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어떤 이는 문학 열풍의 시작은 '티브 잡스'였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 2 프레젠테이션 때 '기술로는 부족하고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은 기업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애플의 강점이기도 한 GUI(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기술과 인문의 결합을 잘 보여준다. 사용자가 복잡한 명령어를 치지 않고 간단한 아이콘으로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경제성의 원리보다 사람을 생각하는 정신이 더 깃들어 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에 기여한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를 정치 개혁의 뜻으로 인용한 모 정치인. 고사성어로 에헴~하는 기존의 정치인의 언어 구사와 차별을 두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생략한다. 그 정치인이나 우리나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진 않았지만 어떤 효과는 있었다. 관심이든 반발이든 행동하게 만들었으니까. 아직 진행 중인 역사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르만 헤세가 쓴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모름의 앎에 대하여》 서평에서 인문학 열풍의 다른 요인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 있다. "삶이 견디기 힘든 시절에는 추상적인 사상의 문제보다 더 나은 피난처가 없다. 거기서는 그 어떤 싸구려 위안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한 가치들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p201)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과 전체를 위해 자신을 소진할 대로 소진한 젊은이들을 위해 1920년에 쓴 글이다. 같은 해 헤르만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익명으로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쓴 연유도 서평으로 밝히고 있다.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동년배가 말하듯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어서 였다고 한다. 1900년부터 죽음에 이른 1962년까지 헤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는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였다. ''은 유행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살피는 마음가짐이 인문학의 기본이고, 글은 언어와 나의 변덕스러움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명징하게 나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헤세는 몇 년마다 다시 읽는 책 중 하나인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두고, 완성하기까지 총 50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막강한 토르소만 남겼다고 했다. 짧은 비판 문장에도 강렬한 경탄이 들어 있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한 소설 전체가, 의지와 시도와 능력으로 보자면 거의 초인적인 괴물인 이 작품이 이런 자리에서 보이는 약간의 실패가 내게는 두 배나 경이롭고 위대하게 여겨진다. 사랑에서 생겨나지 않은 위대한 예술작품이 없듯이, 예술작품에 대해 다시 사랑 말고는 달리 어떤 고귀한 후원의 관계도 없다. 위대한 문학작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 일부가 드러나는 자리에서 오로지 비판이나 심지어 남의 실패를 기뻐하는 마음에 빠져드는 사람이라면, 이 풍성한 식탁에서 언제나 가난하고 비참한 굶주림만을 느낄 것이다."(p229)
ㅡ 헤르만 헤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서평 '이 소설은 하나의 세계다'

 

비판의 쾌락에 취한 굶주림 상태인 지도 모르는 글과 말은 어느 시대에나 상주했다. 그런 비판들은 만나는 모든 걸 황무지로 만든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다음처럼 앙상한 것만 남긴다.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쓴 것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살아있는지도 걱정스럽다. 그에 비해 헤세는 동화나 낯선 동양 경전도 차별 없이 정성껏 읽고 상대에게 전한다. 나쁘게 본다면 오리엔탈리즘도 섞여 있다 말할 수 있지만, 헤세가 직접 표현하기도 한 심이었다고 나는 본다. 삶의 비참함을 감내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작품을, 사람을, 세계를, 작가를 읽을 때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헤세의 에세이들은 증명하고 있다. 그의 글은, 인문학이 완성된 무엇을 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찾아가 읽고 생각하는 과정 전체라고 또렷하게 전해준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고찰이라고 불러도 될까. 50년이 지나도, 화성 이주가 실현되어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차갑지 않으면서 시들지 않는 헤세의 문장을 잘 표현한 표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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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8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28 15:32   좋아요 2 | URL
잡스 영향에 삼성도 인문학 프로젝트 했다가 아무런 소득도 못 얻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학이 기업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인문학 계열 학과들이 효수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씁쓸하죠. 장사되는 카페들은 만들면서 학과는 없애는 대학이라니...
기업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인문학을 자기계발이나 처세술로 써먹으려 하는 자세도 문제가 있겠죠.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죠. 겉으로는 인문학, 안으로는 실리 추구, 정말 표리부동한 현실입니다.
굳이 비밀글로 안 하셔도 될 내용 같은데요^^;

yureka01 2016-09-28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아갈마님 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서..비밀글 처리 했답니다..ㅎㅎ 우째 잘 지내시죠?ㅋ

