대해서 이 책이 참 잘 접근해 주었어요. 글을 따라가며 음악 찾아듣는 안내서 역할도 잘해 주었고^^
 

평안도 사투리와 한국 음식과 각종 토속성을 시에 담은 시인은 한국 시인들에게 韓國詩의 고향 같은 시인이기도 하다. 한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던 허수경 시인의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연작시들은 그걸 고스란히 보여줬다.

 

   

  

 

* 대구 저녁국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대구 덤버덩 국 끓이는 저녁 움파 조고곤 무시 숭덩덩

불근 고추가리 마늘 국에서 노닥 눈 헛파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자파

먼 데 어느 멘지 몰로라

 

저녁 새 벚나무에 쪼그리고 내누어

국 냄새 감나무 가대에 오그리고 대누어

 

그 먼 적 대구국 기리는 저녁,

마흔뎅이 가시나 한 것

저녁 적 노다닥 찬데리여

 

그 흐저다한 혼이라는 길이 말종이 먼재도 길 타서 타박타박 나배도 달녁도 낭구도 마다코 걸어다미는 이 저녁 새 대구국 기리는 저녁센데

 

어느 먼 데

먼 데 어딘지 몰라라

 

저녁 새 벚낭구 가지에 눈님 새울고

국 냄새 간 감낭구 가지에 어둠님 눈구구 감고

 

** 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추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 한국말을 쓰고 잘 아는 독자여도 허수경 시인이 경상도 사투리를 적극 활용해 쓴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연작시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시인은 직접 풀어쓴 같은 시를  앞뒤로 배치했다

대구 저녁국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보다 대구 저녁국 한결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나는 앞의 시가 더 좋다. ?
안도현 시인은 시를 대할 때 '이해'보다 '느낌'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 특유의 정서와 느낌. 허수경 시인의 저 두 시의 비교처럼 풀어쓸 때 휘발되는 무엇이 있다. 나도 처음에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백석 시인의 시가 낯선 사투리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젓갈이 입에 맞을 때까지 많이 먹거나 기다리라고 말해야 할까.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하다. 안도현 시인처럼 '느낌'을 더 중시하자고 말하기보다 나는 이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사전에서도 이 단어는 여러 함의를 보여준다.

 

이해(理解) [네이버 사전 인용]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2.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3. [같은 말] 양해(諒解)(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전달 받는 자 입장에서 사리 분별의 의미를 더 크게 둘 때 대구 저녁국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대구 저녁국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바라는 이해란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암묵의 이해를 약속받은 라는 장르는 그래서 특별하다 번역이라는 장애를 거치고도 외국 시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공감을 불러오는 정서, 한국의 서정(敍情)을 백석 시인은 알 듯 말 듯한 사투리와 토박이말을 써 수를 놓았다. 아래 시는 사투리와 토박이말은 많지 않지만 정서를 잡아내는 탁월함 때문에 인용했다.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백석 시인은 한국말의 변신을, 이해의 변신을 안배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하지만 언어를 남기고 이해로 깊숙이 들어가게 만드는 시인,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백석 하답(夏沓)’

 

 

 

--- 단박에 아이들을 물총새로 만드는 마법에 황홀해하며 계속 계속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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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6-12-04 0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석시를 읽고나서 한동안 영어문장처럼 시들을 기꺼이 외우면서 다녔어요. 영어샘이었다던 그의 굽슬거리는 머리스타일더 멋있었고.. 그래서인지 자야여사에게 한동안 샘을 좀 냈더랬어요. ^^ 백석이라는 시인을 가진 건 문학사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AgalmA 2016-12-04 19:43   좋아요 0 | URL
예, 모두 동감합니다^^ 친일하지 않으면서 어떤 식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준 시인이기도 했죠. 영어교사인데 토박이말을 누구보다 더 열심히 시에 썼다는 점에 있어서도. 북한 체제 속에서 결국 망가지고 말지만, 시 속에서 영원히 빛날 자기 자신을 세운 사람이죠. 여러모로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곰브로비치 《코스모스》는 너무도 질 들뢰즈적인 텍스트.

내가 만족할 만한 분석을 하려면 정신분석에 통달해야겠다 싶어 리뷰를 미루고 있는데 현재로선 언제 쓸지 모르겠다.

만약 그것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면 나는 왜 다시 재떨이를 바라보게 되었을까? 그렇다! 재떨이를 향해 또다시 시선을 던진 바로 그 순간부터 나와 재떨이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1초보다 조금 더 길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서 그 대상은 이제 당신에게서 나머지 다른 대상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이며, 당신의 의식 속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ㅡ Witold Gombrowicz, ibid, 1986, p. 203

고양이와 참새, 그것들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서로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긴 고양이는 참새를 잡아먹으니까, 하, 하, 관계의 그물망이란 얼마나 질척거리는지! 이처럼 연상 작용에 있어서 호의적인 경우와 비호의적인 경우가 처음부터 지정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긴 (나는 생각했다.) 거의 언제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존재의 요건을 미처 다 충족시키지 못하곤 했다, 그건 우리가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무관심하고, 혼란스럽고, 단정치 못하고, 초라하고, 비열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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