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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평점 :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촛대"(<우리는 촛대>)처럼 오롯이 홀로 되어 "밤하늘 언덕에 풀을 몰고 다니던 염소들"(<달 내음>)을 관찰하듯 상상하거나 '내 속에서 돋아든 달과 내 속을 집어먹은 내가 서로 바라보는'(<그때 달은>) 것을 응시한다.
삶이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망설이는, 바위"(<낯익은 당신>) 같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 중단되는가. 중단된다면 시는 없을 것이다. '땅 속에서 감자가 감자의 시간을'(<물 좀 가져다주어요>) 살 듯이 우리는 망설이는 시간 속에 사는 존재이며, 도무지 향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해에게서 시까지 내려왔다.
땅을 헤쳐 발굴을 하는 시인의 이 시집 속 빛은 그래서 유난하다.
"삼엄하게 해가 떠오르던 날"(<영변, 갈잎>), "폭약 많은 오후"(<연등 빛 웃음>), "마른 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해는 우리를 향하여>)
, "해는 이곳에 아찔한 정적을 경작하고 / 햇빛은 자유 데모보다 더 강렬하게 / 폐허의 심장을 움켜쥐지요"(<새벽 발굴>),
"별을 구우려고 불을 피우거나 하는 이도 있지만"(<별이 별이>),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빛이거나 누런빛이거나 하던
거"(<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사막에는 아이를 키울 빛이 서성이고 있는데"(<코끼리, 거미 다리를 가진, 그
해변에서 달리가 그린, 그 코끼리>), "야자잎 드문드문 빛의 존재를 지우는데도 빛은 있다"(<물지게>),
"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작은 아가의 귓바퀴 위에도 빛나는"(<그렇게 조용했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 "그 물 위 당신이 뱉어낸 별들 안아 들일까, 말까 / 그 물속 사라지는 저 빛
어쩔까, 나 말까"(<저 물 밀려오면>)
시인은 사물을 털어 땅의 명(命)을 발견하듯이 빛 속에 사물을 두어 빛의 명(命)도
따른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저녁
스며드네>),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고 들어왔다"(<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만>), "저
불을 아무도 빼앗지 않는 곳에 두고 싶어요 "(<엄마>), "눈빛 아래 혼자 돋아나는 발자국"(<눈 오는 밤ㅡ진이정을
추억하다>), "빛으로/기어가는 뱀 한 마리"(<배>), "빛 속을 걸어다니고 싶었던 말 한 마리"(<말 한 마리>)
이 시집의 바탕인 하늘과 땅의 공존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과 없는 일'(<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이 함께 있는 것이라 보여주고, 우리가 어둠과 빛
모두에 속하면서도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이 빛들은 '통증이며 아스피린'(<달이 걸어오는 밤>)이라 내가 아프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기침마저 빛난다. 이 시집에서 내가 느끼는 감동은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기쁨이여>)이다. 하늘과 땅은 오래전부터 서로의 거울이었고, 그 사이에는 상반된 것이 언제나 공존했다.
내 바깥의 것들은 모두 나를 비추는 빛으로 돌아온다. 어둠마저도.
오늘도 해가 졌다. 어둠과 빛 속에서
우리는 제 한 몸으로 쉼 없이 태어나고 자란다. 매일매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 시는 하루의 마지막 빛처럼 도착하고 나는 계속 읽을
것이다. 그물이 고리를 벗어 물빛으로 풀어지며 내가 사라질 때까지.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1011/pimg_7598491531503584.jpg)
2005년 나온 허수경 시인《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세월이 흘렀어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이 빛의 고고학은 성공한 거 같다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 그냥 지나칠 역은 아닌 것 같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9315/89/cover150/8932029083_1.jpg)