AgalmA 2016-09-28 15:37   좋아요 2 | URL
제가 인문학으로 이야기를 풀었으니 그리 된 거죠, 뭐^^... 감기가 지독하네요. yureka01님도 감기 걸리지 않게 잘 챙기소서^^/

달걀부인 2016-09-28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침 첫 글(시차가 있으니까요)이었습니다. 감명 깊은 대화였어요. 제가 고민하는 지점들에 대한 답을 찾을수도 있었구요.
고민에대한 답을 찾았으나 세상에 대한 답은 요원해 보여 그저 이렇게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

AgalmA 2016-09-28 18:45   좋아요 1 | URL
시차가 꽤 있군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껴 사는 세상이라 문제도 계속 돌고 돌며 고민이 끊이지 않네요
고민이 모여 기적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열릴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체념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게 자신을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친절도 모이고 모이면 문화가 되잖아요^^

[그장소] 2016-09-28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열풍으로 미래는 미리 와있는데 , ㅎㅎㅎ 현실은 후퇴중이네요! 그쵸!^^ 비판은 모든 걸 황무지로 만든다 ..그렇죠 ..물어 뜯기에 바쁜 영영가 없는 논쟁은 정말 그래요!^^

AgalmA 2016-09-28 19:28   좋아요 1 | URL
이 나라 실세들은 지진이 와도 눈가리고 아웅이고, 미래는 미래를 위한 재테크 정도로 생각하니 이 폭풍 속의 한국이란 배를 어쩐답니까...
각자 자기 주장을 가져 발언하는 거 좋죠. 다만 타인에게 귀기울이지 않는 편견과 잘못된 논쟁 문화는 정말 고쳐져야 해요. 위계적인 교육과 경쟁을 일삼는 한국 교육과 경제 질서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죠.

[그장소] 2016-09-29 01:23   좋아요 1 | URL
아 ~ 아~( 오광록 버전 한숨)
누구의 주제런가 ...일만 이천봉 ... 산이좋아 ... 배댈곳도 많아 사공은 좋으려나~~!!
에헤라디오~당신은 ~ 어디, 어디있나요~^^ㅋ ( 마무리는 정동하 버전)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8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은 저항이고 비판이라는 이진경 선생의 모토는 사라진 것인가요?

AgalmA 2016-09-28 19:09   좋아요 1 | URL
적절한 문제 제기를 해 주셨네요^^
인문학의 저항 정신과 비판도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과 잘못되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일어서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용기를 내는 것도 포함되겠죠. 잘못된 흐름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던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의 뜻을 당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죠.
제 글에선 비판의 쾌락에 빠진 비판주의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지 비판의 긍정성까지 부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회의주의도 체념적 회의주의와 합리적 회의주의가 있잖습니까. 제가 비판 정신의 긍정성을 덧붙이려다 놓치고 글을 올렸네요.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9 13:20   좋아요 1 | URL
네...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9-28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이해하고 살피는 마음가짐이 인문학의 기본인데 인문학 전문가 강 모 씨는 노숙자를 좀비로 표현했죠.

AgalmA 2016-09-28 19:13   좋아요 2 | URL
지식과 인격이 비례하는 건 아닌 거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습니까~_~;
거친 발언으로 말에 무리한 힘주기를 하는 거 자기 부메랑이 되기 쉽죠...

북다이제스터 2016-09-28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헤르만 헤세.....
그 이름만으로도 떨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

AgalmA 2016-09-29 00:03   좋아요 1 | URL
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읽고 부르르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훼손될까봐 다시 안 읽고 있는데, 헤세도 그래서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되도록 안 읽으려 했다고 하더군요.ㅎ 이번에 이 책 읽으며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뽐뿌가 많이 왔는데, 소홀했던 동양 쪽을 시간을 길게 잡고 읽어야 겠단 생각도 했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이 장정일 공부 읽고 책목록 잔뜩 생기셨듯 저도 그런 상황ㅎ;

2016-09-29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9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9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09-29 16: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판은 `필요`지만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비판 쾌락주의자의 글은 그 내용보단 글을 쓴 사람을 읽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린 글을 통해 서로를 읽고, 읽히며 사람을 더 넓게 이해하고, 그럼으로 또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게 되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비판 쾌락주의자의 글에서도 인간에 대한 경험은 넓어지니 이 세상엔 아무 쓸모없는 글은 없는 것도 같고요 ㅎ


헤세는 참 많은 서평을 썼군요. 그러고 보니 이런저런 굴곡이 많은 때일수록 가볍지 않은 글들을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생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을요. 아마도 가벼운 글에선 위안 받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맞아요, 인문학은 완성된 무엇이 아니라 생각하는 과정이죠. 그래서 저도 일방적이지 않은, 최선을 다해 읽고 같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A 님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저도 `차갑지 않으면서 시들지 않는` 정신을 읽고 싶고, 또 그렇게 살고 싶어요 ㅎ


AgalmA 2016-09-29 19:20   좋아요 2 | URL
오, 물고기자리님이 빨리 물 위로 나타나셔서 반갑^^ 헤르만 헤세 힘이 강력했나 봄^^!
헤세가 서평을 그리 많이 쓴 것도 시대 영향이 있죠. 그 사이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 생각은 얼마나 많이 했을 것이며 세상에 대한 걱정은 또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운동선수들이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연습하듯이 글도 무거운 글을 통해야 더 단단해지고 깊어질 수 있겠죠.

글은 참 이상해요. 자연스레 동조되는 글엔 경계없이 푹 빠지게 되는데, 의문들이 툭툭 생기는 글엔 이 사람이 왜 이런 글을 쓰게 됐나 살피게 된단 말이죠. 그 지점이 비판의 시작이 되겠죠. 사람 생각의 다양성도 느끼게 되고요. 그래서 말씀처럼 쓸모없는 글은 없게 돼요.

제 글이 타인에게 모범이 되거나 내세울 글은 아니죠. 다만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합니다. 제가 가질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노력도 그 뿐이라고 생각하고요.

물고기자리님 글도 제겐 언제나 `차갑지 않으면서 시들지 않는` 글이랍니다^^ 요즘은 보기가 힘들어 `귀함`이 더 추가됨!
삶에서 글이 오고 글에서 삶이 묻어나듯 물고기자리님도 그런 삶을 사실 거라 생각해요.


물고기자리 2016-09-29 19:24   좋아요 2 | URL
그 귀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좀 더 게을러져 보겠어요!ㅋ

신기한 게 맘이 제일 복잡할 때 오히려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오게 돼요. 제게 있는 긍정적인 부분 중의 하나라고 오만하게 말해봅니다!ㅋㅋ

(A 님 글 읽으러 올라왔죠^^)

AgalmA 2016-09-29 19:42   좋아요 2 | URL
목소리 잃은 인어공주 상태시군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계시)
네가 까뮈와 키냐르와 파묵과 그르니에 같은 작가 리뷰를 많이 쓰면 쓸 수록 많이 볼 수 있다아아~아...
크흑, oTL .... 내가 읽고 글 쓰는 것도 오래 걸리는 방법이잖아;;;
<물고기자리님을 위한 A 단막극 끝>

웃고 계시지만 맘이 어떠실까 생각하니....
귀한 물고기자리님 감기 안 걸리게 잘 두르고 다니세요. 콧물 찔찔 인어공주되면 곤란하니까^^;;

물고기자리 2016-09-29 19:43   좋아요 2 | URL
아, 진짜 육성으로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ㅎㅎ

하여튼 A 님의 맞춤형 재치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좋은 글도, 따뜻한 댓글도 모두 감사해요. A 님도 얼른 감기에서 완전히 회복되시길요!!

고양이라디오 2016-11-08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의 비참함을 감내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작품을, 사람을, 세계를, 작가를 읽을 때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헤세의 에세이들은 증명하고 있다.˝

멋진 문장입니다^^ 저